제왕의 분노에 봉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무례하다 하셨나이까.”“폐하, 신첩은 납치당하였다가 구조되어 돌아온 후로 아무도 신첩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주변 사람들마저 신첩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지요. 소문은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 일을 잊을 거라고요.”“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신첩은 매일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게 되겠지요. 여자의 결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납치 당하고 명성마저 잃은 신첩이 분명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방탕한 요부라고 신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이미 그 유언비어에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감히 황후의 예복을 입고 황궁으로 시집오지도 못했겠지요.”“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폐하께 먼저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한 저를 폐후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신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해주세요!”소욱은 그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생모를 떠올렸다.하지만 곧이어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은 차게 식었다.이렇게 날카로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아니, 한 명 더 있었다. 그날 만났던 여자객이 그랬다.그들 중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객기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짐이 황귀비를 엄벌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제왕인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봉구안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검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모자가 누군지 폐하께서 정말 모르실 리 없지요.”소욱은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얼마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모자도 영소전에서 나왔습니다. 산적을 사주한 조검도 영소전 사람이지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성지 납시오! 황귀비는 명을 받으시오!”춘화는 황귀비를 부축해서 외전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곧이어 궁인이 성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조검이 궁중 재물을 횡령한 증거가 확실한 바, 이는 황귀비의 불찰로 판단하여 금일부터 금인장을 제출하고 황후마마께서 후궁을 관리할 것을….”황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황제가 그녀에게 금인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궁인이 계속해서 낭독했다.“그리하여 황귀비를 귀비로 좌천한다!”능소전 궁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조검이 잘못을 하였는데 황귀비가 이렇게 엄한 벌을 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황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귀비를 부축했다.능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성지를 낭독하러 온 궁인이 떠난 후, 능연은 공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모습을 본 춘화도 말없이 궁인들을 물렸다.능연의 예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봉장미 이 간사한 년! 대체 폐하께 뭐라고 했길래 폐하께서 나한테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마마, 고정하세요. 그래도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는 마음은….”“꺼져! 다 꺼지라고!”능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당장 봉장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가 입궁한 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자녕궁.태후는 화가 나서 차도 목에 안 넘어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내가 황상께 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능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이 정도로 편애하시는 거지?”“조검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눈이 있으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이렇게 여색에 빠져 시비조차 가리지 않을 줄이야! 남제의 강산은 결국엔….”계 상궁은 다급히 태후를 말렸다.“마마, 듣는 귀가 많습니다.”이때, 태감 한 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마마, 능소전 쪽에서 새로운 소
한편 영화궁.목욕을 마친 봉구안은 침상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창밖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창가로 다가갔다.문을 열자 검은색 비둘기 한 마리가 짜증스럽게 창문을 부리로 치고 있었다.봉구안은 비둘기 다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쥐새끼는 굴에 잡아넣었습니다.]쥐새끼란 산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그들은 손목 발목 관절과 혀가 잘린 채로 남자 기생집에 팔려갔다.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나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산적들을 응징했지만 봉구안은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봉장미는 처참한 부상을 입고 인생을 망쳤는데 산적들을 어떻게 괴롭혀도 이 분노를 풀기에는 부족했다.게다가 모든 일의 주모자인 능연은 여전히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연상도 분노에 치를 떨었다.“주모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네요! 귀비를 향한 폐하의 신뢰가 이 정도로 두터웠던 걸까요?”미색에 빠졌든 다른 원인이 있든, 소욱은 황제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그년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으로 장미가 당한 모든 것을 갚아주는 건 쉬워.”“하지만 이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야. 그냥 분풀이일 뿐이지. 진짜 피해자인 장미에게도 의미가 없는 짓이고.”말을 마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무조건 이 일을 만 천하에 알리고 아무도 능연을 지켜줄 수 없게 만들 것이다.어쩌면 그때가 되면 봉장미도 유언비어에 시달릴지 모른다.하지만 상관없었다.어차피 장미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고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속세를 떠나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그 시각, 영소전.춘화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이 방밖으로 쫓겨났다.방에는 황제와 귀비 두 사람만 남았다. 밤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들려오지 않았다.능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병풍 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날이 다 밝아올 때쯤에 병풍이 열리고 청색 비단옷을 입은 제왕이
영화궁.황제가 처음으로 아침 식사하러 방문했기에 주방 일꾼들은 평소보다 더 섬세하게 요리했다.식사는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소욱이 말이 없으니 봉구안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반찬을 챙겨준다는가 하는 행동은 당연히 없었다.연상은 몇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황후는 아예 못 본 척했다.한참 말이 없던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녀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연상에게 담담히 말했다.“밥 한 공기 더 가져오너라.”봉구안은 무공을 하는 사람이기에 여느 여자들보다는 식사량이 많았다.군영에 있을 때는 남자들과 같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궁중에서 보니 무척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그녀가 세 번째로 밥을 추가했을 때, 소욱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비빈들 궁에 가서 식사할 때, 그녀들은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직접 그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는 비빈들이 대부분이었다.그리고 거의 다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며 수저를 놓았다.하지만 황후는 남달랐다.마치 그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 온 것처럼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탁!소욱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다 나가보거라.”하인들이 나간 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황후에게 말했다.“수저 내려놔. 물어볼 게 있다.”봉구안은 담담히 수저를 내려놓고 공손히 답했다.“말씀하시지요.”“산적들과 증거들 언제 다 수집한 것이냐.”“사건이 있고 신첩의 아버지는 매일 수색을 나갔습니다.”소욱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짐이 한 달의 기한을 주었을 때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군. 이미 모든 조사는 끝난 뒤였으니까.”“황후, 이건 황제인 나를 기만한 죄야!”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를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사 진전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폐하도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소욱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됐건 이 일은 여기서
연상이 말했다.“마마, 서왕께서 말씀하시길 폐하는 말을 잘 타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합니다.”“마구 시합을 조직하는 이유도 다른 비빈들이 폐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가요?”봉구안은 담담히 대꾸했다.“항제가 좋아하는 건 말을 잘 타는 영비야. 아무나 말을 탄다고 좋아하진 않아.”“마마, 소인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왜 이걸 조직하는 건가요?”“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거지.”봉구안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연상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 역시 귀비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다.영소전.황제가 황후궁에서 아침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귀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간사한 년!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폐하께서 나를 벌하시고 자기 궁에 폐하를 불러들이기까지 한 거야!”춘화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황후를 진정시키기 위함인 것 같아요. 황후가 조검의 일로 또 마마를 압박하면 큰일이니까요.”“폐하께서 가장 신경 쓰시는 분은 마마밖에 없어요.”하지만 귀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산적 사건을 밝혀내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지?”“금인장? 난 언제든 다시 회수해 올 수 있어.”“그럼요, 마마.”춘화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황후는 금인장을 가져갔지만 그걸 사용하는 법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금인장으로 마구 시합 같은 이상한 걸 조직하죠.”귀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자녕궁.태후는 화분 곁가지들을 자르며 속으로 불만을 삭혔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황상은 능연을 처벌하고 안쓰러워서 그날로 영소전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가셨잖아. 이런 처벌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그렇게 하루도 못 참아? 황당하긴!”계 상궁은 안쓰러운 얼굴로 태후를 위로했다.“마마, 이 일로 화를 내실 건 없어요. 폐하께서 어제 영소전에 머무르시긴 했지만 아침에 영화궁을 방문하여 황후마마와 식사
영화궁봉구안의 금족령이 풀렸지만 아침 문안을 오지 않는 비빈들은 여전히 많았다.아프다는 건 핑계고 귀비 사람들인 것은 분명했다.내실에서 연상은 봉구안의 머리를 다듬어주며 불만을 터뜨렸다.“마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빈마저 아프다고 출석하지 않다니. 설마 벌써 마마의 은혜를 잊은 걸까요?”“전에는 마마를 대신해서 궁중 법규를 베끼겠다고 하더니 한순간의 변덕일 줄은 몰랐네요!”봉구안은 후궁 장부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이익을 따라가는 건 사람의 본능이야.”대청.봉구안이 상석에 앉고 몇몇 비빈들이 양측에 앉아 있었다.그들은 일제이 일어서서 황후에게 문안을 올렸다.“만수무강하십시오, 황후마마.”“다들 앉거라.”봉구안은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엄격한 선별을 거쳐 후궁의 자리를 꿰찬 여인들이라 하나같이 용모가 출중했다.안타깝게도 황제는 귀비에게만 눈이 멀어 이 많은 여인들이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으니 후궁에 원망의 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마구 시합을 할까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거라.”봉구안의 말이 끝나자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와의 시선을 피했다.한참 후, 현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에둘러 말했다.“신첩은 워낙 몸이 허약하여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격한 운동은 못할 것 같습니다. 몸만 건강했어도 참여하고 싶은데 안타깝네요.”현비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황후가 당연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말을 타는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연상아, 현비의 이름을 기입하거라.”현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봤고 피식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봉구안은 웃음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녕비였다.자리에서 일어선 녕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빼주세요. 신첩은 어릴 때부터 자고로 여자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검을 휘두르고 말 위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사내들
영소전.소식을 들은 귀비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황후는 정녕 미친 거야? 감히 날 마구 시합에 끌어들여?”“설마 금인장 가져갔다고 자기 마음대로 후궁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최근에는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황제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당장에 황후를 찾아갔을 것이다.마구 시합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은 귀비뿐이 아니었다.아침 조회가 끝난 후, 비빈들은 한자리에 모여 불만을 토로했다.“마구 시합을 대체 왜 하는 겁니까? 황후마마는 참 이상해요. 이상한 일만 만드는 것 같아요.”“황후께서 아무리 잘 포장해도 난 싫어요. 지금은 선조 시기도 아니고 오늘날의 남제는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들이 성을 지키는 상황은 오지도 않을 거라고요.”“권력 좀 잡았다고 뭐라도 하려는 거겠지요. 우리만 고생이네요. 마구시합이 대체 운영이나 될지 두고 보겠어요.”한편, 녕비는 자녕궁을 찾아가서 일러바쳤다.“고모, 황후가 오늘 얼마나 강압적이었는지 아시나요? 그 여자가 글쎄 우리 가문의 교양에 의문을 제기했다니깐요? 고모마저 무시하는 거잖아요!”태후 역시 마구 시합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미 후궁 일에 손을 떼기로 했고 황후와 귀비의 겨루기를 지켜보기로 한 이상, 황후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조카딸인 녕비를 조금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계 상궁, 이따가 영화궁에 가서 녕비는 나와 함께 불경을 드려야 하니 마구 훈련을 할 시간이 없다고 전해라.”녕비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감사합니다, 고모!”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내 조카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당연히 도와야지. 다만 명심해. 대놓고 황후를 적대하진 말거라. 누가 뭐래도 후궁의 안주인은 황후야.”“예, 고모.”황제의 측근은 궁 곳곳에 퍼져 있었다.산적 사건이 끝난 후로 소욱은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시켰다.그래서 녕비와 그녀의 대화를 포함해 아침에 있었던 일도 자연히 그의
황제의 서재에 도착한 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국무 때문에 바쁘니 간단히 말하거라.”마장 훈련에 두 명만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그는 황후가 말을 안 듣는 비빈들 때문에 자신에게 부탁하려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귀비의 두통약이 다 떨어져갈 때가 됐네요. 그래서 약을 가져왔습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약을 전해주자고 여기까지 왔다고?’사내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지난번에는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말을 마친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아버지께 서신을 보내서 그 의원을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마침 우연히 의원이 경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거짓말인지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거 참 우연이로군.”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그런데 왜 바로 영소전으로 가져가지 않고 짐한테 온 거지?”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산적 사건 때문에 귀비와 신첩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신첩이 주는 거라고 하면 귀비가 먹지 않을 것 같아서요.”소욱은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마구 시합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비빈들이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참는다고?“약은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봉구안이 떠난 뒤, 유사양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황후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단순히 약만 전하러 온 거라니.그가 알기로 현재 두 명만 마구 훈련에 참석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은 골골거리는 현비인 걸로 알고 있었다.다른 비빈들이 참석해 주지 않으면 마구 시합을 대체 어떻게 조직하려고 그럴까?소욱은 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의원에 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영소전에 보내거라.”유사양은 공손히 물러났다.귀비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
봉구안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다리로 신속하게 상대를 공격했다.경공을 잘하는 그녀였기에 발차기 실력도 남달랐다.조여란은 그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 과정에 발길질에 맞은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착지한 봉구안은 한손을 등 뒤에 감추고 한손을 뻗으며 조여란을 도발했다.조여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옷섶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는 음침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너 대체 정체가 뭐냐!”황제 신변의 호위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봉구안은 대답 대신, 이차 공격을 시전했다.철갑옷 같은 기공을 상대하려면 기교가 중요했다.그녀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응집했다.그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로 신속히 전방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그녀의 손이 조여란의 가슴에 닿았다.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여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중지에 모든 힘이 실렸다.봉구안은 내력을 집중하여 중지에 실었기에 그 위력은 상당했다.“푸흡!”조여란의 등이 굽어지더니 입으로 피가 섞인 열물을 토해냈다.그녀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 가까스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철갑옷!”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의 주먹이 그녀의 늑골을 향해 날아왔다.뼈를 관통할 것 같은 위력이 담긴 일격에 조여란은 신음을 내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네 이년! 숙천설이 대체 너한테 뭘 약속했길래… 악!”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주먹이 눈을 향해 날아왔다.조여란은 눈을 붙잡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숙천설!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남의 등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슨 황제야! 나와! 숙천설!”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헀다.“조여란, 네 철갑옷이 천하무적은 아니었군.”조여란은 이를 갈았다.“그럴 리 없어!”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헀다.“철갑옷은 날카로운 검이 아니면 상처를 낼 수 없지. 섭정왕,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네가 이긴다면 길을 비키도록 하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었다.“검을 가져오너라!”잽싸게 모습을 드러낸 은육
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조여란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그 유명한 철갑옷 공법을 한번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순식간에 봉구안은 발로 땅을 구르며 앞을 향해 튕겨나갔다.조여란은 그 자리에서 자세를 취하고 기를 운용하여 공법을 시전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하더니 마치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했다.봉구안은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창을 받아라!”그녀가 창술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서여국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무기를 던졌다.봉구안은 창을 받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조여란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공법을 시전했다.장창이 그녀의 어깨를 찔렀지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하지만 극한으로 끌어올린 조여란의 철갑옷 공법 때문에 창끝은 그녀의 옷을 찢고도 가슴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봉구안의 모든 초식은 상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장창이 부러질 때까지 찔렀는데도 조여란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진기를 응집한 조여란은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음산한 눈빛으로 소리쳤다.“숙천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녀는 봉구안을 밀치고 서여국 황제에게 달려들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황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봉구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분노한 조여란이 호통쳤다.“주제도 모르는 것,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래! 네년부터 죽여주마!”곧이어 조여란의 공세가 이어졌다.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호위 은삼이 은이에게 말했다.“형님,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은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선 지시를 받고 움직이라 했다.”은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조여란 저 여자 꽤 하는데요? 마마께서 다칠까 걱정돼요.”은칠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마마와 조여란이 결전을 벌이는데 은삼이 재수없는 말만 하며 마마를 저주했습니다.]탁!은
조여란 신변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잡았다.이때 누군가가 외쳤다.“당장 그만둬!”조여란은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수많은 사람들이 광화사 대문을 열고 반란군의 앞으로 다가갔다.서여국의 관원들이었다.문무백관이 거의 다 이곳에 잡혀왔다.황제가 한 짓일 것이다.조여란이 차갑게 말했다.“저들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려고? 난 누구든 죽일 수 있어!”대신들은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는 조여란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섭정왕!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조여란, 감히 반역을 꾀하다니!”“우릴 다 죽이면 천하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려고? 조정에 관원이 한 명도 없으면 넌 황제가 되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조여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멍청한 것들은 버려도 좋아!”갑자기 검은 인영이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는 조여란도 익숙한 인물, 숙연을 데리고 있었다.“이 여자도 내칠 것이냐?”봉구안은 숙연을 앞으로 밀치며 싸늘하게 물었다.고공 비행에 숙연은 이미 겁에 질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여란을 향해 소리쳤다.“왕야, 나 좀 구해줘!”봉구안은 뒤에서 그녀의 턱을 잡고 비아냥거렸다.“숙연 대인, 이럴 때는 폐하께 살려달라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조여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사실 그녀 역시 숙연에게 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장기말이었다.하지만 그것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다.“활시위를 당겨라!”곧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감지한 뭇 대신들이 소리를 질렀다.“조여란, 미쳤어? 우리 같은 편이잖아!”“황시위를 당기라니까!”조여란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숙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조여란을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조여란이 데려온 병사들마저 모두 죽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 위함이지만 관원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병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얼굴을 가린 그림자
광화사.조여란의 대군과 호원아의 대군이 대치 중에 있었다.“호원아, 넌 무단으로 직무지를 떠나 폐하를 해하려고 하였다. 내가 섭정대권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다!”호원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광화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조여란, 반역은 네가 했지! 그리고 너희들, 감히 조여란과 결탁하더니! 폐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조여란의 옆에 선 한 장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호원아, 당장 비켜! 우린 폐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친히 광화사 대문을 지키고 선 호원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를 들여보내? 꿈 깨!”조여란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며 손짓했다.“활시위를 당겨라!”그녀가 데려온 대군은 호원아가 이끄는 부대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아무리 호원아라도 쪽수 앞에서는 별 수가 없을 것이다.갑옷을 입은 호원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포진하고 화살을 방어해라!”뭇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광화사 안쪽까지 후퇴했다.화살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조여란은 마치 충신처럼 안쪽을 향해 외쳤다.“폐하, 소신이 너무 늦게 와서 송구합니다!”쾅!이때 대문이 열렸다.고개를 든 조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포를 입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였다.“섭정왕, 늦었군.”서여국 황제의 신변에는 수십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다.조여란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넌 폐하가 아니야!”모신 상궁이 분노한 말투로 반문했다.“섭정왕, 미친 것이냐! 폐하께서 여기 계신데 감히 손가락질을 해?”조여란은 등 뒤에 서 있는 뭇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최근 폐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광화사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폐하를 사칭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원아 너의 간계였구나.”“호원아, 네가 가짜 황제를 내세우고 진짜 폐하를 해한 게 틀림없어!”호원하가 분통해서 말했다.“조여란,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거라!”서여국 황제는
광화사 밖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는 그림자 호위가 봉구안을 지키려 대기하고 있었다.그림자 호위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광화사만 주목하고 있었고 은칠만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황후께서 변장을 하시고 서여국 폐하와 야밤에 은밀한 밀회...”그가 쓴 내용을 본 은삼이 주먹을 그의 머리에 꽂았다.“밀회는 무슨 밀회야!”순식간에 은칠의 정수리가 볼록하게 부어올랐다.“왜 셋째 형님도 저한테 그러십니까?”은삼은 또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둘째 형님이 왜 널 잘 지켜보라고 했는지 알겠어! 은칠, 전에는 몰랐는데 너 소설 쓰는 재주가 있다? 너 마마께서 곤란해 지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폐하와 마마 사이를 이간질하려고!”은칠이 울먹이며 말했다.“다들 저만 괴롭혀요! 폐하께 고발할 거예요!”그는 눈물을 머금고 한마디 덧붙였다.[은삼이 보고서를 쓰는 것을 방해하며 사실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은삼은 뒷골이 땡기는 기분이었다.“쉿! 누가 오고 있어!”은사가 낮게 말했다.시위대가 야간 교대를 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한 시위가 황제가 있는 절당으로 아침을 가지고 갔다.모신 상궁이 밖으로 나오자 시위가 조심스레 물었다.“모 상궁님, 폐하께서는 밤새 잘 주무셨나요?”모신이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그래.”시위가 또 물었다.“그럼 어제 밤에 방문하신 귀빈은…”그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렸고 모신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절당 안.모신은 아침을 식탁에 차리고 은침으로 독을 검사했다.반찬에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황제에게 식사하라 전했다.식탁에 마주앉은 황제가 물었다.“그자는 무사히 나갔고?”모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어젯밤 소인이 광화사 밖까지 바래다드렸습니다.”황제는 죽 한숟가락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이틀 전, 봉구안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는 숙연 대인
광화사.마차에서 내린 서여국 황제는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따라온 호위들 중에 몇몇 안 보던 얼굴이 있었다.아마 조여란이 보낸 자들일 것이다.서여국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하고 앞으로 걸었다. 황금색 용포가 햇살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방에 도착하자 문을 잠근 상궁 모신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광화사가 좀 이상합니다.”불상 앞에 마주선 서여국 황제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이곳은 짐을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다.”승려는 진작에 바뀌었을 것이다.승상의 영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 황궁 서재.숙연은 상소문을 읽고 있는 조여란에게로 다가가 직접 포도를 입에 넣어주었다.조여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런 거 하지 마.”이제 나이도 있는데 지금도 소녀처럼 구는 숙연이 못마땅했다.숙연은 허리를 숙이고 조여란의 목을 끌어안고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뭘 겁내. 어차피 이 황궁과 서여국 전체가 우리의 것이 되었는데.”조여란은 굳은 표정으로 상소문에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아직 부족해. 그 여인이 살아 있는 한, 황제는 여전히 그 여인이야.”“만약 너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국정 감사만 맡기지 않았겠지.”“내가 보기에…”“뭐 의심 가는 거라도 있어?”숙연은 예쁘장한 얼굴로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조여란은 그녀의 턱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폐하의 몸 상태가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야.”“어쩌면 몰래 신의를 찾아서 아무도 모르게 치료를 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숙연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렇다는 건 우릴 의심한다는 소리 아니야?”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몰래 병치료를 하려 했을 리 없었다.조여란이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눈치챘다고 해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어.”“광화사 안팎에 모두 내 사람들이거든. 숙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태상황이 분노한 고함을 질렀다.“미친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짐은 네 아비이자 북연의 황제란 말이다!”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현임 황제는 병부에 눈이 멀어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태상황이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것을 걱정해서 사내들은 그에게 근력을 무력화시키는 약을 먹였다.나이가 든 태상황은 결국 숫자에 밀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는 곧 떠나려는 신임 황제를 보고 곧 있으면 이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처음으로 당황했다.“아니… 아니 된다!”신임 황제는 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병부, 내놓으실 거지요?”분노한 태상황이 포효했다.“하늘이 북연을 멸하려는 게구나!”신임 황제가 음침한 눈을 하고 말했다.“아바마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병부, 내놓으실 거죠?”태상황의 몸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병부를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밤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이런 치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하물며 그는 북연의 황제였다.태상황은 굴욕의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그래, 알았다!”일각이 지난 후.신임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병부를 들고 동화대를 떠났다.마차에 오른 그는 동화대 정문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짐의 아바마마도 역시 정상인이었군.”동화대.태상황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깔린 비빈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불과 몇 달 사이에 그는 열 살은 더 늙은 것 같았다.그는 후회막심하여 검을 들고 자결을 택하려 했다.병부를 내놓으면 북연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 자신의 결백을 위해 결국 내놓고 말았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었다.챙그랑!검이 바닥에 떨어졌다.결국 그는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그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하늘과 조상님들이 보우하여 협공 작전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상황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창밖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서여국.봉구
북연.궁밖의 동화대는 황가에서 건설한 작은 행궁이었다. 압박에 의해 퇴위한 태상황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상 구금이나 다름없었고 안팎에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내실, 태상황은 근엄한 자세로 상석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불효자식인 신임 황제가 있었다.황제는 강압적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상황도 화가 난 상태였다.“남제를 협공한다고? 네가 북연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태상황은 과거에 마음이 약해져서 이 불효자식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신임 황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병부때문이었다.그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마치 이 문제만 해결하면 천하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아바마마, 곧 거사가 성사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온 천하가 북연에 귀속되는 광경을 보게 되실 겁니다. 북연이 천하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남제는 멸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병부를 내어주시지요!”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어리석은 놈! 넌 미친 게 틀림없어!”“남제는 하루아침에 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짐은 이 일에 동의할 수 없다!”인내심이 바닥난 신임 황제는 태상황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아바마마, 왜 아들을 이리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짐도 대국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아바마마께선 나이가 드셨고 북연은 더 이상 아바마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전장에 패배한 기록이 없던 북연이 아바마마의 손에서 연속 남제에 패했습니다.”패배한 전장을 언급하자 태상황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뒤통수를 갈기며 호통쳤다.“그걸 말이라고! 이 후레자식이! 네가 아니었으면 북연은 삼십만 대군을 잃지 않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남제가 화룡을 접촉할 일도 없고 화룡을 제작해낼 일도 없었어!”“북연의 지금 상황은 다 네가 초래한 거야!”뒤통수를 맞은 신임 황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