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바로 증인을 호출하는 대신, 산적 두목에게 물었다.“넌 조검을 그날 만났다고 하는데 날짜는 기억하느냐?”“기억합니다. 10월10일이었어요.”황귀비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그렇게 확신하느냐? 기억력을 자신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구나.”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산적이 말했다.“매년 10월10일은 저희가 산신께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그날도 제사상을 차리고 한바탕 마시고 있는데 저자가 저희를 찾아왔어요.”조검은 상대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억울합니다! 소인을 줄곧 궁에만 있었고 산에 갔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봉구안이 기다렸던 반응이었다.“조검, 그날 네가 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느냐?”조검이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날뿐이 아니고 소인은 줄곧 황귀비 마마를 신변에서 모셨습니다. 마지막 출궁했을 때가 포상 휴가를 나갔을 때였습니다.”“못 믿으시겠으면 출입 기록을 보시면 됩니다. 궁중 관리가 삼엄하니 절대 거짓은 없을 겁니다.”태후는 자신 있게 말하는 조검을 보자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조검의 말이 사실일까?황귀비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후 마마, 신첩이 내무부에 사람을 보내 10월10일날 입궁 명단을 가져오라고 할까요?”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금인장이 있었기에 명단을 자유자재로 조회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황후가 아무리 고귀해도 금인장이 없다면 명단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봉구안은 담담한 눈으로 황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하지.”잠시 후, 내무부 태감이 명단을 가지고 왔다.10월10일뿐이 아니고 10월 한달분 출입국 기록이 전부 들어 있었다.소욱은 시위대와 시종들을 시켜 명단을 확인하게 했다.그 결과, 조검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황귀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를 어쩌나. 조검의 이름이 없네요? 그렇다는 건 산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 아니겠어요?
시위대가 김낭자의 손에서 금화를 받아 자세히 관찰했고 황후가 진술한 것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산적이 받은 금화와 김낭자의 금화는 출처가 같았다.조검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출처가 같다고 하여 뭔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 우연히 소인에게 그 금화가 있었고 소인이 그것을 사용했다면요.”봉구안은 그의 말을 자르고 침착하게 말했다.“재물을 사랑하는 산적은 금화를 애지중지하지요. 은표로 교환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조검은 산적을 매수하기 위해 많은 금화를 지출해야 했을 겁니다. 가지고 다니는 금은 조각으로는 당연히 부족했을 거고 그 많은 금화를 지니고 출궁할 수도 없었을 테니 은표를 지니고 궁 밖에 있는 전장에 가서 금화로 교환하였을 것입니다.”“전장에서 한꺼번에 그 많은 금화를 꺼냈으니 일련번호도 당연히 연결된 번호겠지요.”태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황후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금화가 전부 전장에서 인출하여 사용되었다는 말이 아니더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마마마.”조검은 눈알을 부라리며 반박했다.“하지만 소인은 단지 그 전장에서 금화 한 개만 인출하였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많은 금화를 네가 인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냐?”조검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풍융전장 주인을 데려오너라!”순간 조검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분명 나가기 전에 변장을 하고 나갔고 5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황후가 어떻게 전장까지 조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주인장을 데려와도 매일 출입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전장 주인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황귀비가 비웃는듯 말했다.“너도 조 태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주인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전장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니 당연히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다
“황후, 짐의 결정에 의심을 품는 것이냐!”소욱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봉구안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바로 그녀를 비롯한 천만 병사들이 충성을 맹세한 군왕이란 말인가!회의감이 들었다.그는 폭군일 뿐만 아니라 우매한 군왕이었다!그녀는 정색해서 말했다.“조검이 지은 죄는 산적을 사주해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한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또 뭐가 있지?”태후가 다급히 물었다.봉구안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신첩이 조금 전에 조검에게 물었을 때 그는 확신에 차서 10월10일 궁중에서 당직을 섰다고 고하였습니다. 일지를 확인하였을 때도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렇다는 것은….”봉구안은 손가락으로 황귀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황귀비는 금인장을 갖고 후궁을 관리하였지만 그 와중에 궁중에 출입 기록을 조작한 상황이 드러났으니 이는 명백한 직무 유기입니다!”“평소에 폐하를 매혹하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하니 이게 요부가 아니고 뭡니까!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황귀비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녀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나한테 요부라고?’태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봉구안이 대신 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다.“황상, 황후 말에 틀린 것이 없어요. 조검이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황귀비의 실책입니다.”황귀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신첩이 잘못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소욱은 자신이 총애하는 귀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는 말했다.“황귀비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영소전에서 반성하도록 한다!”연상은 황제의 편협한 판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황후는 애초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년 녹봉을 몰수하고 금족령까지 내려졌었다.황귀비는 직무 유기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반성에 불과
제왕의 분노에 봉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무례하다 하셨나이까.”“폐하, 신첩은 납치당하였다가 구조되어 돌아온 후로 아무도 신첩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주변 사람들마저 신첩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지요. 소문은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 일을 잊을 거라고요.”“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신첩은 매일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게 되겠지요. 여자의 결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납치 당하고 명성마저 잃은 신첩이 분명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방탕한 요부라고 신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이미 그 유언비어에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감히 황후의 예복을 입고 황궁으로 시집오지도 못했겠지요.”“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폐하께 먼저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한 저를 폐후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신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해주세요!”소욱은 그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생모를 떠올렸다.하지만 곧이어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은 차게 식었다.이렇게 날카로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아니, 한 명 더 있었다. 그날 만났던 여자객이 그랬다.그들 중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객기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짐이 황귀비를 엄벌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제왕인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봉구안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검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모자가 누군지 폐하께서 정말 모르실 리 없지요.”소욱은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얼마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모자도 영소전에서 나왔습니다. 산적을 사주한 조검도 영소전 사람이지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성지 납시오! 황귀비는 명을 받으시오!”춘화는 황귀비를 부축해서 외전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곧이어 궁인이 성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조검이 궁중 재물을 횡령한 증거가 확실한 바, 이는 황귀비의 불찰로 판단하여 금일부터 금인장을 제출하고 황후마마께서 후궁을 관리할 것을….”황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황제가 그녀에게 금인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궁인이 계속해서 낭독했다.“그리하여 황귀비를 귀비로 좌천한다!”능소전 궁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조검이 잘못을 하였는데 황귀비가 이렇게 엄한 벌을 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황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귀비를 부축했다.능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성지를 낭독하러 온 궁인이 떠난 후, 능연은 공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모습을 본 춘화도 말없이 궁인들을 물렸다.능연의 예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봉장미 이 간사한 년! 대체 폐하께 뭐라고 했길래 폐하께서 나한테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마마, 고정하세요. 그래도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는 마음은….”“꺼져! 다 꺼지라고!”능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당장 봉장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가 입궁한 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자녕궁.태후는 화가 나서 차도 목에 안 넘어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내가 황상께 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능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이 정도로 편애하시는 거지?”“조검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눈이 있으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이렇게 여색에 빠져 시비조차 가리지 않을 줄이야! 남제의 강산은 결국엔….”계 상궁은 다급히 태후를 말렸다.“마마, 듣는 귀가 많습니다.”이때, 태감 한 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마마, 능소전 쪽에서 새로운 소
한편 영화궁.목욕을 마친 봉구안은 침상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창밖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창가로 다가갔다.문을 열자 검은색 비둘기 한 마리가 짜증스럽게 창문을 부리로 치고 있었다.봉구안은 비둘기 다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쥐새끼는 굴에 잡아넣었습니다.]쥐새끼란 산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그들은 손목 발목 관절과 혀가 잘린 채로 남자 기생집에 팔려갔다.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나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산적들을 응징했지만 봉구안은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봉장미는 처참한 부상을 입고 인생을 망쳤는데 산적들을 어떻게 괴롭혀도 이 분노를 풀기에는 부족했다.게다가 모든 일의 주모자인 능연은 여전히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연상도 분노에 치를 떨었다.“주모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네요! 귀비를 향한 폐하의 신뢰가 이 정도로 두터웠던 걸까요?”미색에 빠졌든 다른 원인이 있든, 소욱은 황제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그년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으로 장미가 당한 모든 것을 갚아주는 건 쉬워.”“하지만 이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야. 그냥 분풀이일 뿐이지. 진짜 피해자인 장미에게도 의미가 없는 짓이고.”말을 마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무조건 이 일을 만 천하에 알리고 아무도 능연을 지켜줄 수 없게 만들 것이다.어쩌면 그때가 되면 봉장미도 유언비어에 시달릴지 모른다.하지만 상관없었다.어차피 장미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고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속세를 떠나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그 시각, 영소전.춘화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이 방밖으로 쫓겨났다.방에는 황제와 귀비 두 사람만 남았다. 밤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들려오지 않았다.능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병풍 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날이 다 밝아올 때쯤에 병풍이 열리고 청색 비단옷을 입은 제왕이
영화궁.황제가 처음으로 아침 식사하러 방문했기에 주방 일꾼들은 평소보다 더 섬세하게 요리했다.식사는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소욱이 말이 없으니 봉구안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반찬을 챙겨준다는가 하는 행동은 당연히 없었다.연상은 몇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황후는 아예 못 본 척했다.한참 말이 없던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녀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연상에게 담담히 말했다.“밥 한 공기 더 가져오너라.”봉구안은 무공을 하는 사람이기에 여느 여자들보다는 식사량이 많았다.군영에 있을 때는 남자들과 같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궁중에서 보니 무척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그녀가 세 번째로 밥을 추가했을 때, 소욱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비빈들 궁에 가서 식사할 때, 그녀들은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직접 그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는 비빈들이 대부분이었다.그리고 거의 다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며 수저를 놓았다.하지만 황후는 남달랐다.마치 그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 온 것처럼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탁!소욱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다 나가보거라.”하인들이 나간 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황후에게 말했다.“수저 내려놔. 물어볼 게 있다.”봉구안은 담담히 수저를 내려놓고 공손히 답했다.“말씀하시지요.”“산적들과 증거들 언제 다 수집한 것이냐.”“사건이 있고 신첩의 아버지는 매일 수색을 나갔습니다.”소욱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짐이 한 달의 기한을 주었을 때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군. 이미 모든 조사는 끝난 뒤였으니까.”“황후, 이건 황제인 나를 기만한 죄야!”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를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사 진전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폐하도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소욱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됐건 이 일은 여기서
연상이 말했다.“마마, 서왕께서 말씀하시길 폐하는 말을 잘 타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합니다.”“마구 시합을 조직하는 이유도 다른 비빈들이 폐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가요?”봉구안은 담담히 대꾸했다.“항제가 좋아하는 건 말을 잘 타는 영비야. 아무나 말을 탄다고 좋아하진 않아.”“마마, 소인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왜 이걸 조직하는 건가요?”“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거지.”봉구안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연상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 역시 귀비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다.영소전.황제가 황후궁에서 아침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귀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간사한 년!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폐하께서 나를 벌하시고 자기 궁에 폐하를 불러들이기까지 한 거야!”춘화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황후를 진정시키기 위함인 것 같아요. 황후가 조검의 일로 또 마마를 압박하면 큰일이니까요.”“폐하께서 가장 신경 쓰시는 분은 마마밖에 없어요.”하지만 귀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산적 사건을 밝혀내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지?”“금인장? 난 언제든 다시 회수해 올 수 있어.”“그럼요, 마마.”춘화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황후는 금인장을 가져갔지만 그걸 사용하는 법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금인장으로 마구 시합 같은 이상한 걸 조직하죠.”귀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자녕궁.태후는 화분 곁가지들을 자르며 속으로 불만을 삭혔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황상은 능연을 처벌하고 안쓰러워서 그날로 영소전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가셨잖아. 이런 처벌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그렇게 하루도 못 참아? 황당하긴!”계 상궁은 안쓰러운 얼굴로 태후를 위로했다.“마마, 이 일로 화를 내실 건 없어요. 폐하께서 어제 영소전에 머무르시긴 했지만 아침에 영화궁을 방문하여 황후마마와 식사
양측 군대가 대치 중인 가운데, 대하 측은 평화 협상을 위해 사신을 선성 근처 유현으로 보냈다.사신은 남제 황제 소욱을 만나, 대하의 평화 의지와 함께 과거 남제와의 화친 및 대하 장공주의 공헌을 강조하며 설득에 나섰다.소욱은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느긋하고도 오만한 태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사신의 말이 끝나자 소욱은 찻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시선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상대의 내면을 꿰뚫는 듯했다.“평화 협상이라?”사신은 준비해온 국서를 급히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소욱은 국서를 읽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위엄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며, 상대방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사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견뎌야 했다.마침내 소욱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고작 이 정도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사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폐하, 그 세 개의 성은 비옥한 땅이며…”“허.”소욱은 냉소를 내뱉으며 말을 끊었다.“보아하니 대하는 장병들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고, 국가의 멸망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폐하!”사신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소욱의 손짓에 따라 사람들이 그를 끌어냈다.“폐하! 대하는 진심으로 평화 협상을 원합니다! 세 개의 성이 부족하다면 네 개를… 네 개를 드리겠습니다!”소욱은 긴 소매를 휘두르며 단호히 외쳤다.“대하가 양보하지 않겠다면 성을 공격하라! 과인 명하노니, 먼저 대하를 쳐라!”……대하.대하 조정에 전해진 전황은 심각했다.“폐하! 남제군이 국경에 집결하여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대전으로 향했다.“남제군이 이렇게 빨리 진격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신하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졌다.“폐하, 저희 병력 대부
북연, 승상부.섭정을 맡은 승상은 밤낮으로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군사 보고를 위해 한 관료가 급히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불안과 초조함이 역력했다.“승상! 큰일 났습니다! 남제로 보낸 원군이 모두 포위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승상은 앉아 있다가 놀라며 일어섰다.“선성은? 폐하와 장수들은 무사한가?”“아직 선성 쪽에서 오는 소식이 없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무장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승상! 선성에서 큰일이 벌어졌습니다!”승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무장은 가져온 물건을 내밀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이것은 남제에서 온 국서입니다. 그들은 이미 선성을 점령했으며, 폐하와 장수들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이 말에 승상과 관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했다.“도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폐하께선 분명 선성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고 전하지 않았는가?”“세상 일은 한순간에 바뀌는 법.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남제의 계략일지도 모릅니다!”“폐하를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라에 군주가 없어선 안 됩니다!”모두가 승상을 바라보며 그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다렸다.승상은 국서를 열어 차분히 읽은 뒤,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고 고개를 들었다.“무도하다! 남제가 우리 북연의 영토 절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그 대가로 폐하를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한다!”“뭐라고요?” 관료들은 경악했다.“영토의 절반이라니, 너무도 과도한 요구입니다!”한 관료가 염려하며 물었다.“승상, 만약 우리가 거절하면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요?”승상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남제가 이렇게까지 협박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황제를 무사히 돌려보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사실 이 모든 사태는 황제가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승상은 이미 황제에게 직접 나서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결국
남제군은 선성 안팎을 장악하며 저항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성벽 위에 서 있던 소욱은 적군이 혼란에 빠져 달아나는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 아래,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정했다.“모든 부대에 알리거라. 이제 멈추지 말고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끝낼 것이다.”“예, 폐하!”밤이 지나고 새벽 햇살이 선성을 비추자, 성 안팎에는 적군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연합군의 깃발은 하나둘씩 뽑히고, 그 자리를 남제의 깃발이 대신했다.새벽 햇살 아래 봉구안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그 안에는 차가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남제군은 마치 신의 가호를 받은 듯 강력한 전투력을 과시하며 적을 섬멸했다.이번 전투는 대규모의 전쟁이었다. 양군이 선성 안에서 맞붙은 상황은 드넓은 평야에서의 전투와는 달랐다.성 안의 좁은 지형과 빽빽한 건물들 때문에, 양쪽 모두 많은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남제군은 본래 선성을 수비하던 병력이 대부분이어서,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그 결과, 양측의 전력 차이는 뚜렷하게 드러났다.북연군의 가장 강력한 기병 부대는 성 밖에 갇혀 기동성을 잃었고, 북연 황제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구련산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수화부 역시 다수의 전사자를 내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였다.그 와중에 누군가 군중 속에서 소리쳤다.“대하국 병사들이 동쪽 성벽으로 달아났다! 우리도 동쪽으로 가자!”하지만 병사들이 간신히 동쪽 성벽에 도착해, 대하국 병사들이 남긴 화살을 따라 성벽을 오르자, 성벽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제군의 화살 세례였다.결국 병사들은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퇴각하는 도중에도 남제군의 추격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병사들은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었다.……구련산.북연군은 산 위로 몰려가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었다.북연 황제는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었고, 주변에는 쓰러지거나 비쩍 마른 병사들로 가득했다.그들
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춘을 바라보았다.그런 뒤, 말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려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들었다.그녀의 움직임은 너무도 신속하고 날카로워 단춘은 전혀 대비할 틈이 없었다.봉구안이 사용하던 긴 창은 정말로 ‘길이가 길수록 강하다’는 말처럼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단춘은 그녀에게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연이어 팔을 맞아 칼을 놓칠 뻔했다.하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즉시 부하에게 긴 창을 가져오게 한 뒤, 무기를 바꾸자 더욱 능숙하게 움직이며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그러나 곧이어 창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부러졌다.단춘은 한순간 멍해졌다.설마 이 긴 창이 부러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회임 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장군님, 조심하십시오!”갑작스러운 경고에 고개를 들어올린 단춘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창 끝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빠르게 몸을 굴려 겨우 치명타를 피했다.……한편, 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후퇴하며 병력을 소집하려 고함쳤다.그러나 성 안의 혼란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갑작스러운 야습에 놀란 연합군은 무장할 겨를도 없이 전투에 뛰어들었다.혼란에 빠진 병사들 중 일부는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음병이다! 움직이지 마라! 음병이 나타났다!”다른 일부 병사들이 또 외쳤다.“진영이 무너졌다! 그만 싸워라! 우리는 같은 편이다!”그렇게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병사들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며 혼란 속에서 휘말렸다.단춘은 병사들의 엄호 속에 가까스로 봉구안으로부터 벗어났다.그는 급한 나머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대하국 군기를 높이 들며 외쳤다.“대하국 병사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 활을 준비하고 진형을 갖추어라!”그러나 부장이 급히 부상을 입은 팔을 붙잡고 나타나 말했다.“장군님, 공간이 너무 좁아서 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단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적군의 기습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더 늦기 전에 반격하지 않으면 모든
막사를 열고 들어온 황제의 키 큰 실루엣은 위엄과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봉구안은 소욱이 이렇게 빨리 선성에 도착한 것을 보고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선성까지 온 거지?’소욱은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다가와 아직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그녀를 단숨에 끌어안았다.“왜,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봉구안은 정신을 차리고 팔을 들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폐하께서 친히 군을 이끄셨다… 고생 많으셨습니다.”소욱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턱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너를 보니 수고로움도 잊게 되는구나. 오늘 밤, 저들을 공격하려는 것이냐?”그리움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 터. 지금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었다.봉구안은 표정을 단단히 가다듬고 대답했다.“예, 이제 때가 왔습니다.”원래 계획은 봉구안이 병력을 이끌고 선성의 적군을 고립시키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여 적국이 원군을 파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후 소욱 황제와 스승이 ‘거미줄’ 기계 장치를 활용해 적의 원군을 소멸시키고, 이어 선성 내의 적군을 몰살하는 계획이었다.그렇게 되면 적군은 식량 부족과 내부 갈등, 공포로 인해 기세를 잃게 될 터였다.이런 방식으로 남제는 적은 병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봉구안은 그날 밤의 공성 계획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소욱은 그녀의 여윈 얼굴을 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알겠다. 먼저 좀 쉬는 게 좋겠구나. 군사 업무는 내가 맡으마. 밤에 적을 치려면 너도 푹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소욱이 나타나자 봉구안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하지만 ‘쉰다’는 건 그녀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더구나 소욱과 비교하자면 그녀는 몇 달간 큰 고생도 아니었다.“지금은 기세를 몰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알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그저 한마디 덧붙였다.“밤에 공성을 시작할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봉구안은 적군을 밑으로 내리차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땅굴로 던졌다.옆에 있던 은이는 재빨리 반응해 구멍을 방패로 막았다.곧이어 땅굴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땅굴 안.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전진하던 중, 전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무슨 일이냐!"곧 누군가 소리쳤다."장수말벌이다! 장수말벌이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라!"‘장수말벌?’‘어디서 장수말벌이 나타났단 말인가!’황제는 생각할 틈도 없이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후퇴를 했다.비좁은 땅굴 속에서 후방 병사들은 탈출하려고 앞으로 밀치고, 앞쪽 병사들은 장수말벌을 피해 후방으로 되돌아오며 두 무리가 엉켜 서로 밀치고 싸웠다.결국 병사들은 장수말벌에 쏘여 온몸이 붓고 고통 속에 비명을 질렀다.다시 선성으로 돌아왔을 때, 병사들의 모습은 완전히 엉망이었다.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의 보호로 장수말벌의 공격은 피했지만,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대체 어디서 장수말벌이 나온 거냐!"한 병사가 대답했다."폐하, 남제군입니다! 그들이 땅굴을 발견하고 저희를 막았습니다!"단춘은 얼굴 곳곳에 벌에 쏘인 자국이 생겨 눈꺼풀까지 부어올랐다.그는 분노를 참으며 얼굴이 검게 변해갔다."남제 놈들이 어떻게 땅굴의 존재를 알았단 말인가! 분명 적의 간첩이 있는 거겠지!"북연 황제도 단춘의 생각에 동의하며 소리쳤다."그 밀정을 찾아내라! 가죽을 벗겨버리겠다!"하지만 밀정을 찾지 못한 사이, 연합군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났고, 병사들은 생존을 위해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거기에 밤마다 음병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병사들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선성 밖.맑은 하늘 아래, 남제군이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기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선성 안 병사들까지도 그 냄새를 맡고 침을 삼켰다.주막 안.봉구안은 몇몇 장수들과 전략 회의를 하고 있었다.그때 은삼이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황후마마, 진나라가 항복을 요청했습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
남강 왕궁.서왕은 상객으로 예우받았다.남강왕은 술잔을 들며 거창하게 말했다.“내가 짐작했지. 남제는 큰 책략을 가지고 있다.”“서왕, 남제가 요즘 기세가 대단하군. 한 달 남짓 만에 적국의 원군 십여만을 섬멸했다니, 정말 감탄스럽구나.”“이렇게 가면 곧 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서왕은 자만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남제가 적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원이 한마음으로 뭉쳤기 때문입니다.”“아직 전세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강왕과 아래에 앉은 신하가 눈빛을 주고받았다.이윽고, 그 신하가 일어서며 말했다.“서왕 전하, 귀국이 승전가를 이어가며 구름을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남강 외곽의 수화부 연합군도 물러갔으니, 이제 남강을 귀국의 주둔군이 지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서왕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이것이 바로 남강 군신들의 진짜 속셈은 남제 군대를 남강에서 철수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서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제가 병력을 데리고 떠나겠습니다.”애초에 떠날 생각이었다.남강에 주둔했던 것은 남강을 지원하고, 수화부를 막으며, 남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수화부 연합군이 이미 물러났으니, 황상과 황후의 계획에 따라 그는 확실히 귀국해야 했고, 5만 군사를 이끌고 동방을 증원해 조유관을 지킬 때였다.남강왕은 무척 만족한 듯 술잔을 들어 함께 건배했다.“남제와 남강은 형제의 맹약을 맺은 사이. 서왕, 이 잔을 비우며 남제가 이 난관을 넘기고 대승을 거두길 기원하자구나!”서왕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왕좌에 앉은 남강왕은 남몰래 서왕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남제는 심모원려한 나라였다. 전쟁도 허실을 섞어 대하기 어려웠다.작은 실수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남강은 항상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수화부 연합군이 물러났으니, 남강에 남제 주둔군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남강 땅에 남제 군사 한 명도 남길 수 없었다!
3월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들이 만개했다.각국의 원군이 남제 땅으로 들어오자 소욱이 이끄는 남제 군대가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거미줄'은 아래에 있고 사람은 위에 있으니, 적들은 그 전술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각국 장병들은 이런 전투 방식을 본 적이 없었다.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함정과 계략이 그들을 괴롭혔고, 남제군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했다.'병귀신속'이란 말 그대로, 소욱은 직접 전장에 나가 결단력 있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한편, 선성에서는 연합군이 본국의 추가 지원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3개월째 고립되어 있었고, 식량은 점점 바닥났다. 더는 병사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이대로 가면 설령 선성의 보물을 찾아도 살아서 누릴 수 없을 터였다.그간 계속해서 성문 자물쇠를 열어보려 했지만, 50만이 넘는 병사들 중 그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단춘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끼와 대검을 들고 성문을 부수려 했지만, 철벽 같은 그 방어 장치는 칼도 창도 통하지 않았다.주국공부.북연 황제는 눈앞의 음식을 보고 젓가락을 세게 내려놨다.탁!그는 곧 질책하듯 물었다.“이게 전부냐? 고기는 어디 갔느냐!”호위병이 답했다.“폐하,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황제가 호위병들을 훑어보니 그들 모두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이대로 가다간 남제군이 공격해 오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었다.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뒤엎었다.“쾅!”“오늘 밤, 야습해서 탈출한다!”이대로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성문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운제와 벽에 매단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어가야 했다.그날 밤, 북연군은 북쪽 성문을 통해 탈출하려 했다.밤하늘 아래, 모두가 조심스레 움직이며 성 밖의 남제군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운제를 설치한 뒤, 병사들은 운제를 타고 성벽으로 올라갔다.그 후 밧줄을 붙잡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하지만,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화광이 비춰왔다.밝은 불빛이 그들을 드러내며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