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에 태후와 황제, 그리고 황귀비가 도착했다.황귀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수건을 꽉 틀어쥐고 긴장에 떨었다.‘봉구안 이 요사한 년이, 진짜 일을 크게 벌일 줄이야!’봉구안은 사람을 시켜 산적들을 끌고 나오게 했다.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주요하게는 두목을 대상으로 심문을 시작했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태후와 황제를 바라보며 아뢰었다.“아버지께서 그날 신첩을 잡아간 산적들을 잡아오셨습니다. 워낙 교활한 놈들이라 조사한지 몇 달 만에 겨우 잡았네요.”“폐하께서 허락해 주신 덕분에 신첩은 결백을 증명하고 진범을 지목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심문을 통해 이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냈습니다. 그자는 바로 황귀비 신변의 조검, 조 태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소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그는 그녀가 정말 조사를 통해 얻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영소전의 황귀비를 저격하기 위한 함정인지 고민하고 있었다.황귀비의 얼굴은 충격으로 빨갛게 물들었다.“조검이? 말도 안 됩니다!”하지만 두 눈은 음침하게 봉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봉장미 이년이 작정하고 일을 크게 만들었구나!’그리고 그녀가 이 사실을 황제와 태후 앞에서 대놓고 고했다는 것은 이미 산적들을 구슬려서 황후 자신에게 관한 것은 전부 입을 막았다는 것을 의미했다.태후는 딱히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조검은 시킨 일을 했을 뿐이고 진짜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조검을 데려오너라.”곧이어 조검이 끌려왔다.그는 짐짓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태후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위엄은 여전했다.태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조검, 5개월 전 산적에게 황후를 납치하라고 사주한 일이 있느냐!”조검은 억울한 얼굴로 답했다.“소인은 억울합니다, 마마! 소인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소인은 궁중에서 귀비마마를 모시면서
봉구안은 바로 증인을 호출하는 대신, 산적 두목에게 물었다.“넌 조검을 그날 만났다고 하는데 날짜는 기억하느냐?”“기억합니다. 10월10일이었어요.”황귀비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그렇게 확신하느냐? 기억력을 자신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구나.”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산적이 말했다.“매년 10월10일은 저희가 산신께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그날도 제사상을 차리고 한바탕 마시고 있는데 저자가 저희를 찾아왔어요.”조검은 상대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억울합니다! 소인을 줄곧 궁에만 있었고 산에 갔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봉구안이 기다렸던 반응이었다.“조검, 그날 네가 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느냐?”조검이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날뿐이 아니고 소인은 줄곧 황귀비 마마를 신변에서 모셨습니다. 마지막 출궁했을 때가 포상 휴가를 나갔을 때였습니다.”“못 믿으시겠으면 출입 기록을 보시면 됩니다. 궁중 관리가 삼엄하니 절대 거짓은 없을 겁니다.”태후는 자신 있게 말하는 조검을 보자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조검의 말이 사실일까?황귀비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후 마마, 신첩이 내무부에 사람을 보내 10월10일날 입궁 명단을 가져오라고 할까요?”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금인장이 있었기에 명단을 자유자재로 조회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황후가 아무리 고귀해도 금인장이 없다면 명단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봉구안은 담담한 눈으로 황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하지.”잠시 후, 내무부 태감이 명단을 가지고 왔다.10월10일뿐이 아니고 10월 한달분 출입국 기록이 전부 들어 있었다.소욱은 시위대와 시종들을 시켜 명단을 확인하게 했다.그 결과, 조검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황귀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를 어쩌나. 조검의 이름이 없네요? 그렇다는 건 산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 아니겠어요?
시위대가 김낭자의 손에서 금화를 받아 자세히 관찰했고 황후가 진술한 것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산적이 받은 금화와 김낭자의 금화는 출처가 같았다.조검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출처가 같다고 하여 뭔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 우연히 소인에게 그 금화가 있었고 소인이 그것을 사용했다면요.”봉구안은 그의 말을 자르고 침착하게 말했다.“재물을 사랑하는 산적은 금화를 애지중지하지요. 은표로 교환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조검은 산적을 매수하기 위해 많은 금화를 지출해야 했을 겁니다. 가지고 다니는 금은 조각으로는 당연히 부족했을 거고 그 많은 금화를 지니고 출궁할 수도 없었을 테니 은표를 지니고 궁 밖에 있는 전장에 가서 금화로 교환하였을 것입니다.”“전장에서 한꺼번에 그 많은 금화를 꺼냈으니 일련번호도 당연히 연결된 번호겠지요.”태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황후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금화가 전부 전장에서 인출하여 사용되었다는 말이 아니더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마마마.”조검은 눈알을 부라리며 반박했다.“하지만 소인은 단지 그 전장에서 금화 한 개만 인출하였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많은 금화를 네가 인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냐?”조검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풍융전장 주인을 데려오너라!”순간 조검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분명 나가기 전에 변장을 하고 나갔고 5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황후가 어떻게 전장까지 조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주인장을 데려와도 매일 출입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전장 주인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황귀비가 비웃는듯 말했다.“너도 조 태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주인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전장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니 당연히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다
“황후, 짐의 결정에 의심을 품는 것이냐!”소욱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봉구안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바로 그녀를 비롯한 천만 병사들이 충성을 맹세한 군왕이란 말인가!회의감이 들었다.그는 폭군일 뿐만 아니라 우매한 군왕이었다!그녀는 정색해서 말했다.“조검이 지은 죄는 산적을 사주해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한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또 뭐가 있지?”태후가 다급히 물었다.봉구안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신첩이 조금 전에 조검에게 물었을 때 그는 확신에 차서 10월10일 궁중에서 당직을 섰다고 고하였습니다. 일지를 확인하였을 때도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렇다는 것은….”봉구안은 손가락으로 황귀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황귀비는 금인장을 갖고 후궁을 관리하였지만 그 와중에 궁중에 출입 기록을 조작한 상황이 드러났으니 이는 명백한 직무 유기입니다!”“평소에 폐하를 매혹하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하니 이게 요부가 아니고 뭡니까!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황귀비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녀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나한테 요부라고?’태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봉구안이 대신 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다.“황상, 황후 말에 틀린 것이 없어요. 조검이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황귀비의 실책입니다.”황귀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신첩이 잘못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소욱은 자신이 총애하는 귀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는 말했다.“황귀비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영소전에서 반성하도록 한다!”연상은 황제의 편협한 판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황후는 애초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년 녹봉을 몰수하고 금족령까지 내려졌었다.황귀비는 직무 유기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반성에 불과
제왕의 분노에 봉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무례하다 하셨나이까.”“폐하, 신첩은 납치당하였다가 구조되어 돌아온 후로 아무도 신첩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주변 사람들마저 신첩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지요. 소문은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 일을 잊을 거라고요.”“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신첩은 매일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게 되겠지요. 여자의 결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납치 당하고 명성마저 잃은 신첩이 분명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방탕한 요부라고 신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이미 그 유언비어에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감히 황후의 예복을 입고 황궁으로 시집오지도 못했겠지요.”“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폐하께 먼저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한 저를 폐후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신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해주세요!”소욱은 그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생모를 떠올렸다.하지만 곧이어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은 차게 식었다.이렇게 날카로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아니, 한 명 더 있었다. 그날 만났던 여자객이 그랬다.그들 중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객기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짐이 황귀비를 엄벌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제왕인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봉구안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검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모자가 누군지 폐하께서 정말 모르실 리 없지요.”소욱은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얼마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모자도 영소전에서 나왔습니다. 산적을 사주한 조검도 영소전 사람이지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성지 납시오! 황귀비는 명을 받으시오!”춘화는 황귀비를 부축해서 외전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곧이어 궁인이 성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조검이 궁중 재물을 횡령한 증거가 확실한 바, 이는 황귀비의 불찰로 판단하여 금일부터 금인장을 제출하고 황후마마께서 후궁을 관리할 것을….”황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황제가 그녀에게 금인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궁인이 계속해서 낭독했다.“그리하여 황귀비를 귀비로 좌천한다!”능소전 궁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조검이 잘못을 하였는데 황귀비가 이렇게 엄한 벌을 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황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귀비를 부축했다.능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성지를 낭독하러 온 궁인이 떠난 후, 능연은 공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모습을 본 춘화도 말없이 궁인들을 물렸다.능연의 예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봉장미 이 간사한 년! 대체 폐하께 뭐라고 했길래 폐하께서 나한테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마마, 고정하세요. 그래도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는 마음은….”“꺼져! 다 꺼지라고!”능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당장 봉장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가 입궁한 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자녕궁.태후는 화가 나서 차도 목에 안 넘어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내가 황상께 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능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이 정도로 편애하시는 거지?”“조검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눈이 있으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이렇게 여색에 빠져 시비조차 가리지 않을 줄이야! 남제의 강산은 결국엔….”계 상궁은 다급히 태후를 말렸다.“마마, 듣는 귀가 많습니다.”이때, 태감 한 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마마, 능소전 쪽에서 새로운 소
한편 영화궁.목욕을 마친 봉구안은 침상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창밖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창가로 다가갔다.문을 열자 검은색 비둘기 한 마리가 짜증스럽게 창문을 부리로 치고 있었다.봉구안은 비둘기 다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쥐새끼는 굴에 잡아넣었습니다.]쥐새끼란 산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그들은 손목 발목 관절과 혀가 잘린 채로 남자 기생집에 팔려갔다.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나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산적들을 응징했지만 봉구안은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봉장미는 처참한 부상을 입고 인생을 망쳤는데 산적들을 어떻게 괴롭혀도 이 분노를 풀기에는 부족했다.게다가 모든 일의 주모자인 능연은 여전히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연상도 분노에 치를 떨었다.“주모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네요! 귀비를 향한 폐하의 신뢰가 이 정도로 두터웠던 걸까요?”미색에 빠졌든 다른 원인이 있든, 소욱은 황제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그년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으로 장미가 당한 모든 것을 갚아주는 건 쉬워.”“하지만 이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야. 그냥 분풀이일 뿐이지. 진짜 피해자인 장미에게도 의미가 없는 짓이고.”말을 마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무조건 이 일을 만 천하에 알리고 아무도 능연을 지켜줄 수 없게 만들 것이다.어쩌면 그때가 되면 봉장미도 유언비어에 시달릴지 모른다.하지만 상관없었다.어차피 장미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고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속세를 떠나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그 시각, 영소전.춘화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이 방밖으로 쫓겨났다.방에는 황제와 귀비 두 사람만 남았다. 밤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들려오지 않았다.능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병풍 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날이 다 밝아올 때쯤에 병풍이 열리고 청색 비단옷을 입은 제왕이
영화궁.황제가 처음으로 아침 식사하러 방문했기에 주방 일꾼들은 평소보다 더 섬세하게 요리했다.식사는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소욱이 말이 없으니 봉구안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반찬을 챙겨준다는가 하는 행동은 당연히 없었다.연상은 몇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황후는 아예 못 본 척했다.한참 말이 없던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녀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연상에게 담담히 말했다.“밥 한 공기 더 가져오너라.”봉구안은 무공을 하는 사람이기에 여느 여자들보다는 식사량이 많았다.군영에 있을 때는 남자들과 같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궁중에서 보니 무척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그녀가 세 번째로 밥을 추가했을 때, 소욱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비빈들 궁에 가서 식사할 때, 그녀들은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직접 그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는 비빈들이 대부분이었다.그리고 거의 다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며 수저를 놓았다.하지만 황후는 남달랐다.마치 그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 온 것처럼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탁!소욱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다 나가보거라.”하인들이 나간 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황후에게 말했다.“수저 내려놔. 물어볼 게 있다.”봉구안은 담담히 수저를 내려놓고 공손히 답했다.“말씀하시지요.”“산적들과 증거들 언제 다 수집한 것이냐.”“사건이 있고 신첩의 아버지는 매일 수색을 나갔습니다.”소욱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짐이 한 달의 기한을 주었을 때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군. 이미 모든 조사는 끝난 뒤였으니까.”“황후, 이건 황제인 나를 기만한 죄야!”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를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사 진전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폐하도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소욱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됐건 이 일은 여기서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