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의 지목을 받자, 녕비는 한사코 부인하였다. “황후마마, 신첩은 저 여인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봉구안은 눈을 들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네 차례는 아직 아니다.” 궁녀는 몸을 떨며 녕비를 힐끗 보고는, 이내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녕비마마께서 소인에게 정비마마의 생신 선물에 손을 대게 하셨사옵니다. 그 선물에 불임을 일으키는 독향을 심어두라 하셨사옵니다…” “허튼소리!” 녕비가 화를 내며 궁녀를 꾸짖었다. 그녀는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황후마마, 어찌 이런 천한 여인의 말 한마디로 신첩의 죄를 단정 지으십니까?”“그녀가 방금 한 말은, 신첩이 결코 하지 않은 일이옵니다!” 하지만 궁녀는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다. 그저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할 뿐이었다. “황후마마, 소인은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이는 진실이옵니다! 소인이 반쯤의 거짓말이라도 했다면 하늘이 소인을 내려치실 것이옵니다!” 봉구안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물러가거라.” 궁녀는 덜덜 떨며 물러났고, 녕비는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봉구안이 냉랭한 목소리로 명했다. “무릎을 꿇어라.” 녕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황후마마, 신첩은 억울하옵니다…” “무릎을 꿇으라!” 봉구안의 어조는 한 치의 거역도 허용하지 않았다. 녕비는 불복하였다. 그러나 봉구안의 눈빛에 담긴 서늘한 위압감에 눌려, 결국 마지못해 무릎을 꿇었다. 봉구안이 말했다. “이기고자 한다면, 떳떳하게 이겨야 하느니라. 이런 비열한 수작을 다시 저지른다면, 이 물건과 그 궁녀를 폐하께 그대로 올릴 것이다.” “정비가 마마를 해치려 하였사옵니다! 저 궁녀도 틀림없이 정비의 사주를 받은 것이옵니다. 마마, 신첩은 정말 결백하옵니다!” 봉구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녕비의 이번 술책은 한 번에 자신과 정비,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계략이라는 것을.
“신첩, 폐하를 뵙사옵니다.” 소욱은 직접 봉구안을 부축하며 말했다. “예를 갖추지 않아도 좋소.” 그녀의 팔을 스치는 순간, 그는 그녀의 미묘한 반감을 감지하였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피했다. 소욱은 한순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황후는 원래부터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했으니, 아마 그녀의 지난 경험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오늘은 그대의 생일이니, 당연히 짐이 그대와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의 은총은 봉구안이 당연히 예를 갖추어 감사드려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기억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앞으로 그대의 생일마다 짐이 항상 함께하겠소.” 순간, 봉구안은 자신에게 있어선 안 될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감사하옵니다, 폐하.” 소욱은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차렸으나,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아침 일찍 귀중한 장신구들을 보내도록 명을 내렸었다. 이번에는 유사양이 궁인 10여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각자 손에 칠안을 들고 있었다. 유사양은 하나씩 천을 걷으며 설명했다. “황후마마, 이것은 부광금이라 하옵니다. 궁에서도 한 자락을 얻기 위해서라면 줄을 서야할 정도로 진귀한 비단이옵니다.” “이 바둑알은 흑자는 먹옥, 백자는 최상급 양지백옥으로 제작된 것이옵니다. 완성되기까지 삼 년이 걸렸사온데, 가히 천금을 호가하옵니다…” 이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은 최 상궁조차도 궁에서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황후마마는 어찌하여 웃음기 하나 없이 평온하기만 하단 말인가? 유사양이 설명을 끝내자, 봉구안은 그저 담담히 예를 표했다. “감사하옵니다, 폐하.” 그녀는 영욕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얼굴에 어떠한 파장도 없었다. 소욱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봉구안은 부인하였다. “아니옵니다. 신첩… 매우 마음에 듭니다.”
소욱의 행동이 갑자기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의 따스함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봉구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짐은 남자일 뿐이다. 그뿐이다.”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두 번 세게 물고는 곧바로 떨어졌다. 봉구안은 속에 화가 가득 차올랐다. 그가 물러나자, 그녀는 그의 옷깃을 붙잡아 거침없이 되갚아 물어버렸다. 소욱은 순간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봉구안은 그의 입술을 세게 물었고, 피가 맺혔다. 소욱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젠장!황제인 자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소욱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고 그녀를 단단히 혼내줄 기세였다. 봉구안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또 덤벼온다면, 이번엔 반드시 그를 피투성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때 밖에서 진한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급했다. “황제 폐하, 급히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소욱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밖으로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연상이 대전에 들어와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진한길의 보고를 들으신 후 심히 노하셨어요. 아마 큰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봉구안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진한길은 소욱의 심복으로,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자였다. 그가 이처럼 다급해할 정도라면,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날 밤 자진궁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여러 비빈들이 영화궁으로 문안을 오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사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심지어 자진궁의 금군들까지 모두 매질을 당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오늘 조회도 열지 않으셨다니, 정말 등골이 오싹합니다.” “듣자하니 간첩 하나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녀들의 이야기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
봉구안이 첩자의 시신을 살펴보니, 그의 팔 안쪽에 작은 문신 하나가 있었다. 언뜻 보면 태반처럼 보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문신이었다. 봉구안은 그 문양을 종이에 옮겨 그려보았다. 마치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한 마리 뱀처럼 생긴 그림. 그 문양,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듯하였으나,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 후 각 방면으로 탐문하여 알아본 끝에, 이 문양이 조 나라의 초기 토템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조 나라는 남제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수십 대에 걸쳐 토템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이 원시 토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조 나라의 정왕뿐이었다. “부맹주, 이로 보아 첩자는 틀림없이 조 나라 사람이옵니다!” 평안 전당포의 주인이 마침내 실마리를 잡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맹주께서 눈썰미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늙은 소인이야 어찌 이 조그마한 것을 알아보았겠사옵니까.”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 일이 풀릴 조짐이 보였다. 봉구안은 곧장 말을 몰아 동쪽으로 떠났다. ……이틀 후. 황성 교외의 한 객잔. 진한길이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황제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폐하, 평안 전당포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사옵니다.” 소욱은 창가에 서서 손을 뒤로 하고 멀리 산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엄숙하였고, 분위기는 한겨울보다도 더 서늘하였다. “기다려라.” 진한길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소환조차 찾지 못할까 우려되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은 어찌 되었느냐?” 소욱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한 채 물었다. 진한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사옵니다.” 사방으로 그물을 넓게 쳐 놓았으나, 확실한 정보를 얻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소욱은 한동안 침묵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옆머리카락이 헝클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명령을 내렸다. “서왕과 이 장군을 부르거
진길은 중상을 입은 소환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다가 황제의 시위인 자신의 신분을 기억해내고 황제의 안위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제 자리로 돌아갔다.“소 공자, 의원을 불러올까요?”소욱 신변의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진길도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사람이 다쳤는데 의원을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덤덤한 얼굴로 의중을 묻다니.봉구안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께 전해주십시오. 폐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였다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죽첩으로 된 서신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진길은 곧장 그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아뢰었다.“폐하, 소 공자가 돌아왔습니다.”곧이어 문이 열렸다.소욱은 그가 오기 전까지 한창 서왕, 이 노장군과 함께 새로운 방어진을 상의하고 있었다.그는 소환의 복귀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지만 소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진길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등을 돌린 사이에 사라지다니!그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소환이 건넨 죽첩을 황제에게 건넸다.죽첩을 펼친 소욱은 바로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잃어버린 방어도였다.남제 변경의 방어도가 완전하게 그 안에 들어 있었다.소환이 그것들을 모두 되찾아온 것이다.서왕과 이 노장군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폐하, 잃어버린 방어도를 찾아온 사람이 누굽니까?”아무런 단서도 없는 정황에서 단 5일만에 방어도를 되찾아왔다는 건 일반인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그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남제까지 살린 영웅이었다.소욱은 신속히 방어도를 보관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문밖에 나가도 소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단지 복도에 흘린 피만 있을 뿐이었다.소욱은 텅 빈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길에게 물었다.“중상을 입었더냐?”진길이 답했다.“그런 것 같습니다.”소욱의 눈빛이 착잡하게 변했다.정의로운 사람에게 면죄부 금패 정도 내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 시각, 객장 밖.봉구안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그녀의 심복
서재.화려한 차림의 장공주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냉철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건조한 대하 지역에서 생활하다 보니 부드럽던 피부는 건조하고 누렇게 변했고 인상도 초췌하고 각박하게 보였다.“폐하, 과거 저를 화친을 보내면서 나중에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약조하셨지요. 그 동안 전 대하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소원을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그런 제가 지금 간청드리건대, 맹 소장군을 풀어주시지요.”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님은 그 여인과 아는 사이였습니까?”그게 아니라면 돌아오자마자 맹교먹 얘기부터 꺼냈을 리 없었다.장공주는 지나간 기억을 되돌리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한때 저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대하에서 도망쳐 남제의 북부로 간 적이 있습니다. 가는 내내 암살자들의 추격을 받았지요. 그런 저를 구해주신 사람이 맹 소장군이었습니다.”“이 은혜는 꼭 갚고 싶습니다. 하물며, 맹 소장군은 남제의 공신 아닙니까. 어찌 공신에게 이리 대하실 수 있나요? 변방을 지키는 장령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황후가 도착했다.장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봉구안을 바라봤다.완벽한 미모를 자랑하는 황후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이런 미인이니 폐하께 베개머리 송사를 했겠지!’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이긴 하지만 품계를 따지면 일국의 황후가 장공주에게 예를 올릴 이유는 없었다.법도를 따지면 장공주가 황후에게 예를 행해야 맞았다.하지만 장공주는 황후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다.알아본데 의하면 맹 소장군이 옥에 갇힌 이유도 황후 때문이라고 했다.사람들은 황후의 말을 믿었지만 장공주는 맹 소장군처럼 정의롭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황후를 습격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오히려 후궁에 사는 황후라면 온갖 속셈을 가지고 황제의 총애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장공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맹 소장군이
봉구안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맹교먹을 석방한 일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장공주가 나간 후,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에 다가가서 섰다. 그리고 제왕의 위엄을 내려놓고 평온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과거 짐이 즉위했을 때, 조정도 조용할 날이 없는데다가 외적들도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님이 자신을 희생해서 대하로 화친을 간 거야.”“짐은 누님께 많은 빚을 졌다.”“알고 있습니다.”봉구안은 땅바닥을 내려보며 덤덤히 답했다.너무도 평온한 그녀의 태도에 소욱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또 말했다.“짐이 약속을 어겼다고 치자꾸나. 사실 짐도 맹교먹을 그동안 가둬둔 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이 나라의 황후이니 아량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맹교먹이 너의 행적을 발설한 건 약속을 어긴 행위이지만 이 나라의 대신으로서 황후의 행방을 짐에게 전한 것이니 충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너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짐은 그녀를 북부에서 황성으로 불러들이고 감옥에 가두었으니…”결국엔 여기서 이 일을 마무리짓자는 얘기였다.하지만 봉구안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소욱을 응시하며 정색해서 말했다.“신첩을 위한 일이 아니지요.”“맹교먹을 황성으로 부른 건 폐하께서도 그녀가 북부에서 패왕 행세를 하길 바라지 않고 북대영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그녀를 옥에 가둔 것은 북대영 쪽의 반응을 시험하고 결과에 따라 그녀를 중용할지 결정하기 위해서고요.”그녀는 쉽게 속아줄 마음이 없었다.일반 남자도 여인을 위해 이익을 양보하지 않는데 하물며 일국의 황제라면 여부가 있을까!소욱의 행보 모든 것은 결국엔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만약 맹교먹을 처벌하는 것이 그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이리도 쉽게 너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결국엔 서로 원하는 바가 같아서 행한 일을 마
자녕궁.태후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안고 눈물을 글썽였다.“내 아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 어미가 얼마나 그리워했다고… 드디어 하늘이 도우셔서 널 내 옆으로 보내준 거야…”녕비도 옆에서 반가움의 눈물을 훔쳤다.“언니, 고모께서 안 그래도 최근에 언니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날짜를 헤아려보니 돌아올 때도 되었는데 안 돌아온다고… 밤새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다렸답니다. 저도 너무 걱정했어요. 대하 쪽에서 갑자기 약속을 번복할까 봐…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장공주도 눈시울을 붉혔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대하에 있는 동안에 이미 눈물샘이 말라버린 그녀였다.“어마마마, 대하의 늙은 황제가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한 뒤로 저는 태비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 짐승 같은 놈이… 저를 능욕하려 했어요!”태후는 그 말을 듣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뭐라? 한 나라의 황제가 돼서 어찌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그래서 너는...”장공주는 고개를 젓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놈의 뜻대로 해주진 않았지요. 이번에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맹 소장군 덕분이에요.”“그녀가 용맹히 적을 무찌르고 양나라를 수복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압박을 주지 않았다면 대하에서도 쉽게 저를 보내줬을 리 없어요.”태후는 딸의 손을 잡고 감개무량해서 말했다.“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그 아이가 승전보를 울리면서 간접적으로 너를 구했구나. 제대로 된 포상을 내려야겠어!”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2년 전에 전 맹 소장군과 만난 적이 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죠.”녕비가 웃으며 말했다.“언니와 맹 소장군이 인연이 있었다니, 놀랍네요!”사정을 모르는 녕비와는 다르게 2년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는 태후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그녀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장공주의 손을 다독이며 감격해서 말했다.“그 사람이었구나. 그럼 더욱 더 포상을 내려야겠네!”그러던 태후가 뭔가 떠오른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맹교먹이라… 내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