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와중에 장공주는 가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다.딱 봐도 후궁 여인은 같지 않았다.물론 장공주는 급하게 서재로 가느라 주변을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기 다가와서 그녀에게 예를 행했다.“소신 맹교먹,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장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처음 대하에 도착했을 때, 늙은 황제는 그녀를 꽤 총애하는 편이었다.하지만 두 달도 안 돼 황제는 또 새로운 여인을 후궁으로 들였다.후궁에서 황제의 총애도 없고 사람들과 어울릴 줄도 모르는 여인의 처지는 어떨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 몇 년 동안 장공주는 온갖 수모를 겪었다.나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그녀는 늙은 황제의 총비를 죽이고 심복의 보호를 받으며 대하를 탈출했다.그녀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그릇된 일을 저질렀고 자신의 행동이 남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오로지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으며 북부로 도망쳤지만 결국 늙은 황제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그녀를 추격한 자들이 받은 지시는 발견 즉시 비밀 리에 사살하라는 것이었다.이대로 죽는가 싶던 순간에 맹성주가 나타났다.그는 그녀를 구했고 앞장서서 대하와 담판을 짓고 친히 그녀를 대하의 변방까지 호송했다.참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함께한 시간은 고작 반 달이지만 장공주는 그의 자상함에 푹 매료되었다.작별할 때가 돌아오자 그가 말했다.“장공주께서는 남제의 공신이십니다. 장공주의 희생으로 남제는 2년 동안 숨을 고를 시간을 벌었지요. 언젠가는 남제가 강대국이 되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그가 약속했던 강성한 남제를 그녀는 지금 보았다.그런데 자신이 기억하던 용맹하고 준수하던 소장군이 여인일 줄이야.매일 밤 그의 용모를 상상했었지만 이런 결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소욱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장공주가 한 말은 아예 못들은 척할 생각이었다.소욱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황후가 나간 후, 장공주는 정색해서 황제에게 말했다.“폐하,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내 필히 황후가 맹 소장군을 모함한 죄증을 밝혀내겠습니다!”나쁜 일을 행하였다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장공주는 황후가 절대 결백한 사람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그녀는 황후가 다시 맹 소장군을 건들지 못하게 어떻게든 황제의 앞에서 황후의 가면을 벗기겠다고 다짐했다.감찰부.교먹은 몰래 정보를 수집하여 끝내 과거의 일에 대해 알아냈다.“또 구명의 은혜야?”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쳤다.‘언닌 참 사람을 구해주기 좋아한다니까.’하지만 그렇다 한들 봉구안도 장공주에게 감히 진실을 알리진 못할 것이다.장공주라는 장기말은 이용할 가치가 커 보였다.촛불 아래, 맹교먹의 미소가 음산하게 빛났다.영화궁.하루동안 잠만 자고 일어나니 봉구안의 피로도 어느정도 가셨다.다음 날, 그녀는 오백을 통해 면죄부 금패를 이미 확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소욱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이제 교먹의 죄증을 정리한 후에 연상과 아랫사람들의 갈 곳을 정해준 뒤에 교먹의 진짜 얼굴을 까발릴 일만 남았다.봉구안은 연상을 따로 불러서 물었다.“너는 집이 어디지? 아직 살아 계신 가족이 있느냐?”연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소인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연상이 다급히 물었다.“마마, 소인을 버리시려는 겁니까?”봉구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살고 싶으면 내 지시에 따르거라.”이런 상황에서 정에 휘둘려 우물쭈물 시간을 지체하는 건 독이라 할 수 있었다.연상과 일년 같이 보내며 정이 든 것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연상은 황후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장공주의 끈질긴 추궁 끝에 교먹은 못이기는 척, 과거 황후가 도주를 시도한 적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자초지종을 들은 장공주는 큰 충격에 빠졌다.“그런 일이 있었다고?”‘정말 황당무계하군!’교먹은 짐짓 착한 척, 황후를 위해 변명했다.“황후께서도 일시적인 충동이었을 겁니다. 아마 폐하께서 돌아가신 영비마마를 그리워하고 있는 걸 보고 화를 참지 못했나 봅니다. 황후도 여인이니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요.”장공주는 화가 나서 헛웃음을 지었다.“이렇게 오만방자할 수가! 대체 폐하를 뭐로 생각하고 황후의 자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황후가 되어서 첩실이나 할 천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수치스럽구나!”교먹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장공주님,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셨거든요. 소신이…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장공주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너의 충심은 내 잘 알고 있다. 황후도 아마 여인인 네가 폐하의 중용을 받으니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일 게야. 너무 걱정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절대 황후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을 터이니!”교먹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하지만 곧이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장공주, 소신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는 마십시오.”“상대는 폐하의 총해를 받는 일국의 황후 아닙니까. 소신이 더 조심하면 됩니다. 아쉬운 건 전장을 누비던 제가 지금은 높은 담장 안에 갇히게 되었으니…”교먹의 의도는 장공주를 이용해서 북대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의 포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내가 아니라서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폐하께 간언을 올렸을 터인데.”교먹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날 믿지 못하는 건가?’그녀가 알아본 바로 장공주가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지만 대신들 중에 그녀를 옹호하는
장미와 용호군 사건에서 교먹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나라의 이익이 오가는 자리였기에 사사로운 감정을 섞을 수는 없었다.만약 교먹이 비무에서 지게 된다면 남제는 크나큰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비무 시작 전, 봉구안은 연상을 시켜 서여국 사신이 쌍칼에 능하니 조심하라는 전갈을 보냈다.교먹은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했다.“돌아가서 황후마마께 전하거라. 꼭 이길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그녀는 봉구안이 자신을 너무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오찬이 끝난 후, 비무 시간이 돌아왔다. 남제의 관료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사신들까지 구경을 위해 자리했다.봉구안과 장공주도 비무장에 나왔다.장공주가 비무에 관심을 갖는 건 소욱이 예상했던 바지만 황후까지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는 의자를 대령하라 시키고 봉구안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봉구안은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징소리와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교먹은 장검을 들었고 서여국 사신은 완도를 들었다.비무가 시작되자 교먹은 먼서 선수를 치고 들어갔다.봉구안과 같은 스승 밑에서 무예를 배웠기에 비록 봉구안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약한 편도 아니었다.눈깜짝할 사이에 교먹은 연속 공격을 시전하여 서여국 사신을 무대 변두리로 몰아세웠다.남제의 관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오른손에 완도를 잡은 서여국 사신은 방어를 위주로 교먹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했다.칼날이 서로 부딪히며 아찔한 소리가 들렸다.교먹의 깔끔하고 신속한 공법은 너무도 빨라 눈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여국 사신은 몇 번이고 피하지 못하고 칼을 맞을 뻔했다.관원들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감히 우리 남제의 제일 여장군에게 도전장을 내밀어서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로군.”“사신은 방어만 할 것이오? 이래서야 비무가 볼거리가 떨어지잖나!”“맹 소장군! 공격을 계속하시오!”무대 위의 교먹은 장검을 교묘하게 휘둘러 서여국 사신의 명치를 노렸다.사신은 뒤로 뒷걸음질치며 가까스로
서여국 사신이 쓰러진 뒤, 교먹은 재빨리 달려들어 팔꿈치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다.상대는 그 자리에서 대량의 피를 뿜으며 공중에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삭막한 정적이 흐른 후에 누군가가 소리쳤다.“이… 이겼다!”장공주는 그제야 안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교먹을 바라봤다.‘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남제의 관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찔한 비무였습니다.”“질 리가 없지 않소! 상대가 맹성주인데!”교먹은 무대 위에서 손을 들고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봉구안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교먹의 권풍은 한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그렇다면 교먹 역시 반칙을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어쩼든 남제가 이겨서 현영석을 내놓을 필요가 없었기에 봉구안은 깊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귓가에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제가 이겼는데 황후는 별로 기쁘지 않아보이는군.”봉구안은 고개를 돌리고 소욱의 의심의 눈초리와 시선을 맞췄다.곧이어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공손히 답했다.“신첩 역시 기쁩니다.”갑자기 소욱이 손을 뻗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시선은 전방에 둔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네가 맹교먹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남제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 아무리 고까워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말거라.”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친밀한 동작이었지만 사실 상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마침 이 광경을 목격한 장공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맹교먹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비무에 임했는데 황후는 이 순간에도 황제를 유혹하려 꼬리를 치고 있으니 같은 여자로서 너무도 비교가 됐다.한편, 서여국 사신은 기절한 상태로 태의원에 실려갔다.서여국이 이기면 자신들도 묻어가서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려고 했던 타국 사신들은 그 모습을 보고 현영석이고 뭐고 빨리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교먹 역시 부상을
황제는 숙연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다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맹교먹은 여장군으로서 열세 번의 전장에 참여하고 무패의 전적을 세웠으니 그 공훈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다. 그리하여 짐은 특별 포상으로 면죄부 금패를 하사하는 바이다.”“또한, 무릇 능력 있는 남제의 사병이라면 출신, 남녀 막론하고 맹교먹을 본보기로 삼아 분발해야 할 것이다. 이 남제의 작위는 언제나 분발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맹교먹은 환희에 들뜬 얼굴로 황제에게 재빨리 감사인사를 올렸다.“황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장공주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며 소욱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현명하십니다, 폐하. 장병들도 이로써 큰 위안을 얻고 더욱 더 분발하여 폐하를 위해, 남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거라 믿습니다.”반면 소욱의 옆에 자리한 봉구안의 얼굴에는 미소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장공주도 당연히 그녀의 이상 반응을 눈치챘다.“황후, 혹여 폐하의 결정에 이의가 있어서 그리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요?”교먹도 고개를 들고 봉구안을 바라봤다.‘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지. 그럼 뭐해, 언니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이제 면죄부를 손에 넣었으니 봉구안도 거리낌없이 그녀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장공주의 질문을 무시한 채, 일어서서 소욱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신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소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앉거라.”대중이 보는 앞에서 장공주가 시비를 걸었는데 황후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 것이다.봉구안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소욱은 곧장 그녀의 팔을 잡고 강제로 끌어다 의자에 앉히려 했다.하지만 봉구안은 이번에 그의 뜻을 따라주지 않고 중심을 바로잡았다.소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그는 낮으니 소리로 경고하듯 그녀에게 물었다.“짐이 앉으라 하였는데 못 들었느냐?”장궁주는 짐짓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황후, 왜 그러십니까?”관료들 틈에
태의원.정신을 차린 서여국 사신의 표정은 참담했다.‘내가 졌어.’하지만 굴복하기보단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분명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침상 옆에 칼을 들고 지키고 서 있는 시위를 발견했다.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뒤늦게 알아차렸다.비무에서 졌으니 남제에 오동광 오백석은 물론이고 손목 하나를 내놓아야 했다.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그녀는 이미 서여국의 죄인이었다.사신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았다.서재.소욱이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는데 진길이 들어와서 아뢰었다.“폐하, 서여국 사신이 목을 베고 자결했습니다!”소욱의 반응은 냉담했다.그는 그 사신이 조금도 가엾게 여겨지지 않았다.“손목을 잘라 시신과 같이 서여국에 보내거라.”진길은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한 시진 후, 영화궁.태의가 진맥을 청하러 걸음했다.봉구안이 탁자 위에 손을 올리자 태의는 맥을 짚으면서 조용히 말했다.“마마, 소신은 분부대로 몰래 그 서여국 사신의 부검을 하였는데 복부에서 은침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꺼내 보니 독을 묻힌 침이더군요.”봉구안이 예상했던 대로, 교먹은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몰래 비침을 사용한 것이다.비침은 신속히 체내에 깊숙이 파고들었기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다.독에 당한 사신마저도 그것을 권풍의 위력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침은?”봉구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태의는 소매 안에서 손수건으로 겹겹이 싼 은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겁니다.”봉구안의 눈가에 한 줄기 서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사모의 서신에서도 장성 등 몇몇 용호군의 몸에서 독침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된 적 있었다.어쩌면 그때 쓴 것과 동일한 종류의 독일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태의에게 경고했다.“이 일은 남제와 맹 소장군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니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죄와 같아.”태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걱정 마십시오. 소신은
봉구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공손히 답했다.“예.”연상은 착잡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비천한 시종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이런 희생을 하는 상전이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웠다.소욱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참으로 막역한 주종 관계로군.”이때, 영문을 모르는 최 상궁이 들어와서 아뢰었다.“폐하, 마마, 저녁 식사를 올릴까요?”아부 섞인 미소를 짓던 최 상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연상을 보고 그녀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고 입가의 미소가 굳어졌다.반면 황제는 기분이 꽤 좋았는지 황후의 손을 잡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저녁을 내오거라.”봉구안은 그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연상을 물리며 담담히 말했다.“가서 짐을 싸고 내일 출궁하거라.”연상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답했다.“예, 마마.”나가려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욱이 말했다.“그래도 황후 신변의 대궁녀인데 내일 친히 호위대를 보내 고향으로 가는 길까지 호송하게 하겠다.”연상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그녀에게는 고향도, 위독한 아버지도 없었다.폭군이 호위대를 보낸다는 건 감시한다는 말과 같았다.연상은 조용히 황후를 바라봤다.봉구안은 겉으로는 침착한 표정으로 소욱에게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폐하께서 이리도 마음 써 주시니 연상이 복받은 거지요.”연상이 나간 후, 식사 시중은 최 상궁이 맡았다.봉구안은 기분이 별로였기에 수저를 거의 들지 않았다.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궁인에게 명령했다.“황후의 접시에 반찬을 더 챙겨드리거라.”봉구안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이따가 힘을 쓸 일이 많으니 많이 먹어야지.”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접시에 고기 한점을 친히 집어주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그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반면, 최 상궁은 황제와 황후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보고 입이 째지게 웃었다.황후는 낙태한 후로 더
황성.오늘의 망강루는 유난히 북적거렸다.소욱은 황후가 서여국에 출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그녀의 가짜 회임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 때문에 그는 궁 안에서 비응군을 위한 축하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궁 밖의 망강루를 빌려 연회를 준비했다. 1층에는 수십 개의 식탁이 놓였고, 비응군은 나눠 앉아 있었다.한편, 은위들은 따로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 누구도 은칠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워낙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남제로 오는 길 내내 그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은 욕대로 먹고, 매를 맞기까지 했다.은칠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황후의 출사 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것은 자신인데, 얻어맞는 것도 자신이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사관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이런 미움을 사는 역할도… 그는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2층, 별실.문 밖에서는 진한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방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고요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을 내려다보며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봉구안은 서여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서여국 황제에게는 몇십 년 전에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제게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게 유일한 단서인데, 부러진 옥비녀 반쪽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일이면 본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서여국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그는 그저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여전히 국사에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남제의 상황을 물었다."제가 없는 동안 담대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소욱은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첩보에 따르면, 겉으로는 남제를 도와 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소욱
봉구안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보랏빛 옷을 차려입고 눈에 띄게 화려한 소욱이었다.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어 질끈 눈을 감았다.저 사람이 정말 자기 서방이 맞단 말인가? 그 위엄 넘치는 한 나라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봉구안은 못 본 척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하지만 소욱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렸다.비응군은 눈치 있게 물러나 황후와 황제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취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가 살짝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알아차렸다. “부인!”소욱은 흥분한 얼굴로 봉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공공장소에서 그는 그녀를 황후라 부를 수 없었다.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봉구안은 그의 옷에서 풍기는 강한 향을 느꼈다. 그 향은 다소 자극적이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구안아, 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봉구안은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차마 그에게 귀신에게 씌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왜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토록 화려하게 차려입다니,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골라준 옷 색감은 아주 훌륭했다. 허나 정작 왜 본인은 이런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걸까.봉구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했다.소욱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가마 안에서 그는 봉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입을 맞추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봉구안은 손을 뿌리치며 그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람이 진짜 소욱이 맞는지,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얼굴로 변장한 것은 아
그 손님은 소년을 향해 노발대발하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어린놈아! 돈을 냈으면 일을 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내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가리라'라고 써달랬으면, 그대로 쓰면 될 걸 왜 이리 말이 많아!” 소년은 창백하고 여위었지만, 붓을 움켜쥔 손과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군가라고요. 전우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어찌 애첩에게 주는 시에 사용을 한단 말입니까!” “그 군가는 이리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손님은 이를 갈며 격분했다. “애첩? 지금 내 부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린 게 버릇없이! 오냐, 좋다! 오늘 내 널 죽여버릴 것이다!”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절 죽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간부음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통한 남자와 음란한 여자라는 뜻이죠. 이미 아내가 있는 주제에 기생과 혼인하려고 하다니,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라리 환관이 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면 자식도 못 낳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에게 짐승을 비유하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날카로웠다. “이 꼬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손님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손을 올렸지만, 갑자기 그의 귀를 누군가 잡아챘다. “누구야! 감히 내 귀를…”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정실 부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널 먹여 살리고, 궁 안에 들어가 시험 보라고 뒷바라지했더니… 감히 기방에서 여인을 만나러 다녀?” 그러고는 그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내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걸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악한 줄도 모르고 정말 당할 뻔했네.”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악을 벌하고 선을 드러내는 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사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아마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남제의 황후가 되었고, 다시 군대를 이끌 기회는 없을 터였다. 취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모든 말을 털어놓았다. 죽을 각오로 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황후마마께서 조직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궁 금군에 편입된 뒤로, 형제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마마께서 소장군이 아니시지만,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무당에서 직책을 맡으실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불경한 말인 줄 알지만, 서여국 황제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와 혼인하신 뒤로 실권이 없으시니, 이제 남은 건 자녀를 돌보고 내조하는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무예를 그냥 묵히시는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봉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서여국 황제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 취사는 순간 얼어붙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와 설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여국에 남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마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마마께서 권력을 가지실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셨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들고 있던 구운 생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남제와 서여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후가 군대를 이끌다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설령 소욱이 그녀를 아무리 용인한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녀 또한 소욱에게 부담이 갈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
비록 봉구안이 은위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여국 황제가 자신의 암위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그녀의 단호한 한마디에 암위들은 즉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곁에는 모신만 남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은근히 이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보아하니, 그들은 네 명령을 따르는 척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제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너를 감시하는구나. 네가 서여국에 머물고 싶어도 결국 넌 남제로 끌려가겠지.” 은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마, 저희는…”하지만 봉구안은 은칠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분하고 당당하게 서여국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굳이 저와 남제 폐하를 이간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지,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서여국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리는 길이 다르구나. 나는 네가 남제 남성들의 권력 아래 있는 걸 싫어해, 여인들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 “서여국의 여인이나 남제의 남성이나 다르지 않습니다.”“길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천하 대동, 남녀가 평등한 길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누른다면 그 길은 기울고 불공평하며,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서여국의 내란도 조여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군사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남녀 간 불공평 때문이었습니다. 외지인으로서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절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여국이 남성에게 불공평한 나라이고, 남제가 여성에게 불공평한 나라라면, 어느 쪽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 봉구안은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길이 멀고 험해 천 년이 지나도 답을 내릴 수
봉구안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서여국의 미남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저들을 처리하기 전에, 약은 남겨 두십시오.” 그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앞에 있는 귀인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무정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녀는 약만 걱정하는 듯했다. 모신은 곁에서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맹 소장군은 남색에 전혀 관심이 없군.’….한편, 서여국 황제가 보낸 미남들을 몰아낸 것을 지켜본 봉구안의 호위들은 눈빛에 살기를 띄우며 말했다.“저따위로 우리 황후마마를 유혹하려 들다니, 당장 찾아가 처리해야겠습니다.”다른 곳에 숨어 있던 은이 역시 이 상황을 보고 머리를 저었다. “형님, 서여국 황제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미남들을 보낸 걸까요?”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강아지풀을 살짝 씹으며 비웃었다. “뻔하지. 서여국 황제는 황후마마를 남겨두고 싶어 하는 거다.” “뭐라고요?!” 호위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약 서여국 황제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 황제 폐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그러나 다행히도, 황후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남들을 거절하고,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한 시진 후. 서여국 황제는 봉구안이 머물고 있는 편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했다. “내 듣자 하니, 맹 소장군은 내가 준비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 하더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황제가 보낸 미남들은 단순히 약을 발라주는 임무를 맡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봉구안이 이들에게 미남계를 쓴 것이라 비난한다면, 황제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고 역이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봉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폐하의 깊은 뜻과 서여국 남자들의 준수한 외모를 보아 외신이 불만을 가질 리 없지요.” “다만… 제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불전에 서약을 한 바 있습니다.”“
서여국 황궁, 천택궁 별채.은위 몇 명이 전각 밖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는 어의가 봉구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봉구안은 내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다.어의가 물러나려 하자 봉구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 순간, 서여국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가만히 앉아 있거라. 내가 명을 내려 어혈을 풀고 멍을 가라앉히는 약을 바르게 하겠다.”봉구안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느냐.”“그대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내 계획대로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많은 무고한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이번 작전으로 피해를 줄였고, 조여란과 가짜 숙연까지 명분 있게 제거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겠느냐.”봉구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조여란이 동산국과 손잡고 남제를 멸하려 한 만큼, 동산국으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았을 것입니다.”“그 자를 처단하기 전에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서여국 황제의 눈빛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였다.“그 말이 맞다. 이 일은 반드시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서여국에서 반역과 군주 시해는 이미 죽음에 값하는 죄였다.게다가 외국과 결탁한 죄는 나라를 배신한 중죄였다.그녀는 이 중죄를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서여국 천옥.조여란은 형틀에 묶인 채 기운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감옥을 직접 찾은 서여국 황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폐하, 이렇게 무정하실 수 있습니까?”“제가 잘못한 건 많지만, 전장에서 함께 싸우며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도 있지 않습니까?”“또한, 쌍둥이 여동생을 찾아드린 것도 저입니다! 이런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제 죄를 덜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서여국 황제는 냉소하며 말했다.“여동생이라니? 네가 조종하여 내 여동생 행세를 하게 만든 창부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자가 내 혈육이라 할
서여국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궁으로 돌아가거라. 어의에게 너의 상태를 잘 살피게 하겠다."봉구안은 서여국으로 비밀 사절로 파견된 상태였고, 황제와 그녀의 심복 모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의 호위병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제의 배려에 봉구안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모신이 먼저 물었다."폐하, 저 관료들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황제는 조여란이 화살로 모두를 살해하려 했던 순간, 관료들 중 일부가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조여란의 동조자는 모두 체포하고, 나머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라.""예, 폐하!"그 순간, 반역죄가 자신들에게 닥쳤음을 깨달은 관료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살려주십시오!""폐하! 순간의 실수였습니다!""폐하, 조여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마음은 없었습니다!""폐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이들의 간청을 전혀 듣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끌고 가거라!"그렇게 조여란의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아아…" 숙연은 조여란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떨며 말했다."저는 조여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억울하게 끌려온 것뿐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억울하다고? 내가 본 건 너와 조여란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서여국 황제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숙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저었다."아닙니다! 언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여란이 반역자인 줄도 몰랐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여국 황제는 검을 뽑아 숙연의 목에 겨누며 비웃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숙연의 동공이 흔들리며 그녀는 급히 외쳤다."언니, 저… 저는 언니의 친동생입니다…!"그 순간, 황제는 매섭게 칼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