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숙연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다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맹교먹은 여장군으로서 열세 번의 전장에 참여하고 무패의 전적을 세웠으니 그 공훈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다. 그리하여 짐은 특별 포상으로 면죄부 금패를 하사하는 바이다.”“또한, 무릇 능력 있는 남제의 사병이라면 출신, 남녀 막론하고 맹교먹을 본보기로 삼아 분발해야 할 것이다. 이 남제의 작위는 언제나 분발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맹교먹은 환희에 들뜬 얼굴로 황제에게 재빨리 감사인사를 올렸다.“황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장공주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며 소욱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현명하십니다, 폐하. 장병들도 이로써 큰 위안을 얻고 더욱 더 분발하여 폐하를 위해, 남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거라 믿습니다.”반면 소욱의 옆에 자리한 봉구안의 얼굴에는 미소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장공주도 당연히 그녀의 이상 반응을 눈치챘다.“황후, 혹여 폐하의 결정에 이의가 있어서 그리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요?”교먹도 고개를 들고 봉구안을 바라봤다.‘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지. 그럼 뭐해, 언니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이제 면죄부를 손에 넣었으니 봉구안도 거리낌없이 그녀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장공주의 질문을 무시한 채, 일어서서 소욱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신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소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앉거라.”대중이 보는 앞에서 장공주가 시비를 걸었는데 황후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 것이다.봉구안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소욱은 곧장 그녀의 팔을 잡고 강제로 끌어다 의자에 앉히려 했다.하지만 봉구안은 이번에 그의 뜻을 따라주지 않고 중심을 바로잡았다.소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그는 낮으니 소리로 경고하듯 그녀에게 물었다.“짐이 앉으라 하였는데 못 들었느냐?”장궁주는 짐짓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황후, 왜 그러십니까?”관료들 틈에
태의원.정신을 차린 서여국 사신의 표정은 참담했다.‘내가 졌어.’하지만 굴복하기보단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분명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침상 옆에 칼을 들고 지키고 서 있는 시위를 발견했다.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뒤늦게 알아차렸다.비무에서 졌으니 남제에 오동광 오백석은 물론이고 손목 하나를 내놓아야 했다.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그녀는 이미 서여국의 죄인이었다.사신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았다.서재.소욱이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는데 진길이 들어와서 아뢰었다.“폐하, 서여국 사신이 목을 베고 자결했습니다!”소욱의 반응은 냉담했다.그는 그 사신이 조금도 가엾게 여겨지지 않았다.“손목을 잘라 시신과 같이 서여국에 보내거라.”진길은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한 시진 후, 영화궁.태의가 진맥을 청하러 걸음했다.봉구안이 탁자 위에 손을 올리자 태의는 맥을 짚으면서 조용히 말했다.“마마, 소신은 분부대로 몰래 그 서여국 사신의 부검을 하였는데 복부에서 은침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꺼내 보니 독을 묻힌 침이더군요.”봉구안이 예상했던 대로, 교먹은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몰래 비침을 사용한 것이다.비침은 신속히 체내에 깊숙이 파고들었기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다.독에 당한 사신마저도 그것을 권풍의 위력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침은?”봉구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태의는 소매 안에서 손수건으로 겹겹이 싼 은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겁니다.”봉구안의 눈가에 한 줄기 서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사모의 서신에서도 장성 등 몇몇 용호군의 몸에서 독침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된 적 있었다.어쩌면 그때 쓴 것과 동일한 종류의 독일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태의에게 경고했다.“이 일은 남제와 맹 소장군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니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죄와 같아.”태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걱정 마십시오. 소신은
봉구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공손히 답했다.“예.”연상은 착잡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비천한 시종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이런 희생을 하는 상전이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웠다.소욱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참으로 막역한 주종 관계로군.”이때, 영문을 모르는 최 상궁이 들어와서 아뢰었다.“폐하, 마마, 저녁 식사를 올릴까요?”아부 섞인 미소를 짓던 최 상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연상을 보고 그녀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고 입가의 미소가 굳어졌다.반면 황제는 기분이 꽤 좋았는지 황후의 손을 잡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저녁을 내오거라.”봉구안은 그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연상을 물리며 담담히 말했다.“가서 짐을 싸고 내일 출궁하거라.”연상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답했다.“예, 마마.”나가려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욱이 말했다.“그래도 황후 신변의 대궁녀인데 내일 친히 호위대를 보내 고향으로 가는 길까지 호송하게 하겠다.”연상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그녀에게는 고향도, 위독한 아버지도 없었다.폭군이 호위대를 보낸다는 건 감시한다는 말과 같았다.연상은 조용히 황후를 바라봤다.봉구안은 겉으로는 침착한 표정으로 소욱에게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폐하께서 이리도 마음 써 주시니 연상이 복받은 거지요.”연상이 나간 후, 식사 시중은 최 상궁이 맡았다.봉구안은 기분이 별로였기에 수저를 거의 들지 않았다.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궁인에게 명령했다.“황후의 접시에 반찬을 더 챙겨드리거라.”봉구안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이따가 힘을 쓸 일이 많으니 많이 먹어야지.”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접시에 고기 한점을 친히 집어주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그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반면, 최 상궁은 황제와 황후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보고 입이 째지게 웃었다.황후는 낙태한 후로 더
소욱은 어둠을 더듬어 거칠게 그녀의 옷섶을 풀어헤쳤다.몸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는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그믐날 밤, 술에 취한 그녀는 열정적으로 그의 애무에 반응해 주었다.하지만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의 그녀는 서툴고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그런 거부감이 소욱의 욕구를 더욱 더 자극했다.봉구안의 의식은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귓가에는 남자의 거친 숨결만 들려왔다.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온몸이 경직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갑자기 사내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깍지를 꼈다.그는 마치 뜨거운 파도처럼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그녀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곧이어 육신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옷자락이 벗겨지자 그녀의 마음도 차갑게 가라앉았다.귓가에 사내의 거친 숨결이 계속해서 귀를 간지럽혔다.그는 가볍게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치 목 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그녀를 갈구했다.그가 물었다.“너도 나를 원하느냐…”봉구안은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그녀는 그의 격앙된 욕망을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이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연상의 귀가를 허락하실 겁니까?”그 말에 소욱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단지 그 아이를 위해 이렇게 순종적으로 굴었던 것이냐?”봉구안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묵인과 같았다.소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련 없이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그리고 그녀를 등지고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매섭게 식어 있었다.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봉구안은 달빛을 빌어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옷깃을 잡았다.“폐하…”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짐의 몸에 손대지 말거라!”봉구안은 곧바로 손을 내렸다.
장공주가 간곡히 말했다.“맹교먹은 중용을 받아야 할 인재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낱 감찰위로 있으니 낭비가 아닙니까.”소욱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단지 여군을 창설하고 군권을 준다면 그것 역시 재능 낭비지요.”장공주가 물었다.“그럼 폐하는 맹교먹에게 어떤 직위를 내리실 생각인가요?”감찰사.맹교먹에게 중임을 맡긴다는 황제의 성지가 도착했다.교먹은 환희에 들떴다.황제가 그녀에게 황성 수비사 장군의 직책을 내린 것이다.감찰사에서 일년을 채워야 전직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온 걸까?“맹 장군, 성지를 받으시지요!”교먹은 활짝 웃는 얼굴로 성지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그 날, 장공주는 친히 축하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난 폐하께 여군을 창설해 너에게 맡기라는 제안을 한 것뿐이었는데 폐하께서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실 줄은 몰랐어. 바로 황성 수비사 장군의 직책을 내리다니!”“폐하는 널 아주 신임하고 계셨던 거였어. 감찰위로 봉한 것은 네가 황성의 생활에 적응하도록 시간을 준 것이었어.”“앞으로 황후도 쉽게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교먹은 정중히 장공주에게 예를 행했다.“소신, 장공주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수비사 장군의 관직은 소장군보다 높고 전장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다소 북대영 쪽이 아쉽기는 했다.그녀는 이 소식을 서신을 써서 사부와 사모에게 전하리라 마음먹었다.‘이러면 그분들도 내가 언니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겠지.’장공주가 말했다.“입궁하여 폐하께 감사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지 말거라.”교먹이 황제를 알현하러 입궁하였을 때, 소욱은 한창 어마장에 있었다.어마장.서왕은 황제와 함께 말을 타고 어마장을 돌며 사냥을 즐겼다.예민한 그는 황제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정비가 시침한 일은 그 역시 전해듣기는 했지만 미인을 품은 황제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슉!산토끼를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소욱은 활을 내려놓고 음침한
봉 대인은 울분을 오백에게 풀었다.“너, 당장 꺼져! 네가 살던 북부로 돌아가! 맹건 그 자식한테 가서 전해! 자꾸 사람을 보내 내 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라고!”황후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고 소장군 자리에 미련을 두고 있으니 봉 대인은 갑갑할 노릇이었다.그는 이 모든 게 다 맹건이 잘못 가르쳐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굶어 죽이더라도 맹건에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봉 대인은 봉구안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봉 부인을 궁으로 보냈다.하지만 입궁한 봉 부인은 황후를 만날 수 없었다.봉구안은 일부러 가족들을 피하는 게 틀림없었다.그녀는 몰래 사모에게 서신을 썼고 며칠 후에 북부에서는 그녀의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맹 장군은 걱정 어린 어투로 물었다.“구안이가 서신에서 뭐라고 썼소?”“시신과 은침을 황성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를 바꿔치기 한 사실을 누가 물어보면 절대 모른다고 답하라고 하더군요.”“그럼 나는?”맹 장군이 자신을 가리키며 다급히 물었다.“부군을 위해 면죄부 금패를 확보했다고 했습니다.”맹 장군 부부는 봉구안이 하려는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맹 부인은 한숨을 쉬며 안타깝게 말했다.“매사에 조심하는 아이니 모든 준비를 끝낸 뒤에 움직이겠지요. 오히려 우리가 그 아이의 짐이 된 건 아닌가 싶습니다.”맹 장군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위로했다.“정이 깊은 아이니 당연히 그러겠지. 그 아이가 우리의 친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맹 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박했다.“제 마음에서 그 아이는 진작에 제 아이였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일가족이 뜻을 함께할 것입니다!”맹 장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부인 말이 맞소. 내가 괜한 말을 하였군.”그렇게 시간은 흘러 3월, 조 나라는 다른 5개국과 연합하여 남제의 변방에서 시비를 걸어왔다.조 나라 황제는 남제의 황궁으로 국서를 보냈다.남제가 타국에게 현영석 채굴권을 허락한다면 군사를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조정의 대신들은 분노를
황성.사방에서 육속으로 전쟁이 일자, 소욱은 후궁에 들를 시간이 없었다.정비는 서재를 자주 찾아갔지만 황제의 얼굴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3월 중순이 되어 봉구안은 오백에게서 소식을 받았다.그녀가 원한 물건이 이미 북부에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용호군 장령의 시신은 잠시 의장에 안치되었다.그날 저녁, 봉구안은 직접 출궁하여 의장을 찾았다.그녀의 얼굴은 시종일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교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그들 중 대부분은 양 나라 군대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교먹의 간계에 당해서 죽었다.진실을 아는 오백도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소장군, 억울하게 죽어간 형제들을 위해서 교먹도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봉구안은 음침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북부의 전장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오백이 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조 나라는 가짜 방어도를 쥐고 있으니 우리의 상대가 안 됩니다. 이미 연속 패배하고 물러가는 추세라고 합니다.”봉구안이 물었다.“장기양은?”“녀석, 아버지를 닮아서 참으로 용맹무쌍하더군요. 이번 조 나라와의 전장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습니다. 다만…”오백은 난감한 표정으로 봉구안의 눈치를 살폈다.봉구안이 차갑게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보거라.”“사실 큰일은 아니고… 장기양은 금방 북대양에 입성했을 때 그 아이를 괴롭히는 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맹 장군께서 잘 지켜주셔서 경미한 부상만 입었습니다.”봉구안은 어쩜 장기양을 괴롭힌 자들도 교먹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장기양은 황성을 떠나자마자 암살자들에게 포위되지 않았는가.교먹은 아마 장기양이 용호군 죽음의 진실을 파헤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소장군, 연상 쪽은 언제 움직이는 게 좋을까요?”오백이 물었다.연상이 궁을 떠나기 전에 오백은 이미 봉구안의 지시에 따라 경로와 위중한 아버지 역할까지 전부 준비해 놓았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연상은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마차를 타고 다른
“뭐? 황후가 진짜 황후가 아니라고?”장공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교먹은 정숙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음산하고 사나웠다.“저도 얼마전에 알아낸 사실입니다. 사실 봉가에서 쌍둥이 여아가 태어났었는데 언니는 줄곧 밖에서 길러졌다고 합니다.”“진짜로 황후가 되었어야 할 사람은 동생 봉장미였죠.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동생은 실종되고 봉가는 밖에서 자란 언니를 데려다가 혼례식을 올렸습니다.”장공주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는 황가의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황실에서 벌어지다니!“이건 군주를 기만하는 행위 아니더냐! 봉가는 어찌 감히!”장공주는 황실 사람이자, 황제의 누이로서 이런 기만을 용서할 수 없었다.교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봉가가 이런 짓을 행한데는 분명 뭔가 음모가 있었을 겁니다.”장공주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당장 폐하께 이 일을 고해야겠다!”그런 그녀를 교먹이 막았다.“안 됩니다, 장공주 전하.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폐하께서도 믿지 않으실 겁니다.”“일단은 증거를 찾고 봉가의 추악한 본모습을 까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장공주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교먹이 계속해서 말했다.“공주께서는 봉씨 저택에 사람을 보내십시오. 어쩌면 남은 서신들을 발견하거나 진실을 아는 자가 저택에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밀 리에 끌어다가 심문을 하면 진실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몰라요.”장공주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자!”만약 황후의 정체가 가짜라면 아무도 그녀를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장공주의 도움이 있으니 교먹은 많은 수고를 덜은 것 같아서 좋았다.마음속에 꿈틀거리던 어두운 욕구는 점점 눈덩이 굴러가듯이 커져서 마지막 남은 양심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처음에 그녀가 원했던 것은 봉구안을 영원히 궁 안에 묶어 놓는 것이었다.그런데 봉구안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언니, 이제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