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부옥이라고!?’ 가면을 쓴 남자는 놀랄 새도 없이 목이 잘려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장기양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완부옥…’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았다.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장기양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스치더니 얼음같이 차가운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부드럽지만 무시무시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너가 바로 소환이 새로 들인 제자더냐?” ‘스승님을 알다니?’ 장기양은 끝내 대답을 피했다. 여인은 웃음을 흘렸다. “속이 아주 단단한 녀석이군. 괜찮다. 뭐 시간은 많으니…” 그녀의 길고 날카로운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조이자, 장기양은 머릿속에 있는 핏줄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장기양은 이를 악물고, 단 한 마디의 애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인은 흥미를 잃었는지 손을 거두며 그를 아래로 밀쳤다. 그리고 그의 턱을 슬쩍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어린 것 치고는 대단하군.” “그래, 이만두지. 소환은 자기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지. 내가 나중에 혼나지 않으려면 오늘은 이쯤하고 널 놓아줘야겠지.” 장기양의 이마는 차가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매우 짙은 향이 뿜어져 나왔고, 그는 그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스승님을 찾는 것이옵니까?” 완부옥의 눈매는 짙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탄탄하고 매끄러워 절대 나이를 먹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 위에 손가락을 슬쩍 올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내가 바로 네 사모다. 네 스승이 내 이야기를 안 했단 말이더냐?” 장기양은 본능적으로 믿기 힘들었다. 완부옥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화를 내며 그를 힘껏 밀쳐버렸다. 얼굴에는 화염같은 분노가 떠올랐고, 그녀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소환, 두고 보아라. 너를 찾아내면 너의 피부를 벗기고 뼈를 발라내어 갈기갈기 찣어버릴
녕비는 영화궁에 당도하였으나, 황후가 취침 중이라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불이 났거늘, 황후께서는 어찌 태평하게 자고 계실 수 있단 말인가? 녕비는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계속 기다렸다. 한 시진이 지나고서야 궁인이 말을 전하러 왔다. “녕비마마, 황후마마께서 잠에서 깨어나셨사옵니다. 안으로 들라 하옵니다.” 녕비는 이번에 온 목적이 분명하여,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봉구안에게 예를 올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마마께서 냉궁에 계셨던 사이, 정비가 무척이나 득의양양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각지에서 들어온 진귀한 공물들을 모두 정비에게만 주셨사옵니다.”“송구하오나, 심지어 마마께서 황손을 품고 계셨을 때조차 이토록 많은 하사품을 받으신 적은 없지 않사옵니까?” “정비는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자이옵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물건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며, 자신이 총애받고 있음을 자랑하고 다니고 있사옵니다. 이런 꼴을, 마마께서 참을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신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사옵니다!” 봉구안은 주인의 자리에 단정히 앉아 차를 마시며, 녕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나직히 물었다. “너는 참을 수 없어 날 찾아온 것이더냐? 내가 나서서 정비를 혼내주길 바라는 것이냐?” 녕비는 말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부인하였다. “아니옵니다, 신첩은 그저 마마께 충심을 품고 있사옵고, 그저 마마가 걱정이 되어…” 봉구안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이어갔다. “정비가 총애받는 것은 그녀 나름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진정으로 나에게 충심이 있다면 조신히 행동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말거라.” 녕비는 다시 꾀어내려 하였다. “황후마마, 만일 정비가 황손을 해친 것이라면 어떠시겠사옵니까?” 봉구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녕비는 황후가 이 일을 무척 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 잡혀간
소욱은 차가운 표정으로 중엄 있게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에게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정비를 궁의 일을 돕도록 지시한 것은 할마마마의 뜻이지, 본래 내 뜻이 아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러니까… 폐하께서는 정비를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는 말씀이옵니까?”소욱은 숨을 조금 거칠게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봉장미라고 부를 게 아니라 봉돌이라 불렀어야 했구나! 그는 그녀가 궁중의 헛소문에 흔들려 자신이 정비를 편애한다 믿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가 오해하든 말든 자신이 굳이 해명할 이유가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말했다.“오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거라.”……그날 밤, 황제는 흥혜궁에 들렀다. 황제의 냉랭한 기운에 주변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정비조차 침묵을 지켰다. 저녁상을 마치고 황제가 떠나려 하자, 정비는 용기를 내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소욱의 얼굴에 곧바로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정비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뗐다.“전하, 들으니 오늘 밤 월식이 있사옵니다. 폐화와 함께 달을 감상하고 싶사옵니다.”소욱은 엄숙히 반문했다.“달이 사라지거늘, 무엇을 감상하겠다는 것이냐?”정비는 당황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감상을 운운했던가.“폐하…”그녀가 말을 고치려 하였으나, 소욱은 그녀의 손을 흔들어 뿌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짐은 아직 결재해야 할 주서가 산더미 같으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가하지 않다.”정비는 즉시 얼굴에 죄송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신첩이 경솔하였사옵니다.”황제가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함께 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총임을, 나아가 침소에 들기를 고대해서는 아니 되었다. 정비는 그가 흥혜궁 밖으로 나설 때까지 끝까지 공손히 배웅하였다.……소욱은 원래 바로 어전으로 가려 했으나, 잠시 마음을
천구가 달을 삼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밤이었다. 궁궐에 야금령이 내려 순찰 중인 호위병들이 더욱 엄중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때, 봉구안은 평안 전당포에서 신호탄을 보고 급히 달려갔다. 막 전당포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향이 코를 찌르는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봉구안은 재빨리 그자의 손목을 잡아, 일격을 막아냈다. 그런데 상대는 순식간에 그녀의 품 안으로 쓰러지더니, 부드럽고 풍성한 몸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오라버니, 그리웠어요.” 봉구안은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골칫덩이가 찾아온 것이다.그때, 최백이 등불을 밝혀 방안이 훤해졌다. 그는 얼굴이 가득한 죄책감을 띠고 봉구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부맹주를 배신한 자였다. 봉구안은 품에 안긴 여인을 냉정하게 밀쳐냈다.완부옥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면사 아래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미소를 머금었다.“3년 만에 보는데, 그동안 더욱 건장해지셨군요.” 봉구안은 완부옥을 상대하는 것이 매우 곤란했다. 이 여인은 독을 가진 자였다. 남방의 독왕에게 사사받은 탓에, 그녀의 몸엔 독이 스며있었다.“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이오?” 봉구안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또다시 뱀을 가지고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부옥은 뱀을 팔에 감고, 손으로 뱀의 급소를 쥔 채 봉구안을 미소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렇게 조급해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께서 제가 3살 연상이라고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보세요.” 그녀는 한 손으로 면사를 벗어, 매끈하고 윤기 나는 얼굴을 드러냈다. “3년 전과 다름없이 곱고 젊지 않습니까? 이렇게라면 그 3년의 나이차는 덮어질 터인데…”봉구안은 예상했다. 이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는지를.곁에 있던 최백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 묘하게 흥분했다. 봉구안이 싸늘한
장미의 편지는 아주 단순했다. 아이 같은 어조로 일상의 자잘한 일들을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구안은 그 편지를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장미의 병이 아직 다 낫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마 단순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방 자유각.봉장미는 은빛 외투를 걸치고, 마당의 그네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반나절이나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잦았다. 시녀 채월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고, 송려는 별채에서 온갖 약재를 다루고 있었다. 이곳엔 불청객이라 할 사람 하나 없이, 매일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이었다.채월이 장미에게 약을 먹이려 하면, 그녀는 얌전히 입을 벌려 약을 받아먹었다. 그러나 시선은 늘 멀리 고정된 채,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그 누구도 그녀를 깨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채월은 그처럼 순종적인 아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아씨가 그 불결한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아씨, 오늘도 구안 아씨께 서신을 쓰실 건가요?” 봉장미는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서신, 언니한테 서신을 써야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기쁜 얼굴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채월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아씨의 기억이 가장 행복했던 그때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리하면 아씨가 아프지 않을 테니까하고 말이다…황성.봉구안이 냉궁에서 나온 후, 봉 부인이 급히 입궁하였다. 그녀는 딸의 손을 잡고 안도에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간곡히 당부를 건넸다.“그동안 네 일로 우리 모두가 마음을 졸였단다.”“너는 비록 황후의 몸이지만, 황제의 한마디로 네 처지가 결정될 수 있으니 자식을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겠니?”“지난번에 아이를 잃어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니… 몸은 잘 회복했느냐?” 봉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자식 문제에
남강의 사신들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독특한 차림새로 궁에 들어섰다. 남자들은 얼굴에 문신으로 가득 꾸며져 있었고, 여자들은 얼굴을 가린 채 허리 부분이 살짝 드러나는 짧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남강의 사신들은 독충을 기르는 데 능하고, 풍속이 기괴하여 여러 나라에서 배척받고 있었다. 그들이 전각에 들어서자, 모두가 피할 듯 몸을 물렸고, 원래 웃음 가득했던 분위기는 얼어붙어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비웃음과 배척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특히나 그 여자, 허리를 드러내다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가!“황제 폐하를 뵙습니다!”봉구안은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바로 그때, 시종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던 그녀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남강의 사신들 가운데 여자라곤 오직 한 명이었다. 그 여자는 다름아닌 봉구안이 며칠 전에 만난 완부옥이었다!완부옥은 붉은 옷차림에, 얼굴을 가린 얇은 베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그 아름다운 얼굴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 눈매는 보는 이의 혼을 쏙 빼앗는 듯하여, 남자들이 그녀를 예법을 어겼다고 비난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봉구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완부옥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소욱은 왕상에 앉아, 엄숙하고 위엄 있게 앉아있었다.“자리에 앉거라.”봉구안은 완부옥과 눈이 마주칠까 피하며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소욱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다소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소욱은 그녀가 들고 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것은 짐의 것이다.”그녀가 술잔을 잘못 집은 것이었다. 봉구안은 곧바로 술잔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소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가 입을 댔던 그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한 번에 마셨다.사신들은 하나같이 남제의 국력이 강성하고, 황제의 통치가 훌륭하다는 찬사를 늘어놓았다.그러나 소욱은 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말들이 지루하기만 했다. 분명 자신의 생일이건만, 이런 이들
완부옥은 용상에 앉은 남제 황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묘하게도 황후에게서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봉구안은 아무런 내색 없이 고개를 돌려 소욱을 힐끗 보았다. 그는 마치 산에서 호랑이가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는 듯, 한가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남강의 사신은 시선을 황후에게 고정했다.“황후마마, 이 여인이 어떻사옵니까?”궁중의 후궁들은 모두 봉구안을 바라보며 내심 황후마마께서 이 남강 사신의 요청을 거절하시길 바라고 있었다. 이미 궁궐에 여인들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봉구안은 조용히 사신에게 반문했다.“내가 보기에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다만 나의 시녀로 삼는다면, 이 여인이 억울하지 않겠느냐?”남강 사신의 얼굴빛이 순간 달라졌다. 시녀라니? 그들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완부옥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남제 황제보다는 남제 황후가 더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아주 딱 맞는 기분이랄까.남강의 사신은 속으로 깊이 고민했다. 완부옥을 남제 황제에게 바치려는 것은 남제의 국운을 끊고 은밀하게 황제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하지만 그녀가 황후의 시녀가 된다면 일이 제대로 성사될 리 없지 않은가?사신은 급히 바로잡았다.“황후마마, 본래 이 여인을 폐하께 바치려 했사옵니다.”봉구안은 이제야 알아차린 듯이 대답했다.“아, 내가 오해했구나. 하긴, 듣자 하니 남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을 중히 여기며 외족과 혼인을 맺지 않는다고 들었다. 또한 남강의 여인은 타인과 남편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 말이 과연 사실인가?”이러한 남강의 규율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남강 사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렇사옵니다…”봉구안은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우리 폐하께서 마음에 드신다 하더라도 이 여인을 받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게다가, 양국이 조공 관계를 맺은 이후로 여러 나라에서 남제가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라 하여 약소국을 괴롭힌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자국의 고유한 유산이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 남제의 신하들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폐하, 절대 불가하옵니다! 아직 이 현영석 광산이 제대로 채굴되지도 않았고, 얼마만큼의 현영석을 얻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사옵니다. 설령 충분히 많다 해도, 이 나라에도 주고, 저 나라에도 준다면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옵니다!”“맞습니다, 폐하! 이것이야말로 헛된 수고만 하는 격이 아니옵니까?”이 말에 사신들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바로 맞섰다.“헛된 수고라니요? 저희는 오십만 냥을 내어 장인들의 품삯으로 쓸 의향이 있사옵니다!”“황제 폐하, 저희 북월도 은 오십만 냥을 내겠사옵니다!”그러자 남제의 백발 노신이 기세등등하게 나섰다.“지금 이게 돈 문제는 아니지 않소! 현영석 같은 귀중한 물건이 과연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지, 그대들도 다 잘 알고 있지 않소!”물론 그들은 알고 있었다.현영석은 매우 드문 희귀한 광물이었다. 지난 백 년 동안 북연국만이 독점하고 있었고, 그 현영석의 풍부한 자원 덕분에 강력한 ‘화룡’을 주조하여 전장에서 무패의 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타국에서는 현영석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비굴한 태도로 천금의 값까지 치렀으나, 손에 쥐는 양은 얼마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북연이 아예 타국에 현영석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제 남제에서 현영석 광산이 발견되었으니, 어느 나라라도 이 이권에 한몫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설령 자신들이 많은 이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제가 이를 독점해 두 번째 강국으로 떠오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소욱은 술잔을 홀짝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오늘 생일 연회가 참으로 따분하기 그지없었다.사신과 남제의 신하들이 계속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을 때, 서녀국의 사신이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서로 한 발씩 물러나 보는 건 어떻사옵니까?”“저희 서녀국은 현영석을 요구하지 않겠사옵니다. 다만 남제께서 새로 개발한 죽화총의 제작을 중단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죽화총을 제작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