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에 당한 상대가 모용선이라는 말을 듣고 소욱은 급급히 방비전으로 달려갔다.태의가 제 시간에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처방했기에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황후인 봉구안도 방비전에 도착했다.소욱은 잔뜩 분노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궁중에서 비빈이 독에 당하다니! 황후, 무슨 일이 있어도 배후를 찾아내거라!”“예, 폐하.”봉구안은 침상에 누운 여인을 힐끗 보고는 담담히 답했다.한참 구토를 했기에 모용선은 무척 허약한 상태였다.소욱은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자진궁으로 돌아갔다.자녕궁.“정 귀인이 독에 당했다고?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태후가 놀라며 물었다.모용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정 귀인을 잘 부탁한다는 태황태후의 서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궁에서 정 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태황태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계 상궁이 공손히 말했다.“태의가 약을 처방해서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잠시 머무르다 돌아가셨답니다. 아직 승은을 입지도 않았는데 이번 일이 오히려 정 귀인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었겠네요.”곧이어 계 상궁이 말을 이었다.“폐하께서는 황후마마께 철저한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그만큼 황후마마를 신뢰하시나 봅니다.”태후가 정색하며 말했다.“계 상궁,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마 범인이 황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계 상궁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소인이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나이까. 단지… 이런 일는 태후께서 조사하는 게 더 합당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태후가 정색해서 말했다.“계 상궁 요즘 말이 너무 많군. 황후는 후궁의 주인인데 내 어찌 황후의 권한을 가로채겠느냐. 황상이 황후를 신뢰한다면 황후가 알아서 잘하겠지.”현흥궁.동하는 현비의 약시중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마마, 모용선이 입궁하면 바로 총비가 될 줄 알았는데 승은을 입기도 전에 독에 당할 줄은 몰랐네요. 황궁은 정말 무서운 곳 같아요.”현비가 담담히 말했다.“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이제
서재.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증거가 나왔으면 사람을 보내 잡아들일 일이지 여긴 왜 온 거지? 설마 가빈이 평소에 황후랑 가깝게 지낸다고 감싸주려는 것이냐?”봉구안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단력을 잃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그녀가 말했다.“가빈은 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독약이 무슨 경로로 궁중에 들어왔느냐입니다. 궁밖에서 들어왔다면 신첩은 궁 안에 독극물을 나르는 첩자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그리하여 이 기회를 빌어 그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니 허락해 주시지요.”소욱은 그녀의 과감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물론 그녀가 능연이를 처단한 사건으로부터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안방 여인이 아닌 것 같았다.정조를 잃었지만 황후의 자리에서 내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뜻대로 하거라.”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예, 폐하.”곧이어 그녀는 미련없이 서재를 나갔다.소욱은 갑자기 그녀의 이런 태도가 황후가 아닌 자신의 부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점점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황후가 이성을 잃은 그날 그의 손을 잡고 이상한 말을 지껄였던 것을 제외하면 황후는 항상 그를 마주할 때 상전을 대하듯이 대했다. 공손하고 충직하지만 부군을 대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은 아니었다.물론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그녀가 총애만 바라지 않는다면 계속 황후의 자리에 두고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다.독극물 사건으로 가빈은 조사를 받았다.영화궁.황후를 제외하고도 녕비와 형비가 조사 현장에 도착했다.가빈은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황후마마, 신첩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신첩은 정 귀인과 원한도 없는데….”녕비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싸늘한 목소리로 가빈의 말을 잘랐다.“가빈, 후궁에서 널 제외하고 얼굴로 폐하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정 귀인 아니더냐?”“능연이가 유배당한 뒤로 너도 그 자리를 대체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정 귀인을 최
모양분이 벌레를 불러온다는 말은 봉구안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모용선은 바로 사실을 털어놓았다.“마마, 모두 신첩의 잘못입이다. 신첩이 한 게 맞습니다.”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전을 바라보았다.귀인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감싸려 할 줄이야.유서는 바로 절을 올리며 절규했다.“마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일은 귀인과 무관합니다. 모두 소인이 한 짓이옵니다! 소인이 귀인을 대신해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귀인은 전혀 모르고 당한 것입니다!”정 귀인은 고개를 돌려 유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아니다, 유서야….”“소인이 했습니다! 황후마마, 벌을 하실 거면 소인을 벌하십시오!”참으로 충직한 시종이었다.봉구안은 묘한 눈으로 모용선의 표정을 주시했다.모용선이 울며 사정했다.“마마, 유서가 잘못을 했지만 이 아니는 신첩과 함께 자란 자매와 같은 아이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첩이 아랫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벌은 신첩이 받겠습니다!”“아니, 아니됩니다! 귀인, 모든 건 소인의 잘못입니다….”정 귀인의 마음에 깊이 감동한 유서는 귀인을 대신해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정 귀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차게 식었다.시종이 이런 짓을 저지를 때 상전이 정녕 아무것도 몰랐을 수가 없었다.봉구안은 궁중법도 대로 유서에게 벌을 내렸다.“곤장 30대를 치고 신형사에 보낸다.”유서가 끌려간 뒤, 모용선은 울며 말했다.“마마, 아랫것들이 허락도 없이 한 일이고 신첩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하마터면 가빈을 해할 뻔하였습니다.”“그러니 신첩도 같이 벌하여 주십시오!”그리고 이때, 태후 신변의 계 상궁이 도착했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계 상궁은 봉구안을 단독으로 불러 말을 전했다.“마마는 모르시겠지만 정 귀인은 태황태후의 조카손녀랍니다. 태황태후께서는 일찍이 태후께 정 귀인을 잘 부탁한다고 서신
봉구안이 말했다.“한번에 둘을 제거하려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다.”“그게 뭐죠?”연상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마마, 설마 그 배후의 범인은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걸까요?”봉장미는 어릴 때부터 황후로 길러진 귀한 몸이었다.능연이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황후와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민간에는 황제가 그녀를 황후로 봉하려 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다.그러니 틀림없었다.“마마, 배후의 인물이 정 귀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만약 장미 아가씨와 능연이가 사라진다면 정 귀인의 외모와 가문의 힘으로 분명 황후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을 거니깐요!”봉구안은 대답 대신 담담히 말했다.“서왕한테 가서 전하거라. 내가 한번 보자고 한다고.”“예, 마마.”고개를 든 연상은 황후가 들고 있는 비수를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어마장.두 사람은 우연을 가장해서 만났다.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서왕이 말에서 내렸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봉구안도 말에서 내렸다.“정 귀인과 아는 사이입니까.”서왕은 겸손한 태도로 답했다.“예. 이미 고인이 된 영비의 사촌동생입니다.”봉구안은 말고삐를 잡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영비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으니 영비를 아끼는 마음으로 정 귀인을 지켜주려 했을 수도 있겠군요.”곧이어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바꾸었다.“만약 정 귀인이 더 많은 것을 바란다면 서왕은 뒤에서 도움을 주겠지요. 맞나요?”서왕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서글픔이 느껴지는 미소였다.“마마, 지금 저를 비웃으시는 겁니까? 저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돌아가신 영비는 황후가 되었을 겁니다.”“하물며 황후의 자리는 선제께서 이미 정해주신 것이니 제가 아니라 폐하마저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내가 죽었다면 가능해지겠지요.”봉구안의 말에 서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난
비수가 땅에 떨어지고,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서왕은 입을 뗄 듯했지만, 봉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소욱에게 몸을 낮추어 예를 올렸다. "황상, 신첩이 숲에서 길을 잃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길을 찾기 위해 나무에 표시를 하려 했을 뿐입니다.""그런데 문득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궁중에 잠입한 자객이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고 들어 자객인 줄 알고..." 서왕이 거들며 둘러댔다. "알고 보니, 중전마마께서 소신을 자객으로 오인하신 것이었군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서왕은 비수를 집어들어 봉구안에게 공손히 건넸다. 소욱의 눈빛이 매서워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후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왕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지내온 친구였다... "황상, 중전마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왕이 말을 이끌고 떠나자, 봉구안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따라갔다. 소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라. 여긴 너 같은 여인이 머물 곳이 아니다." "예." 봉구안은 공손히 대답하며 물러났다. 몇 걸음 나아가던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황상, 신첩이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그녀의 눈빛은 더욱 진지했다. 소욱은 이미 말 위에 올라, 채찍을 손에 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매엔 짜증이 엿보였다. "물어라." "선황께서, 모용가는 영원히 후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까?" 소욱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애써 알아낸 것은 혹여 그가 황후를 교체할까 염려한 것인가, 은근히 경고하는 것인가. ……궁 밖. 연상은 불안에 떨다가, 마침내 중전마마가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전마마, 드디어 나오셨군요! 무사하십니까? 서왕께서는…" "영화궁으로 돌아가자." 봉구안이 날카롭게 말했다. 영화궁 안. 연상이 초조하게 말했
황제의 사람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라 마지않을 일인가. 그러나 봉구안은 그 선택을 바로 지나쳤다. 소욱은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네가 나를 위해 힘쓰는 것을 마다하는 이유가, 다른 주인을 섬기기 때문인가?" 그녀가 내공을 써서 자신의 독을 풀어준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들이 궁중에 잠입했다가 목숨을 부지한 예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강호의 한가로운 나그네일 뿐, 따로 섬기는 이는 없습니다."소욱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지를 주겠다. 북대영에 가서 나라를 위해 힘쓰는 것이다." 봉구안은 천천히 대꾸했다. "듣기로는, 북대영에 여군이 있다 들었습니다."소욱은 턱을 약간 숙이며 답했다. "그렇다." 그녀가 여군에 관심이 있어 보이자,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 여군은 맹성주가 조직한 군대다. 그는 성질이 포악하고 군중 규율 또한 엄격하여, 네가 여자인 것을 이유로 결코 느슨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한가롭게 지내는 자가 어찌 그 규율을 견딜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성질이 포악하다’고 묘사한 그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중대한 일이니, 숙고할 시간을 주시옵소서." 숙고?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답을 애매하게 들은 소욱은 그 말이 진심인 줄 알았다. "빠른 답을 기다리마."소욱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서 한 알의 단약이 그녀에게 던져졌다. "이것은 대보단이니, 네가 내공을 빠르게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봉구안은 그것을 받아들며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감사하옵니다, 폐하.""진한길에게 매일 한 알씩 보내라 지시할 것이니, 네가 내공을 회복할 때까지 여기서
봉구안은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알아챘다. 예상치 못하게, 그 인물은 바로 서왕이었다. 설마 그녀가 남장하고 얼굴에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를 알아볼 줄이야…봉구안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를 골목 밖으로 몰아붙였다. 서왕 또한 밤 행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어딘가 따스함이 묻어나 마치 가득 찬 봄날의 연못 같았다.이 시각에는 이미 통금이 내려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발씩 물러서며 말했다. "의외군요. 마마께서 말솜씨가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경공까지 이리 능하실 줄이야.""형님께서 마마가 몰래 궁을 나선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봉구안은 목소리를 낮추며 음성을 바꿔 말했다. "누가 네 형수란 말이냐! 죽고 싶으냐!" 말을 마치고 발을 들어 그를 찼다. 서왕은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했으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눈에는 은밀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도망가는 건가? 하지만 날은 길어…’……봉구안은 서왕을 따돌리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서왕은 궁에서부터 그녀를 쫓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궁에서 야행복을 입고 있었던 걸까? 며칠 전 영화궁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자도 그였을까?급한 일이 우선이었다. 봉구안은 이 잡념들을 털어내고 암창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 달 만에 그녀는 다시금 황귀비를 만났다. 황귀비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작은 방에 갇혀 있었고, 발목은 쇠사슬에 묶인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포주는 봉구안을 손님으로 보고, 그녀를 데리고 가면서 코앞에서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한 시진에 이백 문. 이건 최하 품질이오. 도련님, 정말로 이걸로 괜찮으시겠소? 다른 것도 보지 않겠소?" 포주는 봉구안을 몇 번 훑어보며 탐탁지 않아 했다. 외모는 궁핍해 보이지 않는데 어찌 이리도 인색한가 싶었던 것이다.봉구안은 냉정히 말했다. "나가보
황귀비는 미친 듯이 봉구안을 바라보며 외쳤다."너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어! 천한 것, 날 궁으로 데려가! 나는 황상을 뵈어야 해!"봉구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서 내보내 주는 것뿐이야.""나는 황상을 뵈어야 한다니까! 황귀비는 단호하게 말했다."네가 잘 알잖아, 그건 불가능해. 너를 황상께 보낸다면 내가 살아남을 길이 없지 않겠니?"황귀비는 막 나가겠다는 듯이 씩 웃었다."그렇다면 다 죽어버려! 다 죽어버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봉구안은 이미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시선을 차갑게 내리깎았다."네가 그렇게 황상을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하지만 난 상관없어.""왜냐하면 난 황상에게 무정하니 그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거든.""내가 궁에 들어온 것은 복수를 위해서였어.""저 비밀스러운 자를 잡아내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지.""그것을 위해서라면 거짓으로 순종하는 척하다 황상이라도 죽이겠어! 그러니 죽는 건 너희들이고,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겠지."말을 마치고, 봉구안은 떠날 듯한 태도를 보였다.황귀비는 깜짝 놀라 외쳤다."안 돼! 네가 감히 그럴 수 있어?"그렇다면 너는 그 두 통의 편지가 필요 없단 말이야?"봉구안은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그 편지란 것은 그저 내 기대에 불과했을 뿐이야. 그 안에 무슨 단서라도 있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자에게 순응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가 나타날 것이니 굳이 네 손에 있는 두 통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구나.""네가 황상을 죽이다니! 천한 것, 미친 거야!" 황귀비는 진심으로 믿으며 외쳤다.봉구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황상만 죽이는 게 아니야. 온 세상에, 한때 황상의 총애를 받던 황귀비가 온전한 여인이 아니었으며, 그 모든 총애가 거짓이었음을 알리겠어."황귀비는 절망에 빠져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렀다."아아아! 천한 것! 내가 널 죽여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