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
맹건은 갑작스레 봉 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단서라도 잡으셨습니까?”봉 대인은 옷깃을 한 번 여미더니,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며칠 전부터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어.”“근데 그 일은 다른 동료들이 거의 다 끝내버렸더라고. 그래서 난 좀 색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지.”맹건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그쳤다.“요점만 말씀해 주십시오. 뭘 찾으신 겁니까?”봉 대인은 그의 다급한 말투에 살짝 통쾌함을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공과 사를 구분해야 될 때였다. 감정에 휘말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특히 맹건의 아들 맹성주는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그는 곧 말을 이었다.“외지인 명단을 전부 뒤져봤지. 대조를 거듭해서, 수상한 인물들을 걸러냈어. 강주의 실종 사건은 바로 그 사람들이 오간 이후부터 부쩍 많아졌거든. 그들 중에 분명 뭔가 수상한 놈이 있어.”맹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하지만 곧 의문을 품은 듯 봉 대인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중대한 일인데, 어째서 폐하께 보고하지 않으셨습니까?”봉 대인의 이마가 일그러졌다.“그걸 자네가 왜 캐묻는 거야?”사실 그는 오늘 황제 폐하께 생신 예물을 드리며 이 이야기를 꺼내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다.하지만 그 꼴을 당하고 나니, 더는 얼굴을 들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차라리 이 늙은 맹건에게 전부 넘겨주고, 알아서 하게 시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황제와 황후 앞에서 또 체면 깎을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내 품속에서 장부 한 권을 꺼내 맹건에게 건넸다.맹건은 몇 장을 넘겨보더니 감탄한 듯 봉 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형님 정말 잘하셨습니다.”수년 많게는 십수 년간의 외지인 유입 기록을 추려낸 이 장부는 보통 정성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기억력이 나쁘거나 끈기가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이 사람… 제법인데? 역시 명문가 출신은 다르군.’맹건은 그 길로 장부를 들고 황제와 황
방 안.봉 대인은 몸을 돌려 맹건에게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누웠다.더는 이 늙은 영감과 말 섞기 싫었다.지금 그는 고집불통 아이 같았다.무슨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맹건은 애써 인내심을 눌렀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형님, 이 나이에 싸우고 삐칠 일이 뭐가 있습니까.”“두 딸 일로 사이가 틀어진 거 저도 잘 압니다.”“인정할 건 합니다. 구안인 저랑 아내가 십수 년을 키웠습니다.”“친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여겨왔지요. 그때 형님께선 그 애를…”“우린 버린 게 아니야!”봉 대인이 벌떡 소리쳤다.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맹건이 되물었다.“그렇다 해도 구안이를 저희 맹가에 맡긴 건 사실 아닙니까.”“저희가 키웠고, 저흴 부모라 불렀습니다. 그 아인 그렇게 저희 딸이 된 거죠.”봉 대인은 말이 막혔다.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맹건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이젠 우리 곁에 남은 건, 구안이 하나뿐입니다.”“장미는 어쩔 수 없이 저희 성을 따랐지만, 마음은 여전히 친부인 형님께 있죠.”“하지만 구안은 달라요. 성주가 죽고, 그 애가 아니었으면… 제 아내도 아들을 따라갔을 겁니다.”“그러니 형님이 불편하다고 해서, 저희가 구안이와 정을 끊을 순 없습니다.”“우리 마음속에서, 구안이는 진짜 딸이나 마찬가지입니다.”“이 일은 형님이 잘못하셨습니다.”“지금 형님께서는 저희 아이를 뺏으려 하시는 겁니다.”봉 대인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곧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건 불만의 표시였고, 동시에 나가라는 뜻이었다.맹건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형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형님이 부럽습니다.”“딸 둘에 아들 하나.”“누굴 더 아끼고 덜 아끼고를 떠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이지요.”“성주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 아이가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겁니다.”남자라면 통하는 감정이었다.맹건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봉 대인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이
봉 대인은 오늘 봉구안의 탄신일을 맞아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비록 궁에 몸을 두진 못하지만, 아비 된 도리로 성의는 보이고 싶었다.며칠을 두고 장터를 돌며 고르고 또 골라, 마침내 고운 비취 하나를 준비했다.객잔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강림이 그를 맞이했다.“폐하와 황후마마께선 지금 배 타고 나가셨습니다. 금세 돌아오진 않을 듯하니, 대인께서 맡겨주신다면 선물을 대신 전달해드리겠습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 대인은 품 안의 비단 상자를 바짝 끌어안았다.눈빛에는 노골적인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강림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내 꼴이 무슨 도둑이라도 된단 말인가?’“나중에 직접 다시 오지.”봉 대인은 짧게 대꾸한 뒤 등을 돌렸다.그의 눈에 강림 같은 자들은 그저 싸돌아다니는 무림객일 뿐이었다.딸의 성정이 저리도 제멋대로가 된 이유 중 절반은 맹건 같은 무사놈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저런 하류들과 어울려서라고 여겼다.그는 강림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직접 찾는 편이 빠르리라 생각하였다.황제와 황후가 함께 나갔다면, 배를 띄운 곳은 정해져 있었다.강주에 그런 호수는 딱 하나뿐이었다.강주, 천자호.호숫가에 도착한 봉 대인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마주한 광경은, 생각보다 훨씬 쓰라렸다.화려한 화선이 고요히 물가에 정박해 있었고, 그 위에서 몇몇 인물들이 막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그중 한 명, 황제를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다.봉구안이 강주에 내려온 사실을 감추고자 했고, 출입 시엔 분장을 하거나 신분을 감췄다는 것도 알고 있던 터라, 그녀를 곧장 알아보지 못한 건 납득할 만했다.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맹건.그 자가, 여기에 있다니.쾅.봉 대인의 가슴이 요동쳤다.심장을 그대로 움켜쥐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황제가 부른 것이겠지.황제가 그 무사 하나를 위해 이토록 정성을 들인 건, 결국 봉구안 때문이지 않겠는가.황제는
“북방으로 가겠다고?”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곧장 봉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이 진심인지, 그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그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봤지만, 봉구안이 아이를 위해 북방으로 간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황제와 황후… 부부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일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맹 부인 또한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봉구안의 지아비는 그저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한 나라의 군주였고, 궁궐엔 이미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그가 과연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세상일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지금은 아무리 다정해도, 시간이 지나고 자리가 비면 변할 수도 있는 일.그녀는 봉구안이 훗날 후회하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남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연 같아서,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않은가.맹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께서 북방으로 태교를 가신다면, 저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기꺼이 도와드릴 일이긴 하나… 결국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한 번쯤 폐하와 다시 상의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녀는 느꼈다.황제의 반응만 봐도 이건 미리 상의된 결정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그러자 봉구안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오해십니다.”“실제로 북방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그녀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안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굳이 떨어져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도 외로웠고, 두려웠다.봉구안은 또렷하게 덧붙였다.“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서여국이든 남제든,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방심할 수 없는 때입니다.”“그래서 양쪽 모두를 잠시 속이는 수밖에요. 지금은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속인다는… 말씀입니까?”맹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뇌었다.하지만 소욱은 가장 먼저 그 뜻을 깨달았다.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선 안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소욱은 별다른 예를 갖추지 않았다.그저 조용한 집안 연회처럼, 봉구안과 소욱, 그리고 맹건 부부 네 사람은 하나의 상에 둘러앉았다.화선 한 척 통째로 소욱이 빌린 터였다.외부인의 발길은 끊긴 채, 오직 이 순간을 위한 자리였다.봉구안은 잔을 들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사부님, 사모님. 멀고도 고단한 길 오시느라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한 잔, 두 분께 올립니다.”어린 시절부터 그들 곁에서 자란 봉구안이었다.그러나 세상 속으로 나간 후론, 정작 곁에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다.그 죄스러움이 술잔 속에 고이 담겨 있었다.근래엔 약쟁이 사건이며 조정 일로 하루하루를 쫓기듯 보냈다.편지 한 장 못 띄운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웠다.그녀가 잔을 들고 입술에 가져가려는 찰나… 소욱이 조용히 그녀의 손목을 눌렀다.그리고 말없이 잔을 건네받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이 술은 내가 너대신 마시도록 하마.”맹건과 맹 부인은 동시에 눈이 커졌다.의아한 시선이 오가고, 곧 맹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마… 혹,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맹건 역시 얼굴이 굳어지며 덧붙였다.“설마, 약쟁이 사건을 쫓다 다친 것입니까?”그는 예전부터 봉구안이 이 사건에 발을 담그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무림에서든 조정에서든, 위험한 일에 몸을 담가선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당부했던 터였다.하지만 소욱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다친 것은 아니다. 염려 말거라.”그는 봉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유순하고 부드러웠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구안이가… 아이를 가졌다.”“아이를요?!”맹건 부부의 얼굴에 일순 기쁨이 번졌다.맹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가를 훔쳤다.“하늘이 도우셨구나… 정말로…!”맹 부인은 봉구안 옆으로 바짝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의 맥을 짚었다.잠시 후, 그녀의 눈에도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정말입니다.”“태기가 단단히 자리를
소탁은 죽산진에 머무르며, 붉은 연초초의 유통 경로를 샅샅이 추적하고 있었다.소욱은 그가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용한 조력자 몇을 붙여주었고, 마침내 중요한 실마리를 쥐게 되었다.처음부터 그는 붉은 연초초가 일반 약재처럼 거래되지는 않았을 거라 의심하고 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리 없었다.결국 그는 연초초를 사료 삼아 기른 닭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 닭들이 매달 일정 수량씩 인근 고을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런데 그 닭 장수들은 모두 행적은 불분명하고, 입도 무거워 매우 수상했다.“폐하, 폐태자께서 닭 장수들을 붙잡았다 하나, 그 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답니다.”소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입을 열든 말든, 진실은 이미 떠올랐다”오늘은 봉구안의 생일이었다.심문 따위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의 손을 가만히 잡아 이끌며 부드럽게 말했다.“가자. 오늘은 네 탄신일이지 않느냐.”“오늘만은 그 시름을 잊게 해주고 싶다.”봉구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객잔 안.강림과 동방세는 객잔 마당 한켠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이야… 사람 둘이 저리 정답게 나가는 걸 보니, 괜히 속이 허해지는구려.”“자넨 언제 혼인할 작정이오?”동방세는 입꼬리조차 들지 않고 술만 넘겼다.강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여인은 이미 떠났소.”“죽은 사람에 갇혀 사는 삶이란, 결국 스스로를 묶는 것이오.”잠시 침묵을 삼키던 동방세는 되레 반문했다.“나야 한 번은 혼례도 올린 몸이오.”“자네는 어찌 아직도 총각이오?”강림은 턱을 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나 같은 미남자와 어울릴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되겠소?”“그만한 인물이 아니면 난 혼자 살리이다.”동방세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허, 입만 살아선…”교외, 호숫가.소욱은 오래 전부터 봉구안의 탄신일을 위해 비밀리에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이날 햇살
남제 전역이 술렁였다.황성에서 내려온 어명이 번개처럼 각지로 퍼지며, 온 나라가 약쟁이 사건 수사에 돌입한 것이다.무림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전진파가 앞장서고, 각 문파가 연대하여 ‘약쟁이’ 소탕을 모의하자 강호 역시 깊은 물결이 이는 듯 긴장감이 팽팽해졌다.겉은 평온해 보였지만 물밑에선 이미 암류가 소용돌이쳤다.조정에서 내건 포고문은 거리마다, 골목마다 붙었다.그 앞엔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세상에, 약쟁이이라니, 도대체 뭡니까?”“듣자하니 사람을 납치해선 독약을 먹이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괴물로 만든다더이다.”“관아에서 외진 데는 피하고, 외출할 땐 여럿이 함께 다니라 하지 않소. 허나, 도둑놈 마음 먹으면 우린 당해낼 재간이 없지요…”“에이, 이젠 집 밖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오.”“근데 이거 봐요. 제보만 잘하면 상금도 나온다 하오!”조정은 단호했다.약쟁이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고, 백성들 또한 생존이 걸린 일이라면 앞장서 도울 각오였다.이건 단순히 나라의 체면이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바로 그들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으니 말이다.가족을 잃은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아로 찾아와 울부짖었다.“대감, 제 딸은… 대체 언제 돌아옵니까?”“대감, 저희 상인은 두 해 전 떠난 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혹 약쟁이방에 끌려간 건 아닌지… 부디 찾아주십시오.”“대감! 저희 아버지도 실종된 지 두 해가 넘었사옵니다… 제발요…”강주 관아.황제는 친히 어전에 앉아, 각지에서 모여든 보고를 듣고 있었다.그 얼굴엔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물론, 봉구안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뺏고도 남았지만… 지금 이 자리만큼은 남제의 군주로서 천하 만백성의 안위를 짊어진 사람이었다.그 역시 한 아내의 지아비이자, 곧 아이를 맞이할 아버지였으나,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야 했다.소욱의 시선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즉시 조사하라.”“실종자들
소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그녀의 난임을 치료하겠다고 무애산까지 다녀왔고, 스승이 내려준 약도 꾸준히 복용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단념했던 터였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의 구안이가… 아이를 품었다.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경사입니다. 태동은 아직 없으나 맥을 보건대, 한 달 남짓 된 태아의 맥이 맞습니다.”소욱의 눈빛이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좋다! 상을 주마! 여봐라, 어서 포상 준비를 해라!”진한길이 황제의 손짓에 따라 금화를 꺼내 의원 손에 쥐어주자, 의원은 그 자리에서 그만 다리가 풀릴 뻔했다.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황금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횡재였다.의원이 물러간 뒤,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덥석 안아 올렸다.“구안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봉구안은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조용히 하십시오. 아이가 놀랍니다.”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하지만 태는 3개월이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괜한 기대에 들떠 방심했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봉구안은 들뜬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담담히 반응했다.소욱은 그녀를 침상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배 위로 덮었다.작은 한기라도 스며들까, 손끝까지 세심했다.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중얼거렸다.“이 아이는 강할거야. 우리를 닮아서 말이다.”한 달 전, 함께한 밤이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의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소욱은 자책하듯 고개를 떨궜다.“내가 좀 더 일찍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무애산의 스승은 치료에 시간이 걸릴 거라 했고, 그는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상 기대를 내려놓았던 게 더 가까웠다.하지만 오늘, 모든 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이 감정은 황위에 올랐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벅참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