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사라진 거 같은데?’박진성은 한동안 정원을 바라봤다.정확히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엄습했다.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움켜쥐었지만, 그 감각조차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서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박진성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민여진은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상자로 달려갔다.망고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그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작은 몸이 꿈틀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느끼고는 바짝 달라붙어 손가락을 핥았다. 그러고는 앙앙거리며 작게 울었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넌 정말 귀엽구나.”“민여진 씨, 식사는 하셨어요?”교대 근무를 나온 서원이 그녀가 박스 속 망고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먼저 이 아이부터 먹여야죠.”그녀는 부드럽게 망고의 털을 쓰다듬으며 강아지가 배불리 우유를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식사를 마친 망고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게 했다. 마침 문 앞에 앉아 있던 순간, 정원 쪽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익숙한 차였다.민여진의 손이 순간 굳어졌다.차가 멈추자,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심히 내려, 다치지 마.”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감싸는 듯한 어조였다.이어서 들려온 것은 문채연의 가벼운 웃음이었다.“진성 씨,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몇 걸음 걷는다고 넘어지겠어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그래도 걱정되잖아.”대화 속 친밀한 기류가 흘러넘쳤다.민여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망고를 품에 안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문채연의 목소리가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여진 씨...”그녀는 살짝 주저하더니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에요.”민여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 순간, 품 안의 망고가 갑자기 낮게 으르렁거리며 낯선 적대감을 드러냈다.“왈왈!”
“네.”문채연은 우아한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여진 씨... 제 건강 문제로 당분간 별장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편을 끼치게 될 것 같네요.”그녀의 말투는 사려 깊은 척했지만, 그 속에 깔린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거짓말도 참 능숙하네.’그녀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뻔히 보였지만, 박진성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민여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하지만 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같이 식사해요. 여진 씨, 제가 직접 요리했어요.”“괜찮아요.”정중하게 거절하려던 순간, 박진성의 시선이 곧장 날아왔다.‘거절하지 마.’그것은 분명한 경고였다.민여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식사 준비가 끝난 후, 문채연은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여진 씨 입맛을 잘 몰라서 그냥 무난한 맛으로 만들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면 말해 주세요.”민여진이 조용히 숟가락을 들려던 찰나, 박진성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뭔데 입맛을 따져? 남김없이 다 먹어.”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진성 씨, 여진 씨가 혹시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그럴 리가. 이건 네가 정성껏 만든 음식이잖아.”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음식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윽—!”강렬한 매운맛과 쓴맛이 혀를 찌르는 듯했다.너무도 이질적이고, 너무도 불쾌한 맛.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뱉어내려 했지만, 끝내 삼켜야 한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이건...”문채연은 눈가를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여진 씨, 제 요리가 그렇게 형편없나요?”민여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직접 드셔보세요.”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이 거칠게 젓가락을 내던졌다.“민여진, 네 연기도 정도껏 해! 내가 먹어봤는데, 맛있기만 하더구먼.”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날
망고가 언제 상자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망고는 민여진의 손끝에 코를 비비며 낑낑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목이 부어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던 민여진은 그저 망고를 꼭 안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이 지독한 나날은 언제쯤 끝이 날까?'문득, 개 팔자가 부러워졌다. 망고는 이렇게 낑낑거리기만 해도 누군가 안아주고 다독여주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몸을 간신히 가다듬고 욕실을 나서려는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응할 틈도 없이 차가운 벽에 등이 밀착됐다. 차디찬 벽면이 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연기도 이제 그만하지?”박진성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짙은 분노가 깔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경고했던 거, 그냥 흘려들었어? 채연이가 해준 음식 좀 먹었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건데?”‘오두방정? 아, 이제는 아픈 것도 없어. 마음이 아파져 올 틈도 없을 만큼 너무 익숙한 일이니까.’민여진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누구를 불쾌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쉰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입술까지 부어올라 있었다.박진성이 순간적으로 동요했지만,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아까 욕실에서 꽤 열심이더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야? 목까지 그렇게 망쳐놓고 또 무슨 핑계를 대려고? 채연이를 걸고넘어질 생각이야?”‘걸고넘어진다고?'민여진의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 감각조차도 둔해져 버렸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그럴 리 없어.”그녀는 적당한 핑계를 찾아 중얼거렸다.“알레르기야.”“알레르기?”“가지 알레르기.”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박진성은 한 번도 자신을 신경 써준 적이 없었으니까.예상대로 박진성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
물 두어 모금을 삼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느긋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문채연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일부러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괜찮아요?”민여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충분히 마신 뒤, 잔을 내려놓고 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러자 문채연이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여진 씨, 나 좀 무시하지 말아요. 진성 씨가 없다고 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기분 나쁘게 하면 진성 씨한테 다 말할 거예요.”그 뻔뻔한 협박에 민여진은 손을 꽉 움켜쥐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문채연이 단 한마디만 해도, 박진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테니까.깊이 숨을 들이마신 민여진은 계단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문채연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그런 거 없는데요?”문채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그냥 어제 그 음식, 입맛에 맞았는지 궁금해서요. 맛있었어요?”어제 입에 넣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던 그 음식이 떠오르자, 민여진의 위가 울렁였다.그녀는 억지로 속을 다스리며 힘겹게 입을 뗐다.“수고했어요. 채연 씨, 요리하느라 바빴을 텐데, 나까지 신경 써 줘서 감사해요.”“수고랄 것까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문채연의 미소는 한층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근데 말이에요... 여진 씨, 고자질까지 할 정도로 간이 컸더라고요? 설마 진성 씨 곁에 있다고 해서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건 아니죠?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여진 씨 같은 건 금방이라도 쓸어낼 수 있다는 거, 몰랐어요?”그 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에 박진성이 자기 손을 짓밟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날 밤, 버닝 나이트에서 당했던 굴욕까지...숨이 턱 막혔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집에서 조용히 있을게.”민여진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응.”이제 끝난 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문채연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료하겠죠? 우리가 뮤지컬을 보러 가는 동안, 서원 씨한테 여진 씨를 데리고 나가서 겨울옷이라도 사게 하면 어떨까요? 겨울도 다가오는데,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요.”민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문채연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박진성이 혐오스러운 눈길을 던졌다.“들었어? 너한테 그렇게까지 당하고도 채연이는 널 걱정해 준다. 네가 병이라도 나면 안 된다면서.”민여진은 비웃고 싶어졌다.누가 누구를 걱정해? 가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박진성, 네 눈에는 문채연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안 보이냐고.“같은 여자로서 말이에요.”문채연이 애써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여자가 여자를 힘들게 해선 안 되잖아요. 저는 여진 씨가 착한 사람이라고 믿어요.”박진성이 조소를 흘렸다.“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세상에는 원래부터 악랄한 인간들이 있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설득해도 변하지 않아.”그의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문채연은 다정한 듯 그의 팔을 감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진 씨도 겨울옷을 좀 사러 나갔다 오는 게 좋겠어요. 서원 씨가 함께 가면 괜찮겠죠?”“그래.”박진성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차가운 시선을 민여진에게 던졌다.“채연이가 그렇게까지 배려해 줬으니까 나도 허락해. 하지만 옷만 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만약 서원 입에서 엉뚱한 데 갔다 왔다는 소리라도 나오면...”끝까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순종하는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우스웠다.내가 지금 이 꼴인데,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돌아가요. 망고 혼자 집에 있으면 불안해할 거예요.”민여진의 눈에 희미한 애정이 스쳤다.서원은 근처 반려동물 가게에 들러 사료를 샀고 민여진은 만져본 순간부터 손에서 놓지 못하던 작은 애견 옷을 구매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여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층으로 달려갔다.“망고야, 망고!”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 반기던 작은 녀석이 이번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민여진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그녀는 문을 활짝 열고 주위를 둘러보며 불렀다.“망고야? 망고?”이상한 기색을 느낀 서원이 따라 올라왔다.“여진 씨, 무슨 일이에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흔들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망고가 대답을 안 해요. 서원 씨, 혹시 침대 밑이나 어디 숨어 있는지 좀 봐줄 수 있어요?”서원도 방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망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여진 씨, 집을 나서기 전에 방문은 닫혀 있었나요?”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분명했다. 박진성이 그녀를 강제로 내려보낼 때, 문을 열어볼 틈조차 없었다. 이후에는 서원과 함께 외출했으니, 이층에는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혹시... 여진 씨가 나올 때 망고가 몰래 따라 나왔던 건 아닐까요?”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문이 잠겨 있었으니까 설령 나왔다고 해도 마당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요.”“나가지 않았을 거야...”그 말을 듣자, 민여진은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마당에서 찾아봐요.”서원이 먼저 앞장서 내려갔고 민여진도 급히 뒤따랐다.서원이 앞마당을 살피는 동안, 그녀는 담장을 따라 뒷마당으로 향했다.그런데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한 순간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순간적으로 발이 멈춰 섰다. 아직 짙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 냄새는 분명했다.‘희미하지만 역
“왜 나갔지? 왜 굳이 밖으로 나갔어... 내가 계속 별장에 있었으면... 그랬다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죽어야 해.”그녀의 속삭임에 서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망고를 데려온 건 난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여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건 여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하지만 민여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땅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서원이 막아섰다.“여진 씨, 가지 마요. 제발... 더러워요. 만지지 마세요.”‘더럽다고?’민여진은 서원이 있는 쪽으로 노려봤다.‘더러운 건 나야. 망고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쯤 장난감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더럽지 않아요... 망고는 절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녀는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털이 손끝에 닿았다.민여진은 흐느끼며 망고를 품에 안았다.“망고...”서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망고, 내가 나가기 전에 너한테 인사도 못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줄 장난감도 샀는데... 예쁜 옷도 샀어. 언젠가 내 눈이 다시 보이면 네가 입은 모습 직접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박진성은 급히 뮤지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전화 한 통을 받고 도착한 별장의 정원에서 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마주했다.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마당,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여진과 그녀의 품에 안긴, 사지가 처참히 절단된 작은 개의 사체가 보였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그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망고가 아니라... 피로 물든 채,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얼굴이었다.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살아있는 유령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숨이 턱 막혔
박진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박 대표님... 여진 씨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진성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죽은 개를 품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셈인가?’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 손 놔.”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내가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장례 치르게 할 거야. 너까지 이러고 있으면 저 개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해.”그러나 민여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더욱더 망고를 품에 끌어안았다.놓을 수 없었다. 한때,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처럼, 이번에도... 망고만큼은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해. 이렇게 추운 날, 차가운 땅바닥에 내버려둘 수 없어... 망고가 너무 외로워할 거야...’“민여진!”박진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몸에 밴 피 냄새가 더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손 놓으라고 했어! 안 들려?”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안 놔? 그럼 방현수를 부를 수밖에 없겠군.”그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또 협박이야...’“어서 놓으라고!”박진성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명령했다.서원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놔주세요. 제가 망고를 잘 보내줄게요.”“망고...”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민여진은 기이하게 웃고 싶어졌다.‘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건... 오직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인데. 결국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네.’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풀고, 망고를 품에서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민여진은 반드시 살아야 했다.만약 그녀가 죽어버리면 박진성은 후회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마음에 무너져내릴 것이다.하지만 만약 그때 호텔에서 보낸 차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박진성 역시 민여진과 함께 빗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그런 건 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걸까?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잠근 후 병실로 나왔다. 병실에는 민여진이 침대 위에 누워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면서까지 민영미를 찾고 있었다.병실을 나서려던 박진성은 민여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박지성, 살아야 돼... 넌 살아야 해.”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파도가 일었다.뜨거운 불길 속에서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박진성을 등에 업으며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박진성,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그 순간, 몸이 겹쳐지는 듯한 기분에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구해준 여자가 민여진이라고 생각했던 걸까?그럴 리 없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사람은 문채연이었다....3일이 꼬박 지나고 나서야 민여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그 크고 따뜻한 손의 주인은 박진성 말고 없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식은땀에 젖은 등을 침대에서 떼어내며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모두가 살아있었다. 이제야 살아있다는 게 실감 났다.하지만 목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을 뻗어 물컵을 찾으려던 그때, 박진성이 선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되찾을 민여진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컵을 건네주었다.민여진은 간단한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고개를 숙여 물을 마셨다.그녀가 물을 다 마시자 박진성은 물컵을 한쪽으로 치워주었다. 민여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뭐 좀 물어볼게. 그때, 나 왜 구해준 거야? 우리 둘 다 죽
박진성은 점점 험난해지는 길에 차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민여진은 이미 정신을 잃었고 푸르스름하던 얼굴은 따뜻해진 환경 속에서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민여진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계속 민영미만 찾아댔다.아무리 극한의 상황으로 몰려도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민영미뿐이었다.박진성은 이제 더 이상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민영미는 민여진에게 거의 반쪽 같은 존재였다.박진성은 이를 꼭 악문 채 민여진을 달랬다.“여진아, 버텨. 네가 버텨야, 네가 깨어나야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어. 이제 벌써 1년 넘게 못 만났잖아. 그러니까 더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주머니를 위해서라도 견뎌야 해!”하지만 하늘은 박진성의 편이 아니었던 건지, 잘 가던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버렸다.차는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 버렸고 우박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박진성은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둘러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려 빗속을 달렸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려보려 해도 날씨 탓인지 박진성의 두 다리는 얼음에 달라붙어 버린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한기에 그의 두 다리에서는 고통이 밀려왔고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굳어갔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무감각해진 발바닥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이대로 가다가는 박진성도 힘없이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날씨에 두 사람 모두 쓰러지면 둘 다 죽고 말 것이다.“박... 박진성...”드디어 박진성의 재킷 속에서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돌아가... 차 안에 있으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거야...”민여진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아주 평화롭게 느껴졌다.“우리 엄마 잘 부탁해.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니까...”“닥쳐!”박진성이 절규했다. 목구멍이 아릿해 왔고 얇은 입술은 불안함에 덜덜 떨렸다.“넌 살아! 넌 꼭 살아야 해!”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얼음장 같은 칼날이 목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그따위 연회에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다.호텔 지배인은 더 이상 박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경호원들에게 그를 뒤 따라가라고 지시했다.박진성은 거센 빗속으로 돌진했다. 거센 빗줄기에 몸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지금 내리는 비는 비가 아니라 칼날처럼 느껴졌다. 한기를 잔뜩 머금은 빗물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진성의 피부를 무자비하게 긁고 있었다.박진성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민여진! 민여진! 얼른 나와!”그는 호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30분 안에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산 아래로 내려가며 민여진을 찾던 도중, 산어귀 버스정류장에서 박진성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우산을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는 어떻게든 비를 피해 보려 한 것 같았으나 강한 바람 때문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머리카락은 옷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추위에 몸을 떨며 구석에 웅크린 민여진은 마치 버려진 길고양이 같았다.무언가가 박진성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민여진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땅에 떨어진 우산은 바람에 날려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민여진은 그제야 낮게 중얼거렸다.“버스가...”“뭐?”“막차가, 안 왔어.”민여진도 박진성의 곁에 남을 것을 결심한 상태였다. 민영미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이 악물고 기꺼이 살아갈 생각이었다.“너, 떠날 생각이었어?”어금니를 꽉 깨문 박지성이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나온 거야? 여기는 남연이니까, 여기서 숨어버리면 널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민여진은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박진성의 힘이 더욱 세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다리에서는 자꾸 힘이 풀렸다.그렇게 민여진은 박진성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민여진
여자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장미처럼 싱그러운 몸매를 자랑하며 요염한 눈빛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박진성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그의 몸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풍겼다.“너 누구야? 누가 널 들여보낸 거야!”박진성의 고함에 깜짝 놀란 여자가 다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대표님... 우선 화내지 마시고, 고 대표... 고 대표님이... 이번에 한몫 크게 챙기고 싶다고 저를 보내신 거예요...”“당장 꺼져!”박진성은 이를 꽉 깨문 채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방 안에 퍼진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자 알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다. 그는 침대 위에 있던 모든 물건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그 여자가 손댄 모든 것들이 꼴 보기 싫었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해줬을 거야.”얼굴이 창백해진 여자는 거의 벗겨진 옷도 신경 쓰지 못하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잠깐만!”박진성이 나가려던 여자를 불러세웠다.여자는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설마 박진성이 요염한 그녀의 몸매에 홀려 다시 흥미를 보이는 건 아닐까?다시 뒤돌아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날카로운 눈빛의 박진성이었다.“민여진 어디 있어?”“뭐... 뭐라고요?”박진성이 앞으로 다가가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묻잖아! 방에 있던 여자 어디 갔냐고!”“아, 그 얼굴 빻은...”여자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려던 그때, 박진성의 압도적인 기세에 휘둘린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버린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몰라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말했다.“저는 그냥 고 대표가 저를 여기에 보냈다는 사실만 말했어요. 그리고 샤워하고 나와보니까 이미 없더라고요. 그 후부터는... 아무것도 몰라요...”“꺼져!”분노에 차 핏줄까지 선 박진성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민여진이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휴대폰도 없었고 밖에서는 비가
너무 아팠다. 온몸이 너무 아파서 바들바들 떨렸다.민여진의 눈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오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억지로 삼켜냈다. 감옥에서 진작 깨달았듯 세상에서 제일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 눈물이었다.“괜찮으세요?”그 순간,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추더니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왜 혼자 계세요? 무슨 일 있어요?”민여진이 고개를 돌리자 잠시 침묵하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앞이 안 보이시나요?”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텅 빈 듯 공허한 민여진의 눈이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 여자가 지금 이런 곳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여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곧 겨울인데, 날씨도 안 좋아요. 안 추워요? 어떻게 이런 산까지 올라온 거예요?”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했다.그녀는 민여진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며 말했다.“아무래도 산에서 내려가시려는 것 같은데, 우선 이거 들고 가세요. 오른쪽으로 꺾으면 버스 정류장이 있거든요. 30분 뒤면 버스 막차가 올 거예요. 여기는 산 중턱이라 최대한 빨리 걸어가야 할 거예요. 저는 연회에 참석해야 해서 같이 가 드리지는 못할 것 같네요. 조심히 가세요.”여자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다.민여진은 여자에게서 받은 우산을 손에 꼭 쥐었다. 손잡이에는 아직 여자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민여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누구였던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방금 여자가 얘기해준 오른쪽에 정류장이 있다는 말이었다.민여진은 우산을 잡고 손을 뻗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드디어 그녀의 손끝에 차가운 철제 틀이 만져졌다. 그녀는 그 틀을 따라가며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여자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30분 뒤에 막차가 올 것이다.민여진은 멍하니
여자는 말을 마치고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직원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며 일부러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했다.“아가씨, 박 대표 옆에 있는 거 보면 바보 천치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알겠죠? 나가서 소파에 앉아 있어요. 일 다 끝나면 부르겠죠.”뭘 안다는 걸까?박진성이 여자를 골라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걸까>민여진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억지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국, 저 여자는 박진성이 선택한 여자였으니 민여진에게는 아무런 불평을 할 자격이 없었다.결국, 민여진은 박진성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민여진이 벽을 더듬으며 문 쪽으로 나가자 직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앞이 안 보여요?”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해서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직원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눈도 안 보이는 사람이 박진성의 곁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말 저 여자가 단순한 비서나 식모인 걸까?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고승범의 명령을 떠올리면 조금의 늑장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민여진은 홀로 벽을 더듬으며 그 벽을 따라 걸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낯선 환경에서 오직 본능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다가 호텔 경비와 부딪치게 되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경비는 연신 사과를 건네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흉측한 민여진의 얼굴에 표정을 굳혔다.호텔은 관광 사업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곳으로서 아직 정신 운영을 시작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 호텔에 묵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이런 곳에서 마주한 민여진의 얼굴은 경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입고 있는 옷도 명품 브랜드가 아니었던 탓에 경비는 민여진이 누군가의 파트너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어디서 오신 거예요?”경비는 마음속으로 이미 민여진에 대해 마음대로 단정 짓고 말했다.“왜 10층 복도에
박진성은 순순히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왜 그래?”민여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 입장 바꿔 한 번 생각해 봐. 만약 진성 씨가 나라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롱당할 자신 있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말을 내뱉은 민여진도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미친 걸까? 무슨 배짱으로 박진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에게 반항하는 걸까? 박진성이 이때까지 원했던 건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었는데.그래야만 민영미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박진성이 그녀보다 더 먼저 말을 꺼냈다.“알겠어.”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미안해, 내가 네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사람들이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하겠지. 하지만 너는 마음껏 비꼬고 조롱하려 할 거야. 네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호텔에서 편히 쉬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민여진은 흠칫 놀라며 박진성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생각보다 더 큰 민여진의 반응에 박진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막무가내로 너 하나 이해 못 해줄 줄 알았어?”방 밖에 있던 직원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매니저님께서 연회가 시작됐다고 하셔서요. 직원분들 다 모이셨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박진성은 이미 준비해둔 정장을 차려입고 민여진에게 말했다.“방에서 쉬고 있어. 배고프면 침대 맡에 있던 전화 눌러. 1번 누르면 카운터로 연결될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다녀올게.”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한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