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문채연은 우아한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여진 씨... 제 건강 문제로 당분간 별장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편을 끼치게 될 것 같네요.”그녀의 말투는 사려 깊은 척했지만, 그 속에 깔린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거짓말도 참 능숙하네.’그녀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뻔히 보였지만, 박진성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민여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하지만 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같이 식사해요. 여진 씨, 제가 직접 요리했어요.”“괜찮아요.”정중하게 거절하려던 순간, 박진성의 시선이 곧장 날아왔다.‘거절하지 마.’그것은 분명한 경고였다.민여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식사 준비가 끝난 후, 문채연은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여진 씨 입맛을 잘 몰라서 그냥 무난한 맛으로 만들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면 말해 주세요.”민여진이 조용히 숟가락을 들려던 찰나, 박진성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뭔데 입맛을 따져? 남김없이 다 먹어.”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진성 씨, 여진 씨가 혹시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그럴 리가. 이건 네가 정성껏 만든 음식이잖아.”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음식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윽—!”강렬한 매운맛과 쓴맛이 혀를 찌르는 듯했다.너무도 이질적이고, 너무도 불쾌한 맛.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뱉어내려 했지만, 끝내 삼켜야 한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이건...”문채연은 눈가를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여진 씨, 제 요리가 그렇게 형편없나요?”민여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직접 드셔보세요.”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이 거칠게 젓가락을 내던졌다.“민여진, 네 연기도 정도껏 해! 내가 먹어봤는데, 맛있기만 하더구먼.”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날
망고가 언제 상자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망고는 민여진의 손끝에 코를 비비며 낑낑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목이 부어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던 민여진은 그저 망고를 꼭 안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이 지독한 나날은 언제쯤 끝이 날까?'문득, 개 팔자가 부러워졌다. 망고는 이렇게 낑낑거리기만 해도 누군가 안아주고 다독여주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몸을 간신히 가다듬고 욕실을 나서려는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응할 틈도 없이 차가운 벽에 등이 밀착됐다. 차디찬 벽면이 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연기도 이제 그만하지?”박진성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짙은 분노가 깔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경고했던 거, 그냥 흘려들었어? 채연이가 해준 음식 좀 먹었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건데?”‘오두방정? 아, 이제는 아픈 것도 없어. 마음이 아파져 올 틈도 없을 만큼 너무 익숙한 일이니까.’민여진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누구를 불쾌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쉰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입술까지 부어올라 있었다.박진성이 순간적으로 동요했지만,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아까 욕실에서 꽤 열심이더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야? 목까지 그렇게 망쳐놓고 또 무슨 핑계를 대려고? 채연이를 걸고넘어질 생각이야?”‘걸고넘어진다고?'민여진의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 감각조차도 둔해져 버렸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그럴 리 없어.”그녀는 적당한 핑계를 찾아 중얼거렸다.“알레르기야.”“알레르기?”“가지 알레르기.”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박진성은 한 번도 자신을 신경 써준 적이 없었으니까.예상대로 박진성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
물 두어 모금을 삼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느긋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문채연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일부러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괜찮아요?”민여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충분히 마신 뒤, 잔을 내려놓고 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러자 문채연이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여진 씨, 나 좀 무시하지 말아요. 진성 씨가 없다고 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기분 나쁘게 하면 진성 씨한테 다 말할 거예요.”그 뻔뻔한 협박에 민여진은 손을 꽉 움켜쥐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문채연이 단 한마디만 해도, 박진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테니까.깊이 숨을 들이마신 민여진은 계단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문채연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그런 거 없는데요?”문채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그냥 어제 그 음식, 입맛에 맞았는지 궁금해서요. 맛있었어요?”어제 입에 넣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던 그 음식이 떠오르자, 민여진의 위가 울렁였다.그녀는 억지로 속을 다스리며 힘겹게 입을 뗐다.“수고했어요. 채연 씨, 요리하느라 바빴을 텐데, 나까지 신경 써 줘서 감사해요.”“수고랄 것까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문채연의 미소는 한층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근데 말이에요... 여진 씨, 고자질까지 할 정도로 간이 컸더라고요? 설마 진성 씨 곁에 있다고 해서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건 아니죠?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여진 씨 같은 건 금방이라도 쓸어낼 수 있다는 거, 몰랐어요?”그 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에 박진성이 자기 손을 짓밟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날 밤, 버닝 나이트에서 당했던 굴욕까지...숨이 턱 막혔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집에서 조용히 있을게.”민여진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응.”이제 끝난 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문채연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료하겠죠? 우리가 뮤지컬을 보러 가는 동안, 서원 씨한테 여진 씨를 데리고 나가서 겨울옷이라도 사게 하면 어떨까요? 겨울도 다가오는데,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요.”민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문채연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박진성이 혐오스러운 눈길을 던졌다.“들었어? 너한테 그렇게까지 당하고도 채연이는 널 걱정해 준다. 네가 병이라도 나면 안 된다면서.”민여진은 비웃고 싶어졌다.누가 누구를 걱정해? 가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박진성, 네 눈에는 문채연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안 보이냐고.“같은 여자로서 말이에요.”문채연이 애써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여자가 여자를 힘들게 해선 안 되잖아요. 저는 여진 씨가 착한 사람이라고 믿어요.”박진성이 조소를 흘렸다.“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세상에는 원래부터 악랄한 인간들이 있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설득해도 변하지 않아.”그의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문채연은 다정한 듯 그의 팔을 감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진 씨도 겨울옷을 좀 사러 나갔다 오는 게 좋겠어요. 서원 씨가 함께 가면 괜찮겠죠?”“그래.”박진성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차가운 시선을 민여진에게 던졌다.“채연이가 그렇게까지 배려해 줬으니까 나도 허락해. 하지만 옷만 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만약 서원 입에서 엉뚱한 데 갔다 왔다는 소리라도 나오면...”끝까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순종하는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우스웠다.내가 지금 이 꼴인데,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돌아가요. 망고 혼자 집에 있으면 불안해할 거예요.”민여진의 눈에 희미한 애정이 스쳤다.서원은 근처 반려동물 가게에 들러 사료를 샀고 민여진은 만져본 순간부터 손에서 놓지 못하던 작은 애견 옷을 구매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여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층으로 달려갔다.“망고야, 망고!”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 반기던 작은 녀석이 이번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민여진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그녀는 문을 활짝 열고 주위를 둘러보며 불렀다.“망고야? 망고?”이상한 기색을 느낀 서원이 따라 올라왔다.“여진 씨, 무슨 일이에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흔들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망고가 대답을 안 해요. 서원 씨, 혹시 침대 밑이나 어디 숨어 있는지 좀 봐줄 수 있어요?”서원도 방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망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여진 씨, 집을 나서기 전에 방문은 닫혀 있었나요?”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분명했다. 박진성이 그녀를 강제로 내려보낼 때, 문을 열어볼 틈조차 없었다. 이후에는 서원과 함께 외출했으니, 이층에는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혹시... 여진 씨가 나올 때 망고가 몰래 따라 나왔던 건 아닐까요?”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문이 잠겨 있었으니까 설령 나왔다고 해도 마당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요.”“나가지 않았을 거야...”그 말을 듣자, 민여진은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마당에서 찾아봐요.”서원이 먼저 앞장서 내려갔고 민여진도 급히 뒤따랐다.서원이 앞마당을 살피는 동안, 그녀는 담장을 따라 뒷마당으로 향했다.그런데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한 순간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순간적으로 발이 멈춰 섰다. 아직 짙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 냄새는 분명했다.‘희미하지만 역
“왜 나갔지? 왜 굳이 밖으로 나갔어... 내가 계속 별장에 있었으면... 그랬다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죽어야 해.”그녀의 속삭임에 서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망고를 데려온 건 난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여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건 여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하지만 민여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땅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서원이 막아섰다.“여진 씨, 가지 마요. 제발... 더러워요. 만지지 마세요.”‘더럽다고?’민여진은 서원이 있는 쪽으로 노려봤다.‘더러운 건 나야. 망고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쯤 장난감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더럽지 않아요... 망고는 절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녀는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털이 손끝에 닿았다.민여진은 흐느끼며 망고를 품에 안았다.“망고...”서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망고, 내가 나가기 전에 너한테 인사도 못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줄 장난감도 샀는데... 예쁜 옷도 샀어. 언젠가 내 눈이 다시 보이면 네가 입은 모습 직접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박진성은 급히 뮤지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전화 한 통을 받고 도착한 별장의 정원에서 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마주했다.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마당,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여진과 그녀의 품에 안긴, 사지가 처참히 절단된 작은 개의 사체가 보였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그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망고가 아니라... 피로 물든 채,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얼굴이었다.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살아있는 유령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숨이 턱 막혔
박진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박 대표님... 여진 씨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진성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죽은 개를 품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셈인가?’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 손 놔.”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내가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장례 치르게 할 거야. 너까지 이러고 있으면 저 개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해.”그러나 민여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더욱더 망고를 품에 끌어안았다.놓을 수 없었다. 한때,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처럼, 이번에도... 망고만큼은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해. 이렇게 추운 날, 차가운 땅바닥에 내버려둘 수 없어... 망고가 너무 외로워할 거야...’“민여진!”박진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몸에 밴 피 냄새가 더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손 놓으라고 했어! 안 들려?”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안 놔? 그럼 방현수를 부를 수밖에 없겠군.”그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또 협박이야...’“어서 놓으라고!”박진성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명령했다.서원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놔주세요. 제가 망고를 잘 보내줄게요.”“망고...”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민여진은 기이하게 웃고 싶어졌다.‘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건... 오직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인데. 결국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네.’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풀고, 망고를 품에서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민여진은 감각이 마비된 듯 옷을 걸쳐 입고 무기력하게 박진성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런데 막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대문 쪽에서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이어 문채연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진성 씨, 너무 일찍 자리를 뜨셨네요. 아쉬웠어요.”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뮤지컬의 후반부가 진짜 하이라이트였는데... 그걸 못 보시다니.”그리고 한 박자 쉬며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덧붙였다.“주인공이 기르던 악질적인 개가 결국 갈기갈기 찢겨 죽었거든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의도적으로 강조한 단어들이 칼날처럼 날아왔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 순간 민여진의 눈이 핏발처럼 붉어졌다.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망고... 망고가 저년이 말하는 악질적인 개란 말인가?’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네가 사람이야?”그녀는 광기 어린 기세로 문채연에게 달려들었다. 손이 뻗었고 차갑고 여린 문채연의 목덜미를 단숨에 움켜쥐었다.“그건... 망고는 그냥 강아지였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문채연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중심을 잃고 거실 테이블에 세게 부딪혔다.그러나 민여진은 멈추지 않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손끝에 들어간 힘,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목을 조르고 있었다.“민여진!”“여진 씨!”서원이 당황한 듯 다가왔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숨이 막힐 듯이 뜨겁고 서늘한 감정이, 그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그 순간 강하게 몸이 잡아당겨졌다.박진성이 단숨에 그녀를 끌어내,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쳤다.“채연아, 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다급했다.그의 손은 문채연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살폈다.한편, 민여진은 계단 난간에 부딪히며 머리를 세게 찧었다.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울렸다. 하지만 그 통증조차,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문채연은 눈물 맺힌 얼굴로 목을 감싸 쥐었다.얇은 피부 위에는 선명
박진성은 순순히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왜 그래?”민여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 입장 바꿔 한 번 생각해 봐. 만약 진성 씨가 나라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롱당할 자신 있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말을 내뱉은 민여진도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미친 걸까? 무슨 배짱으로 박진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에게 반항하는 걸까? 박진성이 이때까지 원했던 건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었는데.그래야만 민영미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박진성이 그녀보다 더 먼저 말을 꺼냈다.“알겠어.”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미안해, 내가 네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사람들이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하겠지. 하지만 너는 마음껏 비꼬고 조롱하려 할 거야. 네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호텔에서 편히 쉬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민여진은 흠칫 놀라며 박진성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생각보다 더 큰 민여진의 반응에 박진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막무가내로 너 하나 이해 못 해줄 줄 알았어?”방 밖에 있던 직원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매니저님께서 연회가 시작됐다고 하셔서요. 직원분들 다 모이셨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박진성은 이미 준비해둔 정장을 차려입고 민여진에게 말했다.“방에서 쉬고 있어. 배고프면 침대 맡에 있던 전화 눌러. 1번 누르면 카운터로 연결될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다녀올게.”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한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하는 조용한 성격은 모두 박진성의 압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강태화가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손에 수액 팩을 들고 있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강태화는 사고회로가 멈춰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대표님, 2층에서 수액 맞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내려와 계신 거예요?”수액 줄을 타고 역류한 박진성의 피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왔다.“피가 왜 이렇게 많이 역류한 거예요?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죠. 벌써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이 정도면 혈관 막힌 거예요. 치료하실 생각이 있긴 하신 거예요?”강태화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민여진은 너무 순종적이었다.“반대쪽 팔에 놔 드릴 테니까 이번엔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더 부으면 이젠 찌를 혈관도 없어요.”강태화가 다시 링거 바늘을 꽂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민여진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많이 역류한 건가요?”“당연하죠, 링거 줄 절반 넘게 피가 차 있었는데!”강태화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위에서 분명 얌전히 계셨잖아요. 굳이 왜 내려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여진 씨를 부르셨어야죠. 자꾸 움직이셔서 카테터도 빠졌잖아요. 안 아프셨어요?”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민여진이 아래층에 있었어.”“나?”민여진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가 하도 안 올라와서 내려온 거야. 1층에는 난방도 안 되는데. 또 너 호자 떨고 있을까 봐 부르러 내려온 거야.”“나는 그냥...”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진성이 왜 민여진을 신경 쓰는 걸까?정말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무슨 이유였든지 네가 아래층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박진성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 약속이라면 박진성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그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줬던 문채연에게 그는 무려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한참이 지나자 박진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살이도 하다 나왔고,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도 잃었어. 이제 민여진에게는 삶을 살아갈 다른 이유가 필요해.”박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우리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겠어?”“하지만…”문채연은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예전에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만약 박진성이 진짜 민여진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문채연은 알고 있었다. 설마 정말 민여진을 사랑하게 된 걸까?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에 문채연은 이를 꽉 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이거 아니어도 속죄할 방법은 많잖아요.”“하지만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시간이 없어.”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을 끊고 민여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았다.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채연아, 너는 조금의 죄책감도 안 들어?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어. 그것도 모자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걸 두 개나 잃었는데. 너도 알잖아. 그날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절망감과 슬픔으로 엉망이 된 민여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박진성은 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나는 그냥 민여진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갔으면 할 뿐이야.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너랑 결혼할 거야.”그는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랑도 없었고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문채연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지만 그녀가 할
“당연히 아니지.”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문채연이 싫어졌다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문채연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박진성이 단호히 부정하다 문채연의 표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더니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거예요? 아무리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건강이 더 중요한 법이에요. 알겠죠?”“응.”박진성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굳게 닫힌 방 문으로 향했다.그의 시선을 따라 문 쪽을 힐끗 본 문채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가 필요해요?”박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민여진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 떠다 주기로 했는데.”문채연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여진 씨... 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나한테 컵을 전해줬어요. 아마 우리 단둘이 편하게 있으라고 굳이 안 올라오는 것 같아요.”단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줬다는 건가?박진성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여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예전부터 민여진은 굳이 다른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비록 박진성은 매번 그녀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내가 너랑 만나는 이유는 오직 문채연 때문이야. 너 같은 여자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이런 말을 들어도 민여진은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가 억지로 참아내며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알겠어.”여태껏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박진성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까지 자신이 민여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차가웠던 걸까?“밖에 춥잖아. 거실엔 난방도 안 되는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내가 가서 불러올게.”박진성은 이불을 걷어내고 수액 손에 쥔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의 행동에 문채연은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