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갔지? 왜 굳이 밖으로 나갔어... 내가 계속 별장에 있었으면... 그랬다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죽어야 해.”그녀의 속삭임에 서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망고를 데려온 건 난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여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건 여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하지만 민여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땅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서원이 막아섰다.“여진 씨, 가지 마요. 제발... 더러워요. 만지지 마세요.”‘더럽다고?’민여진은 서원이 있는 쪽으로 노려봤다.‘더러운 건 나야. 망고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쯤 장난감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더럽지 않아요... 망고는 절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녀는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털이 손끝에 닿았다.민여진은 흐느끼며 망고를 품에 안았다.“망고...”서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망고, 내가 나가기 전에 너한테 인사도 못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줄 장난감도 샀는데... 예쁜 옷도 샀어. 언젠가 내 눈이 다시 보이면 네가 입은 모습 직접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박진성은 급히 뮤지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전화 한 통을 받고 도착한 별장의 정원에서 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마주했다.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마당,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여진과 그녀의 품에 안긴, 사지가 처참히 절단된 작은 개의 사체가 보였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그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망고가 아니라... 피로 물든 채,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얼굴이었다.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살아있는 유령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숨이 턱 막혔
박진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박 대표님... 여진 씨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진성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죽은 개를 품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셈인가?’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 손 놔.”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내가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장례 치르게 할 거야. 너까지 이러고 있으면 저 개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해.”그러나 민여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더욱더 망고를 품에 끌어안았다.놓을 수 없었다. 한때,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처럼, 이번에도... 망고만큼은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해. 이렇게 추운 날, 차가운 땅바닥에 내버려둘 수 없어... 망고가 너무 외로워할 거야...’“민여진!”박진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몸에 밴 피 냄새가 더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손 놓으라고 했어! 안 들려?”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안 놔? 그럼 방현수를 부를 수밖에 없겠군.”그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또 협박이야...’“어서 놓으라고!”박진성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명령했다.서원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놔주세요. 제가 망고를 잘 보내줄게요.”“망고...”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민여진은 기이하게 웃고 싶어졌다.‘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건... 오직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인데. 결국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네.’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풀고, 망고를 품에서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민여진은 감각이 마비된 듯 옷을 걸쳐 입고 무기력하게 박진성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런데 막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대문 쪽에서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이어 문채연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진성 씨, 너무 일찍 자리를 뜨셨네요. 아쉬웠어요.”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뮤지컬의 후반부가 진짜 하이라이트였는데... 그걸 못 보시다니.”그리고 한 박자 쉬며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덧붙였다.“주인공이 기르던 악질적인 개가 결국 갈기갈기 찢겨 죽었거든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의도적으로 강조한 단어들이 칼날처럼 날아왔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 순간 민여진의 눈이 핏발처럼 붉어졌다.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망고... 망고가 저년이 말하는 악질적인 개란 말인가?’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네가 사람이야?”그녀는 광기 어린 기세로 문채연에게 달려들었다. 손이 뻗었고 차갑고 여린 문채연의 목덜미를 단숨에 움켜쥐었다.“그건... 망고는 그냥 강아지였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문채연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중심을 잃고 거실 테이블에 세게 부딪혔다.그러나 민여진은 멈추지 않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손끝에 들어간 힘,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목을 조르고 있었다.“민여진!”“여진 씨!”서원이 당황한 듯 다가왔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숨이 막힐 듯이 뜨겁고 서늘한 감정이, 그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그 순간 강하게 몸이 잡아당겨졌다.박진성이 단숨에 그녀를 끌어내,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쳤다.“채연아, 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다급했다.그의 손은 문채연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살폈다.한편, 민여진은 계단 난간에 부딪히며 머리를 세게 찧었다.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울렸다. 하지만 그 통증조차,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문채연은 눈물 맺힌 얼굴로 목을 감싸 쥐었다.얇은 피부 위에는 선명
민여진의 온몸이 떨렸다. 스스로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버텼다.“여진 씨...”서원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 상황을 전부 목격한 그로서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괜찮으세요?”붉어진 눈으로 민여진이 서원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원뿐이었다.“서원 씨, 말해 줘요. 정말인가요? 망고가... 떠난 게... 그 노숙자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에요?”서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문채연을 의심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일을 저지른 자는 지나치게 깔끔했다.“CCTV에 찍힌 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숙자였어요. 동물 학대 전력이 있던 사람이라, 법적으로도 처벌하기 어려워요. 결국... 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서...”‘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혀왔다.뒤뜰에서 처참히 숨이 끊어진 망고를 보고도 아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알겠어요.”민여진의 목소리가 떨렸다.“여진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단순한 사고였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어떻게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고가 방에서 나갔던 건, 결국 나 때문이잖아.결국 내가 망고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그래요... 고마워요.”그날 밤, 민여진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을 때마다 망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비명 같은 울음소리, 잘려 나간 작은 사지, 손을 뻗었을 때 느껴진 차가운 장기들...그녀가 드레스를 고르며 거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을 때, 망고는 바로 저 뒤뜰에서 처참히 죽어가고 있었다.겨우 잠들면 또 다른 악몽이 찾아왔다. 죽은 아이가, 망고가, 그녀를 원망하며 울부짖었다.“너 때문에...”“널 만난 걸 후회해.”“왜 너만 살아 있어?”“미안해...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나도 곧 따라갈게...”악몽 속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눈가를 누군가 조용히 닦아주었다.아침이 되어 침대에서
마침내 박진성은 문채연을 밀어냈다.“이건 너한테 불공평해. 늦었으니 일찍 쉬어.”말을 마친 그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화려한 화장을 한 문채연만이 남아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분명 그녀가 별장에 오기 전날 밤, 박진성은 민여진과 밤을 보냈으면서 이제 와서 불공평하다는 핑계로 자신을 거절하다니. 정말로 그녀에게 불공평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저 원하지 않는 것일까...문채연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서둘러야 한다. 민여진이 임신이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업무를 마친 박진성은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가까운 펫샵으로 갑시다.”“펫샵이요?”운전기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대표님은 알레르기 있으시잖아요?”“상관 말고 그냥 가요.”운전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서둘러 가장 가까운 펫샵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박진성은 문을 열고 길 건너편에 있는 펫샵으로 들어갔다.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그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케이지 안의 강아지들을 꼼꼼히 살폈다.펫샵 주인이 다가와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서 오세요,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있으신가요? 꺼내 드릴까요? 자세히 보여드리겠습니다.”“아닙니다.”박진성은 더 멀찍이 떨어져 그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검은 털에 정수리 부분이 갈색인, 생후 한 달 정도 된 강아지를 찾아주세요.”정수리가 갈색이라는 특징도 찾기 힘든데 거기에 나이 제한까지 있어 펫샵 주인은 난색을 보였다.“손님, 그 조건은...”“너무 까다로워요?”박진성은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찾기만 하면 가격은 문제없습니다.”펫샵 주인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아닙니다!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결국 펫샵 주인은 여러 개의 켄넬에 연락해서 세 시간 넘게 공을 들인 끝에 조건에
그 순간, 민여진은 망고가 뒷마당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다. “치워! 당장 나가!”박진성은 민여진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나가라는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민여진, 지금 무슨 짓이야? 어제 그 개 때문에 죽네 사네 하더니 이제 새 강아지를 사 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이 꼴이 뭐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래?”‘고마워하라고?’민여진의 심장은 떨렸고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몰려왔다.“당신 보기에 죽은 망고를 다른 개로 대체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건가요?”“아니면 뭘 어쩌라는 거야.”박진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짐승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쏟을 생각은 없었다.“설마 그 개를 다시 살려내기라도 바라는 거야?”민여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박진성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비슷한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나가요.”그녀의 입술은 떨렸다.“나가요! 당장 나가라고!”박진성도 화가 나서 갑자기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민여진, 주는 얼굴에 침 뱉지 마. 내가 그 개와 비슷한 개를 찾으려고 얼마나 큰돈을 썼는지 알아?”그는 알레르기 반응까지 겪으면서 품종견 열 마리도 넘게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그 개를 샀다. 그런데 민여진에게서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혐오스러운 태도만 돌아왔다.“민여진, 내가 너한테 빚졌어?”민여진은 아픔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필요 없어요. 당신의 그 잘난 동정 따위. 난 개도 싫고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함도 싫어요.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개를 키우는 게 아니었어요!”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나가 주세요!”박진성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쏟는 민여진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는 케이지를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문채연은 이미 소란을 듣고 문 앞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박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
아무리 잘해줘 봐야 민여진은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멀리 꺼져주길 바랐다.만약 방현수가 그런 선물을 했다면 곧바로 몸이라도 바쳤겠지...그런 가능성만 생각해도 속이 쓰린 박진성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괜한 생각 마. 그런 여자는 내 호의를 받을 자격도 없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런 것뿐이야. 어쨌든 그 개는 우리 집 마당에서 죽었으니까.”“그래요?”문채연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어두워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진성 씨가 여진 씨를 특별히 챙겨준 게 아니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아마 제가 마음이 좁아서 진성 씨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가 봐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가요?”“그럴 리가.”박진성은 괴로워하는 문채연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에 미안함이 피어올랐다.“안심해. 내 마음속에서 민여진은 네 발끝에도 못 미쳐.”그 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더욱 냉담하게 굴었다.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쳤고 민여진 역시 평정심을 유지하며 필요한 시간 외에는 주로 방에 머물렀다.하지만 식사 시간에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민여진은 말없이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애썼다.박진성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입맛이 떨어진 듯 수저를 내려놓았다.“채연아, 천천히 먹어. 난 서재에 화상 회의가 있어서.”“네.”문채연은 대답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진성 씨, 몸 챙기세요. 내일 생일 파티에 같이 가야 하잖아요.”“그래.”민여진의 손이 멈칫했다.‘생일 파티?’박진성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문채연은 약간의 의기양양함을 담아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내일은 10월 25일이야. 너한테 낯선 날은 아니겠지?”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낯설지 않았다. 문채연의 생일이었다.박진성과 함께한 2년 동안, 매년 이맘때쯤이면 자신이 문채연인 척하며 자기 것이 아닌 생일 축하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했고 정작 자신의 진짜 생일은 잊으려 애써야 했다.“
“걔를 왜 초대해?”박진성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너무 착하게 굴지 마. 걔가 불쌍한 건 자업자득이야. 그리고 네 생일 파티는 중요한 날인데 걔를 보면 분위기만 망치고 다들 불편해할 거야.”“하지만...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요?”문채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여진 씨는 분위기를 망칠 사람은 아니에요.”“하지만 걔가 네 생일 파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박진성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말해봐. 네가 그렇게 성대한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민여진은 멈칫했다. 모욕을 주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잔인한 법이었기 때문이다.지금 문채연은 분명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민여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안 어울려요.”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알면 됐어. 아직도 안 꺼지고 뭐 해?”민여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마음의 고통을 참으며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문을 닫기 전, 문채연의 가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여진 씨 많이 힘들어 보여요...”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진짜 생일은 문채연의 생일 하루 전,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그래서 문채연의 생일이 화려할수록 그녀의 생일은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그녀의 진짜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민여진은 눈을 뜨자 가슴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는 아직 박진성에게 붙잡혀 있어 그녀의 병세는 어떤지,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서재 쪽으로 향했다.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박진성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나가!”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심호흡을 한
박진성은 순순히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왜 그래?”민여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 입장 바꿔 한 번 생각해 봐. 만약 진성 씨가 나라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롱당할 자신 있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말을 내뱉은 민여진도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미친 걸까? 무슨 배짱으로 박진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에게 반항하는 걸까? 박진성이 이때까지 원했던 건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었는데.그래야만 민영미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박진성이 그녀보다 더 먼저 말을 꺼냈다.“알겠어.”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미안해, 내가 네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사람들이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하겠지. 하지만 너는 마음껏 비꼬고 조롱하려 할 거야. 네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호텔에서 편히 쉬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민여진은 흠칫 놀라며 박진성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생각보다 더 큰 민여진의 반응에 박진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막무가내로 너 하나 이해 못 해줄 줄 알았어?”방 밖에 있던 직원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매니저님께서 연회가 시작됐다고 하셔서요. 직원분들 다 모이셨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박진성은 이미 준비해둔 정장을 차려입고 민여진에게 말했다.“방에서 쉬고 있어. 배고프면 침대 맡에 있던 전화 눌러. 1번 누르면 카운터로 연결될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다녀올게.”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한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하는 조용한 성격은 모두 박진성의 압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강태화가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손에 수액 팩을 들고 있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강태화는 사고회로가 멈춰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대표님, 2층에서 수액 맞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내려와 계신 거예요?”수액 줄을 타고 역류한 박진성의 피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왔다.“피가 왜 이렇게 많이 역류한 거예요?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죠. 벌써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이 정도면 혈관 막힌 거예요. 치료하실 생각이 있긴 하신 거예요?”강태화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민여진은 너무 순종적이었다.“반대쪽 팔에 놔 드릴 테니까 이번엔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더 부으면 이젠 찌를 혈관도 없어요.”강태화가 다시 링거 바늘을 꽂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민여진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많이 역류한 건가요?”“당연하죠, 링거 줄 절반 넘게 피가 차 있었는데!”강태화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위에서 분명 얌전히 계셨잖아요. 굳이 왜 내려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여진 씨를 부르셨어야죠. 자꾸 움직이셔서 카테터도 빠졌잖아요. 안 아프셨어요?”박진성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민여진이 아래층에 있었어.”“나?”민여진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가 하도 안 올라와서 내려온 거야. 1층에는 난방도 안 되는데. 또 너 호자 떨고 있을까 봐 부르러 내려온 거야.”“나는 그냥...”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박진성이 왜 민여진을 신경 쓰는 걸까?정말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무슨 이유였든지 네가 아래층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박진성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 약속이라면 박진성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그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줬던 문채연에게 그는 무려 목숨을 빚진 사람이었다.“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한참이 지나자 박진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살이도 하다 나왔고,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도 잃었어. 이제 민여진에게는 삶을 살아갈 다른 이유가 필요해.”박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우리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겠어?”“하지만…”문채연은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예전에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속죄를 해야 한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만약 박진성이 진짜 민여진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문채연은 알고 있었다. 설마 정말 민여진을 사랑하게 된 걸까?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에 문채연은 이를 꽉 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이거 아니어도 속죄할 방법은 많잖아요.”“하지만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시간이 없어.”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을 끊고 민여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았다.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채연아, 너는 조금의 죄책감도 안 들어? 민여진은 우리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어. 그것도 모자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걸 두 개나 잃었는데. 너도 알잖아. 그날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절망감과 슬픔으로 엉망이 된 민여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박진성은 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나는 그냥 민여진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갔으면 할 뿐이야.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너랑 결혼할 거야.”그는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랑도 없었고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문채연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지만 그녀가 할
“당연히 아니지.”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문채연이 싫어졌다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문채연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박진성이 단호히 부정하다 문채연의 표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더니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거예요? 아무리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건강이 더 중요한 법이에요. 알겠죠?”“응.”박진성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굳게 닫힌 방 문으로 향했다.그의 시선을 따라 문 쪽을 힐끗 본 문채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뭐가 필요해요?”박진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민여진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 떠다 주기로 했는데.”문채연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여진 씨... 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나한테 컵을 전해줬어요. 아마 우리 단둘이 편하게 있으라고 굳이 안 올라오는 것 같아요.”단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줬다는 건가?박진성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여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예전부터 민여진은 굳이 다른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비록 박진성은 매번 그녀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내가 너랑 만나는 이유는 오직 문채연 때문이야. 너 같은 여자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이런 말을 들어도 민여진은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가 억지로 참아내며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알겠어.”여태껏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박진성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까지 자신이 민여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차가웠던 걸까?“밖에 춥잖아. 거실엔 난방도 안 되는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내가 가서 불러올게.”박진성은 이불을 걷어내고 수액 손에 쥔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의 행동에 문채연은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