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갔지? 왜 굳이 밖으로 나갔어... 내가 계속 별장에 있었으면... 그랬다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죽어야 해.”그녀의 속삭임에 서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망고를 데려온 건 난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여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건 여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하지만 민여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땅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서원이 막아섰다.“여진 씨, 가지 마요. 제발... 더러워요. 만지지 마세요.”‘더럽다고?’민여진은 서원이 있는 쪽으로 노려봤다.‘더러운 건 나야. 망고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쯤 장난감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더럽지 않아요... 망고는 절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녀는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털이 손끝에 닿았다.민여진은 흐느끼며 망고를 품에 안았다.“망고...”서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망고, 내가 나가기 전에 너한테 인사도 못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줄 장난감도 샀는데... 예쁜 옷도 샀어. 언젠가 내 눈이 다시 보이면 네가 입은 모습 직접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박진성은 급히 뮤지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전화 한 통을 받고 도착한 별장의 정원에서 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마주했다.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마당,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여진과 그녀의 품에 안긴, 사지가 처참히 절단된 작은 개의 사체가 보였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그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망고가 아니라... 피로 물든 채,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얼굴이었다.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살아있는 유령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숨이 턱 막혔
박진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박 대표님... 여진 씨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진성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죽은 개를 품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셈인가?’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 손 놔.”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내가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장례 치르게 할 거야. 너까지 이러고 있으면 저 개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해.”그러나 민여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더욱더 망고를 품에 끌어안았다.놓을 수 없었다. 한때,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처럼, 이번에도... 망고만큼은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해. 이렇게 추운 날, 차가운 땅바닥에 내버려둘 수 없어... 망고가 너무 외로워할 거야...’“민여진!”박진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몸에 밴 피 냄새가 더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손 놓으라고 했어! 안 들려?”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안 놔? 그럼 방현수를 부를 수밖에 없겠군.”그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또 협박이야...’“어서 놓으라고!”박진성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명령했다.서원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놔주세요. 제가 망고를 잘 보내줄게요.”“망고...”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민여진은 기이하게 웃고 싶어졌다.‘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건... 오직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인데. 결국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네.’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풀고, 망고를 품에서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민여진은 감각이 마비된 듯 옷을 걸쳐 입고 무기력하게 박진성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런데 막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대문 쪽에서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이어 문채연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진성 씨, 너무 일찍 자리를 뜨셨네요. 아쉬웠어요.”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뮤지컬의 후반부가 진짜 하이라이트였는데... 그걸 못 보시다니.”그리고 한 박자 쉬며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덧붙였다.“주인공이 기르던 악질적인 개가 결국 갈기갈기 찢겨 죽었거든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의도적으로 강조한 단어들이 칼날처럼 날아왔고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그 순간 민여진의 눈이 핏발처럼 붉어졌다.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망고... 망고가 저년이 말하는 악질적인 개란 말인가?’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네가 사람이야?”그녀는 광기 어린 기세로 문채연에게 달려들었다. 손이 뻗었고 차갑고 여린 문채연의 목덜미를 단숨에 움켜쥐었다.“그건... 망고는 그냥 강아지였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문채연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중심을 잃고 거실 테이블에 세게 부딪혔다.그러나 민여진은 멈추지 않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손끝에 들어간 힘,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목을 조르고 있었다.“민여진!”“여진 씨!”서원이 당황한 듯 다가왔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숨이 막힐 듯이 뜨겁고 서늘한 감정이, 그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그 순간 강하게 몸이 잡아당겨졌다.박진성이 단숨에 그녀를 끌어내,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쳤다.“채연아, 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다급했다.그의 손은 문채연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살폈다.한편, 민여진은 계단 난간에 부딪히며 머리를 세게 찧었다.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울렸다. 하지만 그 통증조차,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문채연은 눈물 맺힌 얼굴로 목을 감싸 쥐었다.얇은 피부 위에는 선명
민여진의 온몸이 떨렸다. 스스로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버텼다.“여진 씨...”서원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 상황을 전부 목격한 그로서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괜찮으세요?”붉어진 눈으로 민여진이 서원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원뿐이었다.“서원 씨, 말해 줘요. 정말인가요? 망고가... 떠난 게... 그 노숙자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에요?”서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문채연을 의심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일을 저지른 자는 지나치게 깔끔했다.“CCTV에 찍힌 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숙자였어요. 동물 학대 전력이 있던 사람이라, 법적으로도 처벌하기 어려워요. 결국... 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서...”‘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혀왔다.뒤뜰에서 처참히 숨이 끊어진 망고를 보고도 아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알겠어요.”민여진의 목소리가 떨렸다.“여진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단순한 사고였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어떻게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고가 방에서 나갔던 건, 결국 나 때문이잖아.결국 내가 망고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그래요... 고마워요.”그날 밤, 민여진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을 때마다 망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비명 같은 울음소리, 잘려 나간 작은 사지, 손을 뻗었을 때 느껴진 차가운 장기들...그녀가 드레스를 고르며 거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을 때, 망고는 바로 저 뒤뜰에서 처참히 죽어가고 있었다.겨우 잠들면 또 다른 악몽이 찾아왔다. 죽은 아이가, 망고가, 그녀를 원망하며 울부짖었다.“너 때문에...”“널 만난 걸 후회해.”“왜 너만 살아 있어?”“미안해...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나도 곧 따라갈게...”악몽 속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눈가를 누군가 조용히 닦아주었다.아침이 되어 침대에서
마침내 박진성은 문채연을 밀어냈다.“이건 너한테 불공평해. 늦었으니 일찍 쉬어.”말을 마친 그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화려한 화장을 한 문채연만이 남아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분명 그녀가 별장에 오기 전날 밤, 박진성은 민여진과 밤을 보냈으면서 이제 와서 불공평하다는 핑계로 자신을 거절하다니. 정말로 그녀에게 불공평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저 원하지 않는 것일까...문채연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서둘러야 한다. 민여진이 임신이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업무를 마친 박진성은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가까운 펫샵으로 갑시다.”“펫샵이요?”운전기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대표님은 알레르기 있으시잖아요?”“상관 말고 그냥 가요.”운전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서둘러 가장 가까운 펫샵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박진성은 문을 열고 길 건너편에 있는 펫샵으로 들어갔다.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그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케이지 안의 강아지들을 꼼꼼히 살폈다.펫샵 주인이 다가와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서 오세요,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있으신가요? 꺼내 드릴까요? 자세히 보여드리겠습니다.”“아닙니다.”박진성은 더 멀찍이 떨어져 그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검은 털에 정수리 부분이 갈색인, 생후 한 달 정도 된 강아지를 찾아주세요.”정수리가 갈색이라는 특징도 찾기 힘든데 거기에 나이 제한까지 있어 펫샵 주인은 난색을 보였다.“손님, 그 조건은...”“너무 까다로워요?”박진성은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찾기만 하면 가격은 문제없습니다.”펫샵 주인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아닙니다!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결국 펫샵 주인은 여러 개의 켄넬에 연락해서 세 시간 넘게 공을 들인 끝에 조건에
그 순간, 민여진은 망고가 뒷마당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다. “치워! 당장 나가!”박진성은 민여진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나가라는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민여진, 지금 무슨 짓이야? 어제 그 개 때문에 죽네 사네 하더니 이제 새 강아지를 사 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이 꼴이 뭐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래?”‘고마워하라고?’민여진의 심장은 떨렸고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몰려왔다.“당신 보기에 죽은 망고를 다른 개로 대체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건가요?”“아니면 뭘 어쩌라는 거야.”박진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짐승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쏟을 생각은 없었다.“설마 그 개를 다시 살려내기라도 바라는 거야?”민여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박진성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비슷한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나가요.”그녀의 입술은 떨렸다.“나가요! 당장 나가라고!”박진성도 화가 나서 갑자기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민여진, 주는 얼굴에 침 뱉지 마. 내가 그 개와 비슷한 개를 찾으려고 얼마나 큰돈을 썼는지 알아?”그는 알레르기 반응까지 겪으면서 품종견 열 마리도 넘게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그 개를 샀다. 그런데 민여진에게서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혐오스러운 태도만 돌아왔다.“민여진, 내가 너한테 빚졌어?”민여진은 아픔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필요 없어요. 당신의 그 잘난 동정 따위. 난 개도 싫고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함도 싫어요.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개를 키우는 게 아니었어요!”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나가 주세요!”박진성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쏟는 민여진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는 케이지를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문채연은 이미 소란을 듣고 문 앞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박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
아무리 잘해줘 봐야 민여진은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멀리 꺼져주길 바랐다.만약 방현수가 그런 선물을 했다면 곧바로 몸이라도 바쳤겠지...그런 가능성만 생각해도 속이 쓰린 박진성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괜한 생각 마. 그런 여자는 내 호의를 받을 자격도 없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런 것뿐이야. 어쨌든 그 개는 우리 집 마당에서 죽었으니까.”“그래요?”문채연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어두워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진성 씨가 여진 씨를 특별히 챙겨준 게 아니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아마 제가 마음이 좁아서 진성 씨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가 봐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가요?”“그럴 리가.”박진성은 괴로워하는 문채연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에 미안함이 피어올랐다.“안심해. 내 마음속에서 민여진은 네 발끝에도 못 미쳐.”그 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더욱 냉담하게 굴었다.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쳤고 민여진 역시 평정심을 유지하며 필요한 시간 외에는 주로 방에 머물렀다.하지만 식사 시간에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민여진은 말없이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애썼다.박진성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입맛이 떨어진 듯 수저를 내려놓았다.“채연아, 천천히 먹어. 난 서재에 화상 회의가 있어서.”“네.”문채연은 대답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진성 씨, 몸 챙기세요. 내일 생일 파티에 같이 가야 하잖아요.”“그래.”민여진의 손이 멈칫했다.‘생일 파티?’박진성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문채연은 약간의 의기양양함을 담아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내일은 10월 25일이야. 너한테 낯선 날은 아니겠지?”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낯설지 않았다. 문채연의 생일이었다.박진성과 함께한 2년 동안, 매년 이맘때쯤이면 자신이 문채연인 척하며 자기 것이 아닌 생일 축하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했고 정작 자신의 진짜 생일은 잊으려 애써야 했다.“
“걔를 왜 초대해?”박진성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너무 착하게 굴지 마. 걔가 불쌍한 건 자업자득이야. 그리고 네 생일 파티는 중요한 날인데 걔를 보면 분위기만 망치고 다들 불편해할 거야.”“하지만...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요?”문채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여진 씨는 분위기를 망칠 사람은 아니에요.”“하지만 걔가 네 생일 파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박진성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말해봐. 네가 그렇게 성대한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민여진은 멈칫했다. 모욕을 주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잔인한 법이었기 때문이다.지금 문채연은 분명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민여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안 어울려요.”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알면 됐어. 아직도 안 꺼지고 뭐 해?”민여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마음의 고통을 참으며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문을 닫기 전, 문채연의 가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여진 씨 많이 힘들어 보여요...”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진짜 생일은 문채연의 생일 하루 전,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그래서 문채연의 생일이 화려할수록 그녀의 생일은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그녀의 진짜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민여진은 눈을 뜨자 가슴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는 아직 박진성에게 붙잡혀 있어 그녀의 병세는 어떤지,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서재 쪽으로 향했다.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박진성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나가!”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심호흡을 한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