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의 온몸이 떨렸다. 스스로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버텼다.“여진 씨...”서원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 상황을 전부 목격한 그로서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괜찮으세요?”붉어진 눈으로 민여진이 서원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원뿐이었다.“서원 씨, 말해 줘요. 정말인가요? 망고가... 떠난 게... 그 노숙자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에요?”서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문채연을 의심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일을 저지른 자는 지나치게 깔끔했다.“CCTV에 찍힌 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숙자였어요. 동물 학대 전력이 있던 사람이라, 법적으로도 처벌하기 어려워요. 결국... 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서...”‘개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혀왔다.뒤뜰에서 처참히 숨이 끊어진 망고를 보고도 아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알겠어요.”민여진의 목소리가 떨렸다.“여진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단순한 사고였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어떻게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고가 방에서 나갔던 건, 결국 나 때문이잖아.결국 내가 망고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그래요... 고마워요.”그날 밤, 민여진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을 때마다 망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비명 같은 울음소리, 잘려 나간 작은 사지, 손을 뻗었을 때 느껴진 차가운 장기들...그녀가 드레스를 고르며 거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을 때, 망고는 바로 저 뒤뜰에서 처참히 죽어가고 있었다.겨우 잠들면 또 다른 악몽이 찾아왔다. 죽은 아이가, 망고가, 그녀를 원망하며 울부짖었다.“너 때문에...”“널 만난 걸 후회해.”“왜 너만 살아 있어?”“미안해...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나도 곧 따라갈게...”악몽 속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눈가를 누군가 조용히 닦아주었다.아침이 되어 침대에서
마침내 박진성은 문채연을 밀어냈다.“이건 너한테 불공평해. 늦었으니 일찍 쉬어.”말을 마친 그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화려한 화장을 한 문채연만이 남아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분명 그녀가 별장에 오기 전날 밤, 박진성은 민여진과 밤을 보냈으면서 이제 와서 불공평하다는 핑계로 자신을 거절하다니. 정말로 그녀에게 불공평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저 원하지 않는 것일까...문채연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서둘러야 한다. 민여진이 임신이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업무를 마친 박진성은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가까운 펫샵으로 갑시다.”“펫샵이요?”운전기사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대표님은 알레르기 있으시잖아요?”“상관 말고 그냥 가요.”운전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서둘러 가장 가까운 펫샵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박진성은 문을 열고 길 건너편에 있는 펫샵으로 들어갔다.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그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케이지 안의 강아지들을 꼼꼼히 살폈다.펫샵 주인이 다가와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서 오세요,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있으신가요? 꺼내 드릴까요? 자세히 보여드리겠습니다.”“아닙니다.”박진성은 더 멀찍이 떨어져 그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검은 털에 정수리 부분이 갈색인, 생후 한 달 정도 된 강아지를 찾아주세요.”정수리가 갈색이라는 특징도 찾기 힘든데 거기에 나이 제한까지 있어 펫샵 주인은 난색을 보였다.“손님, 그 조건은...”“너무 까다로워요?”박진성은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찾기만 하면 가격은 문제없습니다.”펫샵 주인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아닙니다!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결국 펫샵 주인은 여러 개의 켄넬에 연락해서 세 시간 넘게 공을 들인 끝에 조건에
그 순간, 민여진은 망고가 뒷마당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다. “치워! 당장 나가!”박진성은 민여진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나가라는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민여진, 지금 무슨 짓이야? 어제 그 개 때문에 죽네 사네 하더니 이제 새 강아지를 사 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이 꼴이 뭐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래?”‘고마워하라고?’민여진의 심장은 떨렸고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몰려왔다.“당신 보기에 죽은 망고를 다른 개로 대체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건가요?”“아니면 뭘 어쩌라는 거야.”박진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짐승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쏟을 생각은 없었다.“설마 그 개를 다시 살려내기라도 바라는 거야?”민여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박진성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비슷한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나가요.”그녀의 입술은 떨렸다.“나가요! 당장 나가라고!”박진성도 화가 나서 갑자기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민여진, 주는 얼굴에 침 뱉지 마. 내가 그 개와 비슷한 개를 찾으려고 얼마나 큰돈을 썼는지 알아?”그는 알레르기 반응까지 겪으면서 품종견 열 마리도 넘게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그 개를 샀다. 그런데 민여진에게서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혐오스러운 태도만 돌아왔다.“민여진, 내가 너한테 빚졌어?”민여진은 아픔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필요 없어요. 당신의 그 잘난 동정 따위. 난 개도 싫고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함도 싫어요.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개를 키우는 게 아니었어요!”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나가 주세요!”박진성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쏟는 민여진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는 케이지를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문채연은 이미 소란을 듣고 문 앞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박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
아무리 잘해줘 봐야 민여진은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멀리 꺼져주길 바랐다.만약 방현수가 그런 선물을 했다면 곧바로 몸이라도 바쳤겠지...그런 가능성만 생각해도 속이 쓰린 박진성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괜한 생각 마. 그런 여자는 내 호의를 받을 자격도 없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런 것뿐이야. 어쨌든 그 개는 우리 집 마당에서 죽었으니까.”“그래요?”문채연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어두워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진성 씨가 여진 씨를 특별히 챙겨준 게 아니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아마 제가 마음이 좁아서 진성 씨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가 봐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가요?”“그럴 리가.”박진성은 괴로워하는 문채연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에 미안함이 피어올랐다.“안심해. 내 마음속에서 민여진은 네 발끝에도 못 미쳐.”그 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더욱 냉담하게 굴었다.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쳤고 민여진 역시 평정심을 유지하며 필요한 시간 외에는 주로 방에 머물렀다.하지만 식사 시간에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민여진은 말없이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애썼다.박진성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입맛이 떨어진 듯 수저를 내려놓았다.“채연아, 천천히 먹어. 난 서재에 화상 회의가 있어서.”“네.”문채연은 대답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진성 씨, 몸 챙기세요. 내일 생일 파티에 같이 가야 하잖아요.”“그래.”민여진의 손이 멈칫했다.‘생일 파티?’박진성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문채연은 약간의 의기양양함을 담아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내일은 10월 25일이야. 너한테 낯선 날은 아니겠지?”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낯설지 않았다. 문채연의 생일이었다.박진성과 함께한 2년 동안, 매년 이맘때쯤이면 자신이 문채연인 척하며 자기 것이 아닌 생일 축하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했고 정작 자신의 진짜 생일은 잊으려 애써야 했다.“
“걔를 왜 초대해?”박진성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너무 착하게 굴지 마. 걔가 불쌍한 건 자업자득이야. 그리고 네 생일 파티는 중요한 날인데 걔를 보면 분위기만 망치고 다들 불편해할 거야.”“하지만...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요?”문채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여진 씨는 분위기를 망칠 사람은 아니에요.”“하지만 걔가 네 생일 파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박진성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말해봐. 네가 그렇게 성대한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민여진은 멈칫했다. 모욕을 주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잔인한 법이었기 때문이다.지금 문채연은 분명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민여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안 어울려요.”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알면 됐어. 아직도 안 꺼지고 뭐 해?”민여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마음의 고통을 참으며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문을 닫기 전, 문채연의 가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여진 씨 많이 힘들어 보여요...”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진짜 생일은 문채연의 생일 하루 전,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그래서 문채연의 생일이 화려할수록 그녀의 생일은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그녀의 진짜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민여진은 눈을 뜨자 가슴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는 아직 박진성에게 붙잡혀 있어 그녀의 병세는 어떤지,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서재 쪽으로 향했다.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박진성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나가!”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심호흡을 한
“알겠어요...”민여진은 씁쓸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기다릴게요.”그녀가 돌아가려는 순간, 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민여진은 걸음을 멈췄다. 너무나 익숙한 벨 소리였다. 바로 그녀의 휴대폰 벨 소리였던 것이다.박진성 역시 놀란 듯 차가운 표정으로 서랍을 열었다. 발신자 표시에는 ‘방현수'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띄워져 있었다.방현수는 전에도 전화를 걸었었지만 박진성이 민여진에게 전화를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다니 박진성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민여진 또한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쥔 채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제 휴대폰인가요?”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뭘 기대하는 거야?”박진성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눈치 빠른 민여진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부정했다.“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아니라고?”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처럼 텅 빈 눈빛이었는데, 전화 한 통에 생기가 도는 듯했기 때문이다.“누군지 알겠지? 받고 싶어?”민여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갈등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통화 버튼이 잘못 눌리면서 스피커폰으로 바꿨다.곧 방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진아? 너 맞아?”민여진의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감히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차갑게 웃었다.“방현수 씨, 실망했겠군. 민여진이 아니라 나라서.”방현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민여진이 전화를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여진에게 전화 바꿔 줄 수 있어?”“민여진은 바로 옆에 있는데 좀 바빠.”박진성은 민여진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입이 잠시도 쉴 틈이 없어서 방현수 씨 전화를 받을 수 없네. 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해.”방현수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분명 이 모든 것이 다 ... 내 것인데!’박진성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민여진의 목을 놓았다. 민여진이 숨을 몰아쉬려는 순간, 갑자기 힘이 가해지며 그녀는 책상 위로 내던져졌다.그러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박진성의 몸이 그녀를 덮쳤다. 민여진은 옷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박진성! 안돼!”박진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묶으며 차갑게 비웃었다. “왜 안 돼? 네 역할이 이거잖아. 민여진, 내가 왜 널 곁에 두고 있는 줄 알아? 방현수와 살겠다고? 꿈 깨!”그는 민여진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고 분노와 냉혹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책상 위에 짓눌렀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서재 밖에서 문채연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와 차가움으로 물들었다....민여진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까지 깨어나지 못했다.문채연은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맞춤 제작한 긴 드레스를 입은 채 목걸이를 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러고는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파티장으로 향했다.박씨 가문 본가에는 이미 많은 손님이 도착해 있었고 파티는 활기찬 분위기였다. 문채연은 대기실에서 박진성과 만났다. 그의 목에는 민여진에게 할퀸 자국이 남아 있었다.문채연의 눈빛은 잠시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진성 씨, 늦어서 죄송해요.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이미 거실에 나가 계셔.”박진성은 팔을 내밀어 문채연에게 팔짱을 끼게 했다.“우리도 나가야지.”“네.”문채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놀란 표정으로 목을 만졌다.“진성 씨, 잠깐만요! 제 목걸이요! 아,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했나 봐요. 어떡하죠?”“목걸이 하나 없다고 뭐가 달라지나. 안 해도 예뻐.”“하지만...”문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건 어머님이 주신 생일 선물인데 저한테
민여진은 애써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거실의 전화벨 소리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그녀는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마자 박진성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민여진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그렇게 추운 날, 책상 위에서 알몸으로 그에게 짓밟히고 방에 돌아와서는 오한과 열에 시달리며 열병을 앓았다. 지금도 머리가 멍했다.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정을 푸는 데만 급급했을 뿐 그녀를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머리가 아파서... 이제 막 잠에서 깼어요.”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꾀병도 적당히 해야지. 벌써 저녁인데.”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어지러움을 참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채연이가 목걸이를 집에 까먹고 파티에 안 갖고 왔어. 그 목걸이는 어머니가 준 선물이라 아주 중요해. 네가 마침 집에 있으니 갖다 줘.”“네?”민여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박진성은 지금 앞이 안 보이는 장님에게 문채연의 목걸이 심부름을 시키려는 건가?’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전 앞이 안 보여서 혼자 나가기 힘들어요.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시간이 급하지 않으면 너한테 이런 심부름을 시키겠어?”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파티가 곧 시작할 텐데, 택시 타고 본가로 가면 금방이야. 입구에 사람을 보내 둘 테니, 빨리 움직여. 당장 와!”민여진은 어지럼증을 참으며 탁자를 짚고 말했다.“제가 도망갈까 봐 안 걱정돼요?”박진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네 어머니 일 신경 안 쓰인다면 도망가도 돼. 멀리 도망가. 상관 안 할 테니까.”민여진은 목이 메었다. 방현수는 떠났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박진성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민여진은 떨리는 입술로 애써 손을 뻗으며 말했다.“엄마, 손... 한번 만져 봐도 돼요?”민영미의 손은 알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을 어렸을 때 잡았던 느낌은 지금과는 달랐다.특히 몇 군데는 유난히 달랐다.전에는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문채연의 말 때문에 의심이 생겼다.정수향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 여진아... 왜 그래?”“아니에요...”민여진은 심호흡을 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예전에 엄마 손을 자주 잡았었잖아요. 그때가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다닐 때 엄마가 손잡고 집에 데려다주던 게 그리워요...”“그랬구나.”정수향은 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민여진이 뭔가를 눈치채고 불안해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그래, 우리 여진이 손잡아 줘야지.”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하지만 민여진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혹시나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치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손을 잡게 될까 봐 말이다.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정수향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에 느껴지는 거친 감촉에 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 문채연의 말과는 달리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젊은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기쁜 동시에 민여진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민영미의 손에 비하면 이 손은 너무 부드러웠다.“왜 그래?”정수향의 마음은 불안했다. 민영미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손을 눈여겨봤었다.늙고 메말랐으며 굳은살이 가득하고 누렇게 변색된 손이었다.영상 속 민영미는 50대처럼 보였지만 그 손은 마치 말라 죽은 나무처럼 흔적투성이였다.정수향은 그 손을 재현하기 위해 며칠 동안 사포로 자신의 손을 문질렀다. 하지만 민영미의 손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에요...”민여진은 손가락으로 민영미의 손에서 익숙한 굳은살을 찾았다. 딱딱하고 거친 굳은살이 손끝에 닿자 민여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민영미다. 틀림없는 엄마야!’이곳은 오랫동안
문채연은 혀를 찼다.“민여진, 너 설마 저기 너랑 웃고 떠드는 여자가 민영미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그렇게 순진해? 박진성이 아무 여자나 데려다 놓으니까 진짜인 줄 알겠지?”“진짜 민영미이면 너보다 키가 이렇게 크고 이렇게 젊고 정상인처럼 너랑 같이 옷을 사러 다니겠어? 게다가 외모는 네가 눈이 안 보인다고 해도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저 여자는 관리를 잘해서 주름 하나 없어. 네가 손으로 만져보면 몰라? 저런 여자가 너랑 같이 빈민가에서 고생했던 엄마일 리가 없잖아!”“닥쳐!”민여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지만 가슴은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뭐라고? 문채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여자가 엄마가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분명 길에서도 함께 웃고 다정하게 이야기했잖아. 어색한 부분도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낯선 사람일 수가 있지?’민여진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문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만해, 문채연! 이런 수작, 언제까지 부릴 거야! 내가 또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돌아가셨겠어! 넌 그저 나랑 박진성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거잖아. 꿈 깨!”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너한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내가 엄마라고 부른 사람이 누군지!”문채연은 동정하는 어조로 말했다.“정말 알고 있는 거야? 민여진, 너 정말 우스워. 박진성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을 안 믿다니. 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순간, 한기가 온몸을 휘감으며 민여진의 오장육부를 짓눌렀다.민여진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고 문채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날 안 믿는 건 당연해. 하지만 네가 확인할 방법은 많다는 걸 알아. 눈은 안 보이지만 손과 입은 있잖아? 결과가 나오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되겠지. 나와 박진성 중에.”문채연은
“저 사람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나요?”점원은 고개를 저었다.“모녀 두 분뿐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못 봤어요.”문채연은 순간 동공이 수축되며 점원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모녀? 모녀라니!”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점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문채연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금 문의하신 두 분 말씀이시죠? 두 분은 모녀 사이세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여성분이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께 옷을 골라드리겠다고 하셨는데, 모녀가 아니면 뭐겠어요...”문채연의 눈에 엄청난 충격이 어렸다. 민영미가 1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문채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그러니 민여진에게 어머니는 있을 수 없었다.문채연은 음침한 표정으로 점원에게 다가가 말했다.“확실해요? 젊은 여자가 저 여자를 자기 어머니라고 인정했다는 게 확실하냐고요?”점원은 마늘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백 퍼센트 아주 확실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젊은 여자분은 매장에 들어온 후로 계속 옆에 있는 분을 엄마라고 불렀어요. 거짓일 리가 없어요.”“알겠어요...”문채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흔들리며 민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수향은 문채연을 몰랐고 민여진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문채연은 전혀 거리낌 없이 민여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낯선 여자에게 의지하는 모습, 행동거지와 말투까지 모두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민여진이 하는 말을 들었다.“엄마, 이 옷 괜찮은 것 같아요. 한번 입어봐요. 잘 맞는지.”“하...”문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박진성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낯선 여자까지 데려와 민여진을 속였다는 사실이 문채연은 믿기지 않았다.어쩐지, 민여진이 민영미의 죽음에 대해 갑자기 침묵하고 박진성이랑 나가는 것도 받아들이더라니. 처음에 그녀는 민여진이 어머니의 죽음에 무덤덤해진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그가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했다.곧 민여진의 텅 빈 눈에 반짝이는 빛이 떠올랐다. 박진성이 덧붙였다.“서원은 따라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두 사람만 나가. 6시 전에 돌아오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알았어.”민여진은 기뻐하며 대답했다.“일찍 돌아올게.”“그래.”박진성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떠나기 전, 그는 민여진 앞에 카드를 놓으며 말했다.“여기60억이 들어있어. 오늘 하루 쓰기에는 충분할 거야. 부족하면 전화해. 내 번호 알잖아.”“아니...”민여진은 거절하려다가 말을 멈췄다.지금 그들은 부부이니 남편인 박진성이 아내에게 돈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절하면 오히려 어색해질 뿐이니 민영미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그래.”박진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서원과 함께 나갔다.민여진과 정수향은 날이 좀 더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외출했다. 한낮이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민여진은 햇살 아래서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오랜만에 느끼는 자유,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이 순간, 그녀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했다.‘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여진아.”정수향이 웃으며 다가왔다.“힘들어?”민여진은 눈을 떴다. 세상은 까맣지만 둔해졌던 마음은 선명하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요.”정수향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그럼 이따가 다시 햇볕을 쬐자. 지금은 네가 사고 싶은 게 있는지부터 얘기해 보렴.”“옷이요.”정수향이 물었다. “무슨 옷을 사고 싶은데?”“내 옷이 아니고.”민여진이 대답했다.“엄마 옷을 사 드리고 싶어요.”박진성의 돈으로 사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갚을 생각이었다. 어렵게 어머니와 함께하게 된 시간이었으니 더 이상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양성은 다른 도시보다 추워요. 엄마 옷이 너무 얇으니까 두꺼운 옷을 사서 입으세요. 그래야 따뜻할 거예요.”정수향
“가만히 있어!”그는 화를 참으며 피가 멈추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강태화가 두고 간 구급상자를 찾았다.민여진의 손에는 그의 입술 온기가 남아 있었고 따끔거리던 손가락은 이상하게 뜨거워졌다.박진성은 결벽증이 심했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돌았나...’“손 줘 봐.”박진성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지만 꾹 참고 민여진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밴드를 다 붙이고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 “진성 씨, 화났어?”“그런 질문 말고 할 말 없어?”박진성의 대답은 날카로웠고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화가 난 것 같은데... 예전처럼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어.”민여진의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에 박진성은 심호흡을 했다. 민여진에게 괜히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3년 전에도 다칠 걸 망설였다면 그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보고 걱정하지 말라며. 병원에서 애들 옷도 많이 만들어 봤다고 큰소리치더니 이제 와서 손에 상처가 난 건 어쩐 일이래?”민여진은 당황하며 손가락을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뭐. 바느질하다 보면 다치기도 하지.”“그럼 내가 예민하게 군다는 거야?”“그게 아니라...”민여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박진성이 이렇게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다.“병원에서 바느질할 때도 가끔 다쳤어. 바늘을 들고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괜찮아!”박진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말에 민여진과 박진성 모두 깜짝 놀랐다.민여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걱정되고 마음 아프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던 것이다.결국 박진성은 아
차가운 대답에 화가 안 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민여진은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박진성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손 좀 녹여. 밖에 오래 서 있었으니 엄청 추웠겠다.”박진성은 민여진을 봤다. 빨갛게 언 코와 손을 보니 화가 반쯤 풀렸다.그는 찻잔을 받아들고 물었다.“내가 왜 화났는지 알아?”민여진은 고개를 저었다.“나가더라도 나한테 먼저 말을 하고 나가야지. 같이 가면 되는데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가면 네 어머니가 걱정하잖아. 그럼 난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데?”민여진은 고개를 숙였다.“당신이 그렇게 일찍 일어날 줄 몰랐어.”“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내 방에 와서 노크해.”그는 더 이상 민여진이 서원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원이 아무리 착실하다고 해도 그의 눈에는 모래알 하나도 용납되지 않았다.“알았어.”민여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진성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화제를 돌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짐들을 바라보았다.“뭘 샀어?”그 말에 민여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가방에서 천을 꺼내며 말했다.“겨울에 쓸 천을 샀어.”“이걸로 뭐 하려고?”민여진은 2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 젊었을 때 돈 벌려고 몸을 돌보지 않으셔서 병이 생겼거든. 겨울에는 눈만 오면 무릎이 아프고 추울 때도 아프다고 했어.”“이제 곧 겨울이니까 눈이 올 것 같아서 어머니 다리에 감싸 드릴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드리려고 천을 샀어. 그럼 밖에 나가실 때 따뜻하실 테니까.”딸로서의 따뜻한 마음과 걱정이 담긴 말이었지만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정수향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것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무릎이 시리면 가게에서도 전용 무릎 보호대를 파니까 굳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아니야. 엄마는 그런 거 안 좋아해.”민여진은 화를 내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엄마는 예전부터 직접 무릎 보호대를 만들어 쓰셨어
서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민여진은 두 걸음쯤 걷다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불렀다.“서원 씨?”“네.”서원은 곧바로 민여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테라스를 걸었다.민여진이 물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말도 없고... 무슨 일이에요?”서원은 민여진의 밝은 미소와 다정한 모습을 보며 목이 메었다. 갑자기 박진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 거짓말이 계속 이어진다면 민여진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까?’“아니에요. 아까 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보고 차가 오는지 살펴봤을 뿐이에요.”“아이들은 다 그렇죠.”민여진의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저택은 가까이에 있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원에 도착했다.서원이 현관에 거의 다 왔을 때, 저 멀리 큰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박진성은 슬리퍼를 신고 두꺼운 외투 안에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매서운 바람 속에 서 있었다.그는 민여진을 보자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왜 갑자기 나갔어?”박진성은 차갑게 물으며 서원을 노려보았다.“말도 없이 나가면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거 몰라?”“엄마?”민여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엄마 깨셨어? 미안해. 일찍 일어나서 빨리 다녀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다들 깨어 있을 줄은 몰랐어.”“어머니는 안 깨셨어. 내가 깬 거지.”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장한 채 민여진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그는 1층 현관문이 열려 있고 민여진의 신발 한 켤레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서야 민여진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그 순간, 그의 가슴은 끓어올랐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은 왜 나갔을까? 왜 아무 말도 없이 나갔을까? 도망친 걸까? 정수향의 정체를 알아채고 꾹 참고 있다가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떠난 걸까?’그런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정말 그렇다면 평생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몰랐
잠들기 전, 민여진은 정수향의 팔을 꼭 껴안고 말했다.“엄마,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빠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앞으로 내가 엄마 지켜줄게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나 잘살 거예요.”민여진은 졸음에 못 이겨 잠들었지만 정수향은 눈을 뜬 채 마음이 뭉클했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민영미라면 뭐라고 했을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수향은 민여진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밖으로 나가니 박진성이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 그는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1층을 바라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민여진이 그쪽을 의심하던가요?”정수향은 고개를 저었다.“전혀요. 민여진 씨는 아주 순진해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성격이에요. 그럼 제가 해명할 수 있고요. 지금쯤이면 제가 민영미라고 완전히 믿고 있을 거예요.”“그래요.”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민여진은 눈치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에요.”“알겠습니다.”“그리고 내일 민여진이랑 외출하세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 저도 안심하고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생필품 같은 걸 사러 가자고 하세요.”...다음 날, 민여진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서원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내려오는 민여진의 밝은 모습과 얼굴에 감도는 생기는 그를 잠시 놀라게 했다.“민여진 씨, 좋은 아침입니다.”“서원 씨, 좋은 아침이에요.”민여진은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잘 왔어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슈퍼에 가서 벨벳 천이랑 바늘, 실 좀 사다 줄 수 있어요?”“그런 건 뭐에 쓰시려고요?”“쓸 데가 있어요.”서원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같이 가시죠.”“네?”“벨벳 천이 어떤 건지, 저 같은 남자는 잘 모르잖아요. 민여진 씨가 직접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만 날이 너무 추워서 몸이...”“괜찮아요
민여진은 박진성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박진성은 다시 몸을 숙여 민여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마치 평생의 인내심을 쏟아붓듯 공략해 왔다.“진성 씨...”민여진은 그를 밀어냈다. 극도로 어색하고 불편했다.“이러지 마...”“이러지 말라는 게 뭔데?”박진성은 검은 눈동자로 깊숙이 물었다.“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 키스하는 거? 아니면 방금 전에 했던 말?”민여진은 박진성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박진성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말해, 민여진. 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뭐든지 말해. 다 들어줄게. 다 약속할게.”결국 민여진은 서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벽을 짚고 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고 정수향이 계단에서 의아하게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멈칫 발걸음을 멈추자 정수향이 다가와 소매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왜 그래? 뭐가 그렇게 급해? 앞도 안 보이는데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어쩌려고?”“아무것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민여진의 입술에 남은 흔적을 본 정수향은 바로 눈치를 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난 밖에 살아도 괜찮다고 했잖아. 너한테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사람도 있어.”“하지만...”민여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대답했다.“겨울인데 너무 춥잖아요.”민영미는 겨울을 제일 싫어했다. 겨울이 되면 무릎이 아프고 몸 전체가 쑤셨기 때문이다.젊었을 적 한겨울에 강가에서 남의 빨래를 하다 얻은 병이었다.“참.”민여진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엄마, 무릎은 이제 괜찮으세요? 아직도 아파요?”정수향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별로 안 아파. 많이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