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애써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거실의 전화벨 소리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그녀는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마자 박진성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민여진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그렇게 추운 날, 책상 위에서 알몸으로 그에게 짓밟히고 방에 돌아와서는 오한과 열에 시달리며 열병을 앓았다. 지금도 머리가 멍했다.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정을 푸는 데만 급급했을 뿐 그녀를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머리가 아파서... 이제 막 잠에서 깼어요.”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꾀병도 적당히 해야지. 벌써 저녁인데.”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어지러움을 참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채연이가 목걸이를 집에 까먹고 파티에 안 갖고 왔어. 그 목걸이는 어머니가 준 선물이라 아주 중요해. 네가 마침 집에 있으니 갖다 줘.”“네?”민여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박진성은 지금 앞이 안 보이는 장님에게 문채연의 목걸이 심부름을 시키려는 건가?’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전 앞이 안 보여서 혼자 나가기 힘들어요.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시간이 급하지 않으면 너한테 이런 심부름을 시키겠어?”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파티가 곧 시작할 텐데, 택시 타고 본가로 가면 금방이야. 입구에 사람을 보내 둘 테니, 빨리 움직여. 당장 와!”민여진은 어지럼증을 참으며 탁자를 짚고 말했다.“제가 도망갈까 봐 안 걱정돼요?”박진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네 어머니 일 신경 안 쓰인다면 도망가도 돼. 멀리 도망가. 상관 안 할 테니까.”민여진은 목이 메었다. 방현수는 떠났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박진성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가식적인 목소리에 민여진은 더 이상 연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를 문 앞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돌아섰다.“민여진.”문채연은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으면서 말했다.“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모처럼 파티에 왔는데 구경 좀 하고 가지.”“됐어.”민여진은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애초에 상류 사회의 화려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박진성의 아내가 된 것도 오로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젠 그런 기대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목걸이는 가져왔으니 별일 없으면 나 이만 가볼게.”“잠깐만.”문채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우아하게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곧 휴대폰에서 처절한 개 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민여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순식간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문채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 소리, 너에게 익숙하지? 이 개 이름이 뭐였더라... 망고랬나? 아, 걔 죽을 때 정말 끔찍했는데. 배가 갈라진 것도 모자라 팔다리까지 잘렸지. 영상 속에서 걔가 계속 별장 쪽을 쳐다보던데 아마 널 찾고 있었나 봐. 죽기 전에 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민여진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온몸을 떨며 울먹거렸다.“너... 그 영상 어디서 났어?”문채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글쎄… 어디서 났을까? 내가 왜 이 영상을 갖고 있고 왜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을까?”민여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너였어! 네가 망고를 죽였어!”“너무 큰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야? 난 그때 진성 씨와 콘서트장에서 뮤지컬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강아지를 해칠 시간이 있었겠어.”문채연은 혀를 차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하지만 그 노숙자는 내가 보낸 게 맞아. 정신병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정신일 때도 있거든. 내가 그 사람에게 큰돈을 주고 뒷마당에 몰래 구덩이를 파 놓으라고 했어. 네가 서원 씨와 옷 사러 나
“진성 씨!”문채연은 콜록거리며 겁에 질린 채 박진성의 품에 안겨 두려운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았다.“진성 씨, 쟤 미쳤어요... 민여진이 미쳤다고요! 절 죽이려고 했어요!”문채연의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박진성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조금만 늦었더라면...그는 민여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움켜쥐었다. 뼈가 부서질 듯한 강한 힘이었다.“민여진!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내가 준 벌이 부족했나 봐? 어떻게 감히 채연이를 건드려!”민여진은 눈물을 쏟으며 숨쉬기조차 힘들어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박진성을 노려보았다.“왜 못 건드려요? 저 여자는 살인자예요! 죽어 마땅하다고요!”고통에 울부짖는 민여진의 눈에는 진짜 절망이 담겨 있었다. 박진성은 잠시 멍해지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살인자라는 거야?”문채연이 먼저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진 씨가 목걸이를 가져다주고는 가질 않고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원래 자기 것이라면서 절 죽이려고 했어요...”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다행히 빨리 와주셔서 살았어요! 안 그랬으면 정말 죽었을 거예요!”“아직도 거짓말을 해?!”민여진은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럼 네 휴대폰 좀 보여 줘 봐! 모두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라고!”“무슨 영상?”박진성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문채연도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여진 씨, 무슨 영상을 말하는 거예요?”“네 휴대폰에 망고가 배를 갈리고 팔다리가 잘리는 영상이 있었잖아! 조금 전에 나한테 보여줘 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하는 거야?!”박진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문채연에게 손을 내밀었다.“휴대폰 줘 봐.”“진성 씨...”문채연의 눈동자가 움찔하며 수축했다.“제 말 안 믿어요?”박진성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널 믿어.
서원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민여진 씨... 이제 그만 가시죠. 오늘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날에 문채연 씨에게 그런 행동을 하시면 안 됐습니다. 정말 문제가 생겼다면 대표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민여진은 서원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원 씨, 그 노숙자... 문채연이 보낸 사람이었어요. 망고를 죽이려고.”“뭐라고요?!”서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민여진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문채연이 그러더군요. 망고가 죽기 전에 계속 별장 쪽을 바라봤다고. 제가 구해 주기를 기다렸다고... 그런데 그때 전 뭘 하고 있었을까요? 새 옷을 사러 갔었어요. 그러니 제가 망고를 살릴 기회를 버린 거예요. 제가 망고를 죽였다고요...”“민여진 씨.”서원은 충격에서 벗어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날 옷 가게에 간 것도 제가 모시고 간 건데 그럼 저도 공범인가요? 그날 우리는 아무도 몰랐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어요. 망고는 분명 민여진 씨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하지만 나 때문에 문채연이 망고에게 손을 댄 거잖아요.”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문채연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연회장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밖에서는 손님들의 환호성과 생일 축하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팔을 꽉 끌어안았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서원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서원은 눈치 빠르게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민여진 씨, 이 일을 공론화하고 싶으신 건가요?”민여진은 이를 악물었다. 참고 또 참으면 언젠가 박진성이 흥미를 잃었을 때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채연의 행동은
민여진은 홀로 별장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오랫동안 멍하니 있다가 졸음이 쏟아져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발로 차며 열어젖혔다.박진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차가운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만큼 냉혹하지는 않았다.“네가 잠이 와?”박진성은 그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채연이 목에 난 흔적, 아무리 감춰도 다 티가 났어. 파티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는지 알아? 얼마나 쑥덕거렸는지 아냐고! 그리고 파티가 끝나는데도 채연이는 집에 오기 싫대. 네 악독한 심보는 언제쯤 잠잠해질 건데!”민여진은 어깨의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2층에서 던져 버릴 기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화를 내는 박진성의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문채연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이었다. 심지어는 강아지 한 마리까지도 가만두지 않고 말이다.“문채연한테 왜 가만히 있으라고 안 하세요? 걔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면 제가 눈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목을 졸랐겠어요?”“억지 부리지 마!”박진성은 핏발이 선 눈으로 민여진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치며 이를 갈았다.“또 피해자 행세야? 채연이가 반항하지 않은 건 단지 착해서야.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그런 게 그게 네가 걔한테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아니잖아!”“착해요?”민여진은 고개를 숙였다. 죽기 직전 울부짖던 망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게 착한 거라고?’“진성 씨... 당신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군요...”“맞아.”박진성은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널 계속 감싸줬지. 너 같이 악독한 여자는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지!”“따라와!”그는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민여진은 맨발이었다. 발바닥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런데 현관문이
민여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달려가 벽에 바짝 붙었다.박진성의 경멸 어린 비웃음이 들려왔다.“민여진, 너도 죽는 게 무서운가 보지? 난 네가 세상 무서운 게 없어서 감히 채연이를 건드린 줄 알았잖아.”박진성의 차가운 말은 창고 안의 차가운 기운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앞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만약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거짓말이고 망고를 죽인 범인도 문채연이며 또 이 모든 게 그 여자의 계략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후회할 건가요?”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망고를 죽인 범인이 문채연이라고?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계략이었다고?’왠지 모르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민여진을 쏘아보았다.“민여진,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리고 채연이를 모함해!”박진성의 마지막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널 믿었던 게 잘못이었어! 그 때문에 채연이가 큰일 날 뻔했잖아!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얌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풀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물리면 네 책임이야!”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박진성은 사람들을 데리고 뒷마당을 떠났고 문 앞에 묶인 사냥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곧 달려들 것만 같았다.이 순간, 공포가 민여진을 덮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축축한 공기와 함께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은 벽을 타고 흘러내려 민여진의 몸을 적셨다.오한과 열이 번갈아 가며 몰려왔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문득 커다란 천둥소리와 함께 민여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사냥개의 흥분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사냥개가 민여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민여진은 사냥개와 자신의 거리가 손바닥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오래된 창고는 사냥개가 묶인 쇠사슬이 흔들리는 힘에 따라 떨렸다.“
‘민여진, 결국 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가장 초라하고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그녀는 하필이면 사냥개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쓰러졌고 코앞까지 다가온 사냥개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잃었다.오한과 발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녀는 꿈을 꾸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망고인 것 같았다. 망고는 그녀의 얼굴을 핥고 또 핥았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차가워졌다.마침내 비가 그쳤다.박진성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안개가 자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날이 밝을 것이다.그때, 코트를 입은 서원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오늘 웬일로 다들 여기 모였어?” 그중 경호원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원은 본능적으로 이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 “민여진 씨는 어디 있어?!”경호원은 뒷마당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대표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거든. 민여진 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대표님께서 뒷마당 창고에 가둬 버리셨어. 사냥개도 같이 가뒀으니까 아마 지금쯤 엄청 겁에 질려 있을걸.”‘뒷마당 창고에 가뒀다고?’서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에서 깨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와이퍼를 최대로 작동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창고의 얇은 철판이 비를 막아줄 리 없었다.이 추운 날씨에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뛰쳐나갔다.경호원이 당황하며 그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제 정신이야? 설마 그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대표님 성격 몰라? 허락도 안 받고 반항하려는 거야? 미쳤어?!”“놔!”서원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뒷마당으로 달려갔다.이층에서 박진성은 검은 그림자가 창고 쪽으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이 정말 민여진이란 말인가? 고집불통에 사고뭉치, 툭하면 자신을 화나게 만들던 민여진이 맞단 말인가? 왜 이 순간, 나는 차갑게 식은 시체를 안고 있는 것 같지?’박진성은 심지어 민여진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핏발 선 눈으로 거의 죽어가는 민여진을 안고 있는 박진성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가 흔들릴 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박진성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고 민여진을 욕조에 넣었다.“민여진! 민여진!”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정신 차려! 내 말 안 들려?!”잠깐 창고에 가둬 두고 벌을 준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박진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벌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민여진이 숨을 멈출까 봐 두려웠다.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그의 심장은 찢어질 것 같았다.민여진의 몸에 온기가 돌아오자 그는 황급히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바탕 소동에 그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쥐 죽은 듯 서 있었다. 박진성이 지친 얼굴로 내려오자 갑갑한 분위기에 아무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다들 돌아가.”박진성의 말에 마치 해방된 것처럼 모두 황급히 나갔고 오직 서원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아팠다.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적은 없었다.그의 꼼짝않는 모습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가 봐.”서원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대표님, 잠시만 기다려도 될까요? 의사가 민여진 씨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싶습니다.”이 말에 박진성은 불쾌해졌다. 서원은 선을 넘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그의 눈이 갑자기 좁혀지며 시선은 차갑고 냉담해졌다. 얼어드는 주위의 기운에 서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서원아, 내가
민여진은 반드시 살아야 했다.만약 그녀가 죽어버리면 박진성은 후회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마음에 무너져내릴 것이다.하지만 만약 그때 호텔에서 보낸 차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박진성 역시 민여진과 함께 빗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그런 건 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걸까?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잠근 후 병실로 나왔다. 병실에는 민여진이 침대 위에 누워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면서까지 민영미를 찾고 있었다.병실을 나서려던 박진성은 민여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박지성, 살아야 돼... 넌 살아야 해.”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파도가 일었다.뜨거운 불길 속에서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박진성을 등에 업으며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박진성,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그 순간, 몸이 겹쳐지는 듯한 기분에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구해준 여자가 민여진이라고 생각했던 걸까?그럴 리 없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사람은 문채연이었다....3일이 꼬박 지나고 나서야 민여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그 크고 따뜻한 손의 주인은 박진성 말고 없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식은땀에 젖은 등을 침대에서 떼어내며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모두가 살아있었다. 이제야 살아있다는 게 실감 났다.하지만 목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을 뻗어 물컵을 찾으려던 그때, 박진성이 선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되찾을 민여진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컵을 건네주었다.민여진은 간단한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고개를 숙여 물을 마셨다.그녀가 물을 다 마시자 박진성은 물컵을 한쪽으로 치워주었다. 민여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뭐 좀 물어볼게. 그때, 나 왜 구해준 거야? 우리 둘 다 죽
박진성은 점점 험난해지는 길에 차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민여진은 이미 정신을 잃었고 푸르스름하던 얼굴은 따뜻해진 환경 속에서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민여진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계속 민영미만 찾아댔다.아무리 극한의 상황으로 몰려도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민영미뿐이었다.박진성은 이제 더 이상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민영미는 민여진에게 거의 반쪽 같은 존재였다.박진성은 이를 꼭 악문 채 민여진을 달랬다.“여진아, 버텨. 네가 버텨야, 네가 깨어나야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어. 이제 벌써 1년 넘게 못 만났잖아. 그러니까 더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주머니를 위해서라도 견뎌야 해!”하지만 하늘은 박진성의 편이 아니었던 건지, 잘 가던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버렸다.차는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 버렸고 우박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박진성은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둘러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려 빗속을 달렸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려보려 해도 날씨 탓인지 박진성의 두 다리는 얼음에 달라붙어 버린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한기에 그의 두 다리에서는 고통이 밀려왔고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굳어갔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무감각해진 발바닥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이대로 가다가는 박진성도 힘없이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 날씨에 두 사람 모두 쓰러지면 둘 다 죽고 말 것이다.“박... 박진성...”드디어 박진성의 재킷 속에서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돌아가... 차 안에 있으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거야...”민여진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아주 평화롭게 느껴졌다.“우리 엄마 잘 부탁해.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니까...”“닥쳐!”박진성이 절규했다. 목구멍이 아릿해 왔고 얇은 입술은 불안함에 덜덜 떨렸다.“넌 살아! 넌 꼭 살아야 해!”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얼음장 같은 칼날이 목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그따위 연회에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다.호텔 지배인은 더 이상 박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경호원들에게 그를 뒤 따라가라고 지시했다.박진성은 거센 빗속으로 돌진했다. 거센 빗줄기에 몸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지금 내리는 비는 비가 아니라 칼날처럼 느껴졌다. 한기를 잔뜩 머금은 빗물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진성의 피부를 무자비하게 긁고 있었다.박진성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민여진! 민여진! 얼른 나와!”그는 호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30분 안에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산 아래로 내려가며 민여진을 찾던 도중, 산어귀 버스정류장에서 박진성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우산을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는 어떻게든 비를 피해 보려 한 것 같았으나 강한 바람 때문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머리카락은 옷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추위에 몸을 떨며 구석에 웅크린 민여진은 마치 버려진 길고양이 같았다.무언가가 박진성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민여진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땅에 떨어진 우산은 바람에 날려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민여진은 그제야 낮게 중얼거렸다.“버스가...”“뭐?”“막차가, 안 왔어.”민여진도 박진성의 곁에 남을 것을 결심한 상태였다. 민영미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이 악물고 기꺼이 살아갈 생각이었다.“너, 떠날 생각이었어?”어금니를 꽉 깨문 박지성이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나온 거야? 여기는 남연이니까, 여기서 숨어버리면 널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민여진은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박진성의 힘이 더욱 세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다리에서는 자꾸 힘이 풀렸다.그렇게 민여진은 박진성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민여진
여자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장미처럼 싱그러운 몸매를 자랑하며 요염한 눈빛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박진성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그의 몸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풍겼다.“너 누구야? 누가 널 들여보낸 거야!”박진성의 고함에 깜짝 놀란 여자가 다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대표님... 우선 화내지 마시고, 고 대표... 고 대표님이... 이번에 한몫 크게 챙기고 싶다고 저를 보내신 거예요...”“당장 꺼져!”박진성은 이를 꽉 깨문 채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방 안에 퍼진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자 알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다. 그는 침대 위에 있던 모든 물건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그 여자가 손댄 모든 것들이 꼴 보기 싫었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해줬을 거야.”얼굴이 창백해진 여자는 거의 벗겨진 옷도 신경 쓰지 못하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잠깐만!”박진성이 나가려던 여자를 불러세웠다.여자는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설마 박진성이 요염한 그녀의 몸매에 홀려 다시 흥미를 보이는 건 아닐까?다시 뒤돌아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날카로운 눈빛의 박진성이었다.“민여진 어디 있어?”“뭐... 뭐라고요?”박진성이 앞으로 다가가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묻잖아! 방에 있던 여자 어디 갔냐고!”“아, 그 얼굴 빻은...”여자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려던 그때, 박진성의 압도적인 기세에 휘둘린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버린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몰라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말했다.“저는 그냥 고 대표가 저를 여기에 보냈다는 사실만 말했어요. 그리고 샤워하고 나와보니까 이미 없더라고요. 그 후부터는... 아무것도 몰라요...”“꺼져!”분노에 차 핏줄까지 선 박진성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민여진이 사라졌다. 그녀에게는 휴대폰도 없었고 밖에서는 비가
너무 아팠다. 온몸이 너무 아파서 바들바들 떨렸다.민여진의 눈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오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억지로 삼켜냈다. 감옥에서 진작 깨달았듯 세상에서 제일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 눈물이었다.“괜찮으세요?”그 순간,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추더니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왜 혼자 계세요? 무슨 일 있어요?”민여진이 고개를 돌리자 잠시 침묵하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앞이 안 보이시나요?”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텅 빈 듯 공허한 민여진의 눈이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 여자가 지금 이런 곳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여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곧 겨울인데, 날씨도 안 좋아요. 안 추워요? 어떻게 이런 산까지 올라온 거예요?”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했다.그녀는 민여진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며 말했다.“아무래도 산에서 내려가시려는 것 같은데, 우선 이거 들고 가세요. 오른쪽으로 꺾으면 버스 정류장이 있거든요. 30분 뒤면 버스 막차가 올 거예요. 여기는 산 중턱이라 최대한 빨리 걸어가야 할 거예요. 저는 연회에 참석해야 해서 같이 가 드리지는 못할 것 같네요. 조심히 가세요.”여자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다.민여진은 여자에게서 받은 우산을 손에 꼭 쥐었다. 손잡이에는 아직 여자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민여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누구였던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방금 여자가 얘기해준 오른쪽에 정류장이 있다는 말이었다.민여진은 우산을 잡고 손을 뻗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드디어 그녀의 손끝에 차가운 철제 틀이 만져졌다. 그녀는 그 틀을 따라가며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여자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30분 뒤에 막차가 올 것이다.민여진은 멍하니
여자는 말을 마치고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직원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며 일부러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했다.“아가씨, 박 대표 옆에 있는 거 보면 바보 천치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알겠죠? 나가서 소파에 앉아 있어요. 일 다 끝나면 부르겠죠.”뭘 안다는 걸까?박진성이 여자를 골라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걸까>민여진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억지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국, 저 여자는 박진성이 선택한 여자였으니 민여진에게는 아무런 불평을 할 자격이 없었다.결국, 민여진은 박진성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민여진이 벽을 더듬으며 문 쪽으로 나가자 직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앞이 안 보여요?”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해서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직원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눈도 안 보이는 사람이 박진성의 곁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말 저 여자가 단순한 비서나 식모인 걸까?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고승범의 명령을 떠올리면 조금의 늑장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민여진은 홀로 벽을 더듬으며 그 벽을 따라 걸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낯선 환경에서 오직 본능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다가 호텔 경비와 부딪치게 되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경비는 연신 사과를 건네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흉측한 민여진의 얼굴에 표정을 굳혔다.호텔은 관광 사업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곳으로서 아직 정신 운영을 시작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 호텔에 묵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이런 곳에서 마주한 민여진의 얼굴은 경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입고 있는 옷도 명품 브랜드가 아니었던 탓에 경비는 민여진이 누군가의 파트너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어디서 오신 거예요?”경비는 마음속으로 이미 민여진에 대해 마음대로 단정 짓고 말했다.“왜 10층 복도에
박진성은 순순히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왜 그래?”민여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싫어. 입장 바꿔 한 번 생각해 봐. 만약 진성 씨가 나라면,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롱당할 자신 있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말을 내뱉은 민여진도 자신이 한 말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미친 걸까? 무슨 배짱으로 박진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에게 반항하는 걸까? 박진성이 이때까지 원했던 건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었는데.그래야만 민영미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박진성이 그녀보다 더 먼저 말을 꺼냈다.“알겠어.”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미안해, 내가 네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네 말이 맞아. 사람들이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하겠지. 하지만 너는 마음껏 비꼬고 조롱하려 할 거야. 네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호텔에서 편히 쉬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민여진은 흠칫 놀라며 박진성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생각보다 더 큰 민여진의 반응에 박진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막무가내로 너 하나 이해 못 해줄 줄 알았어?”방 밖에 있던 직원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매니저님께서 연회가 시작됐다고 하셔서요. 직원분들 다 모이셨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박진성은 이미 준비해둔 정장을 차려입고 민여진에게 말했다.“방에서 쉬고 있어. 배고프면 침대 맡에 있던 전화 눌러. 1번 누르면 카운터로 연결될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다녀올게.”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한
박진성이 입을 열어 물었지만 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던 박진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민여진, 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네 인생을 망치고, 너의 모든 걸 다 파괴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리고, 너도 붙잡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까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엄마를 만나고도 날 떠나고 싶다면, 그땐 널 놓아줄게.”말을 마친 박진성은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민여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빠르고 선명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박진성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한 관광 개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박진성의 직접 나와 거래처와 조율을 진행해야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오래 걸리면 일주일, 짧아도 5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박진성은 민여진의 마음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혼자 남겨진다면 다시 그를 떠나려 할 게 분명했다.“그렇게까지 오래 걸려?”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일단 거래처가 너무 외딴곳에 있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해서, 이번만큼은 시간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그래, 알겠어.”박진성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민여진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진작 다 나았지만 여전히 민여진이 직접 숟가락을 들어주길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박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남연으로 가자.”그 말에 민여진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몰라. 최소 5일은 걸릴 거야. 널 데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리고 난 아직도 두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해.”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방으로 돌아가
남자의 힘은 셌고 민여진의 가녀린 어깨는 박진성의 한쪽 팔에 꽉 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개를 재빨리 돌린 민여진이 말했다.“놔.”“대답부터 해.”박진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설마 민여진의 마음은 여전히 방현수에게 가 있는 걸까?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건가?민여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도 굳이 박진성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몸은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박진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모르겠어.”“내가 맞혀볼까?”박진성의 시선은 민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채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방현수? 그것도 아니면, 아기 때문인가?”아이 얘기가 나오자 민여진의 동공이 본능적으로 흔들렸다. 박진성은 그런 민여진의 변화를 바로 캐치하고 표정을 찌푸렸다.박진성이 말한 아이는 오늘 두 사람이 발견한 차 안에 갇혀 있던 아이였지만 민여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과 민여진 사이에 생겼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설마 그사이에 박진성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걸까?박진성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휩쌌다.그는 민여진의 머리 위에 턱을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여진에게 왜 아이를 지웠냐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 얘기는 둘 사이의 아픔이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나... 나 먼저 갈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재빨리 박진성의 품에서 벗어나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옷이 젖어버린 탓에 민여진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민여진이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강태화가 들고 온 약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로 내려온 민여진을 발견한 강태화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마침 잘 오셨네요, 민여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