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달려가 벽에 바짝 붙었다.박진성의 경멸 어린 비웃음이 들려왔다.“민여진, 너도 죽는 게 무서운가 보지? 난 네가 세상 무서운 게 없어서 감히 채연이를 건드린 줄 알았잖아.”박진성의 차가운 말은 창고 안의 차가운 기운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앞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만약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거짓말이고 망고를 죽인 범인도 문채연이며 또 이 모든 게 그 여자의 계략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후회할 건가요?”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망고를 죽인 범인이 문채연이라고?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계략이었다고?’왠지 모르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민여진을 쏘아보았다.“민여진,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리고 채연이를 모함해!”박진성의 마지막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널 믿었던 게 잘못이었어! 그 때문에 채연이가 큰일 날 뻔했잖아!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얌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풀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물리면 네 책임이야!”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박진성은 사람들을 데리고 뒷마당을 떠났고 문 앞에 묶인 사냥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곧 달려들 것만 같았다.이 순간, 공포가 민여진을 덮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축축한 공기와 함께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은 벽을 타고 흘러내려 민여진의 몸을 적셨다.오한과 열이 번갈아 가며 몰려왔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문득 커다란 천둥소리와 함께 민여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사냥개의 흥분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사냥개가 민여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민여진은 사냥개와 자신의 거리가 손바닥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오래된 창고는 사냥개가 묶인 쇠사슬이 흔들리는 힘에 따라 떨렸다.“
‘민여진, 결국 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가장 초라하고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그녀는 하필이면 사냥개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쓰러졌고 코앞까지 다가온 사냥개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잃었다.오한과 발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녀는 꿈을 꾸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망고인 것 같았다. 망고는 그녀의 얼굴을 핥고 또 핥았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차가워졌다.마침내 비가 그쳤다.박진성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안개가 자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날이 밝을 것이다.그때, 코트를 입은 서원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오늘 웬일로 다들 여기 모였어?” 그중 경호원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원은 본능적으로 이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 “민여진 씨는 어디 있어?!”경호원은 뒷마당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대표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거든. 민여진 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대표님께서 뒷마당 창고에 가둬 버리셨어. 사냥개도 같이 가뒀으니까 아마 지금쯤 엄청 겁에 질려 있을걸.”‘뒷마당 창고에 가뒀다고?’서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에서 깨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와이퍼를 최대로 작동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창고의 얇은 철판이 비를 막아줄 리 없었다.이 추운 날씨에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뛰쳐나갔다.경호원이 당황하며 그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제 정신이야? 설마 그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대표님 성격 몰라? 허락도 안 받고 반항하려는 거야? 미쳤어?!”“놔!”서원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뒷마당으로 달려갔다.이층에서 박진성은 검은 그림자가 창고 쪽으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이 정말 민여진이란 말인가? 고집불통에 사고뭉치, 툭하면 자신을 화나게 만들던 민여진이 맞단 말인가? 왜 이 순간, 나는 차갑게 식은 시체를 안고 있는 것 같지?’박진성은 심지어 민여진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핏발 선 눈으로 거의 죽어가는 민여진을 안고 있는 박진성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가 흔들릴 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박진성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고 민여진을 욕조에 넣었다.“민여진! 민여진!”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정신 차려! 내 말 안 들려?!”잠깐 창고에 가둬 두고 벌을 준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박진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벌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민여진이 숨을 멈출까 봐 두려웠다.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그의 심장은 찢어질 것 같았다.민여진의 몸에 온기가 돌아오자 그는 황급히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바탕 소동에 그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쥐 죽은 듯 서 있었다. 박진성이 지친 얼굴로 내려오자 갑갑한 분위기에 아무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다들 돌아가.”박진성의 말에 마치 해방된 것처럼 모두 황급히 나갔고 오직 서원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아팠다.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적은 없었다.그의 꼼짝않는 모습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가 봐.”서원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대표님, 잠시만 기다려도 될까요? 의사가 민여진 씨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싶습니다.”이 말에 박진성은 불쾌해졌다. 서원은 선을 넘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그의 눈이 갑자기 좁혀지며 시선은 차갑고 냉담해졌다. 얼어드는 주위의 기운에 서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서원아, 내가
의사는 말을 하다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박진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민여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의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박진성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언제쯤 깨어날까요?”“잘 모르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깨어날 겁니다.”“알겠습니다.”의사를 배웅하고 돌아온 박진성은 다시 민여진의 곁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악몽에서 마침내 깨어난 민여진은 불안한 숨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침대에 일어나 앉는 순간,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목숨이 질기다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남은 유일한 장점인가? 그런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다니...’그녀는 차가운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방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서원 씨에요?”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밤새도록 발코니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던 박진성은 그 말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와 차갑게 비꼬았다.“눈 뜨자마자 서원이부터 찾는군.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지?”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에 가득한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박진성은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분명 그녀는 벌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말해! 벙어리야?”민여진은 떨리는 입술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원 씨와는 별 사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방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우연히 온 건가? 내가 죽든 말든 박진성은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갈 인간인데.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 설마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건가?’“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은 많아.”박진성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민여진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그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민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민여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몹시 갈증이 났다. 그녀는 옷장에서 아무 겉옷이나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을 마셨다. 이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진성의 발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민여진은 입을 열었다.“서원 씨 맞아요?”밖에 있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민여진 씨,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서원이 아니라 상우입니다.”“상우?”남자는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대표님 밑에서 서원과 함께 일하는 경호원입니다. 예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상우는 말하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예전에 민여진이 못생기고 눈도 멀었다고 비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그녀가 박진성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민여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상책이었다.민여진도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냉대했던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그저 상우의 말에 미간을 잠시 찡그렸을 뿐이었다.“서원 씨는요? 그 사람이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상우가 말했다.“별일은 아닙니다. 아침에 서원이가 와서 민여진 씨가 뒤뜰 창고에 갇힌 걸 알고 박 대표님 명령을 어기고 구해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박 대표님이 다른 곳으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민여진 씨를 모시겠습니다.”그리고 상우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근데 서원이도 정말 안됐어요. 도박장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엉망진창이고 힘든 곳이거든요. 민여진 씨를 구하려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게 생겼습니다...”민여진 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서원이 박진성의 명령을 어기고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서원은 그 일 때문에 박진성의 처벌을 받아 힘들고 고된 곳으로 보내졌다...박진성의 횡포에 그녀의 심장은 떨렸다. 그에게 거역하는 사람은 누구도 좋은 결말을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민여진, 착각하지 마.”“그럼 아닌가요... 서원 씨가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창고에서 저를 구해 줬다고 벌준 거잖아요?”민여진은 씁쓸하게 웃었다.‘어째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하는 걸까.’“당신 생각엔 내가 죽어야 마땅했겠죠? 그렇죠”“민여진!”박진성은 차갑게 소리쳤다.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네가 죽든 말든 나랑 상관없고 서원이가 도박장에 보내진 것과도 상관없는 일이야. 그놈은 그냥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니까!”민여진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돌아오게 해 주세요, 진성 씨. 제가 잘못했어요.”누군가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제가 구출된 게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창고에 가겠어요. 열흘이고 보름이고 가둬 두세요!”박진성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민여진의 턱을 움켜쥐었다. 민여진은 아픔에 뒷걸음질 치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박진성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서원을 보낸 가장 큰 이유는 서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여진의 곁에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둘 수는 없었다.그런데 민여진이 이렇게 애원하며 매달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창고에 다시 돌아가겠다고까지 하다니.“언제부터 그놈이랑 그렇게 친해졌지? 그놈 때문에 죽을 각오까지 하는 거야? 창고에 열흘, 보름 갇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네 몸으로 거기 하루도 못 버텨!”민여진은 아픔에 몸을 떨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알면서...”박진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싸늘한 기운이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다니, 설마 너 서원 그놈을 사랑하는 거야?”그 말이 튀어나오자 박진성의 심장은 쥐어짜는 듯 아팠다. 민여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사랑?’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랑이란 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사랑을 포기한
민여진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난 그런 적...”“채연이가 너 때문에 지금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있는데 아직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박진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었다.“서원이를 돌려보내 달라고? 좋아. 채연이가 널 용서하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 주지.”‘채연에게 용서를 빌라고?’민여진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망고를 죽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라니. 더 큰 문제는 문채연은 기회를 잡았으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어때? 네 서원이를 돌려받고 싶어?”그는 ‘네 서원이’라는 말로 민여진을 조롱했다.민여진은 솟아오르는 설움을 삼켰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마음은 여전히 아팠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고통 따위가 대수일까?“좋아요. 당신이 약속만 지킨다면 채연에게 용서를 빌게요.”박진성의 검은 눈동자에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며 문 앞에 서 있는 상우에게 말했다.“다섯 시에 채연이네 별장으로 데려다줘. 채연이가 용서할 때까지 데려오지 마.”상우는 박진성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평소 감정 표현에 절제가 있던 박진성이었다.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조차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였기에 상우는 민여진의 존재가 더욱 궁금해졌다.‘그녀는 대체 박진성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문채연조차 박진성에게 이 정도의 영향을 못 미치는데.’다섯 시에 데려다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10분 정도 차이가 났다.상우는 민여진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으며 중얼거렸다.“대표님은 왜 굳이 저한테 민여진 씨를 따로 모셔다주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본인도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되잖아요?”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그의 말을 어렴풋이 듣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당연히 그녀와 같은 차에 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깐의 십여 분조차도.차
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가정부의 말투에서 박진성과 문채연이 한 방에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박진성이 문채연과 함께 자고 나서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억지로 역겨움을 참으며 물었다.“진성 씨는 언제 나오나요?”가정부는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박 대표님 마음이시죠. 한두 시간이면 나오시지 않을까요?”상우는 가정부의 이상한 말투에 불편함을 느끼고 바로 말했다.“그럼 저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민여진 씨는 어제 추위에 떨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찬 바람을 쐬면 안 돼요. 거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가정부는 표정을 바꾸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죄송하지만 채연 씨의 허락 없이는 손님을 거실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현관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 박 대표님이 내려오실 수도 있잖아요.”“무슨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분은 민여진 씨인데!”가정부는 다시 한번 말했다.“죄송합니다.”상우가 또 말하려 했지만 민여진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더 이상 따져 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문채연을 화나게 하면 결과는 더욱 참혹해질 뿐이었다.“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상우는 투박한 목소리로 이것이 단순한 가정부의 횡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했다.“무슨 여기서 기다려요? 민여진 씨, 이제 방금 깨어나서 물도 몇 모금 못 마셨잖아요. 일단 차에 가서 앉아 있다가 대표님이 내려오시면 그때 들어가요.”민여진은 입술을 옅게 끌어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가정부에게 물었다.“여기서 박 대표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문채연 씨를 만날 수 있나요?”가정부가 대답했다.“여기서 기다리시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알겠습니다.”민여진은 심호흡을 하고 현관 앞에 똑바로 섰다.다행히 저녁 무렵이라 해가 거의 져서 햇볕은 강하지 않았지만 따라오는 찬바람은 매서웠다. 바람이 민여진의 바짓단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
남자는 일부러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누가 봐도 억만장자인 박진성의 돈을 뜯어내려 했다.“6천만 원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긴 해요.”박진성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그러자 남녀는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박진성의 죽은 듯한 눈빛은 두 사람을 한없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는 절대 줄 수 없을 것 같네요. 경찰에 신고할 거면 빨리 신고해요. 당신들이 신고 안 하면 내가 직접 신고할 테니까.”“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우릴 신고하겠다는 거예요?”박진성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갔다.“당신들이 친딸을 학대했으니까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구속 사유라고 보는데요.”박진성의 기세에 눌린 남자는 살짝 고개를 움츠리는 듯하더니 이내 뒤에서 등 떠미는 여자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우리 딸을 학대했다는 거예요!”민여진은 점점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참다못한 그녀가 결국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꺼냈다.“한 살 남짓한 여자애를 차에 두 시간 넘게 가둬놨으면서 그게 학대가 아니라고요? 차 안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아요? 여름이 아니라고 해도, 산소 부족한 차 안에 두 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 애는 숨도 똑바로 못 쉬어요! 당신들이 그러고도 부모예요?”드디어 처음으로 화를 낸 민여진의 온몸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박진성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이윽고 다시 표정을 굳히더니 머리 위에 있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CCTV 있는데,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차에 언제 애 가둬놨는지 다 찍혀 있을 텐데요. 같이 경찰서 가서 확인 한 번 해볼까요?”“미친놈인가...”당황한 남자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내 상황 파악을 끝낸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자리를 떴다. 차가 멀리 떠난 후에도 민여진의 귓가에는 여자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민여진
박진성은 늘 민여진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해왔다. 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문채연과 닮아서 그런 줄만 알았지만 민여진이 얼굴을 다친 후에도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민여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색하게만 흘러가는 기류에 대화 주제를 바꿔보고 싶었다. 그 순간,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민여진의 옷깃을 꽉 쥐었다.“왜 그래, 아가? 어디 불편해?”민여진은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응에 조금 긴장하는 듯했지만 이내 당황하지 않고 한 손으로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리다가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자연스럽게 이어진 민여진의 행동에 아이는 다시 울음을 그쳤다.박진성은 곁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이가 자신과 민여진의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그러면 민여진이 민영미의 죽음을 알게 되어도 아이를 위해 억지로 살아가려 하지 않을까? 그저 민여진이 살아있기만 한다면, 잘 살아가기만 한다면 두 번 다시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진성 씨, 박진성 씨?”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민여진이 박진성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있었다. 그가 다급히 대답했다.“어, 왜 그래?”입술을 살짝 깨물던 민여진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굳이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애한테 뭔 일 있는지 한 번 봐줄래? 울음은 그쳤는데 계속 내 옷 잡고 놔주질 않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아.”아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민여진의 옷깃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슬쩍 본 박진성이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배고픈 것 같아.”“배고파서 그래?”민여진은 박진성의 말에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애한테 뭐라도 좀 먹여야 하나? 아니면 애 부모 올 때까지 기다려?”박진성이 입을 열려던 그때, 먼 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뛰어오고 있었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자는 민여진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들고는 그녀를 힘껏 밀쳐냈다.“애 훔
그리고 민여진은 망고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망고라는 그 강아지는 민여진이 울 때마다 함께 낑낑거리던 아이였다. 만약 망고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늘 그래왔듯 민여진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지 않았을까?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민여진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박진성 역시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민여진이 걸음을 멈추었다.하마터면 그녀를 지나칠 뻔하던 박진성도 다급히 멈춰서며 뒤돌아 물었다.“왜 그래?”민여진이 이마를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애 울음소리라고?”박진성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있는 이곳은 교차로였고,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 연인이나 출퇴근 중인 직장인들이었던 탓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일이 잘 없었다.“잘못 들은 거 아니야?”“아니야!”민여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내가 잘못 들었을 리 없어!”민여진은 앞이 안 보일 뿐이지,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귀가 남들보다 더욱 민감했다.“분명 아기 울음소리였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민여진의 말에 박진성은 어쩔 수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쪽에 주차된 차를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차 안에는 겨우 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덩그러니 갇혀 있었다. 얼마나 갇혀 있었던 건지 얼굴과 몸은 이미 땀으로 가득했고 온몸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여기야!”박진성이 민여진에게 상황을 알렸다.“차 안에 아이가 갇혀 있어.”민여진의 혹시나 하던 불안함은 역시나 하는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차창에 몸을 기대 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울음소리는 더욱 명확하게 들려왔다. 울다가 지친 아이의 울음소리에도 점점 힘이 빠졌다.“이대로 뒀다가는 더 못 버틸 거야. 근
‘어디로 가는 걸까?’민여진은 물어봐야 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순순히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민여진에게 둘러 주고 나서야 문을 나섰다.민여진은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도리를 풀어 손에 쥐었다.“다 왔어.”박진성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여진도 차에서 내렸다. 주변은 사람들의 소음과 차량 경적 소리로 가득했다. 아마도 번화가 한복판인 듯했다.박진성은 민여진과 나란히 서지는 않았지만 정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내 손 잡고 가.”그는 전에 없이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민여진은 머리가 텅 빈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다. “어서 오세요.”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여긴 어디야?”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 오늘 박진성의 행동은 평소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곧 알게 될 거야.”박진성은 대답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라는 그의 말처럼 그곳은 강아지 카페였다. 그녀가 입구에 서 있자마자 작은 강아지들이 몰려들어 낑낑거렸다.직원이 웃으며 민여진에게 말했다.“원래 여기는 유기견 보호소였는데, 박 대표님께서 후원을 해 주셔서 카페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유기견들을 돌보고 있지만 예전처럼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아요.”“박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민여진은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오히려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유기견 보호소에 후원을 했다고? 왜? 그는 원래 고양이나 개를 싫어하지 않았나?’그녀가 아직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박진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손 내밀어 봐.”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그녀의 팔에 안겼다.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강아지는 낑낑거렸다.박진성은 강아지를 보며 말했다.“네가 얘를 버렸을 때 내가 여기로 보냈어. 네가 볼 수 있었다면 알았겠지만,
박진성이 민여진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첫 반응은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마치 자신이 섹스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쉬러 왔어.”“쉬러?”“어.”박진성이 말했다.“지금 우리 상태로는 민영미가 금방 눈치챌 거야. 네가 나한테 거부감을 느끼는 게 보여. 다행히 열흘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해 보자.”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박진성은 한발 물러섰다.“불편하면 거절해도 괜찮아.”‘거절?’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민영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진성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진성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뭐라고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일이 생겼는데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민영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괜찮아. 당신만 괜찮다면 여기서 쉬어.”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박진성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박진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민여진이 잠들자 박진성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마음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결국 악몽을 불러왔다.악몽 속에서 민여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졸랐고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민여진은 끔찍한 얼굴로 울부짖었다.“살인자! 네가 우리 엄마를 죽였어! 그런데도 날 속이려고 해? 절대 용서 못 해!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야!”마지막에 민여진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안 돼! 민여진!”박진성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목에는 아직도 숨 막히는 느낌이 남아 있어 그는 숨을 크게 쉬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팔이 저린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꿈이었다.다행히 꿈이었지
“진정한 사이?”박진성은 불쾌한 듯 물었다.“우리 진정한 사이는 어떤데?”그의 질문에 민여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진성이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으니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잘생긴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민여진, 우리는 부부 사이야. 그 사실만 기억해. 난 여러 여자를 사랑할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아. 네가 채연에게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 영원히 널 지켜줄 거야. 우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박진성은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예전처럼 돌아간다고?민여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귓가에는 박진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무슨 뜻일까? 문채연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걸까?’머리가 지끈거렸고 바깥바람이 너무 매서워 생각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박진성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코트가 그녀를 감쌌다.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박진성의 체취만 남았다.낯선 감각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박진성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물었다.“너랑 연기해 달라며?”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나는 배우가 아니라서 네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오늘부터 연습하는 거야. 네가 만족할 때쯤이면 네 어머니도 눈치 못 챌 거야.”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민여진은 두 사람의 거리가 불편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예전처럼 하면 돼.”“예전이 언제인데?”“결혼한 그 2년 동안.”민여진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박진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때 너한테 잘해 주지 않았는데.”오히려 그 시절은 끔찍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그는 민여진을 단순한 욕구 해소 대상으로 여겼다. 잠자리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서재나 3층으로 향했다.“그걸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