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민여진 씨... 이제 그만 가시죠. 오늘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날에 문채연 씨에게 그런 행동을 하시면 안 됐습니다. 정말 문제가 생겼다면 대표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민여진은 서원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원 씨, 그 노숙자... 문채연이 보낸 사람이었어요. 망고를 죽이려고.”“뭐라고요?!”서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민여진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문채연이 그러더군요. 망고가 죽기 전에 계속 별장 쪽을 바라봤다고. 제가 구해 주기를 기다렸다고... 그런데 그때 전 뭘 하고 있었을까요? 새 옷을 사러 갔었어요. 그러니 제가 망고를 살릴 기회를 버린 거예요. 제가 망고를 죽였다고요...”“민여진 씨.”서원은 충격에서 벗어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날 옷 가게에 간 것도 제가 모시고 간 건데 그럼 저도 공범인가요? 그날 우리는 아무도 몰랐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어요. 망고는 분명 민여진 씨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하지만 나 때문에 문채연이 망고에게 손을 댄 거잖아요.”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문채연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연회장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밖에서는 손님들의 환호성과 생일 축하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팔을 꽉 끌어안았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서원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서원은 눈치 빠르게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민여진 씨, 이 일을 공론화하고 싶으신 건가요?”민여진은 이를 악물었다. 참고 또 참으면 언젠가 박진성이 흥미를 잃었을 때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채연의 행동은
민여진은 홀로 별장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오랫동안 멍하니 있다가 졸음이 쏟아져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발로 차며 열어젖혔다.박진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차가운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만큼 냉혹하지는 않았다.“네가 잠이 와?”박진성은 그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채연이 목에 난 흔적, 아무리 감춰도 다 티가 났어. 파티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는지 알아? 얼마나 쑥덕거렸는지 아냐고! 그리고 파티가 끝나는데도 채연이는 집에 오기 싫대. 네 악독한 심보는 언제쯤 잠잠해질 건데!”민여진은 어깨의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2층에서 던져 버릴 기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화를 내는 박진성의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문채연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이었다. 심지어는 강아지 한 마리까지도 가만두지 않고 말이다.“문채연한테 왜 가만히 있으라고 안 하세요? 걔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면 제가 눈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목을 졸랐겠어요?”“억지 부리지 마!”박진성은 핏발이 선 눈으로 민여진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치며 이를 갈았다.“또 피해자 행세야? 채연이가 반항하지 않은 건 단지 착해서야.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그런 게 그게 네가 걔한테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아니잖아!”“착해요?”민여진은 고개를 숙였다. 죽기 직전 울부짖던 망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게 착한 거라고?’“진성 씨... 당신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군요...”“맞아.”박진성은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널 계속 감싸줬지. 너 같이 악독한 여자는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지!”“따라와!”그는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민여진은 맨발이었다. 발바닥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런데 현관문이
민여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달려가 벽에 바짝 붙었다.박진성의 경멸 어린 비웃음이 들려왔다.“민여진, 너도 죽는 게 무서운가 보지? 난 네가 세상 무서운 게 없어서 감히 채연이를 건드린 줄 알았잖아.”박진성의 차가운 말은 창고 안의 차가운 기운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앞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만약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거짓말이고 망고를 죽인 범인도 문채연이며 또 이 모든 게 그 여자의 계략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후회할 건가요?”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망고를 죽인 범인이 문채연이라고? 이 모든 게 문채연의 계략이었다고?’왠지 모르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민여진을 쏘아보았다.“민여진,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리고 채연이를 모함해!”박진성의 마지막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널 믿었던 게 잘못이었어! 그 때문에 채연이가 큰일 날 뻔했잖아!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얌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풀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물리면 네 책임이야!”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박진성은 사람들을 데리고 뒷마당을 떠났고 문 앞에 묶인 사냥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곧 달려들 것만 같았다.이 순간, 공포가 민여진을 덮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축축한 공기와 함께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은 벽을 타고 흘러내려 민여진의 몸을 적셨다.오한과 열이 번갈아 가며 몰려왔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문득 커다란 천둥소리와 함께 민여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사냥개의 흥분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사냥개가 민여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민여진은 사냥개와 자신의 거리가 손바닥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오래된 창고는 사냥개가 묶인 쇠사슬이 흔들리는 힘에 따라 떨렸다.“
‘민여진, 결국 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가장 초라하고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그녀는 하필이면 사냥개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쓰러졌고 코앞까지 다가온 사냥개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잃었다.오한과 발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녀는 꿈을 꾸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망고인 것 같았다. 망고는 그녀의 얼굴을 핥고 또 핥았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차가워졌다.마침내 비가 그쳤다.박진성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안개가 자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날이 밝을 것이다.그때, 코트를 입은 서원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오늘 웬일로 다들 여기 모였어?” 그중 경호원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원은 본능적으로 이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 “민여진 씨는 어디 있어?!”경호원은 뒷마당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대표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거든. 민여진 씨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대표님께서 뒷마당 창고에 가둬 버리셨어. 사냥개도 같이 가뒀으니까 아마 지금쯤 엄청 겁에 질려 있을걸.”‘뒷마당 창고에 가뒀다고?’서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에서 깨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와이퍼를 최대로 작동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창고의 얇은 철판이 비를 막아줄 리 없었다.이 추운 날씨에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뛰쳐나갔다.경호원이 당황하며 그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제 정신이야? 설마 그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대표님 성격 몰라? 허락도 안 받고 반항하려는 거야? 미쳤어?!”“놔!”서원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뒷마당으로 달려갔다.이층에서 박진성은 검은 그림자가 창고 쪽으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이 정말 민여진이란 말인가? 고집불통에 사고뭉치, 툭하면 자신을 화나게 만들던 민여진이 맞단 말인가? 왜 이 순간, 나는 차갑게 식은 시체를 안고 있는 것 같지?’박진성은 심지어 민여진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핏발 선 눈으로 거의 죽어가는 민여진을 안고 있는 박진성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가 흔들릴 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박진성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고 민여진을 욕조에 넣었다.“민여진! 민여진!”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정신 차려! 내 말 안 들려?!”잠깐 창고에 가둬 두고 벌을 준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박진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벌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민여진이 숨을 멈출까 봐 두려웠다.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그의 심장은 찢어질 것 같았다.민여진의 몸에 온기가 돌아오자 그는 황급히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바탕 소동에 그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쥐 죽은 듯 서 있었다. 박진성이 지친 얼굴로 내려오자 갑갑한 분위기에 아무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다들 돌아가.”박진성의 말에 마치 해방된 것처럼 모두 황급히 나갔고 오직 서원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아팠다.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적은 없었다.그의 꼼짝않는 모습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가 봐.”서원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대표님, 잠시만 기다려도 될까요? 의사가 민여진 씨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싶습니다.”이 말에 박진성은 불쾌해졌다. 서원은 선을 넘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그의 눈이 갑자기 좁혀지며 시선은 차갑고 냉담해졌다. 얼어드는 주위의 기운에 서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서원아, 내가
의사는 말을 하다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박진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민여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의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박진성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언제쯤 깨어날까요?”“잘 모르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깨어날 겁니다.”“알겠습니다.”의사를 배웅하고 돌아온 박진성은 다시 민여진의 곁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악몽에서 마침내 깨어난 민여진은 불안한 숨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침대에 일어나 앉는 순간,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목숨이 질기다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남은 유일한 장점인가? 그런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다니...’그녀는 차가운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방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서원 씨에요?”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밤새도록 발코니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던 박진성은 그 말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와 차갑게 비꼬았다.“눈 뜨자마자 서원이부터 찾는군.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지?”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에 가득한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박진성은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분명 그녀는 벌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말해! 벙어리야?”민여진은 떨리는 입술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원 씨와는 별 사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방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우연히 온 건가? 내가 죽든 말든 박진성은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갈 인간인데.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 설마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건가?’“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은 많아.”박진성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민여진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그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민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민여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몹시 갈증이 났다. 그녀는 옷장에서 아무 겉옷이나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을 마셨다. 이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진성의 발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민여진은 입을 열었다.“서원 씨 맞아요?”밖에 있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민여진 씨,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서원이 아니라 상우입니다.”“상우?”남자는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대표님 밑에서 서원과 함께 일하는 경호원입니다. 예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상우는 말하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예전에 민여진이 못생기고 눈도 멀었다고 비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그녀가 박진성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민여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상책이었다.민여진도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냉대했던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그저 상우의 말에 미간을 잠시 찡그렸을 뿐이었다.“서원 씨는요? 그 사람이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상우가 말했다.“별일은 아닙니다. 아침에 서원이가 와서 민여진 씨가 뒤뜰 창고에 갇힌 걸 알고 박 대표님 명령을 어기고 구해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박 대표님이 다른 곳으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민여진 씨를 모시겠습니다.”그리고 상우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근데 서원이도 정말 안됐어요. 도박장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엉망진창이고 힘든 곳이거든요. 민여진 씨를 구하려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게 생겼습니다...”민여진 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서원이 박진성의 명령을 어기고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서원은 그 일 때문에 박진성의 처벌을 받아 힘들고 고된 곳으로 보내졌다...박진성의 횡포에 그녀의 심장은 떨렸다. 그에게 거역하는 사람은 누구도 좋은 결말을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민여진, 착각하지 마.”“그럼 아닌가요... 서원 씨가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창고에서 저를 구해 줬다고 벌준 거잖아요?”민여진은 씁쓸하게 웃었다.‘어째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하는 걸까.’“당신 생각엔 내가 죽어야 마땅했겠죠? 그렇죠”“민여진!”박진성은 차갑게 소리쳤다.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네가 죽든 말든 나랑 상관없고 서원이가 도박장에 보내진 것과도 상관없는 일이야. 그놈은 그냥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니까!”민여진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돌아오게 해 주세요, 진성 씨. 제가 잘못했어요.”누군가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제가 구출된 게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창고에 가겠어요. 열흘이고 보름이고 가둬 두세요!”박진성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민여진의 턱을 움켜쥐었다. 민여진은 아픔에 뒷걸음질 치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박진성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서원을 보낸 가장 큰 이유는 서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여진의 곁에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둘 수는 없었다.그런데 민여진이 이렇게 애원하며 매달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창고에 다시 돌아가겠다고까지 하다니.“언제부터 그놈이랑 그렇게 친해졌지? 그놈 때문에 죽을 각오까지 하는 거야? 창고에 열흘, 보름 갇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네 몸으로 거기 하루도 못 버텨!”민여진은 아픔에 몸을 떨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알면서...”박진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싸늘한 기운이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다니, 설마 너 서원 그놈을 사랑하는 거야?”그 말이 튀어나오자 박진성의 심장은 쥐어짜는 듯 아팠다. 민여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사랑?’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랑이란 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사랑을 포기한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