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문이 바닥을 기어 일어나려 하자 지남은 발로 그의 가슴을 짓뭉갰다. 주영문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너희는 대체 누구야!”“시골 동네에서 왕 노릇을 오래 하더니 네가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것 같지?”신연우는 여유롭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물 안의 개구리 주제에 천하를 가진 황제가 된 줄 알았나 본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심히 거슬려서 말이야.”주영문은 자신을 밟고 있는 건장한 사내보다 저렇게 온화한 얼굴로 말하는 신연우가 더 두려웠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너… 나 건드리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줄 수 있어! 악!”지남이 인정사정 없이 주영남을 걷어차자 신연우도 주저 없이 방망이를 휘둘러 그의 종아리를 가격했다.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주영문의 처참한 비명이 골목 안에서 울려 퍼졌다.신연우는 고통에 나뒹구는 주영문의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유월영이 주영문에게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화풀이 상대가 절실히 필요했다.신연우는 온화한 표정을 지우고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그래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다리는 앞으로 병신이 되겠지만. 교훈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때 잘 생각하고 행동해. 이 세상에는 네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있는 법이야.”말을 마친 그는 지남과 함께 뒤돌아 섰다.지남은 앞서 가는 신연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신연우는 절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온화한 대학 교수가 아니었다. 그의 본 모습은 누구보다 잔인하고 흉포했다.‘그러니까 사장님이 저 집안에 만만한 인간은 없다고 했겠지.’사업가 신현우, 의사 신연준, 해외에서 증권사를 운영 중인 신경아, 그리고 대학 교수 신연우까지 전부 다 자신의 분야에서 엘리트로 추앙받는 인물들이었다.차에 오른 신연우가 담담한 어조로 지남에게 물었다.“현우는 왜 직접 안 온 거지?”“사
주영문의 집에서 나온 노현재는 곧장 병원으로 갔다.복도를 걷던 그는 마침 수술실에서 재봉합을 마치고 나오는 연재준과 마주쳤다.서지욱도 함께였다. 그들을 본 노현재는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재준아.”가까이 다가가 보니 연재준의 안색은 생각보다 안 좋았다. 노현재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이런 줄 알았으면 주영문 그 자식 그냥 죽여버리는 건데.”“무슨 말이야?”서지욱이 물었다.“너 주영문 벌써 찾아갔었어?”“그래. 매화 마을 일은 내가 해결했어.”노현재는 가져온 계약서를 하정은에게 건네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거기 주민들은 오늘 밤 안으로 이사를 가게 될 거야.”서지욱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별거 안 했어. 주영문을 무릎 꿇리니까 알아서 사인해 주던데?”그들이 병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안에 있던 유월영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노현재가 말했다.“그런데 내가 좀 늦었더라. 이미 누가 와서 주영문 한쪽 다리를 부러뜨려 버렸던데?”그러니까 노현재는 이미 다리가 부러진 주영문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렸다는 얘기였다.노현재의 잔인함은 그토록 끈질기던 주영문마저 도망가게 만들었다.간호사는 조용히 연재준의 침대를 끌고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에 들어선 노현재는 유월영을 보고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뭐야? 유 비서도 재준이랑 같은 병실을 쓰고 있었네? 유 비서도 다쳤어? 심각해?”유월영은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무시에 기죽거나 당황할 노현재가 아니었다.“아직도 지난 번에 유 사장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귀뺨도 맞아줬잖아. 부족해?”이미 노현재에게 당한 적이 있기에 유월영은 그에게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게다가 나중에 조서희마저 안 좋은 일을 당했으니 반감은 커져만 갔다.“혹시 친구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것 때문에 그래?”그는 방긋방긋 웃으며 해명했다.“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그 사건
유월영은 가만히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연재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이게 다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상처가 다시 벌어진 건데 모른 척할 거야?”“뭘 해드려야 하죠? 나가서 꽃이라도 사올까요? 원하는 게 있으면 대놓고 말을 하세요. 예를 들면 물 안 떠다 주면 사진을 공개해 버리겠다든가. 그러면 제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 아니에요.”결국 연재준은 황당함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너 때문에 화병 나서 죽으면 그때 그 사진들을 인쇄해서 내 무덤에 붙일 거야. 사람들 다 보게.”유월영도 화가 치밀었다.“미친 거 아니에요?”연재준은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는지 이불을 걷고 상처를 부여잡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유월영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다가가서 물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노현재까지 여기 있는데 상처 또 벌어졌다고 찾아와서 난리를 부리면 주영문 같은 꼴이 되기 싫었다.“목 마르면 차라리 하 비서를 부르지 그래요? 밖에 대기하고 있는데.”연재준은 물컵을 받지 않고 그녀가 먹여줄 때까지 기다렸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유월영은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손이 다친 것도 아닌데 꼭 이래야만 할까?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목을 충분히 축인 연재준은 만족스럽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며 활짝 웃었다.“주영문 혼내줬어.”“알아요.”“그런데 주영문 다리는 누구 걸작일까?”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아냐고요?’“사방에 적을 두었을 테니 누구한테 맞아도 이상하지 않죠.”연재준이 말했다.“난 누가 했는지 알겠는데.”“누군데요?”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아.”유월영은 미친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침대로 돌아가려고 뒤돌아섰다.연재준은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고 유월영은 반사적으로 손길을 뿌리쳤다.본능적인 거부에 그는 잠깐 당황하는 듯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몸에서도 냄새 나. 좀 닦아줘.”유월영이 그 부탁을
유월영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가가서 한 손으로 그의 옷을 벗겨주었다.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가슴으로 드리우면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그는 그녀의 날렵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피부의 솜털마저 똑똑히 보였다.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던 연재준의 눈빛이 점점 혼탁해졌다.그는 최근에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현시우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일부러 약 올리려고 더 거칠게 다루었는데 전혀 성취감이 들지 않았다.조금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유월영은 점점 뜨거워지는 그의 체온을 느끼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연재준은 눈빛에 드리웠던 욕정을 순식간에 억누르고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일부러 여유 있는 척, 재촉했다.“빨리 좀 해. 내 맨 살을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니면 내가 다쳐서 아무것도 못할 때에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야?”유월영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하며 속으로 후회했다.그러면서도 깨끗한 환자복을 가져와서 입혀주었다. 연재준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지금은 욕구가 올라와도 참아야 할 때였다. 그녀에게 들키는 순간 도망갈 것이다.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옆에 붙잡아두려면 자제해야 했다.분명 응급 처치가 끝났을 때는 이틀만 입원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3일째가 되자 갑자기 수액이 남았다면서 병원 측에서 퇴원을 거부했다.“퇴원이요? 안 되는데요. 모레까지 수액 남았어요.”유월영은 당황하며 간호사를 재촉했다.“수액이 어떻게 남을 수 있죠? 분명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이틀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그녀의 추궁에도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잘 모르겠고 담당 선생님 지시예요. 어쩌면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서 수액을 더 처방했ㅆ을 수도 있거든요.”말을 마친 간호사는 바쁘다고 가버리고 유월영만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있었다.이
유월영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랩을 가져오게 했다. 랩으로 상처 부위만 감싸면 간단한 샤워를 살 수 있었다.안 그래도 어제는 물수건으로 닦기만 해서 온몸이 찝찝했다.병실 공간은 컸지만 방음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연재준은 병상에 누워 해외 바이오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고 잔 실수의 연속이었다.바이오도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해한다며 다음에 통화하자고 했다.“괜찮습니다. 계속하시죠.”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일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점점 생각이 먼산으로 갈 것 같았다.남자는 본능이 앞서는 동물이었다.남녀관계에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해줬던 사소한 일상을 기억한다. 예를 들면 날이 더울 때 선물하는 아이스크림, 추울 때 챙겨주는 외투 같은 사소한 것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하지만 연재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밤이었다.그와 유월영은 그런 쪽으로 아주 잘 맞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의 취향에 맞춰주었다.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인형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둘이 처음 만나고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는 딱히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유월영은 그가 흥미를 느낀 첫 존재였다.첫 잠자리가 끝나고 이어지는 한달 동안 그들은 매일 같이 출근하고 저녁이면 연재준의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밤새 서로를 안았다.소녀였던 유월영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가 다 가르쳐야 했다.업무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스승이었고 정사에서도 그랬다.그는 오늘 가르친 것을 내일 응용하도록 그녀에게 시켰다. 그가 그녀에게만 내준 숙제와도 같았다. 만약 그녀가 숙제를 완수하지 못하는 날이면 벌로 될 때까지 연습하게 했다. 매일 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그만 자자고 애원했다.‘그땐 그랬었지.’욕실에서 물소리가 끊어지고 연재준의 사색도 끊겼다.그는 담담히 시선을 내리
유월영은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연재준은 물수건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쌀쌀맞게 말했다.“난 안 급해. 너만 괜찮다면 말이지.”괜찮을 리가 없었다. 엄마의 병이 완쾌되기 전까지 그녀는 마음을 졸일 것이다.다만 매번 언니에게 전화할 때마다 상태가 안정적이라고 하기에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고 싶었다.연재준이 제시한 조건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그녀는 말없이 수건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새 물수건을 가지고 돌아와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자세를 바꾸더니 당당하게 말했다.“잔등 좀 닦아줘. 피가 말라붙었는지 간지럽네.”“그건 좀….”“인공 심장 이식은 해외 전문가들이 우리 나라보다 더 숙련되었어. 다만 네 엄마 상황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너 해외로 건너간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유월영은 물수건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해외로 가는 걸 고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엄마의 상태가 장시간 비행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다가가서 그의 등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남성미 물씬 풍기는 앞모습에 비해 그의 잔등에는 두 갈래의 흉터가 있었다.그것은 두 개가 교차하여 X자 모양으로 생긴 채찍자국이었다.오래된 상처인데도 지금까지 흉터가 진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맞을 때 그가 얼마나 아팠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상처의 근원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연재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누가 감히 채찍으로 그의 몸에 상처를 새길까?과거 둘이 사이가 좋을 때 신경 쓰여서 물어본 적 있었다. 혹시 어릴 때 뭘 잘못해서 연 회장이 때린 건 아닌지 물어봤다.그럴 때마다 연재준은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그 정도로 모진 사람은 아니라고 답했다.연 회장이 아니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유월영은 갑자기 이 상처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런 유치한 질
안으로 들어오려던 신연우는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방음 효과가 좋지 않은 병원 병실에서 그들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차분하게 시선을 내린 그의 주변에서 우울한 분위기가 풍겼다.최선을 다해 양분을 제공해서 곳 꽃이 필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든 게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결국 그는 조용히 뒤돌아 섰다.연재준은 속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물수건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를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신 교수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건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진짜 필요한 때가 오면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교수님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죠.”연재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넌 걔가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솔직히 대답했다.“제가 만난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저한테 잘해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까요.”연재준은 대놓고 비웃었다. 그녀의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유월영은 더 이상 그와 변론하기 싫어서 환자복을 던져준 뒤에 병실을 나왔다.신연아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입원한지 이틀이나 됐는데 한 번도 찾아간 적 없었다.병실에 가보니 신연우도 거기 있었다.“교수님.”신연우는 그녀를 본 순간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월영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는 병실에 못 간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지금 오는 길이에요. 연아 밥 챙겨주고 가려고 했는데. 많이 배고파요?”신연아는 이상한 눈으로 오빠를 쳐다봤다.분명히 조금 전에 도시락만 내려놓고 나갔다 돌아오더니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배는 안 고파요. 연아 씨 보러 왔어요.”유월영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신연아의 종아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연아 씨는 좀 괜찮아요?”신연우가 대신 대답했다.“통증은 많이 가셨대요. 연아야, 너 걱정돼서 문안까지 왔는데 넋 놓고 인사도 안 할 거야?”신연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인사를 건넸다.“왔어요?”유월영은 웃으며 말
신연우가 매화 마을에서 채집한 데이터를 메일로 보내주었기에 유월영은 다음 날부터 노트북으로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다친 손도 이제는 움직일 수 있어서 속도가 났다. 한바탕 일을 마친 뒤, 수액도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링거를 거두어 갔다.유월영은 수액 병에 쓰인 약명이 이틀 전이랑 다른 것을 보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신연우에게서는 점심에 못 올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배달을 따로 시켜준다고 했지만 유월영은 간만에 내려가서 먹겠다고 하며 거절했다.점심 때가 되자 유월영은 기지개를 펴며 침대를 내려 외투를 챙겼다.연재준이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내 것도 포장해 줘. 그 보답으로 오후에 재미난 거 보여줄게.”“깜빡할 것 같으니까 그냥 하 비서 시켜요.”유월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연재준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깥의 화창한 날씨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병원을 나온 유월영은 근처 칼국수 집으로 들어가서 칼국수를 주문했다.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녀는 아까 찍어둔 약명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갑자기 입원 날짜가 이틀이나 늘어난 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그런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약명을 검색한 결과 일반 비타민 주사였다.의료진이 당장 퇴원해도 되는 환자에게 영양제를 더 투여했을 리는 없었다.누군가 권력을 이용해서 의사와 짜고 행한 일이 틀림없었다.그리고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대충 식사를 마친 후에 싸늘한 얼굴을 하고 병원으로 돌아갔다.‘연재준! 대체 이 변태 같은 통제욕을 언제면 그만둘 거야!’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연재준이 정장을 갈아입고 앉아 있었다.그녀가 밥을 먹고 오는 사이에 그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환자에서 다시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연 대표로 돌아가 있었다.유월영이 당황해서 잠시 주저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 사준다더니 진짜 아무것도 안 사왔네.”유월영이 물었다.“제 입원날짜 연기하게 시킨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
연재준은 의사가 산모와 아이의 상태를 알리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었다.그는 곧장 유월영 곁으로 달려갔다.분만대에 누워 있는 유월영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몸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흐릿한 의식 속에 있었다.연재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눈물이 유월영의 얼굴에 떨어져 그녀의 땀과 함께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연재준이 쉰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괜찮아? 많이 아파?”유월영은 흐릿한 시야로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요.”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마를 그녀의 손등에 대며 말했다.“미안해.”“고마워.”“사랑해.”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유월영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다시는 수술실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유월영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괜찮아요.”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일주일 후, 유월영은 봉현진 마을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딸의 정식 이름과 성씨는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신 임신 때부터 부르던 애칭 ‘찹쌀떡’으로 불렀다. 이는 엄마, 아빠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하지만 한 달 이내에 출생 신고를 해야 했기에 아이의 정식 이름은 반드시 정해야 했다.연재준은 더 이상 유월영을 고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와 ‘고’를 각각 종이에 적어 공 모양으로 말아 병에 넣고 침대에 있는 모녀에게 다가갔다.유월영은 그가 딸에게 뽑기를 시켜 성씨를 정하게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병의 입구를 유월영에게 내밀며 말했다.“당신이 뽑아.”“내가요?”“당신이 낳은 아이니까, 당신이 성씨와 이름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유월영은 웃으며 손을 뻗어 종이 하나를 뽑아 펼쳤다.“고.”그녀는 종이를 보고 연재준과 눈을 맞췄다. 연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고씨로 하자. 좋아, 아주 좋네.”마침내 딸의 정식 이름이
“...”조서희의 말은 황당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이승연은 전문 변호사로서 논리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다.“우선, 너의 신분증과 호적에는 여전히 ‘유월영’으로 기록되어 있잖아. ‘고민서’라는 이름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름이지.”“그러니까 너의 아이가 너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면 유씨 성을 따르는 게 더 안전한 선택이야. 예를 들어, 현시우처럼 다른 성씨로 인해 가문에서 배척받는 일을 막을 수 있지.”그녀는 말을 이어갔다.“지금 너의 가문에서 상속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게 좋아. 그래서 나는 유씨 성에 한 표야.”“게다가, 유씨 성을 따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 너의 이름처럼 유씨 성 여자 이름이든 남자 이름이든 독특한 멋이 있잖아. ‘유월영’, 달빛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운치 있는 이름이잖아.”이승연의 말에 유월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그러나 유씨와 고씨 모두 한 표씩 얻으면서 결국 2 대 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유월영은 고민 끝에 투표 범위를 더 넓혀 이혁재, 서지욱 부부와 노현재, 심지어 현시우에게까지 의견을 물었다. 다섯 사람의 투표 결과는 유씨와 고씨에 각각 두 표씩으로 또다시 동점이었다.결정적인 한 표는 서지욱에게 달려 있었다. 서지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내 생각엔, 너희 아이의 성씨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게 어때? 딸이면 유씨, 아들이면 고씨로 하는 거야.”하지만 이 말에 모두가 반대했다.“왜 딸이면 꼭 유씨여야 해? 딸도 고씨 성을 따를 수 있어.”“왜 아들이면 꼭 고씨여야 해? 아들도 유씨 성을 따를 수 있잖아.”서지욱은 이내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알겠어. 내가 헛소리했네. 기권할게.”결국 성씨 문제는 출산 직전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유월영의 출산은 최고의 의료팀이 관리하며 그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를 판단한 후 제왕절개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