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일단 진서준을 조사해 보겠다고 하자 이지성은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아버지, 허사연이 나서겠다고 한 건 분명 그놈에게 속은 게 틀림없어요! 그 자식이 진짜 배경이 있었다면 그때 우리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겠죠!”이지성이 화를 내며 말했다.“사람을 보내서 그놈 동생과 엄마를 납치해야겠어요. 그래도 그놈이 날뛸 수 있는지 보자고요!”자신의 아들이 이토록 멍청한 것을 보고 이혁진은 그를 노려보았다.“그 입 다물어!”이지성은 순간 깜짝 놀라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옆에 있는 유지수는 옷매무시를 다듬고 말했다.“아버님, 제가 진서준을 잘 아는데 정말 아무 배경도 없어요. 우리는 대학교 동창이었는데 진서준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걔를 키웠어요. 그리고 진서준의 여동생도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남자와 만난 적은 없어요.”이혁진은 유지수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부녀가 뭘 안다고 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내 아들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재수 없는 년!”그러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떠났다.이혁진은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 세상에 예쁜 여자가 많고도 많은데, 자신의 아들은 왜 아무 쓸모가 없는 얼굴만 예쁜 유지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비록 이씨 가문은 너무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이혁진에게 욕을 들은 유지수는 억울해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자칫 잘못하면 이씨 가문에서 빈털터리로 쫓겨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부유한 집에 시집간 대가이다.“망할 놈의 진서준,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야!”유지수는 이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어 마음속의 불만을 진서준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황보식의 운전기사가 진서준을 골동품 거리 입구까지 배웅한 후, 진서준은 즉시 차를 몰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진서라는 마침 점심을 차려놓고 진서준에게 전화하
진서준이 차에서 내렸을 때 노부인은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진서준은 재빨리 다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이때 진서라도 차에서 내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진서준이 지금 있는 이곳은 교외여서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재빨리 차를 몰고 가버렸다.“빨리 도와줘!”노부인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이를 본 진서준은 즉시 허리를 굽혀 노부인을 도왔다.그런데 노부인을 일으켜 세우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운 표정으로 바뀌었다.“나를 넘어뜨린 건 너희들이니 당장 병원비 물어줘!”진서준 남매는 순간 얼어붙었다.“할머니, 양심 있으시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분명히 할머니 저절로 넘어진 거잖아요!”진서준의 눈썹을 찡그리고 불쾌한 듯 말했다.자신은 분명히 선행을 베푼 것인데 상대방은 거짓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다.“헛소리!”노부인은 소리쳤다.“날 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를 부축했어?”진서준은 어리둥절했다.선행을 베푼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옆에 있던 진서라는 이것을 보고 즉시 그들이 노부인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2년 전부터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당시 진서준은 아직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진서라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그때 그녀는 설마 세상에 이런 나쁜 노인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이제 본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자 진서라는 자신이 너무 단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빠, 우리 지금 이 할머니한테 당하고 있어!”진서라는 진서준에게 속삭였다.“당했다고?”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라는 진서준에게 지난 2년 동안 자주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이 말을 들은 진서준은 가슴 속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 속이는 이런 사람은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이런 일이 계속 발생하면 나중에 노인이 정말 아파서 쓰러졌을 때 아무도
상대방이 화를 내며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을 본 진서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꺼져!”진서준이 손을 뻗어 건장한 남자의 팔을 때리자 남자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화난 목소리로 욕했다.“차를 몰다가 사람을 부딪친 것도 모자라 어떻게 감히 나에게 손을 대?!”진서준의 인내심은 이 사기꾼들 때문에 바닥이 날 것 같았다.그는 건장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길을 비키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가만히 있지 않겠다고?”건장한 남자는 얼굴에 경멸이 가득 찬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할지 보고 싶군!”노부인은 비열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오늘 돈 안 주면 못 가!”지나가던 차량 몇 대가 이 광경을 보고는 한참을 쳐다보다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그들 중 일부는 전에 이미 그들에게 당한 적이 있다.이 사기꾼들은 교외에 위치한 사기 치기 알맞은 장소를 선택했고 도로에는 보행자가 거의 없었다.그리고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통 사업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라 돈이 적지도 않았다.부자들은 수백만 원 때문에 이런 악당들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이 사기꾼들은 운이 나빠서 진서준을 만났다. 이런 불의에 대해 진서준은 절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진서준은 악인을 제거할 방법이 따로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진서준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강성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건 사람이 진서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강성철은 서둘러 전화를 받고 감히 대들지 않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진 선생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강성철이 자세를 낮춘 것을 본 진서준은 마음이 불편했다.“성철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진서준이 말했다.“뭔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서울시에서 제가 해결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강성철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별거 아닌데, 건장하고 싸움 잘하는 부하 몇 명을 연북로로 보내주세요.”
진서준이 제시한 두 가지 선택지를 들은 노부인의 가족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어떤 선택을 하든 그들은 큰일날 것이기 때문이었다.지난 1년 동안 이 가족은 이런 수법으로 6천만-8천만 원을 갈취했다.평범한 사람이 10년 동안 일해도 벌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그들이 경찰에 연락해서 자기 잘못을 자백하면 형량은 줄어들지만 그래도 몇 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하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진서준은 그들을 한호철과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서 처리할 것이다.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었다.노부인의 가족은 급히 용서를 빌며 말했다.“선생님, 제발 저희를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안 돼요!”진서준은 망설임 없이 바로 거절했다.그는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이런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다.게다가 그는 조금 전까지 이 가족에게 기회를 줬었다.진서준이 계속 자신들을 밀어붙이는 것을 본 건장한 남자는 이를 악물며 화를 냈다.“너 이 자식, 내 인내심을 건드리지 마. 너도 우리와 같이 망하게 만드는 수가 있어!”이 말을 들은 한호철은 즉시 기뻐하며 건장한 남자의 뺨을 때렸다.이 한 방에 건장한 남자는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젠장, 우리가 누군지 알아?”“우리는 호스텔 그룹이다! 우리와 죽을 때까지 싸울 힘이 있어?”건장한 남자는 분명 조폭 출신이었다. 그는 한호철의 자기소개를 듣자마자 다시 한번 움찔했다.그도 속한 조직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작은 조직원일 뿐이었다.그들의 보스는 그를 위해 호스텔 그룹 사람들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형님, 우리가 직접 경찰에 신고해서 자백해도 괜찮을까요?”건장한 남자는 울먹이는 얼굴로 자비를 구걸했다.진서준은 한호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문제는 호철 씨에게 맡길게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진 선생님, 저 한호철이 반드시 이 문제를 처리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한호철은 자기 가
진서준의 차가 막 출발했을 때 허사연의 전화를 받았다.“사연 씨, 무슨 일이에요?”진서준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허사연의 전화를 받았다.“서준 씨, 지금 시간 있어요? 당신과 함께 가서 옷을 몇 벌 사야겠어요.”“옷을 산다고요?”진서준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마침 서라를 데리고 옷을 사러 가는 길이에요.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좋아요. 어딘데요?”허사연이 설렌 마음으로 물었다.“서라랑 지금 가는 중이니 장소를 알려주면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진서준이 말했다.단순히 옷을 사러 진서라를 데리고 간다면 진서준은 그냥 큰 쇼핑몰을 찾았을 것이다.만약 허사연 이 아가씨도 함께 간다면 당연히 아무 곳이나 갈 수 없었다.“그럼 서산 쇼핑몰로 가요!”허사연이 말했다.“좋아요. 그럼 서산 쇼핑몰에서 봅시다!”그렇게 말한 후 진서준은 전화를 끊고 다시 차의 시동을 걸었다.진서라는 서산 쇼핑몰에 간다는 말을 듣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서산 쇼핑몰에서 파는 물건들은 너무 비싸.”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옷 한 벌 따위가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어?”진서준의 눈에 가장 비싼 옷은 고작 몇백만 원에 불과했다.“그리고 사연 씨도 가는 거니까 마침 보답으로 옷을 사줘야겠어.”“그래, 그게 좋겠네.”진서라는 만약 싼 물건을 사줬다가 허사연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서울시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서산 쇼핑몰에는 모든 유명 브랜드가 모여 있었다.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뿐, 없는 물건은 없었다.진서준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 안에는 수억 원짜리 고급 자동차는 물론 수십억 원짜리 자동차도 몇 대 있었다.“가자,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사연 씨를 기다리자.”진서준은 진서라를 데리고 먼저 서산 쇼핑몰로 들어갔다.백화점 안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많은 선남선녀가 짝을 지어 여러 명품 매장을 드나들고 있었다.서산 쇼핑몰 안의 물건들은 비쌌지만 매일 사람들이 끊이지 않
“서라 말이 맞아요. 이 두 미친년과 싸우는 건 우리 품위만 실추시킬 뿐이에요!”허사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은 진서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유지수와 장혜윤의 표정은 빠르게 굳었다. 유지수는 언성까지 높이며 얘기했다.“누구한테 미친년이라고 하는 거예요!”“너한테 말하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고하고 도도한 허사연에게는 차가운 여왕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허사연이 담담하게 걸어오며 얘기하자 허사연을 본 유지수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씨 가문의 사람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허사연을, 유지수 같은 ‘장식품’ 따위가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서준은 예쁘게 차려입은 허사연을 보면서 마음이 약간 떨렸다.허사연은 여전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비현실적인 외모, 동그란 눈, 앵두 같은 입술, 복숭앗빛으로 물든 두 볼. 그리고 가느다란 목선과 어깨를 감싼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로는 봉긋한 가슴과 곧게 뻗은 다리가 있었다.허사연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은백색의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등장에 다른 여자들은 빛은 잃은 그림자가 되어버렸다.허사연에게서는 도도하고 성숙된 도발적인 매력이 있었다.그런 여자 앞에서 설레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여자가 지금 진서준을 도와 유지수 같은 멍청이와 대치하고 있었다.“쳇. 집에 돈 좀 많은 거로 무슨 유세를 떨어요!”유지수가 분에 겨워 얘기했다.“돈 많으면 다죠. 안 그래요?”허사연은 유지수의 체면을 전혀 봐 주지 않고 차갑게 얘기했다.“얼른 내 친구한테 사과해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허씨 가문의 산업에 발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저...!”부잣집에 시집간 지 2년이 넘었지만 유지수의 성격은 그대로였다.차가운 얼음 마녀 같은 허사연 앞에서 말문이 막힌 유지수는 눈시울을 붉혔다.“이건 갑질이에요! 허씨 가문의 아가씨가 나를 상대로 갑질을 하고 있어요!”유지수는 아예 일을 크게 벌이려고 마음먹은
유지수의 표정을 본 진서준은 마음이 통쾌했다.진서준은 유지수를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그녀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도 감수했었다. 하지만 유지수는 진서준의 원수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지금의 진서준은 유지수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너... 너 헛소리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이씨 가문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경악하던 유지수는 두려움에 떨면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었다.“네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쇼핑몰의 모든 사람한테 이 일을 알릴 수도 있으니까.”“너...!”유지수는 화가 나서 목까지 벌게졌다.그 모습은 본 장혜윤이 궁금해하면서 물었다.“무슨 일인데?”“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끼어들지 마!”유지수는 갑자기 호통을 쳤다.친구한테서 욕을 먹은 장혜윤은 얼굴에 억울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진서준, 네가 협박하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어? 네가 얘기한다고 해도 그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유지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갑게 얘기했다.이 비밀은 그녀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물론 유지수는 진서준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 일로 진서준이 자기를 골려 먹으려고 한다는 것은 눈치챘다.그래서 유지수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유지수가 뻔뻔하게 나오는 것을 본 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래. 네가 당당하다면 괜찮아. 아까는 네가 무릎 꿇고 빌면서 그 비밀을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거든.”“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꿈도 꾸지 마!”유지수는 진서준을 확 노려보고 몸을 돌려 떠났다.장혜윤은 빠르게 유지수를 뒤따라가며 얘기했다.“지수야, 기다려봐!”몰려있던 사람들도 경비원들에 의해 흩어졌다.허사연은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 지으며 진서준과 진서라를 쳐다보았다.“나 때문에 놀란 건 아니죠?”“당연하죠. 아까 모습, 꽤 멋있었어요.”진서준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사연 언니... 아까 정말 여왕 같았
허사연이 또 얘기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네. 도움이 필요하면 저도 뻔뻔하게 손을 내밀 겁니다.”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했다.이때 진서라가 하얀 반팔 티를 들고 걸어왔다.“오빠, 이 옷 어때?”평범한 반팔이긴 하지만 노점상에서 파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노점상의 옷보다 디자인이 더욱 고급스러워 보였다.“그래. 네 마음에 들면 입어봐.”진서준이 웃으면서 얘기했다.“그런데... 조금 비싸.”진서라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괜찮아.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 건 그냥 사면 돼.”진서준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진서라를 쳐다보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여동생이 다시는 상처 받지 않도록 지켜낼 것이다.허사연도 옆에서 얘기했다.“그래요. 진서준 씨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마음대로 사요! 이 매장의 모든 옷을 다 사도 될 정도의 돈이 있거든요.”진서라는 환하게 웃으면서 얘기했다.“그럼 이 옷을 먼저 피팅해볼게요.”진서라는 빠르게 하얀 반팔 티로 갈아입고 피팅룸에서 걸어 나왔다.역시, 원래도 예쁜 진서라가 멋있는 옷을 입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새 옷을 입은 진서라를 보며 진서준과 허사연은 눈이 번쩍 뜨였다.“오빠, 사연 언니. 어때요?”진서라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잘 어울리네.”진서준이 칭찬했다.“얼른 몇 벌 더 골라요.”“아니요. 이것만 있으면 돼요.”진서라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허사연은 진서라의 손을 잡고 매장을 돌아 다녔다.“그럼 안되죠. 진서준 씨는 지금 돈이 엄청 많아요. 그러니까 돈 걱정은 안 해도 돼요.”허사연이 진서라를 데리고 쇼핑하며 두 사람의 손에는 7, 8벌의 옷과 두 켤레의 신이 들려졌다.“진서준 씨, 서준 씨 차례예요.”허사연이 웃으면서 카운터를 향해 눈짓했다.진서준은 은행카드를 들고 가서 계산을 했다.이 옷들은 다 합해서 200만 원 정도였다. 지금의 진서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진서
“군부에 잡혔어.”진서준의 말에 진서훈의 목소리가 다소 불쾌해졌다.“어느 군구야?”“너희는 어느 군구 소속이야?”진서준이 군관을 보며 물었다.“동부 임해 전구야.”“동부 임해 전구라고? 알았어.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낼게.”진서훈은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군관은 진서준의 휴대폰을 강제로 빼앗았다.하지만 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침묵만 지키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군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두 시간 이상 간 후, 진서준 일행은 깊은 산속에 도착했다.마침내 차는 흑석영이라는 군사 기지에 도달했다.흑석영 군사 기지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만이 갇히는 곳이다.일단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없다고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차에서 내리자 진서준은 주변 환경을 천천히 살폈다.은은한 달빛과 반짝이는 별이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주변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딱 봐도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그때 두 사람이 진서준과 황예은을 향해 다가왔다.“황예은 씨, 제 이름은 박신준입니다. 흑석영 군사 기지 총책임자입니다.”장군 훈장을 단 중년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박씨 성을 듣자 진서준과 황예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혹시 이 사람이 박씨 가문의 사람인가?하지만 황예은은 박씨 가문에 군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왜 날 잡아들였죠?”황예은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졌다.황예은은 장군급 군관을 상대하면서도 여전히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황예은 씨는 반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박신준이 차갑게 말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간첩이냐 아니냐는 네가 잘 알지 않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까놓고 다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박신준의 얼굴을 보니 이전에 만났던 박진강과 조금 닮아있는 듯했다.이 사람은 박진강의 삼촌이나 큰아버지일 가능성도 있었다.박신준이 진서준을 힐끗 보더니 이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이 두 사람 분리해서 구속해.”박신준이 두 사람을 따로 구속하려는
군부 사람들이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을 본 황예은은 눈꺼풀이 저절로 뛰기 시작했다.그동안 박씨 가문 회사를 전적으로 맡고 있는 동안, 황예은은 군부 사람들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국민은 절대 공무원과 싸우지 말고 공무원은 절대 군부 사람과 싸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역사적으로 군부는 언제나 국가의 최고 권력이었다.군부의 고위층을 건드리면 그 후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진서준도 바로 그 군부 군관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설표 특전대에서 교관직을 맡기로 했다.“제가 바로 황예은이에요. 무슨 일이죠?”군부가 무서운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황예은의 말투는 여전히 그 여느 때와 다름없이 냉랭하고 자존심 강했다.그 군관은 황예은의 말을 듣고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넌 반역죄를 지질렀어. 넌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침투한 간첩이야.”군관이 거친 목소리로 꾸짖었다.반역죄를 저지른 간첩이라고?황예은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황씨 가문은 대대로 대한민국에 충성한 가문인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죄를 지을 수 있을까?이건 명백히 누군가 고의로 자기를 음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심지어 상대방은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군부까지 동원했다.황씨 가문은 군부에 아무런 인맥도 없었다.지금 이 상태로 군부로 끌려가면 그 처참한 결말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에요. 저는 절대로 간첩이 아닙니다.”황예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간첩인지 아닌지는 네 주장 하나로 해결할 수 없어. 우리와 함께 가서 조사받자.”군관도 똑같이 차가운 말투로 대응했다.그때, 진서준이 앞으로 나서서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누가 너희를 보냈어?”황씨 가문에 부귀전승이 존재하는 마당에 반역죄를 저지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황예은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진서준은 황예은이란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잘 알게 되었다.황예은은 극도로 자존심 강한 여자였
비밀 문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는 온통 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10여 미터를 걸어 내려가니 대략 10평 정도 되는 지하실이 나타났다.지하실은 매우 간소했고 고작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침대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그 탁자 위에는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고서가 놓여 있었고 첫 장에는 큼지막하게 ‘부귀전승’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누님, 이거 우리 아빠가 남긴 거예요?”황현호는 탁자로 뛰어가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5년 전, 아빠가 신비스러운 태도로 날 불러 여기로 데려왔었어.”황예은의 눈빛은 추억에 젖은 듯했다.“그땐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건 널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아.”그때 황경영은 황예은에게 이렇게 말했다.“황씨 가문에 큰 위기가 닥치면 현호 혼자 이 비밀 공간으로 내려와 책에 적힌 전승을 배우게 해.”황예은은 이미 이 책을 읽고 따라 연습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당시 황예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자기처럼 똑똑한 사람도 장악하지 못한 걸 머리가 둔한 황현호가 배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황현호는 부귀전승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겨보더니 곧 그 책에 푹 빠져들었다.“보아하니 이 책은 우리 동생을 위해 준비된 게 맞는 듯하군.”황현호의 몰입한 모습을 보며 황예은은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너 아까 왕권부귀라고 했잖아. 그럼 혹시 왕권전승 같은 것도 있는 거야?”황예은의 질문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 다만, 왕권전승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나도 몰라.”국가급 지도자는 몇몇밖에 없었지만 진서준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과거 왕권과 부귀는 막상막하의 힘을 자랑했지만 과학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부귀의 세력은 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처졌다.황예은은 진서준을 향해 고개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진서준, 정말 고마워.”“내가 너희를 도운 건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으려고 한 게 아니야.”진서준이
왕권부귀!이건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도 수련의 체질이었다.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창욱 어르신이 진서준에게 이 체질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부귀의 체질은 그 자체로 부귀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 무도를 수련하지 않더라도 가문을 번영하게 할 수 있었다.반면, 왕권의 체질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이 체질은 가문을 승승장구하게 하고 국가급 지도자 한 명은 반드시 배출해 낼 정도의 체질이었다.약 10분 뒤, 진서준은 황현호의 복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끝났어.”황현호는 몸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가장 놀라운 건, 황현호의 체내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황현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손발을 움직여보더니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날 살리면 내 단전이 없어질 거라고 했잖아. 근데 왜 멀쩡하지?”황예은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황예은은 특히 진서준이 언급했던 ‘부귀의 체질’이라는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진서준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 바라보며 눈짓을 보냈고 황예은은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했다.“다들 일단 여기서 나가.”방에 진서준과 황예은, 황현호 세 사람만 남자 진서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왕권부귀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그게 뭔데?”황현호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황현호는 예전부터 먹고 놀고 즐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반면 황예은은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내가 기억하기론 아빠가 그런 말을 언급한 적이 있어. 근데 그땐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진서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황경영 씨가 너희에게 뭔가 남겨준 게 없냐?”대한민국의 최고 갑부 황경영이 장악한 정보는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러니 아마 황현호가 부귀의 체질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다만 황현호가 무도를 배울 생각이 없어 보이자 굳이 말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황현호의 태어난 부귀의 체질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진정
“어떻게 낮춰야 할지 모르겠어.”황예은은 솔직히 털어놓았다.“제발, 이 두 글자만 붙이면 돼요.”서지은의 조언을 들은 황예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내 동생을 구해줘.”“거 참 말투가 딱딱하네.”황예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우리 동생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동생을 살려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할게.”하지만 진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봐...”황예은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도 모르잖아. 그냥 돌아가.”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존중을 원한다 이거지?”황예은은 이를 악물더니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었다.이 장면에 서지은과 허윤진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심지어 진서준조차도 순간 표정이 굳었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여자가 지금 이 순간 동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이 사실이 소문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명주시 상류층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제발 우리 동생을 살려줘.”황예은은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조금도 나약하지 않았다.“일어나.”“네가 허락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거야.”황예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내가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 없어.”진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길 안내해.”황예은은 그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곧장 일어나 진서준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황씨 가문으로 가는 내내 진서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황예은 역시 침묵을 지켰다.30분 남짓이 지나 병실에 도착했을 때, 황현호는 얼굴이 창백해 종잇장 같았고 근육은 다 풀어져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그 모습은 꼭 열흘은 굶은 떠돌이와도 같았다.진서준은 황현호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진서준이 의아해하며 말했다.다시 말해 지금은 아직 살릴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황예은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진서준은 황현호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내가 널 살릴
“세상에 누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때 그렇게 거만한 태도로 말해?”황예은은 평생을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어떻게 진심으로 부탁해야 하는지 깔끔하게 잊어 버렸다.지금 황씨 가문 남매가 죽는다면 진서준도 딱히 개의치 않을 터였다.설령 두 사람이 정말 죽는다 해도 곧 다른 누군가가 빈자리를 메울 것이다.국가가 황씨 그룹 같은 거대한 기업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걸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이전까지 진서준은 자기가 큰 착각의 늪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바로 황씨 가문이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양 여겼던 것이다.이 세상에서 사람은 전부 자기만의 개성이 있고 특별한 존재이긴 하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는 누구든 대체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우리 동생, 이제 정말 죽을 것 같아.”황예은은 성질을 억누르며 말했다.“네 동생 생사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진서준이 즉각 되물었다.“어제 내가 분명 경고했지? 그 공법 그만두라고. 근데 내 말 안 듣고 내가 사기꾼이라느니 뭐라더라? 이제 와서 죽을 거 같으니까 뒤늦게 후회해? 모든 건 그 자식 자업자득이야.”황예은의 마음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너 정말 이렇게 매정하게 굴 거야?”진서준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서로 정이라도 있었던가? 설마 내가 네 몸을 보고 만졌다고 해서 그게 정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미안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야.”이틀간 진서준은 황씨 가문 일을 말없이 도왔다.그런데 황씨 가문 남매의 태도는 어땠는가?한쪽은 하늘의 선녀처럼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다른 쪽은 의심과 비난만 일삼았다.그때 진서준이 분을 꾹 참으며 황현호에게 손대지 않은 게 오히려 관대한 처사였다.“어떻게 하면 내 동생을 구할 수 있어?”황예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태도를 보여줘 봐.”진서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의사를 구하려면 일단 태도를 바르게 해야 했다.진서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구걸하라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예의는 갖춰야
황현호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 공법은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어.”황예은이 말에 황현호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왜 그만둬야 하죠? 누님, 설마 그 녀석 말을 믿은 건 아니죠? 말해두는데, 그놈은 누님을 속이는 거예요. 나 이거 배운 지 몇 달 됐는데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작에 생겼겠죠.”진서준이 죽도록 싫은 황현호는 진서준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진서준이 하지 말라고 할수록 황현호는 오히려 더 하고 싶었다.말을 마친 황현호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버렸다.다음 날 아침.하인이 급히 황예은을 흔들어 깨웠다.“아가씨, 큰일 났습니다!”“무슨 일이야?”황예은은 잠옷도 갈아입을 겨를 없이 문을 열었다.“도련님 상태가 뭔가 이상합니다!”그 말을 듣자 황예은은 하인을 따라 급히 달려 나갔다.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활기차 보였던 황현호는 지금 장원 앞마당에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간질 발작을 일으킨 환자처럼 보였다.“현호야, 왜 그래?”황예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주변에는 이미 황씨 가문의 주치의들이 와 있었고 다들 한참을 진단했지만 아무 이상도 찾지 못했다.“아가씨, 도련님은 조금 전까지 멀쩡히 수련하는 중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건지 이렇게 쓰러져 일어날 수 없게 됐습니다. 저희가 방금 도련님을 진단해 봤지만 몸에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의사가 상황을 설명했다.“당장 병실로 옮겨!”황예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혹시 진서준의 말이 맞았던 걸까?“아야야! 좀 살살 들지 못해?”황현호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온몸의 뼈가 부서질 것 같았고 근육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와 도무지 참기 어려웠다.“어제 내가 분명 경고했지? 그 공법 그만두라고. 왜 끝까지 내 말 안 들어?”황예은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황현호를 나무랐다.“절대 공법 때문이 아니에요!”황현호는 이런 상태에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분명 내가 어젯밤에 제대로 못
“서준아, 황씨 가문으로 간다더니 웬일로 돌아왔어?”TV를 보던 서지은은 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서지은은 아직 진서준과 황예은이 이미 틀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황예은와 진서준,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워낙 강하다 보니 애인 관계는커녕 친구로 지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그 여자는 새 경호원을 구했어.”진서준은 간단하게 대답했다.“서준아, 너희들 혹시 싸웠어?”서지은은 진서준의 표정에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허윤진은 진서준과 황예은이 싸웠는지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진서준이 경호원 일을 그만둔 것이 잘된 일이라 여겼다.황예은은 명주시에서 소문이 자자한 으뜸가는 절세미인이었고 어마어마한 재산까지 겸비하고 있었다.진서준이 며칠이라도 황예은의 경호원를 하다 보면 혹시라도 그녀에게 홀려 넘어갈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그깟 경호원 그만두길 잘했어. 그 여자가 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도 돼?”허윤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번엔 우리랑 시간 좀 보낼 수 있겠네.”“아니, 시간이 없어.”진서준은 손에 있던 자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그건 뭐야?”허윤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박씨 가문과 관련된 거야.”진서준이 간단하게 설명했다.“난 올라가서 이 자료부터 볼게. 너희들도 일찍 쉬어.”말을 마친 진서준은 자료를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이상하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허윤진은 진서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허윤진이 진서준을 알고 지낸 이래 이렇게 무겁고 침울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말하기 싫으면 그냥 두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서지은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사랑하는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자기 기분도 좋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방으로 돌아온 진서준은 곧바로 황예은이 준 자료를 열어보았다.자료를 볼수록 진서준의 마음속 경악은 더 커졌다.박씨 가문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모든 자산을 해외로
황예은이 이때 깨어난 것이다.기절 상태에서 깨어난 황예은은 자기가 젖은 채로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귀청이 터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우리 누님 왜 소리 지르는 거야?”황현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네 누님은 괜찮아...”“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누님 바꿔.”황현호가 단호하게 명령했다.툭!진서준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고 곧바로 황예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소리는 왜 지르는 거야?”황예은의 체내에 있던 약물은 이미 다 제거된 상태였다.하지만 뽀얀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홍조가 남아 있었다.그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할 정도였다.“여기가 어디야?”황예은은 몸을 이불로 감싸며 놀란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황예은은 기절하기 전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누군가 자기에게 약을 먹이고 그 약기운에 눈앞의 이 남자를 강제로 키스했던 끔찍한 기억이 순간 떠올랐다.‘설마 이 남자가 이미 나를...’황예은은 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급히 머리를 이불 속으로 넣고 자기 몸을 확인했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하지만 온몸이 축축한 데다 속옷까지 젖어 있어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여기는 모텔이고 너와 대화하던 그 남자가 네게 약을 먹였어.”진서준은 덤덤하게 설명을 이어갔다.“체내 독소를 제거하려고 널 욕조에 넣은 거야.”“너... 혹시 나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니지?”황예은이 조심스럽게 묻자 진서준이 이내 되물었다.“무슨 짓 했다면 어쩔 건데?”황예은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히려 이런 소리를 듣다니. 진서준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별일 없으면 옷 입고 회사로 돌아가.”진서준이 화났다는 걸 눈치챈 황예은은 뭐라 해명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사실 황예은은 그냥 툭 던진 말일 뿐이었다.진서준이 정말 무슨 짓을 했더라도 황예은은 진서준을 탓할 자격조차 없었다.진서준이 아니었으면 황예은은 아까 그놈에게 이미 당했을 거였다.하지만 황예은의 도도하고 고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