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정 씨 일가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이에 김예훈이 계속해서 말했다.“평소 돈을 물 쓰듯이 쓰니까 다 돌려줄 수는 없지. 그들이 가진 것을 전부 팔아버린다고 해도 예물을 다 모을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예를 들면 정씨 회사 지분 49%를 얻는 거야. 반드시 너에게 전부 전이해야돼.”“그건...”정민아는 순간 망설여졌다. 정 씨 일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세운 회사의 지분을 뺏는다면 정 씨 일가는 진짜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망설이는 그녀를 보며 김예훈이 말했다.“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정 씨 일가는 나머지 지분으로 굶지 않으며 살 수는 있어. 어차피 모든 자산을 팔면 지분을 가지고 있어도 뭐해? 송준이 원하면 저들 회사의 지분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그때가 되면 지분은 자산이 아니라 빚이 되어버려.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주는 거야. 이번 기회에 네가 되고 싶었던 상류 가문이 되어보는 거야! 49%의 지분에 CY그룹 내에서의 권력을 잘 이용하면 승승장구할 수 있어! 그 때가 되면 나도 매일 배부르게 먹고 잘 잘수 있겠지.”그의 말에 정민아는 김예훈을 째려봤으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내일 모든 걸 돌려주지 않는다면 한번 얘기해볼게. 들을지 말지는 저들 선택이지.”김예훈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이 일을 벌이긴 했으나 정민아는 심성이 줄곧 똑같았다. 정민아는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었다.그러니 앞으로 정 씨 일가가 어떻게 될지는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렸다.이때, 정가을이 갑자기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왠지 더 부어오른 듯했다.도망치듯 달려 나온 그녀는 김예훈을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었다.“형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예요! 형부가 조금만 잘났어도 다른 사람이 민아 언니한테 함부로 프러포즈하지 않았을 텐데! 이게 다 형부 때문이에요!”김예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
하지만 김예훈은 정가을의 악담에 아무렇지 않게 미소로 답했다.정가을은 자기의 미모를 굳게 믿고 있었지만 정민아와는 비할 수도 없었다.재벌에게 있어 정가을 같은 여자는 기껏해야 노리개에 불과했다.그러니 재벌가에 시집가려는 건 그녀의 멍청한 꿈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진주의 빅토리아 항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태산을 스치고 지나갔다.귀족들만이 입주할 수 있는 이 산은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웠다.태산 1호 별장은 태산 제일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진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진주 이씨 가문이 여기에 살고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4대 상류 가문 중 하나인 이 가문의 실력을 상상도 못 한다.4대 가문은 진주 자산의 60% 이상을 차지했고 거의 모든 진주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4대 가문 중, 이씨 가문이 차지한 자산은 진주 자산의 20%에 다다랐다.그 외에도 외국에 대량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씨 가문은 진주 제일의 가문이라 불러도 무방했다. 평소 경비가 삼엄하던 태산 1호 별장에 오늘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매우 건강해 보이는 백 세 노인이 1호 별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씨 가문의 주인인 이준범이다. 진주 이씨는 그의 두 손으로 세운 가문이다.그러나 이때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고 이에 이준범은 손이 떨렸다.“이 빌어먹을 놈!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돌아와?”“아버지, 몇십 년 만에 봐도 절 이렇게 알아봐 주다니, 진짜 영광입니다.”이일매는 용의 머리가 조각된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했다.“여봐라! 당장 이놈을 쫓아내!”이준범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씨 가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끄떡하지 않고 경외스러운 눈길로 이일매를 보고 있었다.이일매는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돌아왔으니까 이제부터 이씨 가문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한테 넘겨주신다면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도록 해줄게요.”“퉤!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손자가 돌아오면 널 가장 먼
“회장님!”우렁찬 외침과 함께 진주 이씨 가문의 권력이 바뀌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이날을 계획해왔던 이일매는 다시 돌아와 무서운 기세로 순조롭게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태산 1호 별장 발코니에서 김병욱이 자기의 손금을 살펴보고 있었다. 왠지 예전과 달라진 듯했다. 이일매가 그의 뒤로 다가가자 그는 얼른 손을 숨겼다.이일매는 먼 곳에 있는 빅토리아 항구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야망이 있는 건 나쁜 게 아니야. 하지만 아무런 생각과 계획이 없는 야망은 결국 널 잡아먹고 말 거야.”김병욱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바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제가 가진 모든 것은 회장님께서 준 것인데 그런 회장님 앞에서 어찌 야망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겠습니까?”이일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보기에 이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거야?”“매처럼 사납고 강하게 이씨 가문을 손에 넣었으니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죠.”“그래, 진주 이씨 가문도 이렇게 손쉽게 장악했는데 성남에선 왜 그렇게 된 거지?”이일매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병욱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등뒤로 식은땀을 흘렸다.이일매가 말을 이어갔다.“만태한테 알려, 내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고. 내가 진주에서 일을 마치기 전에 성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4걸 중 한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테니까.”“네.”김병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마음대로 해. 이씨 가문의 돈은 마음대로 써도 돼. 하지만 내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말을 마친 이일매는 자리를 떴다. 이일매가 사라지고 나서야 김병욱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곤 그는 빅토리아 항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나와.”이윽고 어디선가 선녀 같은 실루엣이 나타났다.김청미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 진짜 성남으로 돌아갈 거야? 그 사람이 김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합병했다고 들었어. 지금 돌아가면 다 드러나는 거 아니야?이에 김병
다음날, 성남의 정씨 어르신과 정지용, 정가을 세 사람이 함께 프리미엄 가든에 나타났다. 그의 손엔 부동산 증명과 대량의 금, 보석과 현금이 있었다. 모두 정민아한테 줘야 할 것들이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정가을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정지용은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모든 자산을 다 팔았는데도 한참 모자랍니다.”며칠 사이 집과 차를 팔아버렸으니 당연히 시장 가격에 한참 못 미치게 팔았을 것이다. 정씨 일가는 그 돈을 다 합쳐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이 써버린 부분을 메꾸지 못했다. 정동철은 어제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 우리는 반드시 와야 해. 지금은 그저 예전에 가족이었던 걸 생각해서라도 정민아가 우리를 봐주길 바라야지. 아니면 우리 모두 거리에 나앉게 될 거야.”이때, 정가을이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근데 우리가 왜 송준 말을 들어야 해요? 지금 우리가 황금과 옥석을 가지고 성남을 떠나도 막을 사람은 없잖아요? 다른 가족은 몰라도 우리 세 사람만 살아있으면 정 씨 일가는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이 돈이라면 다른 곳에서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그녀의 말에 정지용의 마음도 흔들렸다.“할아버지, 가을이 말이 맞을 지도 몰라요. 복수는 천천히 해도 돼요. 우리가 나중에 다시 강해진 후 복수하면 되잖아요.”정동철은 두 사람을 보며 가슴만 답답했다. 진짜 송준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제부터 감시자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재물을 들고 성공적으로 도망쳐도 정동철은 자신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저 두 사람이 다른 정씨 가문의 사람도 배신했는데 도망길에서 자신을 죽여버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돈을 둘이서만 나눠도 된다.정동철은 비록 실력이 강하지 않아도 그동안 보고 들은 게 많으니 통찰력만큼은 뛰어났다.그 순간, 그가 앞으로 다가가 정가을과 정지용의 뺨을 힘껏 때렸다.“정지용, 정가을
프리미엄 가든 최고층.정군과 임은숙은 일찍이 거실에서 마치 예물이 그들의 것인냥 애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곧이어 벨이 울리는 순간, 임은숙은 체면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마치 행동이 느리면 예물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말이다.“정군아, 은숙아...”정동철이 뒷짐을 쥔 채 온화하게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정 씨 일가를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었으니 정군과 임은숙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그런 그의 자태를 보고 있으니 두 사람은 저도모르게 멈칫했다.“정군아, 민아는 어디 있어?”정동철은 자신이 두 사람의 기세를 꺾었다는 생각에 담담하게 물었다.임은숙은 바로 정지용과 정가을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두 사람 손에 쥐어진 물건을 보고 두 눈이 반짝였다.“민아 출근했어요. 이건 저희한테 맡기세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은숙은 뺐듯이 물건을 가로챘다. 정지용과 정가을은 아쉬운 듯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놔! 송 부대표님 말이 기억 안 나? 이 물건은 모두 김세자가 우리 민아에게 준 거라고!”임은숙이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을 째려봤다.정지용과 정가을은 얼굴이 잔뜩 흐려진채 기어코 물건에서 손을 떼려하지 않았다.“일단 들어와서 앉아요. 액수가 맞는지 세어봐야죠. 송 부대표님이 예물 리스트를 뽑아줬거든요. 액수가 안 맞으면 저희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임은숙은 한시가 급한듯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고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이에 정씨 어르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지금 가지고 온 물건이 애당초 받은 것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송준이 예물 리스트를 가져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이때, 금방 잠에서 깬 듯한 김예훈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정씨 어르신은 그를 보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이 모든 게 다 그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김예훈이 없었다면 정씨 가문은 현재 전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정동
김예훈의 말을 들은 정지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정동철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정민아가 평소 말은 날카롭게 해도 심성은 매우 착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한테 빌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정민아가 모든 일을 김예훈에게 맡겼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은숙아, 언제부터 너의 집 일을 데릴사위가 도맡게 된 거야?”정동철은 마른기침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임은숙과 김예훈 사이를 이간질해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그러나 임은숙은 김예훈을 신경 쓰지도 않고 보석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현금을 확인하던 그녀는 표정이 확 바뀌더니 말했다.“어르신, 액수가 맞지 않는데요? 부대표님이 준 예물 리스트와 비교하면 별장 외에 돈과 보석, 옥석만해도 절반이 모자라요! 안 돼요, 이건 인정할 수 없어요. 남은 부분도 반드시 채워넣어야 해요!”임은숙이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해서 물건들이 자기 것인 것마냥 말했다. 누가 감히 가져간다면 큰 코 다칠 것이라 경고하는 듯했다.정동철은 당황해서 안색이 점점 더 흐려졌다. 임은숙이 돈을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미쳐있는 줄은 몰랐다.예전 같았으면 가문의 주인 신분으로 그녀를 억누를 수 있었지만 관계를 끊은 이상 이젠 자신의 신분으로 임은숙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후회가 막심했다. 애당초 왜 정지용과 정가을의 말을 듣고 전군 일가를 가문에서 내쫓았단 말인가? 이젠 그 결과를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한참 후, 정씨 어르신이 한숨을 푹 내쉬고 억지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은숙아, 우리가 자산을 팔아서 돈을 모으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사실 우린 이미 정씨 가문이 성남에서 가지고 있는 팔 수 있는 모든 자산을 다 팔았어. 그래도 부족했다! 우리가 과거 한 가족이었던 정을 봐서라도 한 번만 봐줘.”말을 마친 그는 정지용과 정가을한테 눈짓했다.이윽고 정지용이 앞으로 나서며 임은숙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
김예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어머님, 일단 제 말 끝까지 들어보세요.”김예훈의 말을 들은 임은숙은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혔다.“알았어,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본때를 보여주겠어.”반면 정동철과 정지용, 정가을은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이 하나같이 불안하게 흔들렸다.왜냐하면 다들 김예훈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김예훈은 말을 이어갔다.“전 여러분들이 일부 자산을 매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그게 무슨 헛소리죠?”정지용이 제일 먼저 펄쩍 뛰어올랐다. 그가 집 한 채를 몰래 빼돌리고 팔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몰래 주얼리를 숨겨둔 정가을도 안색이 돌변했다.평생 자기밖에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어찌 가족을 위해 돈이 되는 물건을 선뜻 내놓겠는가! 일부분이라도 줬다는 자체가 대단할 정도였다.유독 정동철만 여전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김예훈이 절대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내 말 끝까지 듣지? 물론 자기 물건을 기꺼이 팔아서 돈을 모은다고 해도 예물을 반납하기에는 턱도 없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해 좋은 방법을 고안해 냈어요.”“무슨 방법인데?”정동철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주식이 있잖아요. 제가 민아를 대신해서 정 씨 일가가 보유한 주식의 49%를 1000억 주고 인수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펑펑 쓴 예물도 반납하고, 이 돈도 가져갈 수 있죠.”말을 마친 김예훈은 테이블 위에 현금 뭉치를 올려놓았다. 얼핏 보기에도 몇십억은 되어 보이는 현금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김예훈의 말을 듣는 순간 정동철은 얼굴이 일그러졌다.“데릴사위 주제에 이렇게 잔인할 줄은 몰랐네! 우리를 벼랑 끝까지 몰아낼 작정인 건가?”김예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임은숙이 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말했다.“사위, 아주 좋은 생각이야! 어르신, 잘 들었죠? 얼른 주식을 넘겨주고 빚을 갚은 뒤 이 돈 챙기고 나가요!”“진짜 너무하네! 그 주식은 우리 가문의 마지막 재산인
정지용은 떠나기 전까지도 정민아와 김예훈이 잘 지내는 꼴을 죽어도 보기 싫은 나머지 이간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다만 김예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불화를 일으켜도 소용없어. 만약 내가 정말 싫다면 언젠간 복수하러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랄게.”정지용은 이를 악물었다. 비록 패기 넘치게 떠나고 싶었지만, 결국은 세상 찌질하게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섬주섬 챙겨서 김예훈의 무심한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정진 별장으로 돌아온 정동철은 텅 빈 내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늘이 지나면 그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현재의 정 씨 일가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찾아야 하는 신세였다.정지용은 품에 끌어안은 돈을 잘 챙기고 정동철을 빤히 쳐다본 뒤 걸음을 옮기려 했고, 정가을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정동철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일단 있어 봐. 정 씨 일가의 재기는 결국 너희 둘한테 달렸어!”“네?”정지용이 홱 돌아서더니 기쁜 얼굴로 물었다.“할아버지, 혹시 대안이 있는 건가요?”정가을도 희색이 만면했다.“할아버지, 좋은 방법 있어요? 정민아 그 화냥년한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정동철은 심호흡하더니 느릿느릿 말했다.“이건 우리 가문의 비밀이자 마지막 히든카드야. 너희 둘 혹시 부산 견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정지용과 정가을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정동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모르는 게 당연하지. 우린 급이 너무 낮아서 그분들을 접할 자격이 없거든.”말을 마친 정동철은 추억에 잠긴 듯 눈빛이 아련하게 빛났고, 이내 천천히 입을 뗐다.“부산 견씨 가문은 우리나라 10대 제일의 명문가 중 하나인데, 부산을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심지어 경기도 원톱인 김씨 가문조차 부산 견씨 가문에 비하면 함께 거론될 자격이 없어. 왜냐하면 김씨 가문이 명문가인 건 사실이지만, 10대 제일의 명문가 축에는 끼지도 못하거든.”정지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