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숙은 어이가 없어서 나영수만 손가락질했다.정군도 화가 나서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김세자가 개최한 행사에 감히 가짜 초대장으로 입장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지 않냐는 말이다.“됐어요, 그만 하세요.”직원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짜 초대장의 출처를 모른다면 감옥에나 처박혀 있어야죠, 뭐.”“저, 그게...”임은숙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정군도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한편, 현장 직원은 짜증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이 준비한 성대한 행사장에서 이런 사건이 떠졌다는 건 곧 그의 책임을 의미했기에 당장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이때, 나영수는 무언가 번뜩 떠오른 듯 정군과 임은숙을 바라보며 물었다.“두 분처럼 성실한 사람이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대체 이 초대장은 누구한테서 받은 거예요? 설마 그 못난 데릴사위는 아니겠죠? 품행이 단정치 못하기로 소문이 났던데, 여자한테 빌붙는 거 빼면 시체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두 분도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라면서요? 아마도 복수를 위해 일부러 가짜 초대장을 얻어 와서 두 분을 모함하려고 했나 봐요. 얼른 김예훈 그 자식에게 연락해서 자백하라고 하세요!”이때 나영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그는 김예훈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되면 김예훈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건 물론, 나중에 감옥까지 갔을 때 어부지리로 정민아를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이런 생각에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에서도 나영수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역시 잔머리만큼은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반면, 정군과 임은숙은 망설임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갑자기 측은지심이 생겨서 김예훈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게 미안해서가 아니었다.어찌 보면 두 사람한테 김예훈 같은 못난 놈은 애초부터 희생양 신
정민아는 잔뜩 신이 났다. 부모님한테도 너그러운 면이 있어서 기꺼이 김예훈을 챙겨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입구에 도착했다.웃는 둥 둥 마는 둥 하는 김예훈의 표정과 달리 정민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어쨌거나 부모님께서 김예훈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인다는 자체가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두 사람을 발견한 정군과 임은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방금까지 김예훈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대체 누구한테 바가지를 씌워야 한단 말인가!정군이 나영수를 흘긋 쳐다보았다.이내 나영수는 김예훈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가짜 초대장을 줬어요! 얼른 붙잡아서 감방에 집어넣고 못 나오게 하세요!”이 말을 듣자 미소를 짓고 있던 정민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그녀는 단번에 눈치챘다.나영수가 준비한 초대장은 사실 가짜였고, 입장하기도 전에 들통난 것이다.정군이 전화해서 김예훈을 부른 목적도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속였을 가능성이 컸다.정민아는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어른으로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지? 본인들이 나영수에게 당했다고 해서 김예훈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속이다니! 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거랑 뭐가 다른가!다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김예훈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는 앞으로 나서서 정군과 임은숙을 빤히 쳐다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비록 두 분이 나쁜 마음을 먹긴 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연락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죠. 지금도 행사장에 가고 싶은가요? 제가 들여보내 줄게요.”정군과 임은숙은 넋을 잃고 말았다. 데릴사위 주제에 이제 정신마저 나간 건가? 당황하기는커녕 어찌 숨도 안 쉬고 큰소리를 내뱉을 수 있단 말이지?이를 본 나영수는 폭소를 터뜨렸다.“다들 똑똑히 봤죠? 가짜 초대장은 저 자식이 얻어온 게 틀림없어요. 심지어 제 입으로 입장해도 된다고 떵떵거리잖아요.”이때 드디어 정신을 차린 정민아가 황급히 나서며
순간 직원은 무의식적으로 경례를 하고는 뒷짐을 쥐고 공손하게 말했다.“김예훈 씨, 정민아 씨, 갑작스러운 소란에 많이 놀라셨죠? 얼른 입장하시죠.”김예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정군과 임은숙을 바라보았다.“이분들은 내 장모님, 장인어른이니까 같이 들여보내 줘.”그 직원은 알겠다는 듯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이내 정군과 임은숙을 에워싼 직원들이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곧이어 초대장을 확인하던 직원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까는 오해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 바로 입장 도와드리겠습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진 채 다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눈앞의 광경은 마치 꿈만 같았다.특히 나영수는 스스로 뺨을 한 대 때리고 나서야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현장 직원들은 다름 아닌 당도 부대의 병사들이며, 수많은 전투를 치른 장병들이지 않냐는 말이다. 하나같이 안목이 높은 사람들인지라 일반인은 안중에도 없었다.그런데 고작 데릴사위한테 극도로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라니?심지어 초대장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입장하게 했다.데릴사위 김예훈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 이처럼 무시무시한 파워가 있을 수 있지?사방에서 숨을 헉하고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생중계를 담당하던 방송사 기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카메라를 켜는 것도 깜빡했는데, 결국 레전드와 다름없는 명장면을 놓치고 말았다.김예훈은 충격을 금치 못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민아야, 어머님, 아버님, 가시죠.”정민아 가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백운가든으로 향했다.그러고 나서 초대장을 확인하던 직원이 나영수를 가리키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뚱땡이를 끌고 가세요. 우선 해외 무장 세력으로 간주하고 처벌해요!”이처럼 중요한 자리에서 가짜 초대장을 들고 왔다는 자체가 심상치 않은 일이기에 꼼꼼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었다.나영수는 깜짝 놀라서 땅바닥에
김예훈이 무심하게 말했다.“궁금증은 잠시 뒤에 풀릴 거예요.”어쨌거나 이따가 정민아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면 정군과 임은숙도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김세자라는 정체를 공개해도 무방했으니까.뜸 들이는 김예훈을 보자 정군과 임은숙은 의혹으로 가득했다.그러나 둘 다 허영심이 많고 권력에 영합하는 사람들인 지라 김예훈이 귀인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미 무의식적으로 김예훈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기 시작했다.“사위, 전에는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어.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길 바랄게.”“나영수 그 개자식이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만약 네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역시 우리 사위밖에 없네, 나영수 같은 놈은 썩 꺼지라고 해!”김예훈이 피식 웃었다.정군과 임은숙의 천성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는 진정성이라고는 일도 찾아보기 힘든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장모, 장인어른은 이익이라면 누구한테도 들러붙는 사람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행사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았을 텐데, 근처 좀 둘러보고 있어요. 잠깐 할 일이 생겨서 잠시 후에 다시 찾아뵐게요.”김예훈이 한마디 보탰다.그는 오늘 아주 바빠질 예정이었다. 정민아에게 프러포즈하는 걸 제외하고도 인수합병을 담당해야 했다.지금 백운가든 회의실에는 CY그룹과 YE그룹의 전 임원들이 모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백운가든 내부 회의실.한자리에 모여 있는 임원들 때문에 내부는 북적북적했다. 다만 CY그룹은 아직 신생 기업이라서 임원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그중 70~80%는 YE그룹 임원 출신인데, 대부분 김예훈을 위해 일했다가 나중에는 김병욱 등 사람한테 빌붙었다.이제는 또다시 김세자에게 의지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다.파렴치한 기회주의자란 바로 이들을 가리켰다.이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바로 이유정과 장소훈이다.이유정은 상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하은혜를 보며 비록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이때 모든 임원이 잇달아 벌떡 일어서더니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목례했다.이분이 바로 전설의 김세자란 말인가?눈앞의 젊은 남자를 보자 이유정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김세자가 이렇게 어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남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상대하기 가장 쉬웠다.매력 발산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텐데, 앞으로 CY그룹은 자신이 쥐락펴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때가 되면 CY그룹의 여왕은 단연코 그녀일 테니까!이유정의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정했고, 눈앞의 남자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다.다만 송준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장내를 한 바퀴 둘러봤는데, 역시나 당도 부대 출신답게 온몸으로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에 겁을 먹은 임원들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다들 앉으시죠. 제 소개를 드리자면 이름은 송준이라고 합니다. 아마 들어본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오늘부터 김씨 가문 소속이었던 YE그룹, BJ그룹 등 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CY그룹에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CY그룹을 이끄는 부대표가 될 것입니다.”자기소개가 끝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송준이 김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이내 경외심도 서서히 사라졌다.이유정이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부대표님, CY그룹 인사팀에서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저희 같은 원로 직원들은 어떻게 한대요? 계속해서 원래 직책을 맡으면 되나요? 제가 모든 임원을 대신해서 한마디 드리자면 저희보다 YE그룹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희가 있는 한 두 그룹은 이른 시일 내로 인수합병을 마칠 겁니다.”이유정의 말에 다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바로 현실이었다. 나이가 어린 상사 앞에서는 강약 조절이 필수였다. 한편으로 공손함을 잃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압박을 가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송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유정을 빤히 바라보더니 미소
“곧 도착할 겁니다.”송준이 말을 마치는 순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회의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무수한 눈길이 순식간에 김예훈한테로 향했다.“저건 데릴사위 아니야? 네가 왜 여기 있어?”유문석이 가장 먼저 김예훈을 알아보고 그한테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 김예훈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김예훈과 친척 사이란 게 밝혀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똑같이 얕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날 우리가 놀던 장난감 아니야?”이유정은 김예훈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곧바로 경호팀장을 가리키며 버럭 화를 냈다.“경호팀이 경호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이런 놈을 들여보내면 어떡해? 여긴 고위인사들이 회의하는 자리라고! 얼른 끌고 나가! 김세자가 이런 놈을 보고 기분을 망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늘같이 중요한 자리에 이런 쓰레기는 낄 자격도 없어!”전에 반월만에 모습을 드러냈던 고위인사들도 김예훈을 쫓아내려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짓이 밝혀지는 것보다 이 폐물 같은 놈이 김세자와 만나는 자리를 망칠까 봐 겁이 났다.그러나 곧이어 벌어지는 광경에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냐하면 김예훈이 귀가 먹은 듯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유일하게 남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왼쪽엔 하은혜, 오른쪽엔 송준이 앉아 있었다.하은혜와 송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김예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송준은 결연한 목소리로 김예훈을 맞이했다.“오셨습니까?”김예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의자에 몸을 맡기며 답했다.“내가 왜 여기 왔는지 네가 말해봐.”송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몸을 돌린 후 자리에 있는 고위인사들을 훑어보며 말했다.“저희 대표님은 회의에 참석하러 온 겁니다.”“뭐요?”이에 모든 사람들은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한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김예훈이 대표님이라고? 그러면 김예훈이 바로 전설 속의 김세자라는 거야?이유정은 순간 숨이 멈추는 듯하며 몸이 부르르 떨렸고 얼굴도 창백해지
밖에선 정민아가 김세자의 여자란 소문이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모두 장난처럼 받아들였던 소문이 진짜일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김세자가 준비한 프러포즈도 정민아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이유정의 표정은 질투와 분노로 일그러졌다.김예훈은 두 발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테이블 주위에 얼어붙은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여러분, 또 뵙네요.”3일 전 김예훈을 얕보고 모욕했던 사람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긴장감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들은 김예훈이 김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나머지 사람들은 그들과 김예훈 사이의 원한에 대해 일도 모르고 있어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같은 시각, 송준은 이유정 등을 시체 보듯 쳐다봤다.김예훈은 그들의 추태를 보며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이유정, 3일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할지 잘 얘기해봐.”이에 이유정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김 대표님, 저희를 용서해주세요!”“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저희를 용서해주신다면 어떤 대가든 치르겠습니다!”“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면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지금,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후회로 가득 찼다.김예훈의 신분을 진작에 알았다면 이런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유문석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일제히 유문석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유문석의 얼굴은 이미 핏기를 잃었다. 그는 김세자뿐만 아니라 고위인사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앞으로 CY그룹뿐만 아니라 성남에서도 사람처럼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가문을 키우고, 창업하고, 위업을 이루는 모든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이에 유문석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행동이 우스웠고 그의 뒤를 봐주는 임씨 가문도 하찮아 보였다.만약 임씨 큰 어르신이 자기가 가문에서
곧바로 김예훈은 몸을 일으킨 후 회의실을 나섰다.이윽고 송준은 이유정 등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유정, 유문석과 장소훈 등은 고개를 숙인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잠시 후, 송준이 이유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어느 손으로 할까요?”그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유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을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걸로 할게요.”“여자니까 10대로 줄여줄게요.”짝!이유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단번에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오늘 송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세게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송준은 고개를 돌려 장소훈을 쳐다봤다.“남자니까 여자보다는 더 큰 벌을 받아야겠죠?”장소훈은 벌떡 일어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잘 알고 있습니다!”그는 테이블에 있는 펜을 들어 자기 손바닥으로 내리찍었다. 고통의 전율이 온몸으로 전해졌지만 그는 꾹 참으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이에 다른 사람들도 따라 펜으로 손을 내리찍었다.송준은 몸을 돌려 부하한테 명령을 남겼다.“지금부터 이들이 가진 재산에서 부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보육원에 기부해. 그리고 앞으로 이들이 성남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모든 회사에 고용금지 공고를 내려! 그리고 김세자의 신분을 발설하는 사람은 바로 죽이도록 해.”그의 명령에 이유정은 사색이 되었다.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그녀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그러나 명령이 내려진 이상 앞으로 거지로 살 결심을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저지른 모든 악행이 모조리 되돌아올 것이다. 이젠 권세를 잃었으니 그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들이 보복하러 찾아올 게 분명했다.그때가 되면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다....한편, 김예훈은 락커에서 몸에 맞는 슈트로 갈아입고 프러포즈하러 나섰다. 오늘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