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도겸의 신분으로 봐서는 밀양에서 두려운 것이 없었지만 오늘 김예훈한테 꼼짝도 못 하고 잡힐 줄 몰랐다.허도겸은 이대로 고개를 숙일 수 없어 냉랭하게 말했다.“이 자식이! 감히 밀양에서 내 사람들한테 손댄 것도 모자라 나를 납치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부터 대!”김예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예훈.”“김예훈?”허도겸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어디서 나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김예훈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서 악독스럽게 말했다.“그래, 알겠어! 좋기는 너의 신분을 나한테 들키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아니면...”쨕!김예훈은 또 한 번 와인병으로 허도겸의 머리를 박살 냈다.“감히 나를 협박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나를 협박하는 거야. 어디 한번 더 해보든가.”“너!”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허도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꼭 너의 신분을 알아낼 거니까.”“확인해 볼 필요 없어요.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제가 알려주도록 하죠.”바로 이때, 입구에서 누군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분은 저희 추씨 가문의 귀한 손님이자 저 추문성의 형님이기도 해요. 허 도련님, 꼭 기억하시길 바랄게요!”이때 입구에서 몇십 명이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왔고 제일 앞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멋진 아우라를 풍기면서 걸어들어왔다.하지만 그의 등장에 허도겸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말았다.부잣집 따님들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심지어 방수아도 추씨 가문의 사람이 나타날 줄 몰랐는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추씨 가문은 명문가는 아니었지만 추문성의 아버지가 바로 밀양 1인자였다.밀양 허씨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고 두려운 것이 없다고 해도 추씨 가문의 체면은 지켜줘야 했다.이때 추문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김예훈 앞으로 가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김 대표님, 제가 너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추문성의 공손한 모습에
안나 등은 추문성의 등장으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살기가 가득했던 현장 분위기는 그제야 조금 평온해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시선을 김예훈과 방수아에게 고정시켰다.“허도겸,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저 사람들 풀어주고 여기까지 데려와. 저 사람들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 한 명을 건드릴 때마다 너의 손가락을 자를 거니까.”김예훈은 허도겸의 얼굴을 툭툭 치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허도겸은 여전히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고집부리고 있었다.“이 자식이. 네가 추씨 가문의 손님인 걸 봐서 오늘 저녁 너랑 수아 씨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 사람들까지 풀어달라고? 꿈 깨! 어디 한번 날 칼로 찔러보든가! 내가 눈 하나 깜빡하면 사람도 아니야. 그런데 잘 기억해. 내가 죽으면 넌 살아서 밀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 넌 우리 밀양 허씨 가문이 우스워 보여? 날 죽였다간 추씨 가문은 물론 하느님이 오셔도 널 살리지 못할 거야.”이 순간 허도겸은 배 째라는 식이었다.김예훈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솔직히 허씨 가문은 밀양에서만 잘나가잖아. 이 가문을 없애기엔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은데.”이 말에 사람들은 전부 다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밀양에서 이런 허세를 부린다고?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러는 거야?’금발 머리의 안나가 냉랭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봐. 넌 그저 우리 도련님을 납치했다고 허세나 부리는 것 같은데 능력 있으면 우리 도련님을 풀어주고 나랑 1:1로 붙어보든가. 한 손이면 너를 충분히 죽여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안나는 김예훈의 그깟 실력으로는 자기 상대가 못 된다고 생각했지만 허도겸을 붙잡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김예훈이 흥미진진하게 안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그럴 기회는 충분히 있을 거니까...”“계속 허세 부려 봐. 안나는 널 식은 죽 먹기로 죽여버릴 거니까.”허도겸은 김예훈이 안나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그러면서 추문성을 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제가
“방 대표님께서 그 창고를 찾아간 이유는 허 도련님이 20년 된 상한 찻잎을 방 대표님의 새로운 찻잎으로 바꿔치기해서잖아요. 변명할 여지도 없어요. 이미 세관에 확인해본 결과 방 대표님이 이 찻잎을 수입한 기록을 입수했으니까요. 그리고 허 도련님한테 찻잎을 팔았던 판매자도 이미 구속했으니 언제든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그 찻잎들을 어디에 숨겼는지까지도 똑똑히 알고 있어요. 제가 입만 열면 이 사실이 세상에 밝혀져 허씨 가문의 체면은 말도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허 도련님, 저는 상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충고하러 온 거예요. 저 사람들을 풀어주고 계약서 내용대로 나머지 금액을 한 푼도 빠짐없이 방 대표님한테 드려야 할 거예요. 지금 대답하세요. 사람을 풀어줄 건지. 금액도 마저 지급할 건지.”뒷짐 쥐고 담담하게 한 말이었지만 하는 말마다 위엄이 넘쳐 허도겸은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추문성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가를 파르르 떨고 말았다.굳건한 태도를 보아하니 정말 증거를 쥐고 있는 틀림없어 보였다.허도겸은 추문성이 왜 이 정도로 김예훈의 편을 들어주는지 몰랐다. 그의 기를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직원도 구해주고 받지 못한 돈도 받아주고 있으니 말이다.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짓밟힌 적이 없는 허도겸은 불쾌함의 극치에 도달했다.하지만 아무리 성격이 거칠고 고집이 센 허도겸이라고 해도 추씨 가문이 명문가는 아니지만 밀양 1인자가 기관의 절대적인 의지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때 허도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추 도련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러는 거 도련님 의지인가요. 아니면 추씨 가문의 의지인가요?”추문성이 뒷짐을 쥔 채 담담하게 말했다.“뭐가 달라요? 허 도련님은 이미 독 안에 든 쥐인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정말 우리 김 대표님이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에 김 대표님이 정말 당신을
허도겸이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서 일어서더니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오늘 본 손해를 다음번에는 어떻게든 꼭 만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이번에는 추문성이 뒤를 봐줘서 이 정도라지만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직원들 얼굴이 피투성이인 것을 확인한 김예훈이 냉랭하게 말했다.“어디 한 번만 더 터치해 보든가.”퍽!추문성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안나가 한 직원을 발로 걷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렸다.그러면서 얼굴에 가소로운 표정을 짓더니 냉랭하게 말했다.“터치했는데 뭐. 한 명씩 다 걷어찰 건데 뭐 어쩌려고?”샤샥!눈깜짝할 사이에 김예훈은 바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쨕!안나가 멈칫하면서 본능적으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뺨을 맞아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사람들은 김예훈이 순식간에 날아와서 뺨 한 대로 안나를 때려눕힐지 몰랐는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상대는 이탈리아에서 장병의 왕으로 불리고 있는 허도겸의 전용 보디가드인데 말이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안나는 몰래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려고 했다.하지만 총을 꺼내기도 전, 김예훈이 이미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퍽!거대한 소리와 함께 안나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김예훈은 오른발로 안나의 얼굴을 천천히 짓밟았다.“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병신으로 만들어 줄까?”퍽!김예훈이 또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안나는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사람은 풀어줬고, 돈은?”김예훈이 목을 부여잡고 있는 허도겸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물었다.눈을 파르르 떨던 허도겸은 더는 건드리면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을 꺼내 바로 계좌이체 해주었다.띠링!핸드폰이 울리고, 방수아는 계좌이체 내역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절대 받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금액을 이렇게 쉽게 받아낼 줄 몰랐던 것이다.“갑시다!”김예훈은 두말없이 차갑게 뒤돌아 방수아를 데리고 이곳을 떠났다.뒤이어 추문성의 손짓
추문성이 듣더니 배시시 웃었다.“당연히 수소문해 보았죠.”그는 핸드폰으로 김예훈에게 자료 몇 개를 보내주면서 말했다.“총사령관님. 출입국사무소, 그리고 다른 인맥들을 총동원해서 조사해 보았더니 이 사람들은 밀양 사람이 아니라 진주 홍성에서 온 사람들이더라고요.”“진주 홍성이요?”김예훈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러면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은 진주 이씨 가문인가요 아니면 곽씨 가문인가요?”“전부 다 아니었습니다. 홍성 사람들은 워낙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라 돈만 쥐여주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카이 팰리스에 나타난 저격수와 관련해서는 사람을 보내 의심되는 장소를 조사해 보았더니 여우 가면과 버려진 총 한 자루를 발견한 것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물들은 이미 밀양 경찰서에 보내긴 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네요. 상대방이 현장에 물건을 버린 것을 보면 저희가 조사해 내지 못할 거라고 이미 확신한 모양이에요.”“여우 가면?”김예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어디 있어요? 저한테 좀 보여주세요.”추문성의 전화 한 통에 곧 누군가 밀폐된 박스를 보내왔다.김예훈은 박스 속 여우 가면을 보더니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뒤이어 박스 속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김예훈은 추문성에게 방수아 일행의 안전을 맡기고 이곳을 떠났다.임은숙 납치 사건, 저격수와 관련해서는 추문성이 진일보 확인해 봐야 했다.허도겸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그가 눈치껏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른 꿍꿍이를 하고 있다면 김예훈은 아예 허씨 가문을 밀양에서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다짐했다.송산 빌라에 도착한 김예훈은 정민아가 이미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다.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몰랐지만 피곤했는지 벌써 자고 있었다.김예훈은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라면을 끓여 먹고는 다른 방에 가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바닷가에 나가 산책하던 김예훈은 나온 김에 정민아의 아침을 사 가기로 했다.
정민아는 갑작스럽게 맞은 뺨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녀의 뒤에 있던 경찰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계속해서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넷째 도련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어제 이야기 잘 끝났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왜...”이 사람들과 싸우기 싫은 정민아는 그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허준서를 쳐다볼 뿐이다.쨕! 쨕!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또 정민아의 뺨을 두 대나 때렸다.“정민아. 계속 모른 척할래? 어제 넷째 도련님이 너한테 구경시켜 주자마자 도박패를 잃어버리셨잖아. 그렇다면 훔친 사람이 너 말고 누구겠어.”정민아는 실성하고 말았다.“도박패를 잃어버리셨다고? 견씨 가문이 넷째 도련님과 합작한 그 도박패를 잃어버렸다고?”“그래! 계속 모른 척해 봐. 넷째 도련님은 너를 진심으로 잘해주는데 너는 왜 이러는 거야? 정말 개보다도 못하네. 나 허영미, 오늘 널 죽이지 못하면 성을 고칠게!”허영미라는 이 여자는 딱 봐도 무술을 배운 몸이었고 누구보다도 악독스러워 보였다.예전과는 다른 정민아였지만 그래도 허영미한테 뺨을 맞아 휘청거릴 뿐이다.쨕!“빨리 사과 안 해?”쨕!“얼른 도박패를 내놓으라고!”쨕!“도둑년! 창피한 줄도 모르고!”허영미의 예쁜 얼굴에는 원망과 질투가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정민아의 옷깃을 잡더니 뺨을 연이어 열몇 대나 때렸다.“도박패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아? 내가 말해주는데, 오늘 넷째 도련님의 도박패를 내놓지 않으면 감옥에 갈 줄 알아!”허영미는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어제 허준서는 정민아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고 심지어 자기 여자로 만들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부잣집 도련님들이 아무리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허영미는 허준서의 약혼녀로서 절대 이런 일이 발생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어떻게 하면 정민아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일이 터지니 잘됐다 싶었다.힘없는 정민아는 전혀 허영미의 상대가 아니었다. 보디가드들도 허씨 가문 보디가드들한테 붙잡혀 뺨을 맞을
정말 도박패를 수색해 내자 어느샌가 모여든 이 구역에서 살고있는 밀양 상류 인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세상에! 정말 염치도 없네! 어떻게 넷째 도련님의 도박패를 훔칠 생각을 해?”“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보네!”“전체 밀양에는 도박패가 오직 6장. 저마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지. 만약에 정말 누군가 훔쳐 갔다면 넷째 도련님은 살아남지 못할 거야.”“넷째 도련님께서 정민아랑 같이 손잡고 도박장을 열기로 했다잖아. 도박패의 6분의 1 정도의 이윤을 나눠주는 식이지.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도 없어.”“저런 사람을 보고 염치없다고 하는 거야.”“이런 젠장! 넷째 도련님이 얼마나 잘해줬는데!”“사모님께서 잘 대처하신 거야. 우리 밀양에 시집오고 싶어 하는 년들이 얼마나 많은데.”“맞아야 본성을 드러내는 거지!”주위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흔들었다.진주 사람과 밀양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륙 사람을 무시했다.정민아가 예쁜 얼굴에 도둑질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저마다 가소롭게 쳐다보았다.이때 정민아가 얼굴을 움켜쥔 채 허준서에게 말했다.“넷째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도박패를 훔친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장부 검사하러 밀양에 온 거예요.”“민아 씨, 정말 실망이네요.”침묵을 지키던 허준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어제 정민아를 만났을 때만 해도 장부 검사하는 건 별일도 아니라면서 직접 정민아를 데리고 부산 팰리스까지 구경시켜 주었다.그런데 그렇게 매너좋던 모습은 온게간데 사라지고 지금은 냉랭할 뿐이다.“원래는 견청룡 세자님을 대신해 민아 씨가 부산 견씨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고 해도 약속대로 함께 부산 팰리스를 운영해 보려고 했어요. 심지어 제 성의를 보여주려고 직접 도박패까지 보여줬죠. 그런데 민아 씨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제 도박패를 훔쳐 갈 줄은 몰랐네요. 이번 일은 부산 견씨 가문을 봐서 이대로 넘어갈 순 있지만 이 계약서에 사인하세요. 내용은 아주 간단해요. 바로 부산 팰리스의 모든 지분을 포기하겠다는 계약
정민아가 얼굴이 붉어진 채 차갑게 말했다.“넷째 도련님, 정말 저를 모함하실 건가요? 제가 부산 견씨 가문의 수장이라는거 아실 텐테 견씨 가문의 보복을 받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부산 견씨 가문?”허영미는 콧방귀를 뀌면서 정민아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정민아. 왜 이렇게 순진한 거야. 네가 그 머리로 어떻게 수장 자리까지 앉게 되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우리가 믿는 구석 없이 이러는 거 같아? 내가 오늘 널 죽여버려도 견씨 가문에서는 모른 척할 거야... 너는 다른 사람들의 앞길을 막아버렸으니까.”그러고는 뒤로 물러서면서 가소로운 표정으로 비웃었다.멈칫한 정민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결국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정민아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허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임은숙이 납치되는 바람에 밀양에 왔다가 이 일이 터지기까지...점점 이 모든 것이 김예훈을 타깃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그러다 결국 자신 또한 타깃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견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앞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부산 6대 세자 중의 한 명이었던 견청룡이 남겨둔 것은 견씨 가문의 수장 자리뿐만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이보다 더 탐내는 것이 따로 있었고, 그것을 얻으려고 정민아를 먹잇감으로 삼기도 했다.심지어 부산 견씨 가문의 사람들까지...처음 부산에 와서 반갑게 인사하던 모습과는 달리 정민아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쓸데없는 말 그만하고.”이때 허영미의 손짓하나에 허씨 가문 보디가드들은 정민아의 보디가드들을 걷어차 바닥에 눕혔다.그러고는 총을 꺼내 이들의 머리를 겨냥했다.“정민아. 고민한 시간을 10분만 더 줄게. 죄를 인정할지 안 할지 잘 생각해 봐. 인정하면 이 사람들을 바로 풀어줄게. 인정 안 할 거면 마음대로 해. 10분 뒤 너는 무사히 풀려날진 몰라도 보디가드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 될 거니까.”허영미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아마미네 토시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정말 네 아랫것들이 떠벌리는 것처럼 잘났으면 택시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그 많은 총잡이로 날 상대하지 않았겠지. 진짜 잘난 놈이면 그냥 칼 들고 와서 대놓고 내 목을 베어 버렸어야지. 그런데 넌 그러지 않았단 말이지.”“이렇게 삽질을 많이 한다는 건 이유가 하나밖에 없지. 그건 바로 네가 졸아서 그래. 내가 한 방에 너 죽일까 봐. 미야타 신노스케 꼴 날까 봐.”김예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말이야. 내가 김현민이랑 등지자마자 너같이 일본 최고의 검객이란 놈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부산에 나타났지? 비행기가 아니라 로켓을 탄다고 해도 이렇게 일찍 도착할 수는 없지.”“사실은 미야타 신노스케가 올 때부터 넌 이미 부산에 왔었지. 그런데 내가 두려워서 꼼짝도 못 했고.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잖아. 결론은 하나야. 넌 내 상대가 안 돼. 두려웠던 거지.”김예훈은 차를 탁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뭐... 그러고 보면 야마자키파의 검신으로서 미야타 신노스케보다는 조금 똑똑하긴 하네. 그래서 내가 오늘은 특별히 살려주도록 하지. 무릎 꿇고 차 한 잔 따라주고 사과한 다음 너희 나라로 굴러가면 돼. 그럼 내가 너의 면목을 봐서 좀 살려줄 수도 있고.”“닥쳐!”“죽고 싶구나!”“감히 우리 검신을 모욕하다니! 죽여주마!”여덟 명의 검객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선창 안은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김예훈은 눈썹 하나도 까딱이지 않고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네가 진짜 이 쓰레기들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번 덤벼봐. 그때 가서야 알게 될 거야. 그날 용문당에 양상철이 있거나 말거나 달라지는 건 없다는걸.”아마미네 토시로가 비웃듯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김예훈, 너의 그 자신감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지나친 자만은 독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 내가 널 두려워한다고? 네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 아니고?”“내가 미리 부산에 온 건 안동 김씨
“닥쳐!”“건방지구나!”“누구를 등지고 야마자키파 검신 앞에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냐?”“사전을 안 읽어봤나? ‘사’자라는 글자를 모르느냐?”여덟 명의 검객들이 하나같이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누구인가?야마자키파의 검신이자 일본 황실의 어의, 진정한 무신 급의 인물이다.그는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며 전설적인 천인합일의 경지를 추구해왔다.이러한 대인물은 일본에서의 지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이와 같은 일본 검객들의 눈에 그는 살아있는 미야모토 무사시 , 사사코 코지로우 와도 같은 존재였다.그런데 비천한 일반인 주제에 감히 아마미네 토시로를 조롱하다니!이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아마미네 토시로의 평온하던 얼굴에 미묘한 냉기가 스쳤다.하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왼손을 가볍게 들어 그만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그의 동작에 여덟 명의 검객들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으로 김예훈을 산 채로 목 졸라 죽일 듯했다.“김예훈, 네가 인물인 건 안다.”“얼마 전, 야마구치파의 검신 미야타 신노스케도 너에게 큰 피해를 보았지.”“너 때문에 야마구치파의 고수들은 거의 전멸했고...”“나카노 가문의 음양사 한 명도 목숨을 잃었지.”“하지만 넌 잘 알 거야. 미야타 신노스케에게서 그 정도 이득을 본 건 무신 양상철이 네 뒤를 봐줬기 때문이지.”“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너 자신이 제일 잘 알겠지?”“그런데 오늘 양상철이 없이 혼자 여기 와서 내가 널 죽이려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이런 상황에서도 감히 내가 네 앞에서 체면이 없다고 말하다니?”“김예훈, 대체 누가 네게 하늘만큼의 배짱을 준 거냐?”“너의 수준을 잊게 할 정도로?”“감히 내 아마미네 토시로 앞에서 건방을 떨어?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나?”한 검객이 참지 못하고 비웃으며 김예훈을 노려보았다.“김예훈, 얼마 전에 감히 아마미네 다이토 도련님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시켰다지?”“누구든 네게 손을 대면 무신 양상철의 적이라
김예훈이 인파 속으로 뛰어들자 남은 총잡이들은 눈꺼풀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몇 명은 허리에서 단검을 꺼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김예훈이 빠른 몸놀림으로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탕탕탕!총잡이들은 하나둘씩 몸을 떨더니 어떤 이는 바다로 날아가 떨어졌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러졌다.그들은 한 사람의 힘이 이 정도까지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단순한 주먹과 발차기만으로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김예훈은 쓰러진 적들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그는 갑판에서 깨끗한 타월을 집어 머리를 닦으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람선의 내부는 호화로웠다.우아한 인테리어와 은은한 향기가 피비린내 나는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연출했다.안쪽은 전체적으로 일본풍으로 꾸며져 있었다.중앙에는 30cm 높이의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이끼와 정교한 불상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이렇게 작은 유람선 안에 이런 세팅을 해놓은 주인공의 취향이 의아할 정도였다.선실 후반부에는 정교한 대나무 마루와 퉁퉁마디로 만든 자리가 깔려 있었다.평범한 소재지만 눈에 띄게 고급스러움과 값비싼 분위기가 느껴졌다.그 자리 위에는 흰 대머리에 일본 전통 목욕 복 차림을 하고 다리에 일본도를 놓은 중년의 일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그는 갈색 찻잔에 들어있는 말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그의 뒤에는 검도복을 입은 8명의 일본 검객이 허리의 일본 장도를 움켜쥔 채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김예훈은 일본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탁자 앞에 앉으며 덤덤히 말했다.“이게 누구야?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궁중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 아니야? 수행을 마치고 부산에 가서 내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떠들어 대지 않았어? 목숨을 버리려고 여기까지 와서 내게 시비를 건 건가?”“이제 보니 너희 일본 놈들은 정말
김예훈의 표정은 차가웠다. 물속에서 몸을 굴리며 회피하던 그는 놀라운 속도로 유람선에 접근했다.불과 십여 초 만에 그는 이미 유람선의 후미에 다가왔다.오른손으로 선체를 가볍게 짚으며 몸을 날려 갑판 위로 올라섰다.그와 동시에 그가 방금 빼앗은 작살을 휘둘렀다.푸!피가 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김예훈의 모습을 찾던 두 명의 총잡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졌다.김예훈은 몸을 굴리며 다른 두 명의 총잡이 앞으로 다가갔다.손에 든 작살을 던져 그들을 갑판에 박아버렸다.“젠장!”이제서야 다른 총잡이들도 반응했다.사방에서 검은 두건을 쓴 스무 명이 넘는 총잡이들이 달려왔다.그들은 이미 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상태였고 김예훈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탕탕탕!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나왔다.좁은 갑판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변했다.진한 화약 냄새가 퍼지며 김예훈은 전쟁터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힘들다.체로 치듯 총알을 맞거나 벌집이 되어 죽었을 것이다.그래서 이 순간 총잡이들은 하나같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탕탕탕!하지만 김예훈은 불가능해 보이는 타이밍에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닫히지 않은 창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강철 창문이 떨어지며 김예훈 앞을 가로막았다.탕탕탕!그 순간 총알들이 창문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김예훈은 극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피해냈다.나머지 총알들은 빗나가거나 갑판에 박혀 딱딱한 소리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총잡이들의 탄약이 바닥났지만, 김예훈은 겨우 살짝 긁힌 상처조차 없었다.주변은 이미 벌집이 되어 있었다.김예훈은 무심하게 또 다른 총을 주워 탄창을 교체했다.그리고 총잡이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또 할 거냐?”총잡이들은 정신이 멍해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탄창을 교체했다.다시 총을 들이대며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김예훈이 먼저 두 자루의 총을 동시에 발사했다.탕
김예훈이 김현민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원래 평탄했던 도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몹시 울퉁불퉁했다.김예훈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웃으며 물었다.“기사님, 여기는 어디예요? 아니면 당신이 누구 사람인지 물어봐야 하나요?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앞에는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고 있는 길이었는데 길가에는 이미 많이 낡은 경고 표지판들이 가득했다.김예훈의 질문에 대머리 택시 기사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앞에 있는 경고 표지판을 뚫고 길 끝을 향해 질주했다.기사의 무모한 행동에 김예훈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어디로 가냐고? 뭘 할 거냐고? 당연히 당신을 죽이러 가는 거지.”대머리 중년이 갑자기 섬뜩하게 웃었고 입가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당신이 차에 탄 순간부터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고 이제 아무도 당신을 살려줄 수 없어. 김예훈 씨 잘 가! 사모님이 안부 전하라고 했어.”이어서 대머리 중년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고 고개가 옆으로 떨어지더니 먼저 죽어버렸다.그의 오른발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기에 차는 곧바로 도로를 벗어나 바다로 날아갔다.김예훈이 고개를 저었다.김서하가 자기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숨돌릴 시간마저 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다만 이런 하찮은 수법으로 김예훈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김서하든 김현민이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물일지 모르지만, 김예훈이 보기에 두 사람은 어디에든 내놓기 민망한 평균 이하 수준의 사람들이었다.차가 바다에 떨어지려는 순간 김예훈은 꽁꽁 닫혀 있는 차 문을 발로 차더니 차가 물에 빠지기 직전에 차에서 빠져나왔고 동시에 차는 물에 빠지면서 쿵 하는 폭발음이 터졌다.짙은 연기 속에서 수많은 철 조각이 날아다녔다.“푸!”김예훈은 바닷속 10미터 정도에 잠수했고 다시 옆으로 10여 미터 헤엄쳐 간 후에야 수면 위로 올라왔다.처음부터 김예훈은 누군가 고의로 준
김예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말씀드리자면 진실 외에도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그게 뭐죠?”휴대폰 건너편의 박연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첫째는 안동 김씨 가문 당주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합니다. 10년 전의 진실에 반드시 진주·밀양의 안동 김씨 가문 고위층이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는 건 사모님도 잘 아시는 사실이잖아요. 만약 안동 김씨 가문 당주의 지지가 없다면 진실을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잘못하다가는 사모님도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후계자 대체 인력이 필요합니다. 김현민 씨가 잡힌 후 당주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어야 안동 김씨 가문에 혼란이 오지 않을 것이고 또 사모님이 내정한 사람이어야만 사모님께서 김씨 가문을 더 잘 장악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사모님은 아직 젊으시니 20년 후면 반드시 사모님의 친 아드님이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김예훈은 은근히 10년 전 사건의 진범이 김현민이라고 확신하는 듯 말했다.박연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김예훈 씨가 지금 한 얘기는 신중하게 고민해 볼게요. 그리고 몸조심해요. 아가씨는 안동 김씨 가문의 아가씨일 뿐만 아니라 용전의 안주인이에요. 겉으로는 청순한 백련화처럼 보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가면을 쓰고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죽였는지 몰라요. 부디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그녀의 손에 죽는 일은 없기를 바라요.”김예훈이 웃었다.“사모님, 감사합니다. 그 따위 계략으로 절대 저를 죽일 수 없을 거예요.”“저의 남편하고 얘기할 건데 언젠가 시간 내시면 저희 별장으로 식사 초대할게요.”박연서의 말에 김예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당주만 시간을 내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박연서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김예훈 씨,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저의 병을 어느 정도라도 치료해 줘요. 앞으로 며칠 동안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부탁해요. 그리고 며칠 뒤 저희 아버님 생신 파티에 당신을
김예훈은 대머리 택시 기사를 무심하게 훑어보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는 머릿속으로 오늘 김서하의 치밀한 계획을 떠올리더니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의 계획을 눈치챘고 또 김예훈도 다른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때문에 결론적으로 오늘의 상황은 김예훈이 이긴 셈이다.특히 마지막에 날린 귀뺨은 참고 있었던 분노를 터뜨린 거였고 다른 의미에서는 박연서에게 자신의 명확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조금 전의 귀뺨은 김예훈과 김현민 사이를 보여준 것이고 김현민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그래야만 감정결벽증이 있는 박연서와 계속 협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다만 이 일이 어떻게 박연서의 귀에 들어갈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고속도로에서 그들을 본 시각부터 박연서는 반드시 모든 상황을 파악하려고 할 거라고 믿었다.아마 김예훈이 김서하의 귀뺨을 때렸을 때도 박연서의 부하들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만약 이 정도의 능력도 없다면 안동 김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김예훈은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잠시 생각하다가 어디엔가 전화했다.김예훈의 행동을 본 대머리 택시 기사는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더니 앞좌석과 뒷좌석을 가로막는 방음 유리창까지 올려 안심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했다.김예훈은 만족하는 눈빛을 보내며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좌석에 꺼내 놓았는데 그때 마침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차갑고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김예훈입니다.”김예훈은 자기소개부터 했다.“조금 전에 순한 고속도로의 상황은 오해입니다. 그리고 제가 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는데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박연서가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죠?”김예훈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조금 전에 화가 치밀어서 김서하 사모님의 귀뺨을 때렸거든요. 지금쯤 아마 저를 죽이려고 부하들을 보냈을 수도 있어요. 사모님께서 저를 살려주세요.”휴대폰 건너편의 박연서는
“김예훈 씨, 정말로 뜻밖이네요.”김서하는 자기가 준비한 걸 모두 들키자,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김예훈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현민이의 부하들이 왜 모두 실패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머리와 무술 실력은 물론이고 인내력에 운까지 모두 최상급으로 갖추었네요. 내가 이 정도까지 유혹하고 도발해도 꼼짝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평정심으로 모든 걸 알아채다니... 인정해요. 내가 당신을 너무 과소평가했어요. 재미있네요. 당신이 충분히 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나도 당신을 죽이는 일에 더 흥미를 느낄 테니까요.”말을 마치고 김서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출발하더니 순환 고속도로의 출구에서 차를 멈추고 말했다.“당장 내려요.”김예훈은 차 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김서하를 보며 말했다.“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조금 더 신경 써서 사모님을 상대할게요. 그런데 나이도 있으신 분이 저를 상대하려면 보약을 많이 드시고 몸을 잘 챙기셔야 할 거예요. 사모님께서 기력이 딸려서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쓰러질까 봐 걱정이에요.”김예훈의 나이가 많다고 한 말에 김서하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김예훈은 차에서 내려 서둘러 떠나지 않고 오히려 운전석 쪽으로 가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김서하를 보며 말했다.“사모님, 저 궁금한 거 있는데요. 혹시 천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걸 좋아해요? 왜 그렇게 저한테 맞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김서하가 차갑게 말했다.“그렇다면 왜요? 아쉽게도 당신은 겁쟁이라서 기회를 줘도 때리지 못하잖아요. 김예훈 씨 당신은 겉면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찰싹!”김서하의 말이 끝나가도 전에 김예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때렸다.아주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김서하의 얼굴에는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나가는 김예훈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 있던 김서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데 조금은 처량하고 또 조금은 미친 사람 같았다.김예훈의 모습이 사라
“증거는요?”김예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이 차에 탄 것이 무슨 증거라도 된다는 거예요? 진주·밀양의 안동 김씨 가문의 당주가 설마 그렇게 순진할까 봐요?”“아니요. 믿을 거예요. 넷째 오빠는 비록 나를 미워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안동 김씨 가문의 명예거든요. 내가 오빠 앞에 가서 어느 겁 없는 자식이 나한테 나쁜 짓을 하고 또 언니에게 접근하려고 한다고 하면 분명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요. 그리고 증거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고요. 지금 무릎 꿇고 우리 현민이의 개가 될 건지 아니면 죽을 건지 선택해 봐요.”김예훈은 자기가 홧김에 치켜든 손을 보고 또 김서하를 바라보다가 손을 다시 내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혹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사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요. 사모님 성격에 제 앞에서 모든 걸 얘기하고 화를 도발하게 했다는 것은 당신을 때리게 하려는 거죠? 설마 뒷좌석에 있는 카메라를 제가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과 김현민 씨의 윤리 도덕을 넘어선 관계를 모를 줄 알아요?”이어서 김예훈은 김서하가 반응하기 전에 손을 뻗어 뒷좌석에 놓인 쿠션을 가져다 찢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초소형 카메라와 녹음기가 나왔다.“어린 애인을 위해 정말 못 하는 짓이 없네요. 저와 박연서 사모님의 협력을 방해하려고 또 저를 도발시켜 때리게 하려고 하다니... 제가 당신을 때리기만 하면 당신은 영상을 앞뒤로 편집해서 인터넷이나 다른 방법으로 안동 김씨 가문의 당주 손에 들어가게 하려는 거겠죠. 제가 당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못된 짓을 했다는 증거를 보면 안동 김씨 가문의 어르신과 당주는 물론이고 가문 전체에서 저를 죽이려 할 거예요.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한 계획이긴 했어요. 당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저는 죽든가 아니면 진주·밀양에서 쫓겨나겠죠. 그리고 김현민 씨는 어쩌면 특별한 시기에 정당하게 권력을 잡게 되고요?”김예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김서하의 계략을 하나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