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대경이 지금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지아가 조금 전 한대경이 자신에게 보여준 너그러운 행동을 떠올렸다. 과거였다면 이 남자는 진작에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대경을 때리고, 할퀴고, 심지어 내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대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어.’‘정말 이상해. 조금 전 한대경의 모습은 평소 그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한대경이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과거 라카에서 한대경은 그저 ‘소수연’에게 약간의 호감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아도 자신에 대한 한대경의 애정을 분명하게 느꼈다. 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는지는 그가 그 여자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한대경이 지아에게 너무나도 관대했다는 것은 지아에 대한 집착 역시 커졌다는 증거였다.이도윤은 이 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알아챘다. ‘만약 한대경이 지아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아가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폭발을 막지도 않았을 거야.’이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마치 귀여운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자기뿐이야...”“당신 마음속에도 내가 있다면...”‘나와 재결합해야지... 그래야 다른 남자가 더는 내 여자를 탐내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이 말은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지아 사이에 분명한 하나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명분이 없다면, 이예린을 죽인다고 해도 둘 사이의 상황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도윤은 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이때, 지아가 도윤의 넥타이 끝을 잡아당기며 발끝을 세워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지아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도윤의 눈이 순간 동그래지면서, 곧 지아의 마음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지아의 마음은 여전히 전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도윤은 여러가지 일로 다소 산만해 보였다. “오빠 소식은 아직 없는 거야?” 도윤은 뒤늦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했어?”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 한대경 안 좋아해. 조금도 그런 마음 없어.” 지아의 확고한 눈빛을 마주한 도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난 그냥...” 도윤은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도윤은 지아를 처음 봤던 그날부터, 지아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지아는 마치 작은 태양과 같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지 그녀가 내뿜는 빛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윤은 그 빛을 오래전부터 자신의 집 안에 가두고 싶었다. ‘이 빛나는 작은 태양’을 자신의 곁에 두고 아무도 지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만의 태양이길 원했다. 하지만 작은 태양 같던 지아는 점차 그 빛을 잃어갔지만 도윤은 개의치 않고, 그녀가 그저 진주처럼 그의 소유물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지아는 도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지아가 다시 도윤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예전의 지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고 눈부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도윤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빛을 감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아의 빛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고, 도윤도 그녀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 도윤의 마음속엔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아의 빛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지아의 빛은 그 어떤 감옥에도 가둘 수 없는 것이었다.지아도 도윤의 강한 소유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설명했다. “오늘은 묘소에 할머니랑 아빠를 뵈러 간 거야. 한대경이 올 줄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거야. 한대경이 내 차 키를 뺏고 억지로 자기 차에 태운 거야.” 도윤은 지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
몇 십조 규모의 거래는 기업 입장에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가 차원으로 보자면, 그 거래가 담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표면적으로는 현재 5개국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뒤로는 모두가 상대의 패권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A국은 전통적으로 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굳이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두 국가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예전의 한대경은 마치 벼룩처럼 툭툭 여기저기 국경을 넘나들며 분쟁을 일으켰다. 무역은 두 나라가 관계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니, 한대경의 이번 거래 제안은 일종의 화해의 제스추어인 셈이다. 만약 한대경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부장경도 더 이상 국경 지역에 상주하지 않아도 되고, 부남진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부남진은 이미 연로해서, 지난번 부상을 입은 이후로 여러 일처리가 힘에 부치는 듯했다.“괜찮아.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잖아.” 부장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너그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는 부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 가문이 얼마나 가족을 보호하는데 진심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저는 고모님을 보러 갈게요.”국가 차원의 일은 자신 같은 여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부남진과 부장경이 받쳐줄 테니까. 지아는 요즘 전효를 찾느라 바빴다.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지아는 둘이 전에 함께 일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으로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지아는 계속 전효가 맞은 총알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직접 연락을 해주기를 바랐다.화연은 지아가 처방한 약을 꾸준히 복용한 덕분에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지아는 그런 화연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뻐했다.“회복이 잘 되고 있네요. 그런데...” 지아
지아는 계속해서 화연을 설득하려 애썼다. “제가 아이를 가진 엄마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정말 그런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살고 싶어 할까요? 이명란 일가는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하잖아요. 미셸은 그 아이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그 아이의 아버지마저도 아이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 하고 있잖아요. 그 아이가 태어난다면, 태어나자마자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지아는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 아이는 미셸이 하용과 부씨 가문에 복수하려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커요. 지금 아이는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잖아요. 고작 몇십 그램밖에 안 되는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지금, 아이가 완전히 형성되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그리고 고모님과 하용 씨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어요.” 지아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화연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화연은 고개를 떨구며 평평한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는 단지... 내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까 봐 두려워.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기를 수도 있는데...” 지아는 단호히 화연을 말렸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그건 과거 어른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에요. 제가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핏줄이란 참 신기해요. 제 아이들이 넷이나 되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들이 특히 엄마를 많이 닮아요. 만약 그 아이가 미셸의 성격을 물려받았다면, 고모님께서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그 아이는 배은망덕한 늑대로 자랄 거예요.” 지아의 머릿속에는 백채원이 떠올랐다. 선천적으로 나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잘해줘도 바뀌기 어려운 법이었다. 변진희가 20년 동안 채원에게 정성을 다해 길렀지만, 결국 채원은 다른 사람의 사악한 말 한마디에 변진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변진희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채원은 골수
지아는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한대경... 정말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화연을 달래고 난 뒤, 지아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방을 나섰다. ‘좋아, 이번엔 제대로 그놈한테 약을 발라줘야겠어.’ ... 지아가 거실에 다다르기 전,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당신이 왔어요? 당장 나가요.” 도윤은 한 손에 핀셋으로 솜을 집고, 다른 손에는 알코올 병을 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알코올을 한대경의 머리 위에 들이붓고 불이라도 붙일 듯 위협적이었다. 도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 알레르기가 있다면서요? 제가 의사는 아니니까, 지금 직접 해드릴게요. 진환아,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줘.” “네.” 진환은 사람들을 데리고 한대경에게 다가갔다. 이 광경을 보자마자 지아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해마다 섣달에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으려고 건장한 체구를 가진 이웃들을 불러모으는 장면이 떠올랐다.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큰 돼지를 힘껏 붙잡고, 도축사가 칼을 들어 돼지의 멱을 따는 모습처럼, 지금 한대경은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커다란 돼지 같아 보였다. 바로 그때, 배이혁이 다가와 진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측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폭발할 듯 팽팽하게 감돌았다.“그만해요.” 부남진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분, 이쯤에서 멈추시죠.” 부남진은 이도윤과 한대경 사이의 오랜 원한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아끼는 부하를 잃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만날 때마다 서로를 적대했다. 두 세력 간의 암투와 갈등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대립은 점점 깊어져 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부씨 가문의 저택에서 만나 일대일로 대놓고 싸운 것은 처음이었다. 거실은 넓었지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방 안 공기는 무겁고 숨 막히는 듯했다.한대경은 셔츠의 단추를 단정히 잠그고, 냉담한 표정으로 예전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이런 한대경을 바라보며 지아는 침착하게 말했다.“저는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한대경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만약 지아 아가씨가 모르신다면, 이 세상에 아는 분은 없겠죠.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저에게 약을 발라주기만 하면 이번 일은 농담으로 끝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한대경은 이번 사건을 테러 공격으로 규정해 사태를 크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지아는 이도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도윤 씨, 나에게 줘.”“지아야...”도윤은 한대경의 속셈을 알기에 지아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지아는 이미 부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가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부남진이 지아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라카에 갔던 것처럼, 이제는 지아도 부씨 가문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단지 약 좀을 발라주는 거지, 별일 아니야.’지아는 도윤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를 안심시켰다.“금방 끝날 거야.”도윤은 망설였지만, 결국 지아의 결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약을 지아의 손에 건네주었다.지아는 약을 받아 들고 한대경에게 다가갔다. 한대경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지아에게 한대경은 그저 또 다른 환자일 뿐이었다.도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비록 단순히 약을 바르는 일이었지만, 도윤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그는 과거 자신이 백채원에게로 떠나갔을 때, 지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인과응보, 결국 이런 식으로 벌을 받게 되는구나.’한대경은 도윤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아가씨, 수고 좀 부탁드립니다.”도윤은 손가락에 핏기가 사라지고 흰색으로 변할 정도로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지아를 향한 걱정과 한대경을 향한 분노가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과한 말씀입니다
이 뜻밖의 제안은 놀라운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한대경처럼 쉽게 앙심을 품는 사람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자를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대경은 상대방을 쉽게 용서하고, 심지어 이 사건을 더 이상 조사하려 들지 않았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이 한대경의 차에 있었을 때, 지아와 무언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한대경과 지아는 혈연도 아니고,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부남진은 한대경의 행동이 오로지 지아에 대한 호감을 가졌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대경이 그 말을 꺼냈을 때, 부남진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여전히 차분하게 물었다. “우리 집안에는 두 명의 아가씨가 있는데, 자네가 원하는 건 누군가?” 사실 오늘 하용은 단지 자리만 지키면 되는 상징적인 역할로 불려온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직 하용의 사직서를 승인하지 않았다. 하용은 더 이상 예전처럼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고, 그저 맡은 일을 성실히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남진의 이 한마디는 하용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하용과 도윤 둘 다 부남진에게 미움을 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윤은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고, 하용은 과거 미셸을 이용해 출세하려 했던 일로 부남진의 눈 밖에 났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지아와 화연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용과 도윤은 동시에 긴장하며 한대경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러나 한대경은 두 사람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두껍디두꺼운 얼굴로 지아를 향해 말했다. “저는 지아 아가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부디 지아 아저씨께서도 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부남진은 지아를 보며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우리 집안은 자유연애를 존중해 왔으니, 지아야, 지금 내 눈 앞에 너랑 혼인하고 싶은 대단한 분이 나타났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지아는
한대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연애 경험도 없이 곧바로 결혼 생각으로 직진할 만큼 단순했다. 당연히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만약 제 조건이 부족하다면 말해주셔도 좋습니다. 지아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내 기준을 낮추겠습니다.” 지아는 한대경의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부씨 가문은 딸을 팔아서 이익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은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하께서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먼저 연애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닙니다. A 국과의 우호 관계를 원하신다면, 결혼을 빼고도 두 나라의 협력적인 관계를 도모하는 건 국민들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결혼을 빼고, 제가 왜 국민들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합니까? 제가 불편한데, 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까?” 지아는 할 말을 잃었다. 도윤은 지아 옆에 앉으며 비꼬듯이 말했다. “행복하든 말든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죠. 정말 웃기네요. 우리에게 당신의 그 수십 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돈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우방을 거절할 나라는 없겠죠. 만약 제가 Z 국이나 H 국과 손을 잡으면, 이 나라에는 그게 더 큰 골칫거리가 될 것 같은데요.” “정말 본인이 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모양이군요. 본인이 없으면 지구가 멈추고 태양이 빛나지 않을 것 같아요? 웃기지 마세요. 우리 A 국은 당신이 있든 없든 아무 문제도 없어요.” “이도윤, 지금 정말 전쟁을 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끝까지 상대해줄 테니까!”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고, 팽팽한 기운이 방 안을 휘감았다. 지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차라리 두 분이 결혼하는 게 어때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지아를 불타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누가 이 사람이랑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