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혁은 한껏 속력을 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한대경은 도윤을 따돌렸고, 지아는 조금 전 도윤이 자신을 본 사실조차 몰랐다. 지아는 온 힘을 다해 한대경을 밀쳐냈다.“한대경, 자제해.”한대경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으며 비웃었다. “소 선생님, 분명히 알아둬. 처음에 날 건드린 건 당신이었어. 이제 와서 자제를 요구한다고? 이미 늦었어.”찬바람에 지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까만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은 누구라도 동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한대경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한대경을 막아섰다.“내 여자에게서 떨어져.”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대경을 주시하고 있었다.“도윤 씨...” 지아도 결국 도윤을 발견했다.한대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부하에게 명령했다. “따돌려.”도윤 역시 냉정하게 명령했다. “쫓아.”조금 전 전효의 등장도 잠시뿐, 지금 두 사람의 시선은 온전히 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배신혁과 진환은 속도를 더욱 높여 차량을 추격했다. 결국 양쪽의 차량 모두 동시에 부씨 가문의 저택 앞에서 멈췄다.부장경은 부하들과 함께 한대경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택 안으로 난 길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장애물 하나 없이 뚫려 있었다.수십 대의 검은 차들이 경주하듯 도착했고, 그중에서도 두 대가 유독 빠르게 내달렸다.끼익-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마찰하는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리며 두 대의 차량이 거의 동시에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렸다. 도윤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아가 나타났다.부장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한대경을 암살하려고 한 킬러도 아직 못 찾았는데, 지아가 왜 한대경의 차에서 내린 거지?’“지아, 혹시 한대경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니?”지아는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고 도윤의 품에 뛰어들며 조용히 물었다. “오빠는...”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
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대경이 지금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지아가 조금 전 한대경이 자신에게 보여준 너그러운 행동을 떠올렸다. 과거였다면 이 남자는 진작에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대경을 때리고, 할퀴고, 심지어 내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대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어.’‘정말 이상해. 조금 전 한대경의 모습은 평소 그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한대경이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과거 라카에서 한대경은 그저 ‘소수연’에게 약간의 호감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아도 자신에 대한 한대경의 애정을 분명하게 느꼈다. 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는지는 그가 그 여자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한대경이 지아에게 너무나도 관대했다는 것은 지아에 대한 집착 역시 커졌다는 증거였다.이도윤은 이 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알아챘다. ‘만약 한대경이 지아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아가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폭발을 막지도 않았을 거야.’이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마치 귀여운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자기뿐이야...”“당신 마음속에도 내가 있다면...”‘나와 재결합해야지... 그래야 다른 남자가 더는 내 여자를 탐내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이 말은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지아 사이에 분명한 하나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명분이 없다면, 이예린을 죽인다고 해도 둘 사이의 상황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도윤은 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이때, 지아가 도윤의 넥타이 끝을 잡아당기며 발끝을 세워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지아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도윤의 눈이 순간 동그래지면서, 곧 지아의 마음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지아의 마음은 여전히 전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도윤은 여러가지 일로 다소 산만해 보였다. “오빠 소식은 아직 없는 거야?” 도윤은 뒤늦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했어?”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 한대경 안 좋아해. 조금도 그런 마음 없어.” 지아의 확고한 눈빛을 마주한 도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난 그냥...” 도윤은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도윤은 지아를 처음 봤던 그날부터, 지아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지아는 마치 작은 태양과 같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지 그녀가 내뿜는 빛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윤은 그 빛을 오래전부터 자신의 집 안에 가두고 싶었다. ‘이 빛나는 작은 태양’을 자신의 곁에 두고 아무도 지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만의 태양이길 원했다. 하지만 작은 태양 같던 지아는 점차 그 빛을 잃어갔지만 도윤은 개의치 않고, 그녀가 그저 진주처럼 그의 소유물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지아는 도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지아가 다시 도윤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예전의 지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고 눈부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도윤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빛을 감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아의 빛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고, 도윤도 그녀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 도윤의 마음속엔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아의 빛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지아의 빛은 그 어떤 감옥에도 가둘 수 없는 것이었다.지아도 도윤의 강한 소유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설명했다. “오늘은 묘소에 할머니랑 아빠를 뵈러 간 거야. 한대경이 올 줄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거야. 한대경이 내 차 키를 뺏고 억지로 자기 차에 태운 거야.” 도윤은 지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
몇 십조 규모의 거래는 기업 입장에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가 차원으로 보자면, 그 거래가 담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표면적으로는 현재 5개국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뒤로는 모두가 상대의 패권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A국은 전통적으로 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굳이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두 국가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예전의 한대경은 마치 벼룩처럼 툭툭 여기저기 국경을 넘나들며 분쟁을 일으켰다. 무역은 두 나라가 관계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니, 한대경의 이번 거래 제안은 일종의 화해의 제스추어인 셈이다. 만약 한대경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부장경도 더 이상 국경 지역에 상주하지 않아도 되고, 부남진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부남진은 이미 연로해서, 지난번 부상을 입은 이후로 여러 일처리가 힘에 부치는 듯했다.“괜찮아.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잖아.” 부장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너그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는 부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 가문이 얼마나 가족을 보호하는데 진심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저는 고모님을 보러 갈게요.”국가 차원의 일은 자신 같은 여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부남진과 부장경이 받쳐줄 테니까. 지아는 요즘 전효를 찾느라 바빴다.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지아는 둘이 전에 함께 일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으로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지아는 계속 전효가 맞은 총알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직접 연락을 해주기를 바랐다.화연은 지아가 처방한 약을 꾸준히 복용한 덕분에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지아는 그런 화연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뻐했다.“회복이 잘 되고 있네요. 그런데...” 지아
지아는 계속해서 화연을 설득하려 애썼다. “제가 아이를 가진 엄마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정말 그런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살고 싶어 할까요? 이명란 일가는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하잖아요. 미셸은 그 아이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그 아이의 아버지마저도 아이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 하고 있잖아요. 그 아이가 태어난다면, 태어나자마자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지아는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 아이는 미셸이 하용과 부씨 가문에 복수하려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커요. 지금 아이는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잖아요. 고작 몇십 그램밖에 안 되는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지금, 아이가 완전히 형성되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그리고 고모님과 하용 씨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어요.” 지아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화연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화연은 고개를 떨구며 평평한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는 단지... 내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까 봐 두려워.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기를 수도 있는데...” 지아는 단호히 화연을 말렸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그건 과거 어른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에요. 제가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핏줄이란 참 신기해요. 제 아이들이 넷이나 되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들이 특히 엄마를 많이 닮아요. 만약 그 아이가 미셸의 성격을 물려받았다면, 고모님께서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그 아이는 배은망덕한 늑대로 자랄 거예요.” 지아의 머릿속에는 백채원이 떠올랐다. 선천적으로 나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잘해줘도 바뀌기 어려운 법이었다. 변진희가 20년 동안 채원에게 정성을 다해 길렀지만, 결국 채원은 다른 사람의 사악한 말 한마디에 변진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변진희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채원은 골수
지아는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한대경... 정말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화연을 달래고 난 뒤, 지아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방을 나섰다. ‘좋아, 이번엔 제대로 그놈한테 약을 발라줘야겠어.’ ... 지아가 거실에 다다르기 전,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당신이 왔어요? 당장 나가요.” 도윤은 한 손에 핀셋으로 솜을 집고, 다른 손에는 알코올 병을 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알코올을 한대경의 머리 위에 들이붓고 불이라도 붙일 듯 위협적이었다. 도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 알레르기가 있다면서요? 제가 의사는 아니니까, 지금 직접 해드릴게요. 진환아,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줘.” “네.” 진환은 사람들을 데리고 한대경에게 다가갔다. 이 광경을 보자마자 지아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해마다 섣달에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으려고 건장한 체구를 가진 이웃들을 불러모으는 장면이 떠올랐다.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큰 돼지를 힘껏 붙잡고, 도축사가 칼을 들어 돼지의 멱을 따는 모습처럼, 지금 한대경은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커다란 돼지 같아 보였다. 바로 그때, 배이혁이 다가와 진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측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폭발할 듯 팽팽하게 감돌았다.“그만해요.” 부남진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분, 이쯤에서 멈추시죠.” 부남진은 이도윤과 한대경 사이의 오랜 원한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아끼는 부하를 잃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만날 때마다 서로를 적대했다. 두 세력 간의 암투와 갈등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대립은 점점 깊어져 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부씨 가문의 저택에서 만나 일대일로 대놓고 싸운 것은 처음이었다. 거실은 넓었지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방 안 공기는 무겁고 숨 막히는 듯했다.한대경은 셔츠의 단추를 단정히 잠그고, 냉담한 표정으로 예전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이런 한대경을 바라보며 지아는 침착하게 말했다.“저는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한대경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만약 지아 아가씨가 모르신다면, 이 세상에 아는 분은 없겠죠.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저에게 약을 발라주기만 하면 이번 일은 농담으로 끝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한대경은 이번 사건을 테러 공격으로 규정해 사태를 크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지아는 이도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도윤 씨, 나에게 줘.”“지아야...”도윤은 한대경의 속셈을 알기에 지아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지아는 이미 부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가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부남진이 지아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라카에 갔던 것처럼, 이제는 지아도 부씨 가문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단지 약 좀을 발라주는 거지, 별일 아니야.’지아는 도윤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를 안심시켰다.“금방 끝날 거야.”도윤은 망설였지만, 결국 지아의 결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약을 지아의 손에 건네주었다.지아는 약을 받아 들고 한대경에게 다가갔다. 한대경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지아에게 한대경은 그저 또 다른 환자일 뿐이었다.도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비록 단순히 약을 바르는 일이었지만, 도윤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그는 과거 자신이 백채원에게로 떠나갔을 때, 지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인과응보, 결국 이런 식으로 벌을 받게 되는구나.’한대경은 도윤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아가씨, 수고 좀 부탁드립니다.”도윤은 손가락에 핏기가 사라지고 흰색으로 변할 정도로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지아를 향한 걱정과 한대경을 향한 분노가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과한 말씀입니다
소지아가 위암 양성 판정을 받았던 날, 이도윤은 자신의 첫사랑과 함께 그녀의 아들과 아동 병원에 있었다.병원 복도에서 임건우는 검사 보고서를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지아야, 검사 결과 나왔어. 악성 종양 말기야, 수술 성공하면 5년 생존율은 15~30% 정도고.”소지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깨에 멘 숄더백 끈을 잡아당겼고, 약간 창백한 작은 얼굴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선배, 수술 안 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6개월에서 1년, 사람마다 다르지. 네 상황은 먼저 약물치료를 두 번 받은 뒤,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하면 암세포의 확산과 전이의 위험을 막을 수 있거든.”소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했다.“고마워요, 선배.”“나한테 고맙긴, 바로 입원 수속 밟자.”“됐어요, 치료할 생각이 없어요. 약물 치료 견디기 힘들 거예요.”임건우는 몇 마디 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소지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선배, 이건 일단 비밀로 해줘요. 가족들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소씨 가문 파산 이후로 아버지의 거액의 입원비를 내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차마 가족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임건우는 소지아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입 꼭 다물고 있을게. 참, 너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네 남편 쪽은...”“선배, 우리 아빠 잘 부탁할게요,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지아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임건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떠났다.임건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지아가 대학을 휴학하고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학계의 천재로 불리던 소지아는 그렇게 의학계에서 사라져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다.지아의 아버지 소계훈이 치료를 받는 최근 2년 동안, 오직 소지아만이 바쁜 일정을 쪼개 그를 돌보았다. 정작 소지아 자신은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지나가던 행인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