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지아가 깜짝 놀랐다. “오늘 일 때문에요?” “오늘 일뿐만이 아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참고 있었어.” “얘야, 네가 내 친 손녀라는 게 이제 밝혀졌으니 더 이상 널 밖에서 지내게 둘 수 없어. 나와 함께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고 말이야.” “할아버지, 전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처음부터 피가 섞인 가족 아니냐? 난 이미 몇 년 전에 사적으로 소씨 가문에 대해 조사를 한 적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네가 소지훈의 친딸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넘겼었지.” “이 할아버지가 너와 몇 십 년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는데 너에게 그동안 못해준 걸 전부 채워 줄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느냐?” 부남진은 작은 목소리로 지아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에 나와 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알고 싶다고 했지? 나와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줄게.” 부남진은 아예 지아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걸 알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실 거야.” 원래도 가족에 대한 갈망이 컸던 지아는 부남진의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아직 몸도 변변치 않아. 네가 나에게 밤을 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어? 시간도 늦었는데 난 지금까지 약도 먹지 못 했어. 계속 이렇게 있다가...” 이때 지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이겼어요.” 부남진은 거칠고 큰 손으로 지아의 작은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래, 얼른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자.” 지아는 자신의 손과 맞잡은 부남진의 손을 보면서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전에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사람은 이미 차디찬 땅 속에 묻혀 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소지훈이 하늘에서 지아가 진짜 가족을 찾을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분명 아주 기뻐할 것이다. 지아가 떠나려 하자 도윤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남진은 과거 지아가 힘들었던 건
이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안하무인으로 굴던 백채원과 미셸의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모두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무슨 일을 저지르든 편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아의 곁도 비어 있지 않을 것인데 바로 그녀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었고 부장경은 지아가 원래 쓰던 방에 데려다 주었다. 부장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커다란 눈송이만 그의 몸 뒤에서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이 전에 내가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 있잖아.” 지아는 어둡게 가라앉은 부장경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알고 있어요.” 이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고 단연코 많지 않은 부장경의 흑역사 중 하나일 것이다. 지아는 이미 부장경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말했다. “아마 삼촌은 처음부터 저와 혈연관계가 있었기에 호감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어요. 이해해요. 그건 마치 제가 각하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죠.” 이 말 한마디에 어색하던 부장경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졌는데 미셸 같은 멍청한 동생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는지 알 알아. 이제 부씨 가문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이건 부장경이 지아에 대한 약속이었는데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앞으로는 가족이자 연장자의 신분으로 그녀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지아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삼촌.” 부장경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쉬어.” 지아는 방 문을 닫았고 부장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아에 대한 호감이 사랑인지 혈육의 정인지는 누구도 알 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부장경은 이런 결과도 썩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다. 필경 지아의 신분이 폭로되면서
도윤은 뭔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대답했다. “그게 복일지 불행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어. 영예와 위험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불행과 행복 또한 마찬가지니 말이야.” 그러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윤이 지아를 상처받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민연주도 있었다. 부남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순간부터 그녀는 부씨 가문에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민연주가 부남진과 결혼한 수년 동안 그는 줄곧 민연주를 존중하고 아껴주고 감싸주었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그런 부남진의 모습에 민연주는 불만을 느꼈고 한바탕 크게 싸웠던 적 도 있는데 부남진은 당시 싸늘한 눈빛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에게 약을 타 먹이고 내 침대에 올라왔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영원히 내 사랑을 받지 못할 거란 생각은 했어야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권력과 지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 후 민연주도 점차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부남진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이루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민연주는 더 이상 많은 것은 바라지 않았고 오직 자신이 부남진 같은 권위 높은 사람을 만났단 것에 이미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부남진이 마음속에 줄곧 한 여자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남진은 의식을 잃은 순간에도 그 여자의 이름만 하염없이 부르곤 했으니 말이다. 민연주도 그 여인의 존재를 수소문한 적 있었지만 이미 몇 십 년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이로 하여 민연주는 그 여인이 진작에 죽은 거라 생각했다. 남자들이란 다들 첫사랑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민연주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부남진이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민연주는 바로 심장이 철렁했다. 하필 그 상황에서 부남진의 첫사랑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하용은 뒤에서 미셸을 와락 끌어안았다.“도윤이 벌인 모든 일들은 전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야. 전에는 백씨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본처를 버리고 백채원과 결혼도 하려고 했으니 말이야.” “도윤 그 자식은 단지 염치없고 뻔뻔한 비열한 인간일 뿐이야.” “이상한데?” 미셸이 갑자기 반응했다. “만약 도윤 오빠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왜 날 이용하지 않은 건데? 설마 우리 부씨 가문이 백씨 가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걸까?” 이 말에 하용은 순간 움찔했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널 이용하지 않은 건 또다른 음모가 있을 거야. 설아, 지금까지 도윤이 저지른 일들을 잘 생각해봐. 그 자식은 단지 배은망덕한 놈일 뿐이라고.”“한 번 두 번 끝도 없이 일부러 너를 망신당하게 했고 이젠 그 자식 때문에 네가 집에서도 쫓겨 났잖아.” 억울한 듯 눈물을 흘리고 있는 미셸의 모습에 하용은 얼른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다정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설아,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 말을 들은 미셸은 고개를 들고 하용의 다정한 눈을 바라보았고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거야?” “당연하지. 설아야, 이렇게 오랫동안 널 짝사랑해왔는데 아직도 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하용은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랬다면 내 잘못이야. 내가 표현을 너무 적게 했나 보네. 앞으로는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줄게.” 몇 년 간 줄곧 도윤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던 미셸은 모두가 그녀를 포기한 이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자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비록 도윤만큼 잘나진 않았지만 하용도 꽤 잘생긴 얼굴이긴 했고 평소 성격도 아주 시원시원 했다.게다가 우월한 기럭지까지 갖추었는데 이런 하용의 품에 안긴 미셸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눈이 내리는 이
미셸은 눈만 깜빡였고 이 순간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이때 하용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는데 미셸은 그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하용은 단지 미셸을 품에 안을 뿐이었는데 자신의 온기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쌌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막아주었다.“이제 안 춥지?” 미셸은 이전까지 자신이 남자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음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미셸은 처음 주동적으로 하용을 안았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도윤에 대한 짝사랑으로 미셸도 이미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도윤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보니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구나.’ 이날 밤, 하용은 별장에서 미셸과 함께했는데 알콜의 힘과 약물의 작용이 없어도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이번에 미셸은 더 이상 도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의 눈엔 온통 하용뿐이었다. “하용, 정말 나에게 잘해줄 자신 있어?” 하용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귓가에 속삭였다. “설아, 넌 내가 아주 어렵게 붙잡은 여인이야. 그런데 내가 너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잘해주겠어?” 이 말에 미셸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곧바로 하용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이때 하용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오늘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이제 그만 가봐야 해.” 이런 경험이 처음인 미셸은 매우 당황스러웠는데 사실 그녀는 하용과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다. “왜 그렇게 바쁜 거야? 내가 아빠에게 일 좀 줄여달라고 말씀드릴까? 그럼 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할 수 있잖아.” 하용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으로 미셸의 코끝을 톡 치더니 말했다. “내가 안 바쁘면 널 어떻게 먹여 살리겠어? 난 다른 사람들
미셸은 자신에게 줄곧 진심이던 하용에게 상처 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난 단지 우리가 결혼도 전에 아이를 가졌단 걸 알게 되면 아빠가 더 화를 내진 않을까 그게 걱정되었던 거야.” “각하가 화를 내실 수도 있어. 하지만 이 하늘 아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 기껏해야 몇 마디 꾸짖겠지만 너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걱정되어 다시 널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 “게다가 각하도 연세가 있으니 분명 손자 손녀를 품에 안고 싶을 거야. 하지만 장경이 형님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 네가 아이를 낳게 되면 각하와 사모님께서는 분명 좋아하실 거야.” 하용은 마치 악마처럼 미셸의 귀에 속삭이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했다. “설아, 널 이렇게 사랑하는 날 봐서 내 아이를 낳아주면 안 될까? 소지아 그 여자도 고작 스물 몇 살이지만 이미 엄청 큰 아이가 있잖아.” 하용이 지아를 언급하자 미셸의 표정은 순간 싸늘해졌다. ‘그래, 도윤 오빠는 지금껏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다음번에 오빠가 또 다쳐도 과연 나처럼 수혈해줄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 미셸은 심지어 도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녀는 도윤에게 자신이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런 그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알았어. 피임약은 먹지 않을 게. 그러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말지는 이제 우리의 운명에 달린 거야.” 하용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채 말했다. “우리 아이는 분명 아주 예쁠 거야.”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된 게 없는데 뭐가 그리 급해?” “설아, 난 너무 기뻐. 네가 내 아이를 가진다니 이건 내 평생의 행운이야.” 미셸은 냉담했던 도윤과 다정한 하용의 모습이 비교되었고 하용의 그런 따뜻함이 그녀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고 있었다. 하용은 이혼 경력이 없고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미셸은 그를 도윤과 비겨도
유화연은 하용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고 미셸이 남긴 그 흔적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화연, 난 더렵혀졌어. 네가 날 다시 정화해 주면 안 돼?”그렇게 하용과 유화연은 서로의 품에 안겼다. 바깥에서 내리던 눈이 점차 잦아들고 나서야 하용은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고 유화연에게 더 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유화연은 꼭 그에게 옷을 입혀주겠다고 일어났다. 하용이 미셸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유화연의 몸은 온통 그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관계가 끝난 뒤 하용이 직접 유화연을 씻겨주었는데 그가 유화연에 대한 감정은 절대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화연, 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모든 것을 얻고 더 이상 날 위협할 자가 없어지면 그때는 누구도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난 반드시 너와 결혼할 거야.” 유화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하용, 나에게 정말 그 날이 오긴 할까?” “꼭 올 거야. 더 이상 남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유화연은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난 네가 부설아 아가씨와 매일 붙어있다가 둘 사이에 감정이 생길 까봐 너무 두려워.” “화연,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내가 왜 부잣집 응석받이로 큰 미셸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어?” “만약 부씨 가문에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도 그 여자와 엮이긴 싫었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좀 더 줘, 응?” “알겠어. 하용, 난 널 믿어. 하지만 이런 방법이 부설아 아가씨께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이 말을 들은 하용이 냉소하며 말했다. “아니, 부설아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너의 동정의 상대가 다른 누구든 다 상관없지만 부설아만큼은 절대 동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싸늘한 하용의 모습에 유화연은 깜짝 놀랐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하용은 다시 다정한 표정을 지
하지만 지아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입을 떼지 못했고 부장경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가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말하지 못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저 말만 몇 마디 해주면 돼. 우리 집에 가장 차고 넘치는 게 돈과 인력이니 말이야.” “전에는 항상 너 혼자였을 지 몰라도 이젠 달라. 너에게도 가족이 생겼잖아. 가족에게 그런 마음은 안 가져도 돼.” “난 오히려 네가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고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까봐 더 겁나는 걸?” 부장경의 이 말에 지아는 마음이 따뜻했는데 오래 전 소계훈 외에 그녀가 이런 따뜻함을 느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삼촌, 딱히 생각해둔 건 없어요. 그저 방이 차분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요구는 없어요.” “알겠어. 그럼 디자이너를 안배해 놓을게.” “만약 가능하다면 마당에 벚꽃 나무가 몇 그루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에 소씨 가문에 살 때 벚꽃 나무가 있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그래, 다른 건?” 지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다예요.” “앞으로는 우리 앞에서는 뭐든지 겁내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이든 가족끼리 의논하는 게 제일 좋은 거니 말이야.” “아버지께서는 이미 너를 호적에 올릴 준비를 하고 계셔. 하지만 외부에서 모르게 진행 중이고 잠시 동안 네 신분은 아직 비밀이야. 이제 적당한 시기를 찾아 세상에 알릴 거야.” 지아는 애초부터 자신의 신분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기에 부남진의 결정에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삼촌 어머니 쪽은...” 부남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주요하게 어머니가 알게 될까 봐 그러는 거야.” 이에 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왜죠?” “사실 아버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내가 볼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그 감정은 책임감에 가까워.” 부장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다 보니 이게 네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