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자신에게 줄곧 진심이던 하용에게 상처 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난 단지 우리가 결혼도 전에 아이를 가졌단 걸 알게 되면 아빠가 더 화를 내진 않을까 그게 걱정되었던 거야.” “각하가 화를 내실 수도 있어. 하지만 이 하늘 아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 기껏해야 몇 마디 꾸짖겠지만 너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걱정되어 다시 널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 “게다가 각하도 연세가 있으니 분명 손자 손녀를 품에 안고 싶을 거야. 하지만 장경이 형님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 네가 아이를 낳게 되면 각하와 사모님께서는 분명 좋아하실 거야.” 하용은 마치 악마처럼 미셸의 귀에 속삭이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했다. “설아, 널 이렇게 사랑하는 날 봐서 내 아이를 낳아주면 안 될까? 소지아 그 여자도 고작 스물 몇 살이지만 이미 엄청 큰 아이가 있잖아.” 하용이 지아를 언급하자 미셸의 표정은 순간 싸늘해졌다. ‘그래, 도윤 오빠는 지금껏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다음번에 오빠가 또 다쳐도 과연 나처럼 수혈해줄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 미셸은 심지어 도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녀는 도윤에게 자신이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런 그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알았어. 피임약은 먹지 않을 게. 그러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말지는 이제 우리의 운명에 달린 거야.” 하용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채 말했다. “우리 아이는 분명 아주 예쁠 거야.”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된 게 없는데 뭐가 그리 급해?” “설아, 난 너무 기뻐. 네가 내 아이를 가진다니 이건 내 평생의 행운이야.” 미셸은 냉담했던 도윤과 다정한 하용의 모습이 비교되었고 하용의 그런 따뜻함이 그녀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고 있었다. 하용은 이혼 경력이 없고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미셸은 그를 도윤과 비겨도
유화연은 하용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고 미셸이 남긴 그 흔적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화연, 난 더렵혀졌어. 네가 날 다시 정화해 주면 안 돼?”그렇게 하용과 유화연은 서로의 품에 안겼다. 바깥에서 내리던 눈이 점차 잦아들고 나서야 하용은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고 유화연에게 더 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유화연은 꼭 그에게 옷을 입혀주겠다고 일어났다. 하용이 미셸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유화연의 몸은 온통 그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관계가 끝난 뒤 하용이 직접 유화연을 씻겨주었는데 그가 유화연에 대한 감정은 절대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화연, 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모든 것을 얻고 더 이상 날 위협할 자가 없어지면 그때는 누구도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난 반드시 너와 결혼할 거야.” 유화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하용, 나에게 정말 그 날이 오긴 할까?” “꼭 올 거야. 더 이상 남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유화연은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난 네가 부설아 아가씨와 매일 붙어있다가 둘 사이에 감정이 생길 까봐 너무 두려워.” “화연,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내가 왜 부잣집 응석받이로 큰 미셸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어?” “만약 부씨 가문에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도 그 여자와 엮이긴 싫었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좀 더 줘, 응?” “알겠어. 하용, 난 널 믿어. 하지만 이런 방법이 부설아 아가씨께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이 말을 들은 하용이 냉소하며 말했다. “아니, 부설아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너의 동정의 상대가 다른 누구든 다 상관없지만 부설아만큼은 절대 동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싸늘한 하용의 모습에 유화연은 깜짝 놀랐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하용은 다시 다정한 표정을 지
하지만 지아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입을 떼지 못했고 부장경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가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말하지 못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저 말만 몇 마디 해주면 돼. 우리 집에 가장 차고 넘치는 게 돈과 인력이니 말이야.” “전에는 항상 너 혼자였을 지 몰라도 이젠 달라. 너에게도 가족이 생겼잖아. 가족에게 그런 마음은 안 가져도 돼.” “난 오히려 네가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고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까봐 더 겁나는 걸?” 부장경의 이 말에 지아는 마음이 따뜻했는데 오래 전 소계훈 외에 그녀가 이런 따뜻함을 느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삼촌, 딱히 생각해둔 건 없어요. 그저 방이 차분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요구는 없어요.” “알겠어. 그럼 디자이너를 안배해 놓을게.” “만약 가능하다면 마당에 벚꽃 나무가 몇 그루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에 소씨 가문에 살 때 벚꽃 나무가 있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그래, 다른 건?” 지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다예요.” “앞으로는 우리 앞에서는 뭐든지 겁내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이든 가족끼리 의논하는 게 제일 좋은 거니 말이야.” “아버지께서는 이미 너를 호적에 올릴 준비를 하고 계셔. 하지만 외부에서 모르게 진행 중이고 잠시 동안 네 신분은 아직 비밀이야. 이제 적당한 시기를 찾아 세상에 알릴 거야.” 지아는 애초부터 자신의 신분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기에 부남진의 결정에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삼촌 어머니 쪽은...” 부남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주요하게 어머니가 알게 될까 봐 그러는 거야.” 이에 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왜죠?” “사실 아버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내가 볼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그 감정은 책임감에 가까워.” 부장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다 보니 이게 네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미셸의 건강 검신 결과는 곧바로 하용의 손에 전해졌다. 이때 비서가 한 마디 귀띔했다. “보스, 의사가 그러는데 부설아 아가씨는 앞으로의 3일 간이 임신할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랍니다.” “알겠다.” 하용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미셸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미셸은 하용이 가장 질색하는 부류의 여자였다. 하지만 하용은 부남진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부남진에게 딸은 오직 미셸 하나였기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때문에 하용은 그런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면 부남진이 비록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이 혼사를 동의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부장경은 비록 수하에 많은 부대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줄곧 A시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남진은 이미 나이가 들었고 암살 시도도 연거푸 두 번이나 당했으니 그도 슬슬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지아의 신분이 폭로된 건 하용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지아와 도윤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고 미셸이 도윤에게 품고 있던 마음을 확실히 끊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하용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바로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용은 혹시라도 부남진이 어젯밤 일로 자신에게 불만을 가졌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낳기만 하면 하용은 자신이 진정한 부씨 가문의 일원으로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위가 됐는데도 설마 부남진이 날 계속 무시할까?’ 그러나 하용이 유일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어젯밤 부남진은 왜 지아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하용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곧 성공할 자신의 계획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하용의 모든 승부수는 이제 미셸의 임신에 달려 있었다. “화연의 거처에 파란 장미는 보내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민연주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뭐라고? 부씨 가문에 오래 머문다니?” “네, 그렇게 됐습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민연주는 감히 부남진에게 직접 무슨 상황인지 물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지아에 대해서도 감히 제멋대로 굴지 못하고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아와 부남진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두 사람은 거의 온종일 붙어 있었고 부남진이 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도 여러 번 눈에 민연주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남진은 항상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민연주는 심지어 지아와 부남진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그녀가 알아본 결과는 전에 부남진이 조사했을 때의 결과와 다를 것 없었다. 소계훈은 절대 부남진의 아들일 리가 없었다. 소씨 가문은 A시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가문이고 부씨 가문은 그 뒤에 A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부남진과 소계훈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었다. ‘부남진이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은 정말 단지 귀한 인재에 대한 아낌과 목숨을 구한 은인에 대한 고마움일 뿐일까?’ 민연주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셸이 귀찮게 굴지 않으니 민연주의 주변은 한껏 조용해졌는데 이건 평소 미셸의 성격이 전혀 아니었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민연주는 바로 미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너 뭐하고 있어? 네 아빠가 소지아 그 여자를 가문으로 다시 데려온 거 알고 있어?” 이에 미셸은 하용의 몸을 밀어내고 겨우 자신의 목소리를 진정시킨 후 말했다. [역시 아빠가 그 천한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을 줄 알았어! 엄마, 난 아빠가 또 화를 내실 까봐 조용히 지내고 있는 거잖아.] “어쨌든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안 되겠어!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아.” 미셸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리
미셸은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듯 앞으로의 일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고 단지 자신이 점점 하용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부씨 가문에서는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고 지아는 부남진을 위한 따뜻한 차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이때 부남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지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상냥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쉬지 않으시는 겁니까?” 부남진 앞에는 빨간 글씨로 쓰여진 두꺼운 서류들이 수두룩했고 그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얘야, 쉬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쉬는 거란다.”“무슨 큰 일이라도 난 거예요?”지아가 물었다. “내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외부로 새어 나간 모양이야. 요 며칠 A국 주변 나라들이 조금씩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B국은 남수도에서 우리 어민들을 구금해 버렸고 서쪽에서도 우리 나라 변경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어. 게다가 동쪽과 서북쪽에서도...” 이에 부남진은 매우 골치가 아파 보였다. 비록 모두 큰일까진 아니었지만 마치 잠 자는 사자의 주변에서 얼씬대는 모기처럼 사람을 성가시게 했으니 말이다. A국이 통치를 시작한 몇 십 년 동안 경제는 쾌속적으로 발전되었고 이미 전 세계 3위 안에 드는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오랫동안 통일된 나라는 반드시 분쟁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분쟁이 오래되면 다시 통일된다는 말이 있다.평화가 몇 십 년 동안 유지되었으니 누군가 조금씩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들은 다 사소한 일들일 뿐이잖아요. 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재의 형세로는 누구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진 못할 거예요.” 그러자 부남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얘야, 최근 우리와 인접국인 C국의 발전이 꽤 빠른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줄곧 우리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어.” “만약 그들이 배후에서 B국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면 고작 B국 따위가 어찌 함부로 그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겠어?” “C국이요? 5년 전에 나라의
앞으로의 며칠 동안은 부장경뿐만 아니라 도윤도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전에는 도윤이 시시콜콜 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면 지금은 거의 늦은 밤이나 새벽이 되어서야 자고 있는지 안부 인사를 한 마디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아는 대부분 아침이 되어서야 도윤의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답장을 보내도 언제 다시 그의 회답을 받을 수 있을 지조차 알 수 없었다.오히려 지아는 한가해졌고 부씨 가문에는 매일 디자이너들이 들락거렸는데 오늘 그녀에게 맞춤 옷을 제작해 주었다면 내일은 쥬얼리 디자이너가 다녀가곤 했다. 맞춤 제작 외에도 매일 많은 명품들이 지아의 거처에 도착하곤 했는데 이에 그녀는 전에 부장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메워주겠다던 부장경의 다짐은 혈육의 정뿐만 아니라 이런 물질적인 것도 한 몫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민연주는 매일 지아의 거처에 수북이 쌓이는 옷들과 쥬얼리를 보면서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부남진는 항상 소박하고 절약하는 사람이었고 절대 재부를 뽐내거나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지아라는 외부인에게 매일 수많은 옷들을 보내주고 있으니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미셸도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보름이나 지나도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겠단 말은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민연주는 몰래 뒷마당의 시공 현장을 들여다보았다.부남진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난초의 위치까지 옮기며 공간을 넓히고 있었는데 지아만을 위한 새로운 거처의 기본적인 틀이 잡히고 있었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구들이 생겼고 작은 놀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게다가 벚꽃 나무도 한 그루 자리 잡았고 방까지 한 층 더 만들어지고 있었다. 민연주는 자신과 부남진의 안방조차도 이곳의 3분의 1 정도밖엔 되지 않을 텐데 그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민연주는 최근 부남진이 화가 꽤 풀린 것 같아 보
민연주는 싱글벙글하여 미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아,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아빠가 너한테 내일 저녁 집으로 돌아와 밥 먹으라고 하셨어. 내일이 기회이니 더 이상 아빠를 화 나게 해선 안 돼.” 미셸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이미 3일 전 임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미셸은 달콤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엄마, 나도 내일 모두에게 알릴 서프라이즈가 있어.] “서프라이즈? 뭘 준비한 건데 그래?” 미셸은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이성이 이런 엄청난 소식은 내일 식사 자리에서 발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엄마도 분명 기뻐할 소식이야.] 민연주는 비록 약간 의심이 가긴 했지만 최근 미셸은 줄곧 얌전했고 이상한 일을 벌일 낌새도 없었기에 이제는 정말 그녀가 철이 든 거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민연주는 몇 마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때 시간을 확인하던 미셸은 아직 하용이 돌아오지 않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하용은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설아, 미안해. 지금 야근 중이야. 밥은 먹었어? 우리 아기랑 함께 굶고 있는 건 아니지?] 전화기 너머에서 하용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여왔고 이에 미셸은 불쾌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밥은 먹었어. 언제 돌아와?” [오늘 밤엔 아마 못 갈 것 같아. 요즘 일이 터져서 다들 아주 바빠. 도윤은 일 처리하러 다른 곳으로 파견까지 갔어.] [하지만 난 네가 임신한지 얼마되지 않아 네 곁에 있으려고 남은 거야.] 미셸은 약간 서운하긴 했지만 이해한다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아빠가 내일 저녁 나더러 집으로 돌아와 밥 먹으래.” [이거 좋은 일 아니야? 은사님의 화가 풀렸다는 말이잖아.] “응, 그러니 너도 내일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해. 모두에게 나의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하니까.” [알겠어. 그럼 오늘 밤은 혼자서도 얌전히 잘 자야 해. 무서우면 나에게 꼭 전화하고, 알겠지?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