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눈만 깜빡였고 이 순간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이때 하용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는데 미셸은 그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하용은 단지 미셸을 품에 안을 뿐이었는데 자신의 온기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쌌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막아주었다.“이제 안 춥지?” 미셸은 이전까지 자신이 남자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음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미셸은 처음 주동적으로 하용을 안았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도윤에 대한 짝사랑으로 미셸도 이미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도윤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보니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구나.’ 이날 밤, 하용은 별장에서 미셸과 함께했는데 알콜의 힘과 약물의 작용이 없어도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이번에 미셸은 더 이상 도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의 눈엔 온통 하용뿐이었다. “하용, 정말 나에게 잘해줄 자신 있어?” 하용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귓가에 속삭였다. “설아, 넌 내가 아주 어렵게 붙잡은 여인이야. 그런데 내가 너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잘해주겠어?” 이 말에 미셸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곧바로 하용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이때 하용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오늘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이제 그만 가봐야 해.” 이런 경험이 처음인 미셸은 매우 당황스러웠는데 사실 그녀는 하용과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다. “왜 그렇게 바쁜 거야? 내가 아빠에게 일 좀 줄여달라고 말씀드릴까? 그럼 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할 수 있잖아.” 하용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으로 미셸의 코끝을 톡 치더니 말했다. “내가 안 바쁘면 널 어떻게 먹여 살리겠어? 난 다른 사람들
미셸은 자신에게 줄곧 진심이던 하용에게 상처 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난 단지 우리가 결혼도 전에 아이를 가졌단 걸 알게 되면 아빠가 더 화를 내진 않을까 그게 걱정되었던 거야.” “각하가 화를 내실 수도 있어. 하지만 이 하늘 아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 기껏해야 몇 마디 꾸짖겠지만 너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걱정되어 다시 널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 “게다가 각하도 연세가 있으니 분명 손자 손녀를 품에 안고 싶을 거야. 하지만 장경이 형님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 네가 아이를 낳게 되면 각하와 사모님께서는 분명 좋아하실 거야.” 하용은 마치 악마처럼 미셸의 귀에 속삭이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했다. “설아, 널 이렇게 사랑하는 날 봐서 내 아이를 낳아주면 안 될까? 소지아 그 여자도 고작 스물 몇 살이지만 이미 엄청 큰 아이가 있잖아.” 하용이 지아를 언급하자 미셸의 표정은 순간 싸늘해졌다. ‘그래, 도윤 오빠는 지금껏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다음번에 오빠가 또 다쳐도 과연 나처럼 수혈해줄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 미셸은 심지어 도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녀는 도윤에게 자신이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런 그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알았어. 피임약은 먹지 않을 게. 그러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말지는 이제 우리의 운명에 달린 거야.” 하용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채 말했다. “우리 아이는 분명 아주 예쁠 거야.”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된 게 없는데 뭐가 그리 급해?” “설아, 난 너무 기뻐. 네가 내 아이를 가진다니 이건 내 평생의 행운이야.” 미셸은 냉담했던 도윤과 다정한 하용의 모습이 비교되었고 하용의 그런 따뜻함이 그녀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고 있었다. 하용은 이혼 경력이 없고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미셸은 그를 도윤과 비겨도
유화연은 하용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고 미셸이 남긴 그 흔적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화연, 난 더렵혀졌어. 네가 날 다시 정화해 주면 안 돼?”그렇게 하용과 유화연은 서로의 품에 안겼다. 바깥에서 내리던 눈이 점차 잦아들고 나서야 하용은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고 유화연에게 더 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유화연은 꼭 그에게 옷을 입혀주겠다고 일어났다. 하용이 미셸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유화연의 몸은 온통 그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관계가 끝난 뒤 하용이 직접 유화연을 씻겨주었는데 그가 유화연에 대한 감정은 절대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화연, 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모든 것을 얻고 더 이상 날 위협할 자가 없어지면 그때는 누구도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난 반드시 너와 결혼할 거야.” 유화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하용, 나에게 정말 그 날이 오긴 할까?” “꼭 올 거야. 더 이상 남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유화연은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난 네가 부설아 아가씨와 매일 붙어있다가 둘 사이에 감정이 생길 까봐 너무 두려워.” “화연,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내가 왜 부잣집 응석받이로 큰 미셸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어?” “만약 부씨 가문에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도 그 여자와 엮이긴 싫었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좀 더 줘, 응?” “알겠어. 하용, 난 널 믿어. 하지만 이런 방법이 부설아 아가씨께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이 말을 들은 하용이 냉소하며 말했다. “아니, 부설아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너의 동정의 상대가 다른 누구든 다 상관없지만 부설아만큼은 절대 동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싸늘한 하용의 모습에 유화연은 깜짝 놀랐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하용은 다시 다정한 표정을 지
하지만 지아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입을 떼지 못했고 부장경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가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말하지 못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저 말만 몇 마디 해주면 돼. 우리 집에 가장 차고 넘치는 게 돈과 인력이니 말이야.” “전에는 항상 너 혼자였을 지 몰라도 이젠 달라. 너에게도 가족이 생겼잖아. 가족에게 그런 마음은 안 가져도 돼.” “난 오히려 네가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고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까봐 더 겁나는 걸?” 부장경의 이 말에 지아는 마음이 따뜻했는데 오래 전 소계훈 외에 그녀가 이런 따뜻함을 느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삼촌, 딱히 생각해둔 건 없어요. 그저 방이 차분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요구는 없어요.” “알겠어. 그럼 디자이너를 안배해 놓을게.” “만약 가능하다면 마당에 벚꽃 나무가 몇 그루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에 소씨 가문에 살 때 벚꽃 나무가 있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그래, 다른 건?” 지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다예요.” “앞으로는 우리 앞에서는 뭐든지 겁내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이든 가족끼리 의논하는 게 제일 좋은 거니 말이야.” “아버지께서는 이미 너를 호적에 올릴 준비를 하고 계셔. 하지만 외부에서 모르게 진행 중이고 잠시 동안 네 신분은 아직 비밀이야. 이제 적당한 시기를 찾아 세상에 알릴 거야.” 지아는 애초부터 자신의 신분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기에 부남진의 결정에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삼촌 어머니 쪽은...” 부남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주요하게 어머니가 알게 될까 봐 그러는 거야.” 이에 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왜죠?” “사실 아버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내가 볼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그 감정은 책임감에 가까워.” 부장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다 보니 이게 네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미셸의 건강 검신 결과는 곧바로 하용의 손에 전해졌다. 이때 비서가 한 마디 귀띔했다. “보스, 의사가 그러는데 부설아 아가씨는 앞으로의 3일 간이 임신할 확률이 가장 높은 시기랍니다.” “알겠다.” 하용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미셸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미셸은 하용이 가장 질색하는 부류의 여자였다. 하지만 하용은 부남진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부남진에게 딸은 오직 미셸 하나였기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때문에 하용은 그런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면 부남진이 비록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이 혼사를 동의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부장경은 비록 수하에 많은 부대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줄곧 A시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남진은 이미 나이가 들었고 암살 시도도 연거푸 두 번이나 당했으니 그도 슬슬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지아의 신분이 폭로된 건 하용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지아와 도윤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고 미셸이 도윤에게 품고 있던 마음을 확실히 끊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하용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바로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용은 혹시라도 부남진이 어젯밤 일로 자신에게 불만을 가졌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미셸이 자신의 아이를 낳기만 하면 하용은 자신이 진정한 부씨 가문의 일원으로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위가 됐는데도 설마 부남진이 날 계속 무시할까?’ 그러나 하용이 유일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어젯밤 부남진은 왜 지아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하용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곧 성공할 자신의 계획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하용의 모든 승부수는 이제 미셸의 임신에 달려 있었다. “화연의 거처에 파란 장미는 보내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민연주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뭐라고? 부씨 가문에 오래 머문다니?” “네, 그렇게 됐습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민연주는 감히 부남진에게 직접 무슨 상황인지 물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지아에 대해서도 감히 제멋대로 굴지 못하고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아와 부남진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두 사람은 거의 온종일 붙어 있었고 부남진이 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도 여러 번 눈에 민연주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남진은 항상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민연주는 심지어 지아와 부남진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그녀가 알아본 결과는 전에 부남진이 조사했을 때의 결과와 다를 것 없었다. 소계훈은 절대 부남진의 아들일 리가 없었다. 소씨 가문은 A시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가문이고 부씨 가문은 그 뒤에 A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부남진과 소계훈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었다. ‘부남진이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은 정말 단지 귀한 인재에 대한 아낌과 목숨을 구한 은인에 대한 고마움일 뿐일까?’ 민연주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셸이 귀찮게 굴지 않으니 민연주의 주변은 한껏 조용해졌는데 이건 평소 미셸의 성격이 전혀 아니었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민연주는 바로 미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너 뭐하고 있어? 네 아빠가 소지아 그 여자를 가문으로 다시 데려온 거 알고 있어?” 이에 미셸은 하용의 몸을 밀어내고 겨우 자신의 목소리를 진정시킨 후 말했다. [역시 아빠가 그 천한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을 줄 알았어! 엄마, 난 아빠가 또 화를 내실 까봐 조용히 지내고 있는 거잖아.] “어쨌든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안 되겠어!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아.” 미셸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리
미셸은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듯 앞으로의 일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고 단지 자신이 점점 하용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부씨 가문에서는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고 지아는 부남진을 위한 따뜻한 차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이때 부남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지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상냥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쉬지 않으시는 겁니까?” 부남진 앞에는 빨간 글씨로 쓰여진 두꺼운 서류들이 수두룩했고 그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얘야, 쉬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쉬는 거란다.”“무슨 큰 일이라도 난 거예요?”지아가 물었다. “내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외부로 새어 나간 모양이야. 요 며칠 A국 주변 나라들이 조금씩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B국은 남수도에서 우리 어민들을 구금해 버렸고 서쪽에서도 우리 나라 변경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어. 게다가 동쪽과 서북쪽에서도...” 이에 부남진은 매우 골치가 아파 보였다. 비록 모두 큰일까진 아니었지만 마치 잠 자는 사자의 주변에서 얼씬대는 모기처럼 사람을 성가시게 했으니 말이다. A국이 통치를 시작한 몇 십 년 동안 경제는 쾌속적으로 발전되었고 이미 전 세계 3위 안에 드는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오랫동안 통일된 나라는 반드시 분쟁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분쟁이 오래되면 다시 통일된다는 말이 있다.평화가 몇 십 년 동안 유지되었으니 누군가 조금씩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들은 다 사소한 일들일 뿐이잖아요. 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재의 형세로는 누구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진 못할 거예요.” 그러자 부남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얘야, 최근 우리와 인접국인 C국의 발전이 꽤 빠른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줄곧 우리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어.” “만약 그들이 배후에서 B국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면 고작 B국 따위가 어찌 함부로 그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겠어?” “C국이요? 5년 전에 나라의
앞으로의 며칠 동안은 부장경뿐만 아니라 도윤도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전에는 도윤이 시시콜콜 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면 지금은 거의 늦은 밤이나 새벽이 되어서야 자고 있는지 안부 인사를 한 마디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아는 대부분 아침이 되어서야 도윤의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답장을 보내도 언제 다시 그의 회답을 받을 수 있을 지조차 알 수 없었다.오히려 지아는 한가해졌고 부씨 가문에는 매일 디자이너들이 들락거렸는데 오늘 그녀에게 맞춤 옷을 제작해 주었다면 내일은 쥬얼리 디자이너가 다녀가곤 했다. 맞춤 제작 외에도 매일 많은 명품들이 지아의 거처에 도착하곤 했는데 이에 그녀는 전에 부장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메워주겠다던 부장경의 다짐은 혈육의 정뿐만 아니라 이런 물질적인 것도 한 몫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민연주는 매일 지아의 거처에 수북이 쌓이는 옷들과 쥬얼리를 보면서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부남진는 항상 소박하고 절약하는 사람이었고 절대 재부를 뽐내거나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지아라는 외부인에게 매일 수많은 옷들을 보내주고 있으니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미셸도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보름이나 지나도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겠단 말은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민연주는 몰래 뒷마당의 시공 현장을 들여다보았다.부남진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난초의 위치까지 옮기며 공간을 넓히고 있었는데 지아만을 위한 새로운 거처의 기본적인 틀이 잡히고 있었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구들이 생겼고 작은 놀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게다가 벚꽃 나무도 한 그루 자리 잡았고 방까지 한 층 더 만들어지고 있었다. 민연주는 자신과 부남진의 안방조차도 이곳의 3분의 1 정도밖엔 되지 않을 텐데 그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민연주는 최근 부남진이 화가 꽤 풀린 것 같아 보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고, 시월은 왜인지 모르게 더욱 불편해졌다. 분명 이건 소씨 가문의 내부 문제인데도 시월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반면, 소상현은 시월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온통 패배의 쓰라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졌구나. 그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도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단지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자신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려는 것이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호와 소윤성이 현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은 비교적 평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소상현과 생각이 달랐다.소임호가 설령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 어머니를 둔 이복형이었기에 굳이 소임호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형님, 괜찮으세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부장경에게 눈길을 보냈다.“저분은...”소임호가 설명했다.“이분은 부장경 씨인데,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부른 건 우리 소씨 가문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야.” 역시나 소임호는 뛰어난 장악력을 보여주었다.사람들은 모두 부장경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했지만, 소임호의 단호한 태도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고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최근 소씨 가문엔 많은 일이 있었고, 명담이도 세상을 떠났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소상현이 냉소를 지으며 비웃었다.“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 연민을 보일 필요는 없어!” ‘명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상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재호가 나섰다.“형님, 명담이 일은 큰형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직도 저 인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저 인간은 애초부터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 지금 부씨 가문 사람들까지 들이닥쳤잖아!!” 그제야 소재호와 소윤성은 소임호가 부씨
소상현은 소임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을 위해 소상현은 수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후회 안 해.”“그래, 그럼 시작하자꾸나.”주주총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한쪽에서 시월은 지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총회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번 일에 시월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단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최근 회사 내 지분 변동이 심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소영수가 보유했던 20%의 지분에 지나지 않았다. 소영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재산을 분배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소상현은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려 했다. 하지만 소임호는 손뼉을 가볍게 치며 변호사를 불렀고, 변호사는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영수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이 있었는데, 지분 양도서부터 가문의 재단, 부동산 분배까지 모든 내용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심지어 회사의 20%의 지분이 소임호의 것이라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 소상현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길 시간조차 없었어! 저 유언장은 가짜라고!” 하지만 소임호는 차분하게 말했다.“이 유언장은 아버지께서 반년 전에 미리 작성해 두신 거야. 믿지 못하겠다면 네 변호사에게 감정을 맡겨도 좋아. 서류 외에도 아버지의 영상, 음성, 그리고 친필 서명이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소지훈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호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소지훈이 이끄는 변호사단의 수석 변호사가 나와 서류를 철저히 검토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짜입니다. 확실히 어르신께서 생전에 작성하신 유언장이 맞습니다.” 소상현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소임호는 손짓하며 비서에게 부장경을 위한 차 한 잔을 내오게 했다. 소임호는 이미 자신의 출생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소임호와 부장경은 좌우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비록 한 사람은 비즈니스계, 다른 한 사람은 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미간에 드러나는 강인한 기개는 아주 비슷했다. 지아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전자의 힘이란 정말 신기한 거구나.’ 어머니가 다른 데다가 함께 자라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묘한 동질감을 뿜어냈다. 반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내내 안절부절못하더니, 부장경까지 나타나자 그 불안은 극에 달했다. 소상현의 얼굴엔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일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났고, 그 어디에서도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에게 소씨 가문을 맡길 리 없었다. 소임호는 소상현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둘째야, 정말 나랑 적대하며 회사를 차지할 작정이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바꾼다면, 과거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해줄게.”소임호의 눈에 소상현은 언제나 동생일 뿐이었다. ‘형으로써 동생을 지켜주는 건 당연지사야.’이는 소영수가 늘 소임호에게 했던 말이었다.“임호야, 상현이는 어리석고 자존심만 높아. 재호는 이쪽 일에 뜻이 없고, 윤성이는 정에 빠져 살지. 우리 소씨 가문을 짊어질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도 수고 좀 해다오.” 어머니도 생전에 늘 이렇게 말했다.“네가 형이잖아. 형은 동생들을 더 많이 이해해 줘야 해.”비록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소임호는 소영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떠돌던 나와 어머니의 삶을 끝내 주었고, 그 험난한 시절에 물질적 풍요를 떠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그뿐만 아니라 소영수는 마음 깊이 소임호를 돌봐주고 키워줬으며, 단 한 번도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