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훈은 등골이 오싹했다. 평소 조원주와 얘기를 나눌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이곳에는 총 마흔여덟 종의 뱀이 있는데 그중 서른 이상이 독사고, 한번 물면 어떤 약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도윤이 앞이 안 보이는데 넘어지기라도 한다면?지아와 경훈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앞쪽으로 달려갔다.“보스, 멈춰요!”경훈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조용한 산에서 도윤이 분명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도윤의 슬리퍼가 발견되었고 이따금 뜨끈한 피 몇 방울이 보였다.지아는 도윤이 그렇게 많이 넘어졌는데도 왜 계속 앞으로 달려가는지 궁금했다.위험하단 걸 모르나?아니, 도윤은 분명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계속 달리는 것이다.“빨리 가요!”...자고 있는 무무의 곁으로 무언가 팔을 건드렸다.졸린 눈을 비비고 보니 평소 함께 놀던 새끼 사슴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침대에 내려앉아 구구 울어댔고 고개를 돌리자 지아는 보이지 않았다.뭔가 잘못되었다.무무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사슴을 따라 뛰어갔다.도윤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췄고 탁 트인 산 너머로 경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지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고 위험에 처했는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살려줘요, 살려줘요...”“지아야!”도윤이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뱀이 신호를 보내는 소리가 들렸고, 소리가 들쑥날쑥한 걸 보아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다름 아닌 주원이었다.그는 몇 번이나 넘어져 상처투성이인 도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고 눈에서 독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도윤은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지금보다 도윤을 죽일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주원은 조용히 들고 있던 지아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기를 아래로 던졌다.그 아래에는 뱀 동굴이 있었고, 수천 마리의 뱀이 무리 지어 얽히고설킨 모습
지아는 속도를 다그쳤다. 뱀굴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도 빠져나오기 힘든 곳이었다.뱀굴에 빠지면 분명 뱀에게 잡아먹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비릿한 뱀 냄새와 함께 찬바람이 불자 지아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지아는 마치 사냥하는 맹수처럼 최대한 열심히 달릴 뿐이었다.지나가는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지아는 겁에 질렸다.쿵 소리와 함께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닥에 쓰러졌고, 경훈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괜찮아요?”그런데 지아의 온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빨리 가요! 바로 앞에 뱀굴이 있어요!”지아는 까진 무릎도 개의치 않고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뛰어갔다.이 순간 지아에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도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절대 그가 죽어서는 안 된다.온 힘을 다해 달려갔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뱀굴로 뛰어드는 도윤의 모습만 보였다.수천 마리의 독사들 속에서 지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살려줘요, 살려줘요...”도윤이 목숨도 뒤로한 채 죽기 살기로 달리며 뱀굴에 뛰어든 이유였다.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안 돼!”지아의 처절한 목소리도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고 도윤의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단지 앞을 보지 못할 뿐 바보가 아닌데, 분명 눈앞에 뭐가 있는지 알 텐데도 도윤은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뛰어들었다.지아도 이성을 잃고 도윤을 쫓아가려 했지만 주원이 그녀를 붙잡아 품에 꽉 가둔 채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늦었어, 이제 다 끝났어.”지아는 그제야 소름 끼치는 소년이 절대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배에서 일부러 약을 먹고도 순진한 척, 좋은 사람인 척 자신의 곁에 있었고, 나중에는 그녀의 아이까지 없애려고 했다.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주원이었기에 잊으려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오직 자기밖에 몰
“보스, 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요.”“물러서, 명령이야! 가만히 서 있어!”경훈은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많은 형제들이 전장에서 죽는 걸 보면서 생사에 무뎌진 지 오래였다.당시 미연의 죽음이 트라우마가 되어,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미 망가진 다리를 최선을 다해 재활하면서 도윤의 곁을 지키려 했다.하지만 결국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비 내리던 밤 미연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무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때처럼.지아는 주원이 방심한 틈을 타 그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경훈을 가로질러 뱀굴을 향해 달려갔다.이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지금 지아의 눈앞에는 자신을 바다에서 안아 올리던 젊은 소령이, 교통사고 당시 유리 파편을 막기 위해 앞을 가로막던 전남편이, 겨우 녹음된 목소리에 망설임 없이 뱀굴에 뛰어든 멍청이만 보였다.개자식, 나한테 빚진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죽어, 네가 어떻게!지아가 두말없이 뱀굴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주원은 자신의 완전한 패배를 깨달았다.오랜 세월이 지나도 도윤을 향한 지아의 마음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주원은 바닥에 누워 망설임 없이 도윤을 향해 달려가는 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10년을 더 기다려도 지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 같았다.지아 누나,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날 쳐다보지 않는 거야?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매화나무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어린 소녀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소녀의 눈은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지아에는 뱀을 쫓는 가루를 뿌리지 않아 그곳에 내려가면 죽는 거나 다름없었다.이 또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갑자기 귓가에 피리 소리가 울리고, 소리와 함께 붉은 뱀이 세상을 무너뜨릴 기세로 뱀굴을 덮쳐들자 순식간에 도윤의 몸과 주변에 있던 뱀들이 파도에 휩쓸리듯 사라져 버렸다.붉은 뱀은 지아를 위해 길을 터주며 어떤 뱀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뱀 동굴은
도윤은 괜히 지아를 놀라게 해 꿈처럼 사라질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지아는 손을 뻗어 주먹으로 도윤의 가슴을 때렸다.“나쁜 놈,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도윤은 겨우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지아의 손을 잡았다.“지아야, 여긴 뱀이 많으니까 빨리 나가. 얼른 여길 떠나.”경훈은 도윤이 왜 낯선 이를 껴안고 지아의 이름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보스, 뱀들은 다 쫓겨났으니 이제 안전해요.”달빛 아래 무무는 사슴의 등에 올라타 피리를 손에 들고 숲속을 달리는 요정처럼 멋진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지아와 도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아이의 마음도 온기가 느껴졌다.엄마는 아빠를 포기하지 않았다.힐끗 주원을 돌아보자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대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도윤은 지아에게 뺨을 맞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웃으며 지아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던 도윤은 아이처럼 행복해했다.“지아야, 정말 널 찾았어. 넌 계속 내 곁에 있었어.”도윤은 손을 뻗어 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난 괜찮아, 정말 괜찮아.”감정을 가라앉힌 지아도 도윤을 밀어내며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안 죽었으면 얼른 돌아가 잠이나 자.”지아의 심장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늘 밤에도 몇 번이나 바닥을 쳤다가 다시 올라왔다가 오르락내리락했다.상황이 마무리되자 감정을 추스르고 집 나갔던 이성도 다시 돌아왔다.지아가 앞장서 걸어가자 경훈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사모님, 오랜만이네요.”지아는 경훈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여전히 바보 같네요.”경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모님은 온화한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때다 싶게 인신공격을 하며 평생 혼자 살라는 저주까지 퍼부었다.“아.”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응시하는 경훈을 보며 지아는 어이가 없었다.“저 사람 다시 데려가요.”더 이상 죽든지
문밖으로 나오자 지아는 뒤에 서 있던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아가, 잘했어. 엄마가 잘 치료해 줄 거야.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자.”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지아는 무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만약 도윤이 무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무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과거 도윤의 차가운 얼굴과 함께 배신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자신과 강욱을 용서했다고 해도 그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것까지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무무의 존재는 항상 마음속 가시처럼 도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것이다.지아가 도착했을 때 도윤은 이미 옷을 다 벗고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지아라는 것을 안 경훈은 눈치껏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나며 두 사람만 남겨두었다.도윤은 지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입술만 축였다.전에는 지아를 알아보고도 말할 수 없어 참느라 괴로웠는데 드디어 다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지아야, 난...”지아의 손가락이 도윤의 입술에 더 닿았다.“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내가 이름을 감춘 건 당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당신도 알겠지. 지금의 이 균형을 깨뜨리지 마.”마지막 한 마디가 도윤의 모든 말을 삼키게 했고 도윤은 다소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균형?”지아는 차갑게 말했다.“난 의사고 당신은 환자일 뿐이야, 그게 다야.”지아는 그렇게 두 사람의 모든 과거를 일축해 버렸다.“오늘 밤 일은 내가 동생 대신 사과할게. 당신도 무사하니까 내가 구해준 걸로 퉁 쳐.”“그러니까 너한텐 나보다 주원이 더 중요한 거야?”불쑥 튀어나온 도윤의 말에 지아는 무언가 눈치챈 듯 그를 돌아보았다.“주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건가?어쩌면 주원이 일부러 덫을 놓은 것도 이미 눈치챈 걸지도 몰랐다.도윤은 그런 지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얼른 부인했다.“아니, 널
도윤의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약탕에서 몸을 담그자 모든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고 지아는 약을 발라 소독을 했다.옥 같은 피부는 온전한 곳 없이 곳곳에 다양한 크기의 상처가 있었다.도윤은 지아를 화나게 할까 봐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만약 처음부터 작정하고 꾸민 자신의 계략에 빠졌단 걸 알면 지아는 너무 화가 나서 밤중이라도 도망쳤을 거다.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아냈다. 지아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달려온 순간 도윤은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확신했다.지아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과거가 여전히 걸림돌이 되었지만 아무리 큰 구멍이라도 지아 앞에 다시 서기 위해서는 꾹꾹 채워야만 했다.긴 과정이 필요하니 서두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지아도 상처를 치료할 때 조금 겁이 났다. 녹음된 소리를 따라 달려갔는데 만약 무무의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백골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지아는 도윤과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마을 북쪽은 절벽이고 남쪽은 뱀굴이야. 세균뿐만 아니라 독극물도 득실거려. 안전한 곳은 마을뿐이야.”“네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안 그럴게.”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도윤의 태도에 지아는 전에 진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과 닮은 여자에게 손을 댈 수 없어서 다쳤다고 했다.그런 저급한 실수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는 게 놀라웠다.“도윤 씨.”지아가 갑자기 도윤의 이름을 불렀다.“나 여기 있어, 지아야.”“난 그동안 공부도 많이 했고 날 지킬 능력도 생겼어. 이름도 감추고 있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건 아무도 몰라. 앞으로 내 걱정은 하지 마. 매번 당신을 구해줄 수는 없어.”다른 사람들이 도윤의 약점을 알면 분명 같은 수법을 반복할 것이다.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 해도 결국엔 서로가 잘되기를 바랄 뿐이었다.“알겠어.”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지아는 도윤에게 약을 발라주었다.둘 다 각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아는 무무에 대해 물을까 경
그러다 발을 헛디뎌 첨벙 소리와 함께 지아의 얼굴에 물보라가 튀었다.“누구야?”지아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대자로 뻗어있는 도윤을 발견했다.지아는 그를 놀리고 싶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도윤은 당황한 얼굴로 물속을 더듬으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지아야, 어디 있어? 괜찮아?”그렇게 불쌍한 도윤을 보니 갑자기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도윤 씨, 난 괜찮아.”지아의 목소리를 들은 도윤은 급히 물속을 헤엄쳐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품에 끌어안고 횡설수설했다.“지아야, 어디 있었어? 날 놀라게 하지 마, 힘들게 찾았는데.”동굴 안에는 지아가 가져온, 그리 밝지 않은 빛을 내는 작은 태양열 램프 몇 개를 제외하고는 저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만 있었다.지아는 걱정으로 가득 찬 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순간의 감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순간 목이 메었다.그토록 고고하고 강인했던 도윤이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자 지아는 꿈을 꾸는 듯 어색했다.“지아야, 왜 말을 안 해? 무슨 일인데? 나 앞이 안 보여, 놀라게 하지 마.”도윤은 짜증이 나서 감고 있던 눈의 붕대를 잡아당겼다.“난 왜 앞이 안 보이는 거야. 지아야, 뭐라고 말 좀 해봐...”지아는 도윤을 밀어내고 차분하게 말했다.“도윤 씨, 무슨 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돌에 부딪혀 상처가 난 도윤의 손바닥을 지아가 붕대를 감아주었는데 조금 전 힘을 준 탓에 상처가 찢기며 새빨간 피가 물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거즈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온몸이 흠뻑 젖은 도윤의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한 방울씩 흘러내려 눈앞의 물 위로 떨어지며 파문을 일으켰다.“도윤 씨, 이럴 필요 없어.”도윤은 개의치 않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네가 괜찮기만 하면 난 괜찮아.”지아의 마음은 폭우가 쏟아진 듯 축축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어떤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걷잡을 수 없이 휩싸여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괜히 짜증이 난 지아가 도윤을 밀
물에 젖은 두 사람이 한데 얽혔고 도윤은 엉망진창이 된 채 일어나려고 허둥대다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원래는 침착하고 자제력이 뛰어난 남자였지만, 지아만 보면 침착함이나 자제력이 모두 사라졌다.조심하면 할수록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움직이지 마, 내가 할게.”지아는 힘없이 말했다.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으니까.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떻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괜히 도윤이 상황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까 일단 그를 다독인 뒤 지아는 깨끗한 옷을 그의 손에 건넸다.“여기 옷과 바지야. 알아서 갈아입을 수 있지?”“응, 그런데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야?”“됐어, 내가 할게.”어차피 남자의 몸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지아는 체념하고 손가락으로 허리에 묶인 끈을 잡아당겨 가운을 벗겼다.남자의 탄탄한 등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3년 전 지아를 구하느라 남은 흉터였다.지금도 지아는 그때의 처참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벌써 이렇게 지났다니, 시간이 참 무섭다.지아는 깨끗한 수건으로 도윤의 얼굴과 몸에 묻은 물기를 부드럽게 닦아주었고, 도윤은 얌전한 대형견처럼 그녀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전에는 이럴 때가 있었나?도윤은 워낙 강한 남자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하는 데 익숙했다.과거 도윤과 만날 때 그는 일부러 자신의 마음을 숨겼고, 지아는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를 전혀 몰랐다.살결이 부딪힐 때에야만이 비로소 도윤의 존재를 살짝 느낄 수 있었다.도윤이 자신의 마음을 전부 꺼내 지아에게 보여주어도 보는 척도 하지 않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지난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턱에는 수염이 두툼하게 자랐고 머리카락도 조금 더 길어졌다.게다가 중독된 탓에 사람이 무척 초췌해졌다.도윤은 눈을 가린 붕대를 뜯어내자 지아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지금 지아의 시선도 하늘의 달빛처럼 부드러운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