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말고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모든 것을 듣고 난 유남우가 한수민에게 물었다.한수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질문의 답을 주었다.“간병인이랑 민정이한테만 얘기했어요. 우리 간병인 좋은 사람이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요.”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죽을 때가 되니 제 편이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나지막한 소리로 한수민이 말했다.하지만 유남우는 그 어떠한 동정심도 없었다.“어릴 적부터 민정이한테서 그런 얘기 종종 들었었어요. 엄마가 기뻐했으면 좋겠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요.”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한수민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그럴 자격이 없는 엄마인데...”“조금이라도 잘해 주셨으면 적어도 저렇게 자격지심이 강하지 않고 구박도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서야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민정이가 안쓰러운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유남우는 덤덤하게 덧붙였다.“엄마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허구한 날 쓴소리만 들었던 민정이가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겠어요.”한수민은 뼈만 남은 손으로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도 하염없이 흘러 내려왔다.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얘기를 듣게 되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제가 죽고 나면 저 대신 우리 민정이 좀 잘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더 이상 민정이를 볼 자격이 없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어요...”유남우는 그 말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앞으로 시간 되면 뵈러 오겠습니다. 민정이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으시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네.”감격해 마지 못하는 모습으로 한수민이 말했다.박민호가 과일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유남우가 이미 떠난 뒤였다.그는 곧바로 과일을 병실에 두고 한수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뒤따라갔다.무정하기 짝이 없는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한수민은 한심하기 그지
“알아보지 마.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간여도 하지 마.”유남준은 말을 마치고 난 뒤,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폭풍우가 휘몰아친 곳에 서다희 혼자만 덩그러니 남긴 채로 말이다.사업을 빼앗아 간 사람이 자기 쪽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박민정이라는 사실에 간여하고 싶어도 간여할 수 없는 노릇이다.그리고 유남준은 절대 박민정에게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을 것이다.침실 안에서.베란다에서 침실로 돌아온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그만 자려고 했으나 주체할 수 없이 들떠 있었다.오늘 자기가 해낸 거사를 내일 회사 동료들에게 알리면서 최현아의 체면을 아주 제대로 짓밟을 생각으로 말이다.그때 씻고 들어온 유남준은 이불을 젖히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박민정을 품속으로 끌어안았다.유남준이 묻기도 전에 박민정은 흥분에 겨워 먼저 입을 열었다.“남준 씨, 나 요즘 기분 너무 좋아요.”이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박민정의 모습을 유남준 역시 느끼고 있었다.자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기분이 좋아진 것으로 생각을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유남준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간 것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었으니 말이다.물론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유남준은 정확한 답을 듣고 싶었다.모든 일을 마치고 난 박민정은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그게 실은 얼마 전에 형님이랑 내기했어요.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내가 직접 빼앗아 올 것으로 말이에요. 그 누구도 날 믿지 않았는데, 내가 이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거예요.”유남준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었어?’‘내가 아주 훌륭한 아내를 만났네...’‘너한테 직접 듣기 전까지 절대 믿을 수 없었는데...’박민정의 말을 듣게 되는 순간 갖은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하지만 그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의 말을 계속 들었다.“날 하찮게 여겼던 사람들한테 아주 제대로 ‘복수’할 수 있어서 속이 다 시원해요. 실은 다들 담이 없어서 방어하는 데만 시간을 두고 먼저 공
오전 10시 10분.고위직 직원들로 가득 찬 호산 그룹 회의실 안이다.날이 날인만큼 유명훈과 고영란도 오늘 회사로 오게 되었다.주위를 둘러보던 고영란은 박민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추경은에게 물었다.“민정이는?”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몰라요. 새언니 아직 출근 전인 것 같아요.”“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민정 옆에 붙어 있지 않았어? 옆에서 민정이 챙겨줘라고 너 여기에서 출근하게끔 내가 해준거잖아.”고영란은 단도직입적으로 그 어떠한 체면도 돌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남준 오빠도 새언니도 모두 저를 싫어해요... 앞으로 두원 별장에서 지낼 생각하지 말라면서 단호하게 말까지 했고요. 그래서 저 요금 회사 근처에서 월세맡고 살고 있어요. 낮에는 회사에서 새언니 챙겨주고 있고요.”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면서 유남준에게 약을 탄 사실에 대해서는 토씨 하나 꺼내지 않았다.고영란은 추경은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더는 따지지 않았다.“근데 왜 민정이는 아직도 안 오는 거야?”10시 30분에 회의를 연다고 알고 있던 박민정과 달리 최현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10시에 회의를 연다고 알렸던 것이었다.“혹시 새언니 부끄러워서 안 오는 거 아니에요?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오지 못했나 봐요.”추경은이 걱정하는 척하면서 물었다.그 말이 나오는 순간 고영란은 추경은을 째려보았다.“헛소리하지 마!”지금 이 자리에 고위직 직원들도 심지어 유명훈도 있었으니 말이다.만약 박민정이 최현아에게 지게 된다면 ‘첩’의 후손은 영원히 ‘처’의 후손 보다 못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고영란의 호통에 추경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고영란은 답답한 마음에 프런트 직원에게 박민정의 행방에 관해 물어보러 갔으나 아직 출근 전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어찌 된 영문인지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바로 그때 최현아가 다가왔다.“숙모님, 이제 곧 회의 시작할 거예요. 어르신께서도 부르시
고영란의 말을 듣고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계약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과연 고영란의 말대로 IM 그룹에서 빼앗아 간 공급업체를 도로 빼앗아 온 것이었다.“정말이네요!”“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 어려운 걸 해냈네요.”다들 아첨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고영란이 박민정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도로 빼앗아 온 공급업체는 그리 중요한 편도 아니었다.IM 그룹을 상대로 그 어떠한 바람도 일으킬 수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는 것이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현아는 떨떠름하기만 했다.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뒤 최현아는 본격적으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숙모님, 며느리한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무려 100억이나 들여서 그 고객 다시 찾아온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호산 그룹에 뭔가를 안겨다 준 것 같지 않은데요.”최현아의 말에 회의실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고영란이다.‘어떻게 알았지? 내가 100억으로 다시 빼앗아 왔다는 거?’유명훈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그게 사실이냐! 이렇게까지 민정이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냐! 설마 보잘것없는 고객 하나를 빼앗아 왔다고 현아 자리에 민정이를 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유명훈은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최현아를 통해 알게 되었었다.이번 일에 고영란이 끼어들어서 커닝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유명훈의 호통 소리에 고영란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애꿎은 두 손만 꼭 움켜쥐고서 최현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아무런 소리로 하지 않은 채 시선을 거두었다.‘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민정이 때문에 나까지! 가만히 회사나 다닐 것이니 내기는 왜 해서 이 난리야!’고영란은 모든 분노를 박민정에게 돌렸다.하지만 오늘 박민정은 고영란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오히려 체면을 세워주게 된다.“그럼, 계속...”최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밖에서 열렸다.순간 문
자기가 빼앗아온 프로젝트에 대해서 박민정은 자신감이 넘쳤다.IM 그룹에도 호산 그룹에도 극히 중요한 프로젝트이니 말이다.“이거 도시 중심에 있는 그 땅 아니에요? IM 그룹이 진주시에 오자마자 계약한 그 땅이잖아요.”이 땅은 IM 그룹이 호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IM 그룹에서 직접 맺은 프로젝트였다.박민정은 처음부터 IM 그룹에서 빼앗아 간 프로젝트를 다시 빼앗아 올 생각이 없었다.여러 번 반복되는 과정에서 모든 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박민정이었다.“도시 중심의 그 땅이 맞습니다! 박 비서님께서 정말로 해내셨네요!”“설마요. IM 그룹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IM 그룹에서도 알고 있습니까?”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무시하던 호산 그룹의 에이스 직원들은 계약서를 훑어보면서 감격해 마지 못했다.순간 박민정에 대한 모든 색안경이 벗겨지게 되었다.고영란은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이상할 따름이었다.“도시 중심의 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2달 전에 허가를 받게 된 땅인데, IM 그룹에서 엄청난 돈으로 그 땅을 살 수 있게 됐다고 들은 바가 있어요. 본사에서도 나서고 싶었지만, 그땐 유 대표님께서 임직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 만한 시간도 정력도 없으셨거든요.”어느 한 고위직 직원이 고영란에게 설명해주었다.순간 고영란은 의문이 탁 트이면서 그동안 내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봐 왔었던 박민정이 자기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며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유명훈과 최현아 역시 지금 믿어지지 않아 입이 떡 벌어져 있다.“계약서라니 설마 위조한 거 아니죠? 나도 좀 봐봐요.”최현아는 손을 내밀었고 어느 한 고위직이 계약서를 건네주면서 일깨워주었다.“위조한 거 아니에요. 회사 인장도 박혀 있고 절대 틀림없을 거예요.”최현아는 그 말에 상대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를 훑어보았다.그 결과
오늘 고영란과 박민정은 같은 라인에서 ‘적’과 맞서고 있다.최현아는 고영란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고 어느새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제가 아무리 그래도 마케팅 총 팀...”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영란이 바로 공격을 날렸다.“근데 지금은 단지 마케팅 5팀의 팀장이잖아.”“...”“그 자리에 걸맞은 실력이든 아니든 난 너야말로 가장 바닥에서 천천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남준이랑 남우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서 천천히 일떠선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은 타고난 천재이고 어떤 사람은 가장 기초부터 닦을 수 없어. 아니면 평생 기초만 닦으면서 살든가 말이야.”고영란의 말에 최현아는 더더욱 얼굴을 들 수 없었다.갈 길을 잃은 최현아는 유명훈을 바라보면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유명훈은 지금, 이 상황에서 최현아의 편을 들어주기가 그러했다.“현아야, 계약서까지 체결한 이상 그냥 계약서에 적힌 대로 하여라.”순간 최현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네...”회의 내내 최현아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고위직들은 박민정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단하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도전했다면서...밖에 듣고 있던 추경은은 박민정이 이번 내기에서 이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리기도 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았네! 박민정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참!”한편, 고영란은 박민정을 사무실에 남겨두었다.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박민정을 탄복하고 있는 고영란이다.“이번 일은 아주 완벽히 잘했어. 근데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는 건 사실이야. 만약 최현아한테 지게 되었다면 호산 그룹에 발 들여놓기 힘들었을 거야.”고영란은 마침내 어른다운 모습으로 말했다.박민정도 그제야 고영란이 자기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하지만 오늘 너무 잘했어. 아주 최고였어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 유남준의 모습에 서다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대표님 아주 사랑에 푹 빠지셨구나.’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달려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나서려고 할 때 그만 어느 한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는 부랴부랴 의자를 옮기면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손님이 오셔서 내놓은 의자였는데, 원래 자리로 옮긴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김인우의 말이 떠올랐다.가능한 한 수술을 이른 시일 안에 받아야 한다는 것.만약 계속 지체하게 되면 머릿속의 유리 파편을 빼내기도 어려울 것이고 뺀다고 하더라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이다.앞으로 어쩌면 평생 캄캄한 세상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남준은 급 기분이 가라앉았다.“괜찮아. 가자.”“네.”...호산 그룹.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민정은 유남준의 차를 보고서 바로 달려가서 차에 올랐다.“남준 씨, 나 왔어요.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소리만 들어도 무척이나 흥분하여 있다는 것을 유남준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볼 수 없었다.“난 뭐든 좋아. 네가 추천하는 대로 가자.”유남준의 정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박민정은 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이윽고 어느 한식당의 리뷰가 눈에 들어왔다.“이 한식당으로 가요.”“그래.”한식당의 음식들은 보통 정갈하고 맛도 좋으며 건강하기까지 하다.목적지에 이른 뒤 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꼭 잡고 부축해 주었다.“계단 조심해요.”왠지 모르게 유남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만약 실명된 게 아니었다면 ‘계단 조심해’라는 말은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했었을 것이니 말이다.먼저 앞장서서 박민정을 보호하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게 서로 다른 감정으로 어렵게 자리에 앉게 되었다.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뭐 하나만 물어볼게.”박민정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었다.“뭔데요?”“만약
박민정은 이제는 유남준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음식에 온갖 정신을 몰두하기 시작했다.어느덧 아이를 품은 지 4개월이 넘다 보니 식욕이 폭증하고 뭐나 먹고 싶고 뭐나 맛있게 먹게 되었다.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간다고 이미 박윤우에게도 알린 박민정이다.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각자 바삐 돌았다.박민정이 아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유남준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나와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술시간 좀 알아봐 줘.”“진심이야?”“응.”“형수한테는 말했어?”보통 일도 아니고 박민정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한 김인우이다.“아니, 우리 둘만 알고 있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수술하자.”유남준의 말을 듣고서 김인우는 걱정이 밀려왔다.“그건 좀 아니지 않아? 혹시라도... 어떻게 하려고 그래?”“민정이랑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하고 난 뒤에 수술받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유남준은 거듭 당부했다.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인우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한번 결정한 일을 절대 바꿀 리가 없는 유남준이니 말이다.“알았어.”김인우는 시간을 한번 체크하고 나서 유남준의 차트를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보름 뒤에 하자.”“그래.”더는 물어보지 않고 유남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음 날.유남준은 서다희에게 연락해서 변호사인 강연우와 연락이 닿았다.강연우의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고 본성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은 보통 박민정 때문에 이성을 잃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외에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하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그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강 변호사, 저 유언장 좀 작성하려고요.”그 한마디에 서다희와 강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지금 가장 당황하고 놀란 사람은 서다희이다.“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표님 나이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을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