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 유남준의 모습에 서다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대표님 아주 사랑에 푹 빠지셨구나.’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달려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나서려고 할 때 그만 어느 한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는 부랴부랴 의자를 옮기면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손님이 오셔서 내놓은 의자였는데, 원래 자리로 옮긴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김인우의 말이 떠올랐다.가능한 한 수술을 이른 시일 안에 받아야 한다는 것.만약 계속 지체하게 되면 머릿속의 유리 파편을 빼내기도 어려울 것이고 뺀다고 하더라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이다.앞으로 어쩌면 평생 캄캄한 세상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남준은 급 기분이 가라앉았다.“괜찮아. 가자.”“네.”...호산 그룹.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민정은 유남준의 차를 보고서 바로 달려가서 차에 올랐다.“남준 씨, 나 왔어요.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소리만 들어도 무척이나 흥분하여 있다는 것을 유남준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볼 수 없었다.“난 뭐든 좋아. 네가 추천하는 대로 가자.”유남준의 정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박민정은 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이윽고 어느 한식당의 리뷰가 눈에 들어왔다.“이 한식당으로 가요.”“그래.”한식당의 음식들은 보통 정갈하고 맛도 좋으며 건강하기까지 하다.목적지에 이른 뒤 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꼭 잡고 부축해 주었다.“계단 조심해요.”왠지 모르게 유남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만약 실명된 게 아니었다면 ‘계단 조심해’라는 말은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했었을 것이니 말이다.먼저 앞장서서 박민정을 보호하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게 서로 다른 감정으로 어렵게 자리에 앉게 되었다.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뭐 하나만 물어볼게.”박민정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었다.“뭔데요?”“만약
박민정은 이제는 유남준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음식에 온갖 정신을 몰두하기 시작했다.어느덧 아이를 품은 지 4개월이 넘다 보니 식욕이 폭증하고 뭐나 먹고 싶고 뭐나 맛있게 먹게 되었다.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간다고 이미 박윤우에게도 알린 박민정이다.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각자 바삐 돌았다.박민정이 아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유남준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나와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술시간 좀 알아봐 줘.”“진심이야?”“응.”“형수한테는 말했어?”보통 일도 아니고 박민정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한 김인우이다.“아니, 우리 둘만 알고 있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수술하자.”유남준의 말을 듣고서 김인우는 걱정이 밀려왔다.“그건 좀 아니지 않아? 혹시라도... 어떻게 하려고 그래?”“민정이랑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하고 난 뒤에 수술받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유남준은 거듭 당부했다.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인우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한번 결정한 일을 절대 바꿀 리가 없는 유남준이니 말이다.“알았어.”김인우는 시간을 한번 체크하고 나서 유남준의 차트를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보름 뒤에 하자.”“그래.”더는 물어보지 않고 유남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음 날.유남준은 서다희에게 연락해서 변호사인 강연우와 연락이 닿았다.강연우의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고 본성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은 보통 박민정 때문에 이성을 잃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외에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하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그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강 변호사, 저 유언장 좀 작성하려고요.”그 한마디에 서다희와 강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지금 가장 당황하고 놀란 사람은 서다희이다.“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표님 나이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을
서다희는 유남준의 뜻을 알아들었다.“사모님은 알고 계십니까?”“아니, 모르게 진행할 거야.”박민정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유남준은 수술로 바보가 된다면 박민정이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아직 유남준의 의식 속에는 못난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여자인 박민정에게 모든 걸 맡기고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네.”...호산 그룹.오늘 박민정은 마케팅 5팀 팀장의 신분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박민정이 오기 전부터 마케팅 5팀의 팀원들은 삼삼오오 수군거리고 있었다.“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최현아 그 사람이랑 다 똑같을 거야.”“난 그렇지 않다고 봐. 최현아랑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어.”다들 의견이 분분했다.마케팅 부서는 본래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편이다.대부분이 박민정 역시 최현아와 비슷한 실력으로 관리 따위를 일절 모르고 오로지 배경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박민정은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케팅 5팀 팀원들에게 최현아가 오기 전의 모든 제도를 회복할 것이라고 알렸다.순간 마케팅 5팀 팀원들은 멍하니 있다가 환호하면서 박수까지 미친 듯이 쳤다.최현아의 제도에 비하면 그 전의 제도가 얼마나 좋았는지 팀원들은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전의 제도하에 마케팅 5팀은 분기마다 마케팅 부서 전체를 통틀어서 일등을 차지하곤 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박민정은 부팀장까지 임명하여 그에게 다시 마케팅 5팀의 명예를 회복하게끔 격려했다.박민정의 결정에 반대의 소리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오히려 전과 다른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박 팀장님, 앞으로 저희 팀을 이끌고 가실 텐데 오늘 저녁에 저희끼리 환영식이라도 할까요?”“맞아요. 저희가 준비할게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번 달에 열심히 달리셔서 매출액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그것으로 여러분의 환영을 받았다고 간주할 것입니다.”“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랑 장난삼아 그런 소리를 하는 줄 알았었다.그러나 잠들기 직전에 유남준은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읽어봐봐.”박민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도 않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잘 거예요.”“예전에 있었던 일을 하도 많이 잊어버려서 그래. 이른 시일 내로 모든 걸 알아야 하니 네가 좀 읽어줘.”너무 몰아붙이면 박민정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유남준은 다른 식으로 말머리를 돌렸다.과연 박민정은 성화에 못 이겨 읽기 시작했다.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졸음이 밀려와서 그만 잠들고 말았다.소리가 끊기자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에서 서류를 빼내서 잘 눕힌 뒤 품속으로 끌어안았다.그 뒤로 남은 시간 동안 유남준은 마치 엄숙한 선생님처럼 박민정을 스파르타 하게 가르쳤다.직원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지 등 여러모로 말이다.가장 이른 시일 안에 박민정에게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다.처음에 박민정은 그리 열심히 배우지 않았었다.그러던 어느 날 최현아가 호산 그룹으로 다시 오게 된 걸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내가 다시 복귀할 줄은 몰랐지? 나 앞으로 실적이 가장 좋은 마케팅팀에서 팀장으로 일해.”“...”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유명훈이 아무리 본처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대로 나가다가 호산 그룹이 망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최현아는 가기 전에 일부러 박민정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참, 마케팅 부서 전체에 규칙 하나가 있어. 실적에서 꼴찌 한 팀은 바로 탈락이라는 규칙 말이야. 만약 앞으로 마케팅 5팀의 실적이 바닥이라면 너희 팀 전체가 회사에서 잘리게 될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는 호산 그룹 이미지와 능력에 알맞은 신인을 다시 뽑을 거야.”마케팅 5팀의 현재 팀장으로서 박민정 역시 잘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서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기가 발
지금 박세찬이 너무 그리운 박윤우이다.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공부랑은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다.숫자가 점점 커지자 박윤우는 양손을 총동원하여 계산하기 시작했다.만약 박예찬이었다면 아마 이미 암산해 냈을 것인데 말이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정부는 어린 박윤우가 벌써 학업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속으로 지금 학부모들의 교육 방식이 너무 무서울 정도라면서 혀도 차고 말이다.머리를 긁적이는 박윤우를 보고서 박민정은 다가가서 도와주려고 했다.그러나 겨우 두 발자국밖에 옮기지 못했는데 유남준의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민정아, 네 임무는 완성했어?”박민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자기 코부터 닦았다.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엄숙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박민정이다.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름이 없는 지금이니 말이다.“아직이요... 생각하고 있었어요.”박민정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그래.”유남준은 대답하고 나서 계속 자기 업무를 처리하였다. 집에 가만히 있기엔 너무 화창한 날씨라 일가족은 정원에서 각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김인우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정원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조하랑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민정아, 윤우야.”그 소리에 박민정과 박윤우는 바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순간 암담했던 자기 세상에 빛 한 줄기가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어!’박윤우는 기뻐해 마지 못했다.김인우와 박예찬은 차분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고 경비실에서 문을 열어주자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아빠, 인우 아저씨랑 하랑 이모가 형 데리고 왔어요.”박윤우는 유남준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아직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나이인데 산수라니... 학대가 따로 없다고 느꼈으니 말이다.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이 무척이나 언짢은 유남준이다.“계속해.”순간
수술에 실패할 확률도 높고 김인우는 꼭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행여나 유남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앞으로 박민정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게다가 김인우와 유남준은 어릴 적부터 함께 한 친구 사이이다.“수술하지 않으면 나 지금처럼 이렇게 살 수 있어? 평범한 사람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냐고?”유남준이 물었다.그 말을 듣고서 김인우는 순간 말 문이 턱하고 막혔다.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억에 혼돈이 온 유남준이었다.만약 유리 파편을 꺼내지 않는다면 수시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다만 그 상황이 언제 펼쳐질지 모른다는 것이다.“내내 걱정하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한 번 눈 딱 감고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유남준이 말했다.김인우는 이제는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우리 민정이랑 아이들 네가 책임져줄 거지?”“그럼! 당연하지!”김인우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책임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면의 지출을 자기가 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박민정에게 목숨을 빚지기도 했고 그동안 유남준에게 받아온 것에 빚을 가득 진 김인우이기 때문이다.“그럼 됐어. 이제는 걱정할 것도 없어.”김인우의 약속을 받아낸 유남준은 마침내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필경 진주시에서 김씨 가문도 손에 꼽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감히 함부로 김씨 가문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동안 박민정과 조하랑은 요즘 호산 그룹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조하랑은 자기 친구인 박민정을 진심으로 탄복하면서 대신 기뻐해 마지 못했다.“너 진짜 대박이야! 최현아 완전 꼭지 돌았겠는데?”“처음에는 그랬는데 얼마 전에 마케팅 1팀의 팀장으로 다시 돌아왔어. 실적이 가장 좋은 팀인데...”“그건 반칙이지!”하지만 조하랑 역시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공평을 추구하려면 남
책임성이 강했던 유남준은 주말 내내 박민정과 박윤우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종일 문제 풀이를 하게 하고 서류를 보게 하였으니 말이다.잠자리에 든 박윤우는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문제 풀이를 하고 있었다.“흑흑흑... 열심히 할게요. 아빠 화내지 마세요...”잠꼬대도 하면서 이내 시달리고 있었던 박윤우였다.마침 박윤우의 침실을 지나가고 있던 유남준은 그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손을 들어 박윤우의 팔을 다치자 인기척에 박윤우는 바로 깨어났다.어두운 불빛 아래 비친 유남준의 얼굴을 보고서 박윤우는 귀신이라도 본 듯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저 졸려요. 내일 일어나서 계속하면 안 돼요?”유남준은 앳된 박윤우의 소리를 듣고서 가슴이 약간 미어졌다.“완성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워낙 몸도 남보다 좋지 않은데 다른 면에서까지 뒤처지면 안 된다. 아니면 어떻게 엄마를 지켜줄 수 있겠어... 앞으로 먼저 다가가서 배우는 법을 익히고 건강을 핑계 삼아 남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 알았어?”갑작스러운 훈계에 박윤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으나 유남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네, 꼭 그렇게 할게요.”“계속 자.”유남준은 침실에서 나가면서 문을 꼭 닫아주었다.잠이 깬 박윤우는 유남준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아 박예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형, 요즘 아빠 좀 이상한 것 같아.]이제 막 자려고 하던 박예찬은 그 메시지를 보고서 약간 귀찮아했다.[어디가?][콕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는데, 뭔가 이상해.][그럼, 하지 마.]박예찬은 본래 유남준에 관해서 관심도 없었다.[알았어.]박예찬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자, 박윤우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다.그런 박윤우의 모습이 상상되었기에 박예찬은 다시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박윤우는 요즘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리면서 유남준이 박민정과 자기한테 이런저런 일을 시켰다는 것까지 알렸다.[드라마에서 보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유지훈은 바로 스마트 워치로 유명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애들이 다 저만 괴롭혀요.”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증손자가 유치원에서 괴로움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유명훈은 바로 유치원으로 달려갔다.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유지훈은 박예찬이 다른 애들한테 자기랑 놀지 못하게끔 으름장을 놓았다고 거짓말을 했다.“예찬이가 그랬다는 말이냐? 어쩜 그럴 수 있어!”유지훈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덧붙였다.“할아버지, 저 언제쯤이면 엄마랑 아빠 만날 수 있어요? 보고 싶단 말이에요. 엄마 아빠가 곁에 없으니 다들 저만 괴롭히잖아요.”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억울해하는 유지훈의 모습에 유명훈은 가슴이 미어졌다.“지훈이 너 엄마 아빠는 잘못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 오기 힘들단다. 앞으로 할아버지가 옆에서 널 지켜줄 테니 감히 그 누구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예찬이한테 사과받아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박예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불려갔다.유명훈은 그를 보자마자 호통부터 치기 시작했다.“어쩜 그런 짓을 꾸밀 수 있냐 말이다! 다 같은 유씨 성을 가진 형제인데, 어찌 너부터 나서서 우리 지훈이를 괴롭힐 수 있느냐?!”깊이 따져들 그것도 없이 박예찬은 유지훈이 또다시 자기한테 검탱이를 씌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제가요? 제가 어떻게 괴롭혔는데요?”“다른 애들한테 우리 지훈이랑 놀지 말라고 그랬다면서.”박예찬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 문이 막혔다.“한쪽 말만 듣고 이러시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친구들한테 왜 유지훈이랑 놀려고 하지 않는지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이치가 있는 그 말에 유명훈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자기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반박하는 박예찬의 모습에 놀라울 따름이었다.“얘가 어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말을 채 하기도 전에 전화 한 통이 걸려 들어왔다.핸드폰을 꺼내 들어 확인해 보니 김훈이었다.하는 수 없이 잠시 화를 억누르고서 전화를 받았다.“김 회장,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하고.”“그딴 소리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