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희는 유남준의 뜻을 알아들었다.“사모님은 알고 계십니까?”“아니, 모르게 진행할 거야.”박민정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유남준은 수술로 바보가 된다면 박민정이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아직 유남준의 의식 속에는 못난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여자인 박민정에게 모든 걸 맡기고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네.”...호산 그룹.오늘 박민정은 마케팅 5팀 팀장의 신분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박민정이 오기 전부터 마케팅 5팀의 팀원들은 삼삼오오 수군거리고 있었다.“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최현아 그 사람이랑 다 똑같을 거야.”“난 그렇지 않다고 봐. 최현아랑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어.”다들 의견이 분분했다.마케팅 부서는 본래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편이다.대부분이 박민정 역시 최현아와 비슷한 실력으로 관리 따위를 일절 모르고 오로지 배경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박민정은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케팅 5팀 팀원들에게 최현아가 오기 전의 모든 제도를 회복할 것이라고 알렸다.순간 마케팅 5팀 팀원들은 멍하니 있다가 환호하면서 박수까지 미친 듯이 쳤다.최현아의 제도에 비하면 그 전의 제도가 얼마나 좋았는지 팀원들은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전의 제도하에 마케팅 5팀은 분기마다 마케팅 부서 전체를 통틀어서 일등을 차지하곤 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박민정은 부팀장까지 임명하여 그에게 다시 마케팅 5팀의 명예를 회복하게끔 격려했다.박민정의 결정에 반대의 소리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오히려 전과 다른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박 팀장님, 앞으로 저희 팀을 이끌고 가실 텐데 오늘 저녁에 저희끼리 환영식이라도 할까요?”“맞아요. 저희가 준비할게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번 달에 열심히 달리셔서 매출액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그것으로 여러분의 환영을 받았다고 간주할 것입니다.”“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랑 장난삼아 그런 소리를 하는 줄 알았었다.그러나 잠들기 직전에 유남준은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읽어봐봐.”박민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도 않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잘 거예요.”“예전에 있었던 일을 하도 많이 잊어버려서 그래. 이른 시일 내로 모든 걸 알아야 하니 네가 좀 읽어줘.”너무 몰아붙이면 박민정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유남준은 다른 식으로 말머리를 돌렸다.과연 박민정은 성화에 못 이겨 읽기 시작했다.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졸음이 밀려와서 그만 잠들고 말았다.소리가 끊기자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에서 서류를 빼내서 잘 눕힌 뒤 품속으로 끌어안았다.그 뒤로 남은 시간 동안 유남준은 마치 엄숙한 선생님처럼 박민정을 스파르타 하게 가르쳤다.직원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지 등 여러모로 말이다.가장 이른 시일 안에 박민정에게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다.처음에 박민정은 그리 열심히 배우지 않았었다.그러던 어느 날 최현아가 호산 그룹으로 다시 오게 된 걸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내가 다시 복귀할 줄은 몰랐지? 나 앞으로 실적이 가장 좋은 마케팅팀에서 팀장으로 일해.”“...”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유명훈이 아무리 본처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대로 나가다가 호산 그룹이 망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최현아는 가기 전에 일부러 박민정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참, 마케팅 부서 전체에 규칙 하나가 있어. 실적에서 꼴찌 한 팀은 바로 탈락이라는 규칙 말이야. 만약 앞으로 마케팅 5팀의 실적이 바닥이라면 너희 팀 전체가 회사에서 잘리게 될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는 호산 그룹 이미지와 능력에 알맞은 신인을 다시 뽑을 거야.”마케팅 5팀의 현재 팀장으로서 박민정 역시 잘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서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기가 발
지금 박세찬이 너무 그리운 박윤우이다.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공부랑은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다.숫자가 점점 커지자 박윤우는 양손을 총동원하여 계산하기 시작했다.만약 박예찬이었다면 아마 이미 암산해 냈을 것인데 말이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정부는 어린 박윤우가 벌써 학업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속으로 지금 학부모들의 교육 방식이 너무 무서울 정도라면서 혀도 차고 말이다.머리를 긁적이는 박윤우를 보고서 박민정은 다가가서 도와주려고 했다.그러나 겨우 두 발자국밖에 옮기지 못했는데 유남준의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민정아, 네 임무는 완성했어?”박민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자기 코부터 닦았다.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엄숙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박민정이다.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름이 없는 지금이니 말이다.“아직이요... 생각하고 있었어요.”박민정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그래.”유남준은 대답하고 나서 계속 자기 업무를 처리하였다. 집에 가만히 있기엔 너무 화창한 날씨라 일가족은 정원에서 각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김인우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정원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조하랑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민정아, 윤우야.”그 소리에 박민정과 박윤우는 바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순간 암담했던 자기 세상에 빛 한 줄기가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어!’박윤우는 기뻐해 마지 못했다.김인우와 박예찬은 차분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고 경비실에서 문을 열어주자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아빠, 인우 아저씨랑 하랑 이모가 형 데리고 왔어요.”박윤우는 유남준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아직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나이인데 산수라니... 학대가 따로 없다고 느꼈으니 말이다.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이 무척이나 언짢은 유남준이다.“계속해.”순간
수술에 실패할 확률도 높고 김인우는 꼭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행여나 유남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앞으로 박민정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게다가 김인우와 유남준은 어릴 적부터 함께 한 친구 사이이다.“수술하지 않으면 나 지금처럼 이렇게 살 수 있어? 평범한 사람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냐고?”유남준이 물었다.그 말을 듣고서 김인우는 순간 말 문이 턱하고 막혔다.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억에 혼돈이 온 유남준이었다.만약 유리 파편을 꺼내지 않는다면 수시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다만 그 상황이 언제 펼쳐질지 모른다는 것이다.“내내 걱정하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한 번 눈 딱 감고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유남준이 말했다.김인우는 이제는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우리 민정이랑 아이들 네가 책임져줄 거지?”“그럼! 당연하지!”김인우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책임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면의 지출을 자기가 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박민정에게 목숨을 빚지기도 했고 그동안 유남준에게 받아온 것에 빚을 가득 진 김인우이기 때문이다.“그럼 됐어. 이제는 걱정할 것도 없어.”김인우의 약속을 받아낸 유남준은 마침내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필경 진주시에서 김씨 가문도 손에 꼽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감히 함부로 김씨 가문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동안 박민정과 조하랑은 요즘 호산 그룹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조하랑은 자기 친구인 박민정을 진심으로 탄복하면서 대신 기뻐해 마지 못했다.“너 진짜 대박이야! 최현아 완전 꼭지 돌았겠는데?”“처음에는 그랬는데 얼마 전에 마케팅 1팀의 팀장으로 다시 돌아왔어. 실적이 가장 좋은 팀인데...”“그건 반칙이지!”하지만 조하랑 역시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공평을 추구하려면 남
책임성이 강했던 유남준은 주말 내내 박민정과 박윤우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종일 문제 풀이를 하게 하고 서류를 보게 하였으니 말이다.잠자리에 든 박윤우는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문제 풀이를 하고 있었다.“흑흑흑... 열심히 할게요. 아빠 화내지 마세요...”잠꼬대도 하면서 이내 시달리고 있었던 박윤우였다.마침 박윤우의 침실을 지나가고 있던 유남준은 그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손을 들어 박윤우의 팔을 다치자 인기척에 박윤우는 바로 깨어났다.어두운 불빛 아래 비친 유남준의 얼굴을 보고서 박윤우는 귀신이라도 본 듯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저 졸려요. 내일 일어나서 계속하면 안 돼요?”유남준은 앳된 박윤우의 소리를 듣고서 가슴이 약간 미어졌다.“완성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워낙 몸도 남보다 좋지 않은데 다른 면에서까지 뒤처지면 안 된다. 아니면 어떻게 엄마를 지켜줄 수 있겠어... 앞으로 먼저 다가가서 배우는 법을 익히고 건강을 핑계 삼아 남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 알았어?”갑작스러운 훈계에 박윤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으나 유남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네, 꼭 그렇게 할게요.”“계속 자.”유남준은 침실에서 나가면서 문을 꼭 닫아주었다.잠이 깬 박윤우는 유남준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아 박예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형, 요즘 아빠 좀 이상한 것 같아.]이제 막 자려고 하던 박예찬은 그 메시지를 보고서 약간 귀찮아했다.[어디가?][콕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는데, 뭔가 이상해.][그럼, 하지 마.]박예찬은 본래 유남준에 관해서 관심도 없었다.[알았어.]박예찬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자, 박윤우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다.그런 박윤우의 모습이 상상되었기에 박예찬은 다시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박윤우는 요즘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리면서 유남준이 박민정과 자기한테 이런저런 일을 시켰다는 것까지 알렸다.[드라마에서 보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