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 사무실에서 나온 홍주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즐기고 있는 동료들을 보게 되었다.잠깐 흠칫거리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도착한 배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때 배달 음식을 먹고 있는 홍주영을 보고서 박민정은 이상하기만 했다.‘어찌 된 상황이지?’“혹시 호텔 측에서 깜빡하고 홍 비서님께 주문을 받지 않았나요?”그 말에 동료들이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기다리다시피 비아냥거렸다.“그럴 리가요. 아무리 잘해준다고 한들 절대 민정 씨 마음 몰라줄 거예요.”“워낙 혼자에 익숙해진 사람이라 늘 저런 식이에요. 저렇게 해야만 대표님 눈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굳이 홍 비서님 때문에 민정 씨 기분까지 망치지 말고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점심을 먹었다.산모인 박민정을 위해서 야심 차게 준비한 점심을 말이야.박민정은 갈수록 홍주영에 대한 호기심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홍주영은 결코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하물며 어제 디저트를 건네주었을 때도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은 홍주영이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직접 주문한 배달 음식에만 집중했다.다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때 누군가가 홍주영 옆으로 다가왔다.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박민정이었다.홍주영은 곧바로 차갑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그러자 호텔에서 여부로 보내온 음식을 홍주영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박민정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배달 음식 자주 드시면 안 좋아요. 저 혼자서 먹기에는 좀 과분한 양이라 괜찮으시면 이거 드세요.”실은 속으로 거절을 당하게 될까 봐 살짝 걱정하면서 뱉은 말이기도 했다.하지만 호산 그룹의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본다면 홍주영은 깊이 사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서가 직접 받아온 계약서야. 어쩜 이틀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런 사달이 나게 할 수 있어? 천인 그룹에서 계약을 강제로 해제하겠다고 하고 있잖아!”최현아가 말했다.박민정은 상대조차 하지 않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뭐? 위약금을 3배나 낸다고? 계약 해제하려고?’“천 대표님께서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한다고요?”“그쪽에서 무슨 사정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도 몰라.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계약 해제라는 사실이야.”“어디 한 번 말해 봐. 재고 상품은 어떻게 할 거야? 유통 기한이 있는 식품들이야.”최현아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식품 판매이다.그리고 천인 그룹은 진주시 전체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구매상이다.천인 그룹에서 계약을 해제한다면 호산 그룹 재고 상품은 그대로 ‘쓰레기’가 될 때까지 두고만 볼 수 없게 된다.비록 계약 해제 금으로 회사에서 막대한 손실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천인 그룹이라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잃게 된 셈이니 앞으로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혹시 동서가 천수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야? 우리 회사 욕하기라도 했어?”최현아가 본격적으로 책문하기 시작했다.소리가 결코 작지 않아서 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한 방에 끌어당겼다.막장 드라마나 다름없는 지금 이 상황이 지루한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던 직원에게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따지고 보면 최현아와 박민정은 친척 사이인데, 한 명은 대표 소리를 듣고 다른 한 명은 비서 소리를 듣고 있으니 궁금하기 그지없었다.박민정은 최현아의 말을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최 대표님 말씀대로 제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면 천 대표님께서 왜 계약서에 사인을 하셨겠습니까? 돈이 남아돌아서 계약 해제 금을 3배나 지급하면서까지 사인했다가 해제하려고 했겠습니까?”‘대체 어떻게 마케팅팀장이 된 거지?’최현아 같은 여자가 어떻게 한 팀을 이끌 수 있고 그 자리까지 올랐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말을 바로 직설적으로 내뱉는 사람이
박민정의 말에 회의실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그 또한 찰나 바로 회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IM 그룹? 또 IM 그룹에서 한 짓이란 말입니까?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입니까!”“돈밖에 없는 회사 아닙니까! 어쩜 이렇게 가는 곳마다 막고 있을 수 있습니까!”“IM 그룹이 진주시에 있는 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해외 회사인 것 같습니다!”고위직 직원들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최현아이다.다른 회사에서 가로채 갔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갑지 않아 하면서 박민정을 의심했다.“통화 내용만 들어봐도 둘이 엄청 친한 것 같은데 혹시 박 비서님이 IM 그룹 소개해 준 건 아니죠?”어떻게든 박민정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애간장을 쓰고 있는 최현아이다.“최 대표님, 그 의문에 대해서는 앞서 답변드린 것 같은데요. 혹시 요즘 잠을 설치시나요?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그래요.”“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만약 제가 천 대표님께 IM 그룹을 소개해 드렸다면 그쪽에서 무슨 이유로 저희 회사와 계약서를 체결하겠어요. 아니에요?”“계약 체결하고 나서 알려준 거 아니에요?”최현아는 어떻게든 반박만 하려고 앞뒤도 가리지 않았다.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는 최현아를 상대로 박민정은 화를 내지도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제가 그렇게 했다면 천 대표님께서 저를 미워하지 않겠어요? 저희 회사와 체결하게 하고서 IM 그룹과 다시 계약 관계를 맺게 한다고요? 그 엄청난 계약금까지 지급해 가면서요?”“하물며 그렇게 했다고 한들 저한테 이로운 건 뭐죠? 저 호산 그룹의 직원이기 전에 유씨 가문의 며느리입니다. IM 그룹 대표가 저였으면 뭐 이유가 될 수 있겠죠. 근데 그건 아니잖아요.”IM 그룹의 대표는 박민정이 아니지만 유남준이므로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다만 그 사실을 박민정 본인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조리 정연
IM 그룹이 진주시에 나타난 뒤로 거의 시장 전체를 독점하고 있다.IM 그룹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어서 호산 그룹은 손해를 본다고 한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된 것이다.고위직 직원들은 하나같이 IM 그룹의 기세를 꺾을 생각만 하고 그 누구도 감히 IM 그룹의 고객을 빼앗아 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러한 생각을 제기한 선두자가 바로 박민정이라고 할 수 있다.박민정의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흐뭇하기만 했다.당하기만 하는 상황에 이미 질 린 대로 질린 상황이었고 먼저 나서서 싸울 때도 되긴 했다.입이 떡 벌어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계속 말했다.“그 어느 회사든 능력이 제한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IM 그룹은 천인 그룹과 계약서를 체결함과 동시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 틈을 타서 IM 그룹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그래도 되는 겁니까?”어느 한 고위직 직원이 의문을 드러냈다.호산 그룹의 오래된 직원 역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호산 그룹은 큰 도련님께서 책임졌을 때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별 탈 없이 회사를 계속 운영하려면 안정적으로 시장에 스며들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다른 회사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IM 그룹에서 알고 난 뒤 보복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맞습니다. IM 그룹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만약 큰 도련님께서 시력이 회복되신다면 모를까... 큰 도련님이 나서게 되면 IM 그룹과 맞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지금 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큰 도련님’은 바로 유남준이다.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남준에 대한 믿음이 이 정도로 클 줄이라고 박민정은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호산 그룹이 유남준 손으로 넘어갔을 때 지금의 규모도 아니었고 매일 예상치 못하는 위기에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박민정은 다소 압박감이 들었다.“유 대표님,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남우 씨’가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박민정의 모습에 유남우는 감정이 복잡해졌다.“민정아, 너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형보다 못한 거 같아?”순간 박민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말이다.박민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유남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타일렀다.“회의실에서 어떤 분위기이었는지 봤을 거 아니야. 말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해.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않을게. 그냥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했으면 좋겠어.”박민정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서로 잘난 점이 다른 것 같아요. 대표님 같은 경우는 성격이 워낙 부드럽잖아요.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남준 씨는 성격이 불같아요. 그리고 대표님은 남에게 상처도 쉽게 주지 않고 위로도 잘 해주시는 분이지만 남준 씨는 아니에요.”“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대표님보다 남준 씨가 호산 그룹에 더 오래 있었고 남준 씨가 호산 그룹을 책임졌을 때 거의 밑바닥에서부터 책임진 거였잖아요. 회사 규모든 뭐든 거의 업계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의 호산 그룹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말이에요.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은 돈을 버는 데만 익숙해졌으니 당연히 모험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으시려고 할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숨기기 위해서 아마 남준 씨를 걸고넘어진 것 같아요.” 박민정은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그 모든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민정아, 너 혹시 기억나? 너 거짓말할 때면 항상 고개 푹 숙이고 나랑 눈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었어.”박민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말한 것뿐이에요.”유남준의 잘만 점에 대해서 말하
한창 출근할 시간에 박민정의 전화를 받게 된 유남우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IM 그룹은 왜 물어?”“다름이 아니라 요즘 많은 회사가 IM 그룹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잖아요. 그 배후에 있는 사장이 얼마나 음흉하고 악독한지 참...”‘음흉하고 악독해? 내가?’유남준은 박민정의 말과 뉘앙스가 마냥 웃기기만 했다.정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자기한테 음흉하고 악독하다고 평가하는 그 말이.경쟁으로 이기지 못하자 별의별 평가를 다 내세운다면서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다.하지만 유남준은 계속 모르는 척 박민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나도 몰라. 근데 우리 회사도 IM 그룹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어.”“네? 정말이에요?”처음에는 IM 그룹에 대해서 궁금하기만 했었는데, 유남준의 말을 듣고 난 뒤 IM 그룹이 싫어지기 시작했다.“응... 근데 호산 그룹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유남준이 물었다.“호산 그룹의 고객을 IM 그룹에서 빼앗아 갔어요.”박민정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그 고객이 바로 천인 그룹이라는 것을 유남준은 잘 알고 있다.“그래? 안 됐네. 남우는?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회사 쪽은 내가 이미 해결했거든.”“어떻게 해결한 거예요?”박민정은 단번에 구미가 당겼다.“알고 싶어?”“네, 알고 싶어요.”IM 그룹에 대해서 알고 난 뒤로 박민정은 작은 회사에서 도려 IM 그룹에 피해를 보게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퇴근하고 와서 나한테 다시 한번 부탁해 봐. 그럼, 내가 아주 천천히 가르쳐줄게.”유남준은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로 무척이나 간드러지게 말했다.순간 그 말 뒤에 숨겨 있는 뜻을 알아차린 박민정은 바로 거부해 버렸다.“됐어요. 남준 씨 아니어도 이미 대책 방안 생각해 냈거든요.”“그게 뭔데? 어떻게 해결할 셈이야?”유남준은 무척이나 궁금했다.자기 아내가 무슨 방법으로 자기에게 공격을 할지 말이다.“나중에요. 성공하고 나면 그때 다시 얘기해줄게요. 그럼, 먼저
박민정 역시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될 줄은 몰랐다.에리와 조금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문 앞에 서 있는 최현아와 추경은을 보게 되었다.추경은은 최현아를 대신하여 열심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박민정은 바로 전화를 끊고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새언니, 대낮에 사무실 문은 왜 잠그고 있는 거예요? 뭐 보면 안 될 일이라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최현아를 등에 업고 있어서인지 추경은은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그게 아니라 지나가던 똥개라도 사무실에 들어올까 봐 잠가 놓은 거예요.”가만히 듣고만 있을 박민정이 아니었다.욕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새언니, 지금 나랑 올케언니 욕하고 있는 거예요?”추경은 역시 바로 반박했다.“그런 말 한 적 없고 함부로 덮어씌우지 마시죠.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폄하할 수 있죠?”박민정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추경은은 뭐라고 더 하고 싶었지만 최현아가 그녀를 말렸다.“동서한테 볼 일이 있어서 온 거야.”“무슨 일인데요?”“동서가 회의에서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IM 그룹 프로젝트를 빼앗아 오겠다고 한 것 말이야. 나도 다른 고위직 직원들은 모두 반대하는 쪽이야. 하지만 대표님께서 이미 결정 내린 일이고 하니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봐.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의견을 꺼낸 사람이 직접 가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최현아가 말했다.그 많은 고위직 직원을 뒤로하고 작은 비서인 자기한테 이번 일을 맡기게 될 줄은 몰랐다.하지만 박민정은 바보가 아니다.“호산 그룹에서 제 신분은 비서입니다. 비서로서 어떻게 프로젝트를 빼앗아 올 수 있단 말입니까?”“대표님께 그럴만한 권리를 달라고 하면 되잖아.”최현아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서 또다시 물었다.“제가 이번 일을 성황리에 끝마치면 제가 얻게 되는 건 뭐죠?”“얻게 되는 거?”최현아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박민정이 마냥 우습기만 했다.“걱정하지 마. 일단 계약서만 체결하면 회사에서 인셉
최현아는 박민정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전혀 믿지 않는다.최현아의 말에 홍주영은 바로 멀지 않은 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비서에게 조금 전 사항을 계약서로 만들어내라고 했다.이윽고 계약서에 최현아와 박민정 모두 사인하게 하라고 했다.최현아는 사인을 하기 전에 불현듯 무엇인가 떠오른 듯했다.“근데 너무 불공평한 계약서인 것 같아요. 박 비서가 이기면 마케팅 5팀 책임자 자리에 앉게 되는데, 내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죠? 박 비서 쪽에서 치르는 대가가 아무것도 없잖아요.”“만약 제가 프로젝트를 빼앗아 오지 못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렀으면 합니까?”“퇴사요.”최현아는 호산 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민정을 눈엣가시로 여긴 지 한참 되었다.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두말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그러죠.”계약서에 새로운 조건을 첨부하고 두 사람 모두 사인을 했다.유남우를 공증인으로 모시기도 했다.대표이사실 전체가 오늘 두 사람으로 인해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최현아 일행이 떠나고 난 뒤 박민정은 잠깐 쉬다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어떻게 빼앗아 올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IM 그룹은 지금 모든 회사의 프로젝트를 빼앗고 있어. 근데 정작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고 있는 회사는 없어. 따라서 IM 그룹은 지금 무방비 상태일지도 몰라.’박민정은 IM 그룹에서 빼앗아 간 프로젝트를 모아서 일일이 연구하기 시작했다.어느 프로젝트를 도로 빼앗아 오면 쉬울지에 대해서 말이다.온갖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시간은 유난히 빨리 흘러갔다.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난 뒤에도 박민정은 사무실에 앉아서 열심히 파고들고 있었다.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된 박민정은 그제야 저녁 6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왜 아직도 퇴근 안 해?”유남준의 소리가 들려왔다.“이제 곧 해요.”박민정은 대답을 마치고 난 뒤 서둘러 짐을 챙겨 가방을 들고 퇴근했다.회사 문 앞에는 한참 동안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이 있었다.박민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