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장 밖에서 정민기는 이미 부하들과 함께 비밀리에 장애물을 처리해 버렸다.유남준과 박민정이 지금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정민기와 서다희는 서로 사인을 주고받고서 바로 안으로 달려들었다.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권해신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의 부하 역시 어안이 벙벙해졌다.“둘째 도련님!”권해신은 그제야 알았다.지금껏 시간을 끌려고 모든 꼼수를 총동원했다는 사실을 말이다.하지만 서다희가 어떻게 위치를 알고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일이 이 지경으로 번진 마당에 권해신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알고 유남준 일행의 목숨이라도 빼앗을 생각이었다.“저 두 여자랑 유남준만 죽이면 내가 10억을 주려고 한다.”“만약 죽이는 도중에 함께 죽게 된다면 그 몫은 그 사람 가족한테 줄 것이다.”10억?일반인이 평생을 소처럼 일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만질 수 없는 금액이다.권해신 부하들은 두 눈을 이글거리면서 박민정을 향해 다가갔다.박민정은 바로 유남준의 손을 잡고서 소리쳤다.“얼른 가요.”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퍼졌고 박민정은 으스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게다가 추경은의 소리까지 들려왔다.“남준 오빠, 나 좀 살려줘!”다리를 다친 추경은, 아이를 품은 박민정, 손을 다친 유남준...세 사람은 순순히 도망칠 수 없었다.권해신 부하가 휘두른 칼날이 박민정 코 앞으로 다가왔다.박민정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아이부터 지켰다.이대로 죽게 되는 줄 알았으나 유남준이 또다시 앞을 가로막으면서 그녀를 살려주었다.다만 이번엔 피가 박민정의 두 눈을 물들여 버렸다.“남준 씨!”배가 아파지면서 숨쉬기조차 어려웠으나 박민정은 그부터 꼭 껴안았다.“남준 씨!”때마침 정민기가 조금 전 그 사람을 처리하고 다가왔다.불과 10분 만에 모든 적을 물리 세웠고 도망치려던 권해신까지 기절시켜 버렸다.박민정은 다른 이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뼛속 깊이 파고드는 아픔을 참으면서 유남준을 꼭 껴안았다.어디가 다쳤는지 지금 박
안타깝게도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는 유남준이다.자기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유남준을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두 손을 더욱더 움켜쥐었다.피범벅인 박민정을 바라보면서 서다희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사모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선생님께 한번 봐 드리라고 할게요.”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다친 데 없어요... 다친 사람은 남준 씨예요... 남준 씨만 다쳤어요.”서다희는 그제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의 사투로 유남준은 마침내 지혈을 할 수 있었다.“병원으로 가셔서 봉합해야 합니다. 제가 살펴본 정황에 따르면 동맥까지 다치셨습니다. 지혈했다고 한들 얼마나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의사의 말에 서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유남준 오른쪽 머리에 긴 칼 상처가 있는데, 하마터면 얼굴까지 상처가 날뻔했다.조금 전에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게 움직이지 못한 정민기와 자신이 한스러웠다.아니면 유남준에게 이러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그 어떠한 후회도 돌이킬 수 없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이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고 김인우가 직접 수술칼을 잡았다.함께 온 추경은은 다른 수술실로 옮겨져 갔다.복도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박민정은 양손을 새빨갛게 물들어 버린 손을 바라보면서 파르르 떨었다.이때 정민기가 다가왔고 뭐라고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가만히 옆에 서 있기만 했다.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나서야 수술이 끝났다.집으로 돌아온 박윤우는 박민정과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전화를 걸어왔다.아들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겨우 버티면서 거짓말을 했다.유남준과 함께 볼 일이 있다면서 오늘은 집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그렇게 박윤우에게 거짓말을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마침내 유남준이 수술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박민정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김인우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엄숙한 모습으로 다가왔다.“어떻게 됐어요?”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박민정이 물었다.“내일쯤이면 깨어
서서히 깨어난 유남준은 손가락을 움직였고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그의 움직임에 박민정은 바로 눈을 떴다.“남준 씨, 깼어요?”박민정의 소리를 듣게 된 유남준은 그제야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응, 오래 잔 것 같아.”박민정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면서 확 끌어안았다.“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요. 오래 잔 게 아니라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던 거예요.”동맥까지 다친 유남준은 아주 섬뜩할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렸었다.박민정에게 꼭 안겨버린 유남준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손을 들어 박민정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괜찮아.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그러자 박민정은 그를 더욱더 꼭 껴안았다.얼굴 전체를 유남준의 가슴팍에 묻을 정도로 말이다.눈물은 어느새 유남준의 옷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흐느끼는 박민정의 소리에 유남준은 가슴이 미어졌다.“울지마.”박민정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대답했다.“안 울었어요.”“배고프지 않아요?”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참, 이제 막 깨어났는데, 가서 인우 씨 불러와야겠어요. 지금 남준 씨 상황이 어떠한지 확인해야 할 것 아니에요.”유남준이 거절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침대에서 빠르게 내려와 문 앞으로 가서 경호원에게 말했다.“김인우 선생님 좀 불러오세요.”김인우는 오늘도 병원에서 밤을 보냈다.유남준의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깨어났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는 빠르게 달려갔다.그리고 검사하는 동안 박민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밖에서 기다렸다.“다행히 지혈은 잘 됐어.”김인우가 말했다.유남준은 다소 의외라는 모습을 보였다.“네가 수술한 거야?”검사를 마치고서 김인우는 옆에 앉았다.“남준아, 내 의술에 전혀 믿음이 없는 눈치다? 나 엄청 중요한 사실도 발견했는데, 알고 싶지 않아?”“네가 앞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자, 자주 기억을 잃는 이유일 수도 있어.”유남준은 순간 엄숙해지기
몸을 던지면서 자기를 구해줬던 유남준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박민정이다.그런 순간에 제법 유치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던지는 유남준의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심심해요?”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깨버렸다.“누구야?”유남준이 물었다.핸드폰을 꺼내 든 박민정은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서 이실직고했다.“지석이에요.”유남준은 질투심이 폭발한 사춘기 소년처럼 입을 삐죽거렸다.“스피커폰 눌러.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나도 들어봐야겠어.”어제 그 상황에서 박민정이 내뱉은 모든 말과 행동이 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질투가 났었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스피커폰을 눌렀다.“지석아.”박민정이 그를 불렀다.“어제 민기한테 전화했었어. 어찌 된 상황인지 이미 다 알았고. 너 지금 괜찮아?”연지석이 물었다.“응, 괜찮아.”“그럼, 됐어. 근데 내가 어제 했었던 말은 아직도 유효야. 너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너 데리러 갈 수 있어. 내 곁에 있으면 절대 다치는 일 없을 거야.”옆에서 듣고 있던 유남준은 어느새 얼굴이 어두워졌다.박민정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연지석 씨, 제 아내는 제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연지석은 자기와 박민정의 대화를 유남준이 듣고 있겠다고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바로 충고하기 시작했다.“유 대표님께서 민정이를 잘 지켜줄 수만 있다면 걱정할 일도 없을 겁니다.”“거듭 경고하는데, 우리 민정이 나한테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잘 지켜줄 수 없으시다면 하루빨리 저한테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유 대표님처럼 자기 여자도 아이도 다치게 두지 않거든요.”유남준은 손을 꼭 움켜쥐었다.그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이때 박민정이 나서서 살벌한 분위기를 깨려고 했다.“지석아, 나 괜찮아.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시간 되면 너 보러 에스
가만히 듣고 있던 유남우의 두 눈에 잠시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대충 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다 먹었어요. 그만 출근하러 갈게요.”“오늘도 회사에 간다고?”고영란이 물었다.“네,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되잖아요.”이윽고 유남우는 윤소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집에서 어머니 파티 준비 잘 도와드려. 가능한 한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말고.”얼마 전 온라인에서 박민정의 표절에 대해 모함 극을 벌인 일을 겨냥하면서 한 말이었다.“알았어요.”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린 윤소현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대답만 했다.하도 크게 번진 일이라 지금 감히 유남우에게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윤소현이다.집에서 나온 유남우는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있었다.권씨 가문 셋째 도련님 권진하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바로 연결되었다.수화기 너머 권진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도련님, 어떡하죠! 유남준 부하들이 우리 해신 형을 데리고 가버렸어요.”유남우는 그 소식을 듣고서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자업자득이야.”자기 형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유남우이다.유남준이 바보가 되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감히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권진하 역시 지금 그때 권해신을 말리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남우 도련님, 우리 해신 형 좀 구해주시면 안 돼요? 큰형도 잃은 마당에 저 해신 형까지 잃을 수 없어요.”권진하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어서 지금까지 밖에서 숨어지내고 있다.차에 오른 유남우는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덤덤하고 차가운 눈빛을 유지했다.“나 그렇게 심심하지도 않고 착한 사람도 아니야.”“하물며 나랑 남준이 사이가 얼마나 어색한지 너도 잘 알잖아. 내가 나서서 말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아주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는 셈이다.이러한 답이 돌아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권진하이다.그
늘 했던 대로 처리하면 권해신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대로 말하면 박민정이 놀라게 될까 봐 거짓말을 했다.“다시는 진주시에 오지 말라고.”“그런 거였어요.”박민정은 그제야 알았다.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경호원이 병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추경은 씨께서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추경은에 대해서 그 어떠한 좋은 감정도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추경은이 비틀거리면서 다짜고짜 들어왔다.“남준 오빠, 남준 오빠, 괜찮아?”추경은은 병원으로 실려 오기 전에 유남준이 박민정을 구하기 위해 크게 다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자기를 배신한 박민정을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보호하고 대신 칼을 막아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민정한테 그렇게 매력이 있냐면서 말이다.경호원은 추경은을 가로막고서 더 이상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유남준의 사촌 동생이고 부상도 입은 상황이라 폭력적인 수단을 행사하기에 좀 불편했다.“비켜! 남준 오빠 만날 거야!”밖에서 추경은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 박민정은 귀가 아파 났다.“그냥 들여보내세요.”경호원은 그제야 추경은을 막아서지 않았다.추경은 역시 밖에서 박민정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지팡이를 짚고서 비틀거리며 들어온 추경은은 박민정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책문했다.“박민정,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뻔뻔하게 죽치고 있는 거야?”박민정은 그녀가 했었던 음험한 일을 떠올리면서 일부러 염장을 질렀다.“왜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 나랑 남준 씨는 법으로도 인정받은 부부사이야. 근데 아무런 관계도 없는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난 참 궁금하네.”박민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유남준은 끼어들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참 뻔뻔도 하지! 다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우리 남준 오빠랑 부부 사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야? 세상에 그런 부부 사이도 있어?”말을 마치고 추경은은 곧바로 유남준에게 말했다.“남준 오빠, 얼른 이혼해요!”대
병실 안에서.유남준은 박민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고서 박민정이 물었다.“머리는 아프지 않아요?”“안 아파.”“근데 좀 안기고 싶어.”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바로 침대에 앉아서 그를 안아주었다.“상처에 닿기라도 한다면 바로 알려줘야 해요.”“알아.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야.”입이 거의 찢어질 지경으로 웃고 있는 유남준이다.이처럼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대로 한참이나 안고 있었다.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서로의 온도만 느꼈다.“아빠는 왜 다 큰 성인인데도 엄마한테 안겨 있는 거예요?”앳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민정은 문 쪽으로 바라보았다.그때 정민기의 손을 잡고 온 박윤우가 시야로 들어왔다.“엄마, 아빠랑 같이 너무 한 거 아니야? 몰래 병원에서 이럴려고 나한테 학교 가라고 한 거야?”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유남준을 밀어냈다.“그...”갑자기 박윤우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박민정은 엄두 바를 몰랐다.하지만 박윤우는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는 눈빛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막힌 말을 한다.“돌다리 밑에서 나 주워 온 것 맞지? 흑흑흑.”박민정은 바로 박윤우에게로 달려가 그를 안았다.“우리 윤우 엄마가 미안해. 돌다리 밑에서 주워 오다니 말도 안 돼. 윤우는 엄마 아빠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야.”갑자기 박민정을 빼앗겼다는 허전함에 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렸다.‘한참 좋았는데... 분위기 다 깨졌어.’박민정의 말과 행동에 박윤우는 흡족했다.역시나 엄마 마음속에서 자기와 형이 일등이라면서.“엄마, 앞으로 윤우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알았어.”박민정은 바로 대답했다.박윤우는 그제야 더 이상 애교를 부리지 않고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아빠, 좀 괜찮으세요?”“그래. 많이 좋아졌어.”유남준이 대답했다.“아빠, 제가 호호 불어드릴까요? 전에 칼에 베였을 때
알고 보니 메가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추경은의 말을 듣고 난 뒤 박민정이 말했다.“가서 남준 씨한테 직접 전해줘요.”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면서 추경은은 당당한 걸음으로 병실에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추경은이 걸어 나왔다.병실 안으로 돌아간 박민정은 무척이나 심심해 보이는 박윤우를 보게 되었다.“윤우야, 아빠 편하게 쉬시게끔 우리 그만 가자.”“좋아요.”유남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자 온 박윤이다.지금껏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루함의 극치를 맛보았기에 차라리 집으로 가서 라이브를 보고 싶었다.두 사람이 집으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서 유남준이 말했다.“나도 같이 갈래.”상처는 이미 어느 정도 완전히 아물었고 격렬한 운동만 하지 않으면 별문제가 없다.“하지만 아직... 괜찮겠어요?”박민정이 걱정하며 물었다.“걱정하지 않아도 돼. 인우도 괜찮다고 이미 말했었어.”안심을 주고 나서 유남준은 또다시 덧붙였다.“일단 본가에 들릴 생각이야.”아직 유남우에게 볼 일이 있는 유남준이다.서다희의 조사에 따르면 유남우는 요즘 권해신과 아주 가까이하고 있다고 한다.이번 사건이 유남우과 관련되어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유씨 가문에서 파티를 주최할 때마다 많은 비즈니스 파트너들도 함께 하곤한다.유남준은 가능한 한 박민정과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재력을 구축해야 한다.“그럼, 같이 가요.”홀로 본가로 가겠다는 유남준이 걱정되어 박민정이 말했다.“싫으면 억지로 가지 않아도 돼.”유남준은 박민정이 유씨 가문 본가로 가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예전에는 싫었는데 지금은 좋아요.”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예전에는 유남준의 안중에 박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본가로 들릴 때마다 돌아오는 건 유남준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차가운 시선이었으니 말이다.그러나 지금은 그와 정반대이다.두 사람의 달콤한 대화를 듣고서 박윤우 역시 입꼬리가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