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은 오전 내내 윤소현의 전화를 기다렸다.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 되도록 윤소현은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전화 대신 윤소현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한 여사님, 인제 그만 협박하세요. 요구하신 대로 드릴 돈도 인제 없거든요.]메시지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한수민은 화가 치밀어오른 바람에 아랫배가 아파졌다.이윽고 한수민은 바로 모든 매체에게 연락을 했다.한편, 박민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줄어드는 기사와 이슈를 확인하고서 이상하기만 했다.‘날 돕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박민정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어 진서연에게 지시를 내렸다.“서연아, 인제 그만 공지해.”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진서연이다.박민정은 작곡가 민 선생의 이름으로 국내 SNS에서 따로 계정을 열었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몇백만 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일이 커지면서 어느새 팬은 천명을 훨씬 넘고 있었다.진서연은 계정에 오르고 나서 박민정의 요구대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일단 이번 일로 저에게 관심을 가져다주신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박민정 씨의 표절 의혹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바로 박민정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민 선생의 이름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건 단지 이름만으로 다른 선수들에게 불공평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까 봐 하는 우려도 있었고 국내에서 제 음악을 인정해 줄 것인지 아닌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즉, 제 명성과 달리 제 음악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제 일이 이슈가 된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와서 이렇게 공지를 올리게 된 이유는 바로 누군가가 댓글알바를 구하고 기사를 함부로 올리는 것과 같은 부정당한 수단으로 대회 전체를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진서연은 글을 작성하고 나서 회사에서 수집한 증거 자료까지 첨부했다.일부 심사위원이 뇌물을 받은 증거까지 모조리 올렸다.그 공지
IM 그룹.유남준은 서다희를 사무실로 불렀다.“민정이 일은 어떻게 됐어? 다 해결했어?”일부 기억을 잃고 있는 유남준일지라도 마음속 깊이 박민정을 신경 쓰고 있는 유남준이라는 것을 서다희는 잘 알고 있다.“일단 불리한 언론은 우리 측에서 모두 내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 선생 SNS 계정으로 공지글이 올라왔습니다. 사모님이 바로 민 선생이라는 것을 네티즌들이 알게 되었고 표절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자기가 너무 서둘러 나섰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지금의 박민정은 결코 약한 인물이 아니니 말이다.박민정은 이미 대체 방안을 생각해 놓고 있었고 여론이 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기자들한테 전화해서 다시 폭로 글 올리라고 해.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온통 민정으로 도배되었으면 좋겠어. 남에게 모함을 당한 내용으로.”“네, 알겠습니다.”서다희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플랫폼에서 반전 기사를 볼 수 있었고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온통 이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전에 윤소현이 큰돈을 들여도 이러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었다.박예찬은 어느 정도 시기가 적절해진 것을 보고 휴식 시간을 틈타 박민정을 모함했던 계정을 해킹해서 들어갔다.이윽고 상대가 어떻게 돈을 받고 일을 했는지 그 모든 기록을 퍼뜨렸다.순간, 모든 이들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모든 게 가짜였구나... 윤소현 역시 자기 형님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당연하지! 내가 한 번 알아보았는데, 박민정은 어릴 적부터 난청을 앓고 있었다고 했어. 난청 환자는 보청기를 착용해야 하는데, 이토록 대단한 곡을 써낼 수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거야.][난청 환자? 사실임? 사실이라면 나 오늘부터 박민정 팬 할래! 롤모델로 삼을 거야!][사실 맞아. 나 역시 민 선생 팬이잖아.]순간 민 선생 국내 SNS 팔로우 수는 5천만을 뚫어버렸고 모두 찐팬들이었다.그리고
댓글을 아무리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버둥 치고 싶었다.“박민정이 꾸민 짓일 거야! 내가 민 선생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박민정 그년이 아니었어!”“얼른 공지 올려! 박민정이 민 선생 아니라고! 그년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라고! 얼른!”비서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숙였다.“박민정 씨와 민 선생 동일 인물이 맞습니다. 민 선생 국내 계정에서 공지 글이 올라온 것이고 민 선생과 자주 합작한 스타도 글을 올리면서 박민정 씨의 신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그렇다. 에리는 광고 촬영을 마치고 나서 또다시 글을 올렸다.[박민정 씨가 민 선생을 표절했다고요? 자기 자신의 곡을 표절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윤소현은 서서히 호흡마저 가빠지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윤소현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한들 그건 사실이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합니까?”지금 윤소현이 일하고 있는 곳은 정수미가 차려준 무용 회사이다.뒤범벅이 된 상황을 돌이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윤소현은 다리의 힘까지 풀려왔다.“어떻게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애꿎은 비서에게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왔는데, 다른 이가 아니라 고영란이었다.어제저녁 식탁 위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 박민정의 일을 좀 해결해 주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고영란 역시 이 모든 일을 윤소현이 꾸민 것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윤소현은 가능한 한 덤덤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어머님.”“네가 한 짓이야?”과연 고영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영란은 오늘 다른 가문 사모님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 그 기사를 보게 되었다.박민정과 윤소현의 시어머니로서 두 며느리의 이름이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하자 체면이 말도 아니었다.“어머님, 오해하셨어요.”“오해라니? 네 입으로 민정이가 표절했다고 말한 거 아니니? 어떻게 오해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니?”윤소현은 두 손을
“엄마, 지금 저 욕하고 저격하는 사람들 엄청 많아요. 핸드폰 보고 싶어도 무서울 정도예요.”윤소현은 자기 뒤에 정씨 가문이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따라서 그 누구의 공격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두려움에 떨고 있는 윤소현이 마냥 안쓰러워 정수미는 그녀를 토닥거려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두려워할 것 없어.”“그깟 여론 따위 엄마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나중에 네 이모한테 전화 한 통만 하면 돼. 이모가 나서서 모두 무마해 줄 거야.”정수미의 동생, 즉 윤소현의 이모라고 하는 사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네.”윤소현은 눈물을 닦으면서 얌전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한테 그렇게까지 했는데...”나약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수미는 약간 걱정되기 시작했다.“소현아, 앞으로 너 스스로 문제 해결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야 할 거야. 엄마는 언젠간 네 곁을 떠나게 될 것인데, 평생 널 지켜줄 수는 없잖아.”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가슴이 철렁했다.‘뭐지?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인가?’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온라인상의 여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윤소현은 내내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엄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엄마는 평생 제 곁에 있을 것이고 절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예요.”“그래. 우리 보배딸.”말하면서 정수미는 윤소현을 가볍게 끌어안았다.“이번 일은 엄마가 한 번 제대로 알아볼게.”‘뭘 알아본다는 말이지?’‘알아보게 되면 내가 먼저 시비를 건 게 밝혀지는 거잖아.’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윤소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이쯤에서 그만둘래요. 박민정은 이미 유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저는 아직 시집가기 전이잖아요. 더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요.”“역시 우리 딸 기특해.”이에 대해 말이 나오자 정수미는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너랑 남우 약혼한 지도 한참 됐고 임신까지 했는데 서둘러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이번 일 해결되고 나
충고를 마치고 진서연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짜고짜 그러한 말을 듣게 된 한수민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슨 말이지? 보스님은 또 누구지?’그때 간병인이 웃으면서 병실로 들어왔다.“어머, 사모님 너무 좋으시겠어요.”“우리 사모님 복이 아주 터지겠어요. 민정 씨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라고 이미 해명 글도 올라와 있어요.”간병인은 온라인으로 떠들썩한 기사도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자기 딸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박민정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뭐라고?”한수민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불과 몇 시간 만에 여론은 360도 달라져 있었다.민 선생의 공식 계정에서 올린 글을 한수민도 보게 되었다.‘민 선생... 민정이...’‘동일 인물이었어!’한수민은 문뜩 얼마 전에 윤소현이 자기 돈을 가져가려고 온갖 아첨을 떨면서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박민정과 조하랑을 마주치게 되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그때까지만 해도 한수민은 온갖 폄하하는 말과 행동으로 박민정을 저격했었다.조하랑은 그때 박민정이 유명한 작곡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때 당시에는 그 말을 믿지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핸드폰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난청 환자인 박민정과 음악 사이의 거리는 멀 것으로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명성이 자자한 작곡가가 되었다니...심지어 라이브 방송까지 해가면서 애원했었던 민 선생이라니...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순간인 것만 같았다.“그런 거였구나...”한수민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내내 중얼거렸다.“사모님 좋으시겠어요. 친딸도 수양딸도 어쩜 이렇게 우수할 수 있어요.”간병인은 한수민이 약간 부럽기도 했다.자기를 부러워하는 간병인의 말과 태도에 한수민은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다.애꿎은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어릴 적부터 우수한 아이였다.다만 한수
“민정 씨, 이번 일은 제가 알아봤는데 소현이 잘못 맞아. 인터넷에서 함부로 글을 올리는 건 옳지 않잖아.”정수미는 먼저 사과한 후 덧붙여 말했다.“소현이도 잘못을 깨달았어. 어차피 둘은 나중에 시누이 사이로 지내야 하고 또 친자매이기도 하잖아. 소현이는 내게 다시는 이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번 한 번만 봐줘.”정수미는 한수민이 박민정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녀가 박민정에게 연락한 이유는 그녀의 여동생이 이번 일 뒤에 박민정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그래서 가능하면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박민정도 정수미가 먼저 와서 사과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정 대표님의 뜻은...”“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말아 달라는 말이야. 민정 씨가 입은 손해는 내가 보상할게.”정수미가 말했다.박민정도 이 정도 여론만으로는 윤소현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씨 가문이 그녀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더구나 사태가 커지면 유씨 가문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박민정은 이미 유남우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에 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소현과의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그럼 정 대표님께서 윤소현 씨더러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럼 잘못을 뉘우친 걸로 알고 있을게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현실적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동의했다.하지만 윤소현은 반대했다.“엄마, 제가 왜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해요? 오해라고 제가 말했잖아요.”“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그거 알아? 이 일 때문에 이모 회사 소속 연예인 두 명, 나락 갈 뻔했어. 여론 때문에.”정수미가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윤소현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결국 공개적으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사과한 후.박민정도 용서한다는 글을 올렸다.온라인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여론은 그렇게 잠잠해졌다.박민정은 이번 신곡 대회에서 당연히 1등을 차지하게 되었고 예상보다 더 큰
“그럼 IM 그룹에서 왜 저희를 도와줬죠?”진서연이 의아해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지난번에 에리가 나한테 자기가 지금 IM 그룹 소속이라고 했던 것 같아.”진서연은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에리는 역시 IM 그룹 소속이었다.“에리 씨가 도와준 거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요.”“그래야지. 알겠어.”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저녁 식사 후 휴식 시간에 박민정은 에리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인사했다.에리는 자기가 인터넷에서 그녀를 위해 나선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였다.“다음에 내가 돌아가면 잊지 말고 밥 사줘.”“그럼, 당연하지.”박민정은 흔쾌히 대답했다.박윤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가끔 박민정을 쳐다봤다.‘엄마와 에리 삼촌이 전화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네. 예전에는 전화하는 사람이 나와 형밖에 없었는데.’박윤우는 좀 걱정이 되었다.아빠가 계속 기억을 잃고 엄마와 따로 살면 결국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면 그와 박예찬은 가족을 잃게 될 것이다.박윤우는 이 생각에 마음을 굳히고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미간을 찡그렸다.“배가 너무 아파요!”옆에 앉아 있던 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윤우야, 왜 그래?”“배가 아파요. 온몸이 다 아파요.”박윤우가 말했다.민수아는 바로 박민정을 불렀다.“민정아, 윤우가 온몸이 아프대.”박민정은 바로 전화를 끊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윤우의 상태가 더 나빠진 줄 알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윤우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갈게.”박윤우는 박민정의 옷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병원 가기 전에... 아빠를 보고 싶어.”“그럼 엄마가 먼저 병원에 데려가고 아빠도 부를게. 그럼 되지?”박민정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박윤우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좋아.”병원으로 가는 길에 박민정은 차 안에서 박윤우를 안은 채 유
유남준은 어색하게 손을 들고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박민정은 조금 진정된 후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품이 갑자기 비어버리자 유남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우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두 사람에게 아이의 병이 악화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곧이어 박윤우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박민정은 바로 병실로 들어가서 물었다.“윤우야, 많이 아파?”박윤우는 약간 미안한 듯 고개를 저었다.“이제 안 아파.”그는 이어 멀리 서 있는 유남준을 바라봤다.“아빠.”“응.”유남준이 대답했다.박윤우는 계속해서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아빠,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돼요?”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유치원 친구들이 그러는데 엄마, 아빠가 따로 사는 건 이혼하려고 하는 거라던데. 정말 저랑 형을 버리려는 거예요? 형은 김 회장님과 인우 아저씨, 하랑 이모가 있는데 저는 엄마랑 아빠밖에 없잖아요.”그는 찡얼거리며 말했다.밖에서 듣고 있던 서다희는 아이가 너무 안타까웠다.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나중에 민수아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절대 다투지 않고, 또 절대 민수아와 따로 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박민정은 윤우가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기에 더욱 미안해졌다.“윤우야, 엄마는 아빠랑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야.”박민정이 그를 달랬다.박윤우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안 믿어.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려는 게 아니면 왜 따로 살고 있어? 왜 아빠가 이사하면 엄마도 이사해야 해?”박민정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아이가 감정이 격해져 상태가 나빠질까 봐 바로 대답했다.“우리 오늘 바로 이사해서 아빠랑 같이 살자. 어때?”박윤우는 두 눈을 반짝였다.“정말이야?”그는 유남준에게 다시 물었다.“아빠, 아빠도 올 거죠? 설마 나와 엄마를 버릴 건 아니죠?”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곧바로 대답했다.“그래.”...박민정과 함께 지내기로 한 후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