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은 오전 내내 윤소현의 전화를 기다렸다.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 되도록 윤소현은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전화 대신 윤소현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한 여사님, 인제 그만 협박하세요. 요구하신 대로 드릴 돈도 인제 없거든요.]메시지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한수민은 화가 치밀어오른 바람에 아랫배가 아파졌다.이윽고 한수민은 바로 모든 매체에게 연락을 했다.한편, 박민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줄어드는 기사와 이슈를 확인하고서 이상하기만 했다.‘날 돕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박민정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어 진서연에게 지시를 내렸다.“서연아, 인제 그만 공지해.”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진서연이다.박민정은 작곡가 민 선생의 이름으로 국내 SNS에서 따로 계정을 열었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몇백만 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일이 커지면서 어느새 팬은 천명을 훨씬 넘고 있었다.진서연은 계정에 오르고 나서 박민정의 요구대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일단 이번 일로 저에게 관심을 가져다주신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박민정 씨의 표절 의혹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바로 박민정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민 선생의 이름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건 단지 이름만으로 다른 선수들에게 불공평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까 봐 하는 우려도 있었고 국내에서 제 음악을 인정해 줄 것인지 아닌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즉, 제 명성과 달리 제 음악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제 일이 이슈가 된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와서 이렇게 공지를 올리게 된 이유는 바로 누군가가 댓글알바를 구하고 기사를 함부로 올리는 것과 같은 부정당한 수단으로 대회 전체를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진서연은 글을 작성하고 나서 회사에서 수집한 증거 자료까지 첨부했다.일부 심사위원이 뇌물을 받은 증거까지 모조리 올렸다.그 공지
IM 그룹.유남준은 서다희를 사무실로 불렀다.“민정이 일은 어떻게 됐어? 다 해결했어?”일부 기억을 잃고 있는 유남준일지라도 마음속 깊이 박민정을 신경 쓰고 있는 유남준이라는 것을 서다희는 잘 알고 있다.“일단 불리한 언론은 우리 측에서 모두 내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 선생 SNS 계정으로 공지글이 올라왔습니다. 사모님이 바로 민 선생이라는 것을 네티즌들이 알게 되었고 표절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자기가 너무 서둘러 나섰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지금의 박민정은 결코 약한 인물이 아니니 말이다.박민정은 이미 대체 방안을 생각해 놓고 있었고 여론이 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기자들한테 전화해서 다시 폭로 글 올리라고 해.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온통 민정으로 도배되었으면 좋겠어. 남에게 모함을 당한 내용으로.”“네, 알겠습니다.”서다희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플랫폼에서 반전 기사를 볼 수 있었고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온통 이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전에 윤소현이 큰돈을 들여도 이러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었다.박예찬은 어느 정도 시기가 적절해진 것을 보고 휴식 시간을 틈타 박민정을 모함했던 계정을 해킹해서 들어갔다.이윽고 상대가 어떻게 돈을 받고 일을 했는지 그 모든 기록을 퍼뜨렸다.순간, 모든 이들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모든 게 가짜였구나... 윤소현 역시 자기 형님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당연하지! 내가 한 번 알아보았는데, 박민정은 어릴 적부터 난청을 앓고 있었다고 했어. 난청 환자는 보청기를 착용해야 하는데, 이토록 대단한 곡을 써낼 수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거야.][난청 환자? 사실임? 사실이라면 나 오늘부터 박민정 팬 할래! 롤모델로 삼을 거야!][사실 맞아. 나 역시 민 선생 팬이잖아.]순간 민 선생 국내 SNS 팔로우 수는 5천만을 뚫어버렸고 모두 찐팬들이었다.그리고
댓글을 아무리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버둥 치고 싶었다.“박민정이 꾸민 짓일 거야! 내가 민 선생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박민정 그년이 아니었어!”“얼른 공지 올려! 박민정이 민 선생 아니라고! 그년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라고! 얼른!”비서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숙였다.“박민정 씨와 민 선생 동일 인물이 맞습니다. 민 선생 국내 계정에서 공지 글이 올라온 것이고 민 선생과 자주 합작한 스타도 글을 올리면서 박민정 씨의 신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그렇다. 에리는 광고 촬영을 마치고 나서 또다시 글을 올렸다.[박민정 씨가 민 선생을 표절했다고요? 자기 자신의 곡을 표절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윤소현은 서서히 호흡마저 가빠지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윤소현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한들 그건 사실이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합니까?”지금 윤소현이 일하고 있는 곳은 정수미가 차려준 무용 회사이다.뒤범벅이 된 상황을 돌이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윤소현은 다리의 힘까지 풀려왔다.“어떻게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애꿎은 비서에게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왔는데, 다른 이가 아니라 고영란이었다.어제저녁 식탁 위에서 고영란은 유남우에게 박민정의 일을 좀 해결해 주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고영란 역시 이 모든 일을 윤소현이 꾸민 것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윤소현은 가능한 한 덤덤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어머님.”“네가 한 짓이야?”과연 고영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영란은 오늘 다른 가문 사모님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 그 기사를 보게 되었다.박민정과 윤소현의 시어머니로서 두 며느리의 이름이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하자 체면이 말도 아니었다.“어머님, 오해하셨어요.”“오해라니? 네 입으로 민정이가 표절했다고 말한 거 아니니? 어떻게 오해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니?”윤소현은 두 손을
“엄마, 지금 저 욕하고 저격하는 사람들 엄청 많아요. 핸드폰 보고 싶어도 무서울 정도예요.”윤소현은 자기 뒤에 정씨 가문이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따라서 그 누구의 공격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두려움에 떨고 있는 윤소현이 마냥 안쓰러워 정수미는 그녀를 토닥거려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두려워할 것 없어.”“그깟 여론 따위 엄마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나중에 네 이모한테 전화 한 통만 하면 돼. 이모가 나서서 모두 무마해 줄 거야.”정수미의 동생, 즉 윤소현의 이모라고 하는 사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네.”윤소현은 눈물을 닦으면서 얌전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한테 그렇게까지 했는데...”나약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수미는 약간 걱정되기 시작했다.“소현아, 앞으로 너 스스로 문제 해결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야 할 거야. 엄마는 언젠간 네 곁을 떠나게 될 것인데, 평생 널 지켜줄 수는 없잖아.”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가슴이 철렁했다.‘뭐지?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인가?’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온라인상의 여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윤소현은 내내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엄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엄마는 평생 제 곁에 있을 것이고 절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예요.”“그래. 우리 보배딸.”말하면서 정수미는 윤소현을 가볍게 끌어안았다.“이번 일은 엄마가 한 번 제대로 알아볼게.”‘뭘 알아본다는 말이지?’‘알아보게 되면 내가 먼저 시비를 건 게 밝혀지는 거잖아.’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윤소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이쯤에서 그만둘래요. 박민정은 이미 유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저는 아직 시집가기 전이잖아요. 더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요.”“역시 우리 딸 기특해.”이에 대해 말이 나오자 정수미는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너랑 남우 약혼한 지도 한참 됐고 임신까지 했는데 서둘러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이번 일 해결되고 나
충고를 마치고 진서연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짜고짜 그러한 말을 듣게 된 한수민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슨 말이지? 보스님은 또 누구지?’그때 간병인이 웃으면서 병실로 들어왔다.“어머, 사모님 너무 좋으시겠어요.”“우리 사모님 복이 아주 터지겠어요. 민정 씨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라고 이미 해명 글도 올라와 있어요.”간병인은 온라인으로 떠들썩한 기사도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자기 딸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박민정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뭐라고?”한수민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불과 몇 시간 만에 여론은 360도 달라져 있었다.민 선생의 공식 계정에서 올린 글을 한수민도 보게 되었다.‘민 선생... 민정이...’‘동일 인물이었어!’한수민은 문뜩 얼마 전에 윤소현이 자기 돈을 가져가려고 온갖 아첨을 떨면서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박민정과 조하랑을 마주치게 되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그때까지만 해도 한수민은 온갖 폄하하는 말과 행동으로 박민정을 저격했었다.조하랑은 그때 박민정이 유명한 작곡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때 당시에는 그 말을 믿지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한수민이었다.한수민은 핸드폰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난청 환자인 박민정과 음악 사이의 거리는 멀 것으로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명성이 자자한 작곡가가 되었다니...심지어 라이브 방송까지 해가면서 애원했었던 민 선생이라니...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순간인 것만 같았다.“그런 거였구나...”한수민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내내 중얼거렸다.“사모님 좋으시겠어요. 친딸도 수양딸도 어쩜 이렇게 우수할 수 있어요.”간병인은 한수민이 약간 부럽기도 했다.자기를 부러워하는 간병인의 말과 태도에 한수민은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다.애꿎은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어릴 적부터 우수한 아이였다.다만 한수
“민정 씨, 이번 일은 제가 알아봤는데 소현이 잘못 맞아. 인터넷에서 함부로 글을 올리는 건 옳지 않잖아.”정수미는 먼저 사과한 후 덧붙여 말했다.“소현이도 잘못을 깨달았어. 어차피 둘은 나중에 시누이 사이로 지내야 하고 또 친자매이기도 하잖아. 소현이는 내게 다시는 이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번 한 번만 봐줘.”정수미는 한수민이 박민정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녀가 박민정에게 연락한 이유는 그녀의 여동생이 이번 일 뒤에 박민정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그래서 가능하면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박민정도 정수미가 먼저 와서 사과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정 대표님의 뜻은...”“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말아 달라는 말이야. 민정 씨가 입은 손해는 내가 보상할게.”정수미가 말했다.박민정도 이 정도 여론만으로는 윤소현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씨 가문이 그녀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더구나 사태가 커지면 유씨 가문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박민정은 이미 유남우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에 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소현과의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그럼 정 대표님께서 윤소현 씨더러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럼 잘못을 뉘우친 걸로 알고 있을게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현실적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동의했다.하지만 윤소현은 반대했다.“엄마, 제가 왜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해요? 오해라고 제가 말했잖아요.”“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그거 알아? 이 일 때문에 이모 회사 소속 연예인 두 명, 나락 갈 뻔했어. 여론 때문에.”정수미가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윤소현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결국 공개적으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사과한 후.박민정도 용서한다는 글을 올렸다.온라인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여론은 그렇게 잠잠해졌다.박민정은 이번 신곡 대회에서 당연히 1등을 차지하게 되었고 예상보다 더 큰
“그럼 IM 그룹에서 왜 저희를 도와줬죠?”진서연이 의아해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지난번에 에리가 나한테 자기가 지금 IM 그룹 소속이라고 했던 것 같아.”진서연은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에리는 역시 IM 그룹 소속이었다.“에리 씨가 도와준 거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요.”“그래야지. 알겠어.”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저녁 식사 후 휴식 시간에 박민정은 에리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인사했다.에리는 자기가 인터넷에서 그녀를 위해 나선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였다.“다음에 내가 돌아가면 잊지 말고 밥 사줘.”“그럼, 당연하지.”박민정은 흔쾌히 대답했다.박윤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가끔 박민정을 쳐다봤다.‘엄마와 에리 삼촌이 전화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네. 예전에는 전화하는 사람이 나와 형밖에 없었는데.’박윤우는 좀 걱정이 되었다.아빠가 계속 기억을 잃고 엄마와 따로 살면 결국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면 그와 박예찬은 가족을 잃게 될 것이다.박윤우는 이 생각에 마음을 굳히고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미간을 찡그렸다.“배가 너무 아파요!”옆에 앉아 있던 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윤우야, 왜 그래?”“배가 아파요. 온몸이 다 아파요.”박윤우가 말했다.민수아는 바로 박민정을 불렀다.“민정아, 윤우가 온몸이 아프대.”박민정은 바로 전화를 끊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윤우의 상태가 더 나빠진 줄 알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윤우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갈게.”박윤우는 박민정의 옷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병원 가기 전에... 아빠를 보고 싶어.”“그럼 엄마가 먼저 병원에 데려가고 아빠도 부를게. 그럼 되지?”박민정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박윤우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좋아.”병원으로 가는 길에 박민정은 차 안에서 박윤우를 안은 채 유
유남준은 어색하게 손을 들고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박민정은 조금 진정된 후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품이 갑자기 비어버리자 유남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우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두 사람에게 아이의 병이 악화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곧이어 박윤우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박민정은 바로 병실로 들어가서 물었다.“윤우야, 많이 아파?”박윤우는 약간 미안한 듯 고개를 저었다.“이제 안 아파.”그는 이어 멀리 서 있는 유남준을 바라봤다.“아빠.”“응.”유남준이 대답했다.박윤우는 계속해서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아빠,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돼요?”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유치원 친구들이 그러는데 엄마, 아빠가 따로 사는 건 이혼하려고 하는 거라던데. 정말 저랑 형을 버리려는 거예요? 형은 김 회장님과 인우 아저씨, 하랑 이모가 있는데 저는 엄마랑 아빠밖에 없잖아요.”그는 찡얼거리며 말했다.밖에서 듣고 있던 서다희는 아이가 너무 안타까웠다.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나중에 민수아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절대 다투지 않고, 또 절대 민수아와 따로 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박민정은 윤우가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기에 더욱 미안해졌다.“윤우야, 엄마는 아빠랑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야.”박민정이 그를 달랬다.박윤우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안 믿어.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려는 게 아니면 왜 따로 살고 있어? 왜 아빠가 이사하면 엄마도 이사해야 해?”박민정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아이가 감정이 격해져 상태가 나빠질까 봐 바로 대답했다.“우리 오늘 바로 이사해서 아빠랑 같이 살자. 어때?”박윤우는 두 눈을 반짝였다.“정말이야?”그는 유남준에게 다시 물었다.“아빠, 아빠도 올 거죠? 설마 나와 엄마를 버릴 건 아니죠?”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곧바로 대답했다.“그래.”...박민정과 함께 지내기로 한 후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