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피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렸기에 박민정은 즉시 자리에서 물러섰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박민정의 몸은 커다란 품에 안겨 있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유남준은 어느새 박민정 앞에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껴안았다.유남준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단지 방금 박민정이 말한 반대 방향으로 그녀가 있는 위치를 판단했고 다행히도 그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그리고 뱀의 위치도 알 수 없었기에 박민정의 앞을 통째로 막아야 했다.그리고 유남준의 품에 안긴 박민정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뱀도 박민정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시각, 정민기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추경은을 발로 걷어차 뱀의 자리로 내던졌기 때문이다.추경은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하마터면 뱀의 몸에 부딪힐 뻔했다.그리고 뱀은 갑작스러운 큰 충격에 놀라 쏜살같이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추경은은 흙과 풀을 한입 가득 머금고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순간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어떻게 감히 나를 걷어차요?”그러나 그녀의 투정에도 정민기의 눈동자는 그저 싸늘하기만 했고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저의 직책은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지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추경은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목이 메었다.방금 만약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그 뱀은 틀림없이 그녀를 물었을 것이다.이 경호원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단 말인가?조하랑과 다른 이들도 조금 전의 위험한 상황에서 천천히 빠져나왔고 그들 역시 추경은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추경은 씨가 민기 씨를 탓할 면목이 있습니까? 원래 가려던 뱀을 왜 굳이 소란을 피워서 다시 돌려놔요? 뱀이 정말 민정이를 물어뜯기라도 바랬습니까?”조하랑도 정말 합세하여 그녀를 몇 발 걷어차고 싶었다.이에 민수아도 동참했다.“너 마음이 너무 악랄하신 것 아니야? 크게 말하면 안 된다니까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질
그러나 박윤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몰래 봤어.”“...”박예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박윤우는 유남준의 휴대폰 잠금화면과 배경화면을 모두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사진으로 설정해놓았는데 기존의 간단한 배경화면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어차피 아빠는 보지도 못하는데 별말씀 안 하실 거야.”박윤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나와 낭패한 꼴을 하고 있는 추경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구하려고 했든, 아니면 나를 해치려고 했든 상관없어요. 그런데 만약 경은 씨가 내 아이를 다치게 했다면 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바로 그녀의 보물이다.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는 반드시 열 배로 갚아줄 것이다.한편, 박민정의 기세에 놀란 추경은은 즉시 고개를 떨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저는 정말 새언니를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김인우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방금 박민정이 정말 독사에게 물렸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추경은, 이번 일은 네 잘못이 확실해. 반성하도록 해.”그러자 추경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알았어.”우산뱀이 일으킨 소란으로 더 이상 산에서 머물기가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해가 떠오른 후에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다.추경은은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돌아가서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특히 더 말을 잘 들으며 고분고분 행동했다.“새언니, 조심하세요. 넘어지면 안 돼요.”그러자 조하랑이 다가와 그녀를 밀어냈다.“저리 비켜요. 나중에 또 우리 민정이 밀어버리지 말고.”화가 났지만 추경은은 상황을 보고 얌전히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박민정의 몸 상태로 산을 내려갈 땐 확실히 부축을 받아야 한다.하지만 다행히도 길은 평탄했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의 여관에 도착하게 되어 모두가 짐을 풀고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또 무슨 일 있어?”“오늘 그렇게 위험했는데 왜 절 구해주셨어요?”박민정이 그를 꼿꼿이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유남준이 정말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현재의 기억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그녀를 매우 혐오하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왜 몸을 바쳐 그녀를 구했단 말인가?박민정의 물음에 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솔직히 그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러니까 몸의 본능이 박민정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네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니 당연히 네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지.”유남준이 냉담하게 대꾸했다.그러자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그렇군요, 그럼 돌아가세요.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들어가 쉬세요.”“응.”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서다희가 그의 곁으로 와 그를 차에 태웠다.박민정과 민수아도 각자 집안으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부른 산부인과 의사들이 도착해 박민정의 건강을 체크해 주었는데 아이는 건강했고 그녀의 건강에도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의사들의 말을 몰래 듣고 있던 추경은은 그들이 떠나자마자 박민정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새언니,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잘할 테니 제발 저를 집에 보내지 말라고 오빠를 설득해주세요. 네?”추경은은 말을 이어가며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새언니, 그거 알아요? 저희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전 추씨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문의 어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제가 계속 유씨 가문에 빌붙기를 원했죠. 그런데 만약 제가 사촌 오빠에게 쫓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추씨 가문에는 더 이상 제 자리가 없을 거예요.”“그뿐만 아니라 추씨 가문에 있으면 제 사촌 오빠와 언니들이 분명히 저를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괴롭힐 거예요.”그녀는 계속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
“누군가 일부러 저를 깎아내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추경은이 박민정과 민수아에게 해명을 늘어놓았다.그러나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박민정도 곧바로 채널을 돌리고 민수아와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았다.이 상황에 추경은 혼자 무릎을 꿇고 있으니 그들의 공간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듯했고 그녀는 답답하고 달갑지 않았지만 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녀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추재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 건너편에는 그녀를 향한 욕설이 난무했다.“추경은, 남준이 돌보라고 보냈더니만 넌 김씨 가문에 가서 뭐 하는 거냐? 그리고 너 때문에 우리 추씨 집안 명성이 바닥이 났어.”추경은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간 후에야 답했다.“할아버지, 이건 모두 오해예요. 누군가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거예요.”“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결국, 네가 꼼꼼하지 못한 탓이지.”추재훈은 한없이 냉담했다.“죄송합니다, 할아버지.”“그렇다면 지금 남준이와 있는 건 어떠냐?”추재훈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지금 추씨 집안과 유씨 집안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게다가 두 집안의 실력 차이도 워낙 큰지라 추경은이 유씨 가문에 들러붙지 않는다면 그들 추씨 집안의 길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추경은은 차마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이 일은 너무 서두르면 안 돼요. 박민정이 아직 유씨 가문의 혈육을 품고 있잖아요.”추재훈도 자연히 이 도리를 알고 있다.“경은아, 할아버지가 너에게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좋은 때란 말이다. 박민정이 임신하고 있어야 네가 유남준에게 접근할 수 있지.”유남우는 이미 윤소현과 약혼을 마쳤다.그러니 유남우는 당연히 건드릴 수 없고 유남준은 달랐다. 그는 이제 눈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유씨 가문의 리더도 아니다.그렇다면 추은경의 미모라면 유남준의 환심을 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네, 알고 있습니
보고서에는 박민정과 한수민 사이에는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쓰여 있었다.박민정은 한번, 또 한 번 그 결과를 읽어보았다. 이미 한수민을 통해 여러 번 들은 이야기지만 막상 정말 확정을 받고 나니 저도 모르게 아찔해졌다.역시 모든 것이 틀리지 않았다...한수민은 정말 그녀의 친엄마가 아니었다.어쩐지 한수민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더라니...하지만 그렇다면 그녀의 친엄마는?보고서를 들고 있는 박민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박민정 씨, 괜찮으세요?”직원이 박민정의 표정을 살피며 살뜰히 물었다.그제야 박민정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목이 멘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몸을 돌려 병원을 떠나려 하자 직원들이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민정 씨, 우리 병원에는 온라인으로 가족을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민정 씨의 자료를 등록해놓으면 민정 씨 친부모님께서 인터넷에서 당신을 찾을 수도 있어요.”직원들은 박민정이 가족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여겨 제안을 건넸다.그러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한수민은 전에 그녀가 보육원에서 입양되었다고 말해주었다.그렇다면 박민정의 친부모는 그녀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얘기인데 어떻게 온라인으로 가족을 찾을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묵묵히 바깥 하늘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무거웠던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하필이면 이때, 밖에서 밥을 사 오던 간병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박민정을 만난 간병인의 눈빛 속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민정 씨, 어머니 보러 오셨죠?”어머니?어머니라는 세글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아니요. 아주머니께서 잘못 알고 계세요. 그분은 제 엄마가 아니에요.”물론 간병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박민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가씨, 사모님께서도 이제 정말 잘못을 뉘우치고 계세요. 어젯밤엔 잠꼬대하면서 계속 아가씨
간병인은 한수민에게 정성껏 음식을 차려주었다.“조금이라도 드세요.”한수민은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큰 죄를 짓지 않는 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한수민은 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포도당 수액을 맞으며 삶을 연명하고 있다.간병인은 오늘도 숟가락을 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한수민은 억지로 병상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그러자 간병인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고 밥상을 그녀의 앞으로 옮겨주기도 했다.“TV를 좀 보고 싶네요.”“알겠습니다.”간병인은 한수민에게 텔레비전을 켜주고 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댄스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옮겨주었다.한수민은 음식을 조금씩 먹으면서 TV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했다.“먼저 드시고 계세요.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래요.”한수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간병인이 떠난 뒤 한수민은 다시 TV에 시선을 돌려 나풀나풀 춤을 추는 젊은 무용수를 바라보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그때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지만 지금은...그 사이, 한 곡이 끝났다.한수민은 곧바로 윤소현의 최신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되었다.영상 속 진행자는 윤소현의 춤 솜씨를 연신 칭찬하며 고의인지 무의식인지 모르게 한수민을 언급하게 되었다.“윤소현 씨, 새어머니가 국제적으로 유명한 무용가였다고 들었는데 당신이 오늘의 성취를 이룬 것도 어머니의 공이 있지 않을까요?”그러나 윤소현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색이 좀 언짢아졌다.“제가 오늘날 이룬 모든 건 친어머니인 정수미 씨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줄곧 무슨 일을 하든 그 결과는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끈기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도리를 가르쳐 주셨죠.”윤소현이 한수미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욱 괴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사실 윤소현이야말로 그녀의 친딸이다.한수미의 마음은 더없이 답답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불효녀를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한수미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하고 부드러운 노래가 실내에 울려 퍼지고 윤소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 곡은 아직 가사도 없고 사람의 목소리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음악이다.그러나 단순한 음악인데도 불구하고 깊숙이 빠져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곡 대부분을 듣고 나서야 윤소현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이 곡이 박민정이 쓴 곡이라고? 말도 안 돼.”처음에는 박민정이 좋은 곡을 써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좋은 곡임을 부정할 수 없어지자 그녀는 또 박민정이 이 곡을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했다.“몰라요. 표절일 수도 있고 작곡가를 매수했을지도 모르죠.”매니저가 윤소현의 말에 동참했다.“당장 가서 알아보고 같은 장르를 찾으면 알려줘.”박민정이 쓴 곡이 히트 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었다.“예.”매니저가 떠난 후에도 윤소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또 돈을 주고 2위에 놓여 있는 곡에 모든 데이터를 쏟아부으라고 분부했다.박민정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얼마를 써도 아깝지 않았다....같은 시각, 박민정도 집에 돌아가 대회 실시간 상황을 눈여겨보았다. 현재 그녀의 곡이 다운로드 재생 수와 청중들의 평점이 가장 높다.하지만 처음에는 그녀와 2위의 격차가 매우 컸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격차가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2위 곡을 들어봤지만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하여 박민정은 더 이상 인터넷 순위를 보지 않았고 그저 혼자 쉬면서 오늘에 있었던 일들을 소화했다.이제 그녀는 자신이 한수민의 딸도 아니고 박씨 가문 아가씨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박민정은 더욱 답답해졌다.밖에는 언제부터 내린 것인지 큰비가 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때, 입구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 나가보니 문밖에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은 우산도 없이 걸어 나갔다.눈앞의 가정부는
통화가 연결되고 전화 건너편에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추경은 씨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대요. 그래서 병원비를 내달라고 부탁하더군요.”박민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해주었다.추씨 집안과 박민정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그리고 박민정과 추경은은 더더욱 아무런 혈연이 없으니 이 일은 자연히 유남준에게 맡기면 된다.“알았어. 사람을 보내서 처리하도록 할게.”“네.”박민정이 전화를 끊었다.병원 안.병상에 누워있는 추경은은 정말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 집에 남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번에는 하마터면 정말 저승사자와 만날 뻔했다.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추경은이 힘겹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보았지만 찾아온 사람은 뜻밖에도 서다희였다.“새언니는요?”추경은이 잔뜩 갈라진 입술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병원비를 지급하는 것 뿐인데 사모님이 직접 오실 필욘 없죠.”그녀를 대하는 서다희는 유난히 차가웠다.대표님을 대신해서 추경은이 정말 교통사고를 당한 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것인지 확인해보러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교통사고는 진짜였던 모양이다.추경은은 오른쪽 다리에 깁스하고 있었는데 보름 내에는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할 듯했다.“아.”박민정이 오지 않았다는 말에 추경은은 눈에 띄게 실망한 눈치였다.“혹시 사촌 오빠도 알게 된 거예요? 그럼 사촌 오빠에게 전해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이곳에서 치료받다가 몸이 좋아지면 집에 돌아갈게요. 그리고 앞으로 절대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만약 추경은의 정체를 몰랐다면 서다희도 아마 그녀의 불쌍한 모습을 정말 믿었을 것이다.서다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와 병원비와 입원비 등을 모두 지급하고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방금 치료기록을 훑어보았는데 가짜가 아닙니다.”“그럼 간병인을 불러서 그녀를 돌보게 하도록 해.”어쨌든 추씨 집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민재가 아니라 유남우였다.홍주영은 순간 얼어붙었다.“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유남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별일 아니야. 네가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와봤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했다.홍주영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는 걸 확인했다.“죄송해요. 오늘 오후 바빠서 폰을 무음으로 해뒀거든요. 그래서 확인을 못 했어요.”유남우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컵이 눈에 들어왔다.“누가 왔었어?”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묻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오늘 남자 친구 가족을 만나고 왔어요.”‘남자 친구 가족...? 벌써 부모님을 만난 건가?’“언제 그렇게 됐어? 상대는 누구야?”유남우는 모르는 척 물었고 이 말에 홍주영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하민재 씨예요.”‘역시, 그놈이었군.’유남우는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애써 감췄다.“그때는 사귈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나?”“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어요.”홍주영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어쩐지 유남우 앞에서는 괜스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더 이상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도련님 오늘 저한테 왜 연락하신 거예요?”“별건 아니고, 전에 고 대표 건 홍 비서가 맡았지? 그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나중에 혼자 찾았어.”“아... 찾으셨군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업무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유남우는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물맛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괜찮아. 이제는 홍 비서 일도 중요하니까. 홍 비서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됐겠지.”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 안에 앉아 있던 유남우는 여전히 홍주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그는 무심코 넥타이를 당겼다.또다시 10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차가운 자동 응답음뿐이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가슴 한구석이 더 답답해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지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운전해.”운전기사가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모르겠어. 그냥 아무 데나 가.”“네.”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한편, 홍주영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씨 가문의 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하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하민재는 벌써 그녀를 미래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어때요? 불편한 점은 있어요?”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없어요. 할머니도 너무 좋으시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그때 하민재가 갑자기 등 뒤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자, 받아요.”“이게 뭐예요?”홍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하민재는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었다.“열어봐요. 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에게 주시는 첫 선물이에요.”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장신구 세트가 들어 있었다.아니, 단순한 ‘고풍'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 예물이었다.하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를 인정하신 거예요. 이건 우리 집안의 며느리만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홍주영은 너무 놀라 얼른 상자를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었다.“이건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왜 못 받아요?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결혼'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결혼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잖아요. 아직은 너무 일러요.”결혼 이야기가 나온 이상, 섣불리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저는 남준 씨가 동서를 못마땅해하던 시절도 지켜봤어요. 그 삼 년 동안 동서는 정말 처참했죠. 아무도 동서를 사모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어요.” 최현아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나는 동서가 영영 남준 씨랑 화해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동서는 정말 너그럽네요.”유남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으나 최현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도련님께서 돌아오기 전에 전 이미 동서한테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동서는 그때 이미 남준 씨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유남우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거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최현아는 입을 다물었다.유남우는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서 걸어갔고 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유남우는 유남준이 잘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두 형제가 어떻게 싸울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유남우는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는 홍주영이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가 타자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도련님.”“응, 회사로 가자.”“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녀는 확인하지 않았고 유남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왜 메시지를 안 봐?”홍주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메시지라 굳이 볼 필요 없어요.”그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건 하민재였다. 둘은 이제 화해하고 교제하기로 했는데 하민재는 예상외로 틈만 나면 연락을 해왔다.“괜찮아. 지금 업무 시간도 아닌데.” 유남우는 부드럽게 말했다.“네.”홍주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어 하민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그는 오늘 오후에 그녀를 하씨 가문에 초대했다. 할머니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홍주영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유남우에게 말했다. “도련님, 오늘 오후에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요.”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
그가 고개를 숙이며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박민정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리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덕분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고 말았다.둘의 시선이 엉키며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유남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치우려 하자 박민정은 급히 외쳤다.“안 돼요!”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의 동작이 멈췄다.“저... 저 갑자기 기억이 난 것 같아요.”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정말?”“네! 어제, 아마도 음료에 술이 조금 섞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박민정은 얼굴이 불타오를 듯이 새빨개졌으나 유남준은 오히려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당연한 거야. 너도 결국 참지 못한 거잖아.”“뭐라고요?” 박민정은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뭘 참지 못했다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찬이랑 윤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박민정은 아이들이 밤새 자신을 찾아다니다 놀랐을 걸 생각하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좋아. 아침 먹고 바로 돌아가자.”그의 기분은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였다. 돌아가는 길 내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반면, 박민정은 그의 곁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 이미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을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참지 못한 거지?'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다.“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이건 걷는 문제랑 상관없어.”박민정은 그의 아내였다. 그는 그녀가 항상 그의 시야 안에 머물도록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유남준이 어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어제, 최현아가 너한테 뭘 하지 않았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