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랑의 기분이 순간 잡쳤다.“김인우 씨. 왜 추경은 씨는 도우라고 안 하는데요? 추경은 씨도 임신했어요?”김인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손님이잖아요.”“손님은 무슨. 민정이랑 유남준 씨 보살피러 왔다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가 보살피고 있는데요?”조하랑은 전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던 유남준은 시중을 들어도 추경은의 시중은 싫었다.“왜 그렇게 쪼잔하게 굴어요?”“내가 쪼잔하다고요?”조하랑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지금 기름 냄새를 견디면서 힘겹게 굽고 있는데 추경은은 멀지 않은 곳에서 꼬치를 든 채 벗꽃나무 아래에 앉아 온갖 교태를 부리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이에 반해 박민정은 임신했어도 식자재를 건네주고 텐트마다 모기약을 뿌려주고 있었다.조하랑은 민수아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수아야, 가자. 좋은 남자 코스프레는 혼자 하라지.”“응?”민수아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조하랑에게 끌려갔다.김인우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조하랑이 서다희와 정민기를 불렀다.“두 분도 인우 씨 돕지 마세요. 지금은 친구로 있는 거지 상하급 관계로 있는 거 아니잖아요.”“혼자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해야죠.”정민기는 김인우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서다희는 김인우에게 함부로 밉보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하랑은 지금 김인우를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막 대하고 있었다. 서다희는 그제야 왜 김씨 집안 어르신이 애도 딸린 조하랑을 며느리로 콕 집었는지 알 것 같았다.김인우처럼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간땡이가 크고 성격이 만만치 않은 와이프가 필요했다.“조하랑 씨, 이건 너무...”김인우는 참다못해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그때 박예찬이 김인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인우 삼촌, 할아버지가 전에 저한테 그러셨거든요. 만약에 삼촌이 하랑 이모 말 안 들으면 언제든지 알려달라고요.”“할아버지가 비행기 타고 오면 아마 1시간도 안 걸릴 것 같은데요.”이 말에 김인우는 일단 이빨을 숨길
“언니 어떻게...”추경은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뭘요? 내가 그 댁 식구라도 돼요? 추씨 가문과 유씨 가문과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 몰라도 김씨 가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 않나요? 정 마음에 안 들면 김인우 씨한테 찾아오라고 해요.”조하랑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여자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추경은은 조하랑이 매섭게 쏘아붙이자 말문이 막혔는지 박민정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새언니.”박민정이 친구를 두고 추경은을 도울 일은 없었다. 하여 못 들은 척 민수아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세 사람은 아예 추경은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추경은은 하는 수 없이 꼬치를 들고 남자들이 앉은 쪽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유남준에게 물었지만 유남준이 거절했다. 그러자 추경은은 포기하지 않고 서다희와 정민기에게로 향했다.“다희 오빠. 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요. 인제 그만 화 풀어요. 이건 내가 금방 구운 거예요.”서다희는 그런 추경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미안한데 이미 배가 다 차서요.”너무 민망했던 추경은이 정민기에게 건네주었다.“민기 씨, 먹을래요? 맛있어요.”“괜찮아요.”정민기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이에 추경은은 목표를 아이들에게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들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박윤우가 이렇게 말했다.“경은 이모, 우리도 싫어요.”추경은은 얼마를 가져갔으면 그대로 다시 가져갔다.김인우도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다 먹었대? 우리 더 구워? 말아?”“괜찮아. 더 굽지 뭐. 저녁에 야식으로 먹어도 되잖아.”추경은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김인우가 추경은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왜?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추경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뚝뚝 떨궜다.“오빠,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다들 나 싫어하는 것 같아. 다들 나 쪽 주고 왕따시키려 들어.”이 말에 김인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말했다.“에이, 착각한 거 아니야?”“만약에 사람들이 다 너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거라면 네가 뭘 잘못한 건 아닌지 고민해
추경은이 갑자기 카메라 앞에 나타나 시청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안녕하세요.”댓글이 터지기 시작했다.[윤우 도련님, 이 예쁜 언니는 누구야?][예찬 도련님, 이제 우리는 뒷전인 거야?][엄청 예쁜데?]댓글은 칭찬으로 가득했다.추경은이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저는 예찬이의...”“우리 집 가사 도우미에요. 엄마 배 속에 동생이 생겨서 엄마를 보살피러 온 이모에요.”박윤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추경은의 말을 잘라버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추경은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뭐? 가사도우미?’비록 박민정과 유남준을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오긴 했지만 가사 도우미라고 불리긴 싫었다. 그것도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 앞에서 말이다.추경은이 라이브 화면을 쓱 훑어봤다. 시청자가 족히 800만은 넘었다.라이브 화면에 댓글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아, 가사도우미였구나. 역시 예찬이는 타고나길 도련님이라니까. 어떻게 가사도우미까지 이렇게 예뻐?][근데 예찬 도련님 엄마가 더 예쁜 것 같지 않아? 가사 도우미는 어리기만 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그러네. 임산부를 돌보려면 좀 나이 많고 경험도 많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언니는 애도 안 낳은 걸로 보이는데?]추경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얼굴이 망가진 늙은 여자랑 나를 비교해? 그것도 나보다 예쁘다고?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박윤우도 당연히 추경은의 기분이 잡쳤다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추경은에게 물었다.“이모, 우리 엄마 보살펴주러 가야죠.”추경은이 멈칫하더니 말했다.“그래, 지금 바로 가야지.”추경은이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라이브 시청자는 여자가 대부분이었기에 한눈에 추경은이 좋은 물건은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는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 도련님, 조심해. 아빠한테 가사 도우미 좀 바꿔 달라고 해.][그래. 바꾸는 게 좋아. 아무리 봐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 같아.]시청자들은 어린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돌려서 말했다.하지만
텐트는 총 5개가 있었다. 정민기 하나, 김인우 하나,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아이들 하나, 민수아와 서다희 하나, 조하랑 하나 이렇게 모두 5개였다.다들 텐트로 돌아가 잠을 청하려 하자 추경은이 김인우의 팔을 잡고는 말했다.“오빠, 나는 텐트가 없어.”“산으로 캠핑 오면서 텐트도 안 가져왔어?”김인우는 이제 슬슬 어이가 없었다. 하필 이때 비가 조금씩 떨어졌다.다른 사람은 이미 텐트로 들어간 상태였다. 어두운 불빛 아래 추경은만 김인우의 팔을 잡은 채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산에 파는 거 있는 줄 알고 안 가져왔어.”김인우가 이를 듣더니 추경은을 데리고 조하랑의 텐트로 향했다.조하랑은 오늘 캠핑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남포등까지 켜둔 상태였다.남포등에 불을 붙이자마자 텐트 지퍼가 열리고 김인우의 잘생겼지만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얼굴이 나타났다.“용건 있어요?”조하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김인우가 조하랑의 핑크색 텐트를 빙 둘러봤다. 크지는 않았지만 여자 둘이 지내기엔 문제없을 것 같았다.“경은이가 잘 곳이 없다는데 같이 자요.”“네?”조하랑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추경은이 김인우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언니. 밖에 비 내리는데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조하랑은 정말 자기가 무림 고수가 아닌 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만약 그녀가 무림 고수였다면 겁도 없이 덤비는 김인우와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는 추경은을 같이 뻥 차버렸을 것이다.“나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추경은 씨가 어디서 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김인우 씨랑 같이 자도 상관없으니까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마요. 부정 타니까.”처음 만난 사람과 같이 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추경은은 오늘 알게 모르게 그녀를 여러 번 깎아내렸기에 조하랑은 지금 약이 잔뜩 올라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같이 잔다면 아마 화병 나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김인우는 조하랑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다.“싫으면 싫은 거지 왜 화를 내고
“추경은, 어르신께서 너에게 자중이 뭔지 가르쳐 주신 적 없어?”유남준이 얇은 입술로 입을 열었다. 그의 가벼운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날카로운 칼날과 같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그리고 추경은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남준 오빠, 이건 오해예요.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유남준이 그동안 그녀의 만행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추재훈의 체면을 생각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보니 이 여자는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그런 뜻이 아니라면 더 조심했어야지.”다른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막상 자신이 좋아하던 유남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추경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자신이 성급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추경은이 다급하게 해명을 늘어놓았다.“미안해, 오빠, 그리고 새언니. 부모님이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어. 정말 미안해. 오늘 밤은 내가 밖에서 당신들을 위해 밤을 지새울게. 나 오늘 안 잘 거야.”그렇게 말을 마치고 추경은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마치 박민정이 그녀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박민정은 추경은의 뻔뻔한 태도에 감탄하며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유남준이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물었다.“어디 가?”“잠깐 나가보려고요.”“밖에 비 와. 나가지 마. 별로 볼 것도 없어.”“비가 온다고요?”손을 뻗어보니 과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유남준은 비록 앞을 볼 수 없지만 청력은 일반인보다 더 좋아진 모양이다.하지만 유남준과 달리 박민정은 줄곧 보청기에 의지하고 있다. 손끝에 닿은 빗물을 느끼며 고개를 내밀자 김인우 앞에 서서 흐느끼며 무언가를 하소연하고 있는 추경은이 눈에 들어왔다.이미 자리에 누운 박윤우와 박예찬 두 형제는 방금 유남준이 추경은을 쫓아내는 것을 보며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더 상승했다.“정말 비가 오네요. 이만 자요.”박민정이 가장자리에 누웠다.그리고 두 아이는 두 사람 사
이쯤 되니 김인우는 진심으로 추경은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진주산 정상은 도심에서 한 네댓 시간 거리 떨어져 있는데 인제 와서 사람을 불러오라니...김인우가 추경은을 떠나보내려고 하는 그때, 조하랑이 램프를 들고 텐트 밖에 나타났고 그녀의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어리둥절한 김인우가 물었다.“어르신께서 전화하셨어요.”“할아버지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합니까?”그러나 조하랑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추경은도 곁에 있는 것을 보아 말을 꺼내기 난감해져 김인우에게 눈짓했다.“무슨 일입니까, 그냥 말씀하세요.”그러자 조하랑도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어르신께서 인우 씨가 왜 제 텐트 안에서 저와 함께 자고 있지 않냐고 물으셨어요.”순간 난처해진 김인우가 추경은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먼저 나가주면 안 될까?”“알겠어.”추경은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반강제로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그냥 말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난처해지니까 사람을 내보내?“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또 뭐라고 하셨어요?”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김인우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훈이었다.“예찬이가 곁에 없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저희와 얘기 좀 나누재요. 그래서 저희더러 먼저 함께 누워있으라고 하셨고요...”“이 늙은 영감탱이가 진짜.”김인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러나 조하랑도 어쩔 수 없었다.어르신은 정말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 주셨고 그동안 어딜 가든 항상 맛있는 먹거리와 재밌는 물건을 선물해 주시곤 했다.게다가 그저께 경매에 나갔는데 조하랑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사기 위해 역대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해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정말 친할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어서 받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께서 또 이상한 생각 하시겠어요.”그 말에 김인우도 마지못해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것이냐?”핸드폰 저 너
같은 시각, 바깥에 쫓겨난 추경은은 추위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라는 김인우의 답이 없자 초조해진 추경은이 참다못해 김인우의 텐트 앞으로 걸어갔지만 텐트의 지퍼가 모두 안에서 닫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램프까지 꺼진 것을 보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추경은이 발을 동동 굴렀다.하지만 조하랑이 이곳에서 자고 있다는 건 추경은에게도 남은 텐트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여 그녀는 재빨리 그 텐트를 찾아 안으로 쏙 들어갔다.침낭을 가져오지 않았더니 산이 엄청 추워요.추경은은 텐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몇 벌로 겨우 몸을 녹일 수 있었다.살면서 정말 오늘처럼 비참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하필이면 옆 텐트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다름 아닌 서다희와 민수아였다.“젠장...”이에 추경은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한편, 박민정은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두 아이를 재우고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바깥에는 매서운 바람이 윙윙 휘몰아쳤고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이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침낭 안에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이리저리 뒤척였다.“이리로 올래?”유남준이 갑자기 말을 건넸다.“네?”유남준 역시 박민정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먼저 제안을 건넸다.“와서 내 옆에서 자.”“싫어요.”그러나 박민정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유남준도 별로 권하지는 않았다.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고, 2분, 10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박민정이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남준 씨, 자요?”“아직.”“남준 씨도 무서운 거예요?”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무서워하지 마세요. 세상에 귀신은 없어요.”유남준은 그녀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위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박민정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원래는 무섭지 않다고
확인해보니 조하랑이 묵고 있는 텐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아직 그 텐트 안에 있는 사람이 추경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박민정이 있다는 것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하랑아, 왜 그래?”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추경은이었다.추경은은 놀란 눈으로 텐트 안을 가리키며 황급히 말했다.“안에 뱀이 있어요.”그녀의 비명소리에 다른 텐트 안의 사람들도 잇달아 깨어났고 하나둘 텐트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입니까?”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정민기였다.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일찍 일어났을 텐데도 다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을 보고 텐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러자 추경은은 박민정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정민기를 향해 달려갔다.“민기 오빠, 텐트 안에 뱀이 있어요.”물론 박민정도 추경은의 이런 행동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는 어젯밤 조하랑이 선심을 써 추경은과 함께 묵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추경은이 뛰쳐나왔다면 조하랑은 아직 안에 있다는 말인데 만약 뱀에게 물리면 어떡한단 말인가?“하랑아.”박민정이 텐트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그러나 조하랑은 안에 없었고 지퍼를 열자마자 텐트 안의 맹독성 우산뱀만 한눈에 보일 뿐이다.그녀는 곧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서더니 재빨리 텐트 지퍼를 다시 잠가버리고 추경은을 돌아보며 물었다.“하랑이는요?”그러나 추경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조하랑이 얼굴을 붉히며 김인우와 함께 그의 텐트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민정아, 내가 설명할게. 우리 둘 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그러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렸다.“설명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엄연히 약혼 사이인데 같이 자는 건 정상이잖아.”그 순간, 조하랑이 김인우의 발을 콱 밟아버렸다.바깥 기척에 잠이 깬 서다희와 민수아도 텐트 안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무슨 일이에요?”민수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조하랑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텐트 안을 가리켰다.“안에 독사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