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전화를 받았다.유남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이제 시간이 났나 보지?”박민정은 유남준의 말이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했어요?”“지금 당장 해운 별장으로 와.”유남준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유남우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걸어 나왔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박민정을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침은 먹었어? 내가 바래다줄까?”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에요. 저 혼자 가면 돼요.”이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또 유남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그제야 떠났다.파라다이스 밖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박민정은 한참 동안 기다려서야 택시를 잡았으며 기사님더러 해운 별장으로 가달라고 했다.유남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박민정은 그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았다.해운 별장 내, 강연우가 도착한 후 이혼 합의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박민정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별장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서다희는 문 앞에 선 채,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한눈에 유남준의 옆에 서 있는 강연우를 알아보았다.‘이 남자가 여기에 왜 왔지?’강연우가 말없이 떠나는 바람에, 조하랑은 그를 몇 해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엔 그는 돌아온 후,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박민정은 그런 강연우에 대해 정말 일말의 호감도 없었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강연우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하고는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남준 씨, 저를 왜 불렀어요?”유남준은 말없이 바로 전에 작성된 합의서 초안을 박민정 쪽으로 밀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읽어봐. 별문제 없으면 사인해.”박민정은 합의서를 보려고 한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서다희가 낮은 소리로 콜록 기침하였다.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한눈 보고는 또다시
유남준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박민정의 팔목을 다시 붙잡았다.“박민정!”유남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내가 어떻게 하면 이혼해 줄 건데?”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이 손 놔요! 나는 예찬이랑 윤우, 배 속의 아이만 있으면 된다고요!”박민정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남준 씨가 아이들의 양육권을 포기한다면 바로 이혼서류에 사인할게요.”유남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지금 나랑 장난해? 유씨 가문의 아이들을 당신이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아?”유남준의 손등에는 지난번에 물었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박민정은 개의치 않고 더 세게 물었다. 유남준은 깜짝 놀라더니 박민정의 머리를 누르며 소리쳤다.“이거 못 놔?”‘개도 아니고 왜 자꾸 물어뜯는 거야!’박민정은 피가 나는 걸 확인하고는 놓아주었다.“장난치는 건 내가 아니라 남준 씨 아닌가요? 내가 낳은 아이를 당신이 왜 데려가는 건데요!”박민정이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유남준을 발로 찼을 것이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박민정은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여자이기에 유남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재판까지 가보겠다는 뜻이야?”박민정은 얼음처럼 차가운 유남준의 목소리를 들고서야 정신이 들었다.‘유남준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기억을 잃어도 넌 여전히 나쁜 놈이야!’“뜻대로 하세요. 절대 물러날 생각 없거든요.”박민정은 아이들을 떠올리며 불안해했다.‘변호사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야. 그래도 승소할 수만 있다면 우리 예찬이랑 연우를 지킬 수 있어.’“재판장님이 바람나서 아이들을 방치한 엄마의 편을 들어줄 것 같아?”유남준의 말은 비수가 되어 박민정의 가슴에 꽂혔다.“내가 바람났다고요?”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증거있어요? 내가 언제…”“어제 외박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널린 게 증거야!”유남준이 말을 이었다.“유남우가 그렇게 좋으면 이혼해 줄게. 이혼하고 나서 유남우가 윤소현과의 혼약을 취소할지는 모르지…”퍽!방 안에 소
더욱 화가 난 박민정은 해운 별장을 나갔다. 어제 자신이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열이 펄펄 오르더니 결국 쓰러졌고 박민정을 발견한 유남우가 데리고 갔다.박민정은 이곳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유남준은 되레 박민정한테 이혼서류를 내밀었고 박민정을 바람난 여자라고 모함했다.유남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남우가 왜 박민정을 데리고 갔는지 묻지 않았기에 박민정은 더욱 억울했다.‘남준 씨가 아픈 건 알지만 판단력을 잃을 정도로 머리를 다친 건 아니잖아.’이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줄 알았으나 발신자는 유남우였다. 박민정이 전화를 받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에 도착했어?”박민정은 유남우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했다.“그럼요.”“알겠어.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왜 혼자 추모 공원에 쓰러져 있었던 거야?”사실 유남우는 어젯밤에 무슨 상황인지 조사했었기에 알고 있었다.“몸살 때문인가 봐요.”박민정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자 유남우는 박민정이 예전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던 그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유남우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푹 쉬어. 너무 무리하지 마.”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요즘 휴가 내려고 했었어요.”“그래.”전화를 끊은 유남우는 마음이 아팠다. 유남우 기억 속의 박민정은 어릴 적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려주던 사람이었다.‘알려주지 않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나 봐.’한편 유남준의 주치의 오진욱은 해운 별장에서 유남준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누가 대표님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오진욱은 유남준의 방에서 나오더니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유남준이 머리를 다친 건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서다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사모님이에요.”오진욱은 한참 동안 멍해 있더니 박민정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계속해서 물었다.“어떻게 때렸는데요?”서다희는 유남준의 아랫사람한테는 친절한 편이었기에 직접 꽃
서다희가 말을 이었다.“어제 사모님께서 한수민을 보러 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중이에요.”유남준은 생각에 잠겼다.‘내가 정말 민정을 오해한 걸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꽃병으로 내 머리를 내리친다는 게 말이 돼?’“민정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두원 별장으로 간 것 같아요.”유남준은 밀려오는 두통을 참으며 말했다.“쉬고 싶으니 이만 나가봐.”“강 변호사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혼은 빨리할수록 좋잖아요.”눈치 없는 서다희의 말에 유남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돌려보내.”“알겠어요.”서다희가 나간 뒤, 유남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고민 끝에 일어나 방문을 열자 서다희와 마주쳤다.“두원 별장으로 가자.”서다희는 유남준이 기억을 잃어도 박민정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네. 차 대기시킬게요.”진주시의 하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흐려지더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남준이 두원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이라도 큰비가 내릴 것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차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 멈추었고 유남준은 차에서 내렸다.“남준 오빠, 왔어?”추경은의 목소리를 들은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민정이는 어디에 있어?”박민정부터 걱정하는 유남준의 말에 추경은은 미간을 찌푸렸다.“새언니 정말 이상하다니까? 어젯밤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더니 오늘 집에 돌아오자마자 짐부터 싸는 거야.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내가 상관할 바 아니래.”추경은이 말을 이었다.“남준 오빠, 새언니 너무 건방진 것 같아. 은근히 유씨 가문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예의가 없어.”유남준은 추경은의 말을 무시한 채 서다희한테 지시했다.“민정이한테 전화 걸어.”“네.”서다희도 추경은을 없는 사람 취급하자 추경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한참 후에야 박민정이 전화를 받았다.“서 비서님, 어쩐 일이세요?”박민정은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돌아가서 민수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사모님, 지금 어디에
박윤우는 박민정을 따라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향하면서 의문이 들었다.“엄마, 왜 여기로 온 거야?”박민정이 박윤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곳도 우리 집이니까 온 거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세 낡아버리거든.”“그럼 아빠는 언제 오는데?”박윤우가 말을 이었다.“아빠가 보고 싶어.”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빠는 아파서 당분간 못 올 거야. 다 나으면 같이 지내자.”박윤우는 박민정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쓰레기 아빠가 또 엄마를 화나게 했나 봐.’박윤우가 뒤로 누우며 말했다.“아빠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 네 식구 함께 캠핑 갈 수 있잖아.”며칠 전, 박민정과 박윤우가 통화할 때 같이 캠핑하러 가서 산책도 하고 재밌게 놀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박민정은 아무 말 없이 박윤우를 끌어안았다.‘나랑 이혼하겠다는 유남준과 무슨 캠핑을 가… 마주 보고 밥 먹는 것조차 싫어하겠지.’박윤우가 곤히 잠들자 박민정은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힌 뒤, 박윤우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스마트워치를 꺼내 이불속에 숨어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쓰레기 아빠가 기억을 잃어서 실수했나 본데… 이럴 땐 내가 도와줘야 해.’유남준은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받았더니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쓰레기 아빠.”유남준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문뜩 아들이 생각났다.‘윤우가 어떻게 나한테 전화를 걸었지?’“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유남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박윤우는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또 엄마랑 싸운 거예요? 우리 지금 외할아버지가 지내셨던 집에 왔어요.”유남준은 이번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박민정을 바람난 여자로 몰아갔고 이혼서류에 사인하라고 협박했었던 것이다.“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일 해결할게.”유남준의 말을 들은 서다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내일 해결한다고? 대표님, 사모님한테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박민정은 박윤우와 민수아를 위해 직접 아침을 차렸다.민수아가 씻고 나오더니 식탁 위에 놓인 모닝빵, 해물 죽, 노릇노릇한 계란 프라이와 만둣국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민정아, 이거 네가 직접 만든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얼른 와서 먹어봐.”“아침부터 진수성찬이라니… 너무 행복해.”박윤우도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왔고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은 아침을 먹었다.“민정아, 내가 매일 늦게 일어나서 아침이라고는 출근길에 먹는 삼각김밥이 다였어.”하지만 지금은 돈을 얼마 들이지도 않고 큰 별장에서 지낼 수 있었고 친한 친구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아주 기뻤다.“저녁도 맛있는 걸 차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고마워. 일찍 퇴근하고 와서 도와줄게.”박민정은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 것이 아니었다. 유남준을 위해 요리를 배웠는데 유남준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행복했었다.하지만 유남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아도 이렇게 기쁠 수가 있고 삶의 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엄마, 수아 이모! 저도 같이 할래요.”박윤우의 말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었다.“그럼 오늘 다 같이 요리해 보자.”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센서 소리에 박민정이 인터폰 앞으로 다가가자 별장 앞에 여러 대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내가 나가볼게.”민수아와 박윤우는 슬리퍼를 신고 나가는 박민정을 따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뒷좌석이 꽃으로 가득 찬 스포츠카가 여러 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 박윤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빠 철들었네.’스포츠카에 앉아 있는 보디가드들은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뒷좌석에 놓인 꽃다발을 차례대로 별장 문 앞에 배열해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민정이 다가가 물었다.“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죠?”“사모님, 유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꽃다발입니다.”보디가드가 배열해 놓은 꽃다발은 제사를 지낼
유남준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내가 언제 당신을 저주했다고 그래?”박민정이 죽길 원하는 사람이 단순히 저주만 할 리 없었다.“남준 씨가 보낸 꽃은 하얀색과 노란색이더군요. 그런 꽃들을 집 문 앞에 배열해 놓는 건 저더러 죽으라는 뜻이 아닌가요?”박민정은 임신해서 그런지 감정 기복이 심했다. 하지만 하얀색 꽃과 노란색 꽃은 제사를 지낼 때 많이 사용되는 꽃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박민정은 화가 솟구쳐 올랐다. 예민해서 호의를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박민정은 민수아한테 물었다.“수아야,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걸까?”민수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 안개꽃은 그렇다 쳐도 누가 국화를 선물로 준다고 그래!”“화내면 나만 손해야. 됐어, 신경 쓰지 않을래.”박민정은 심호흡하면서 어릴 적 우울증을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한 대로 천천히 화를 삭였다. 박민정은 박윤우를 먼저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유남준한테 따질 생각이었다.정민기는 별장 앞에 차를 대기시켰고 박민정은 박윤우를 차에 태우면서 당부했다. 박윤우는 들어가려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아빠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니까 화내지 마.”“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박민정은 박윤우를 달래며 손을 흔들었고 차가 멀어질 때쯤, 유남준한테 전화를 걸었다.“서 비서가 곧 갈 거야.”조금 전 유남준은 서다희한테 당장 박민정의 별장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었다.“서 비서가 여길 왜 오는데요? 또 이혼서류에 사인하라고 보낸 건가요?”“어제 일은 내가 당신을 오해했어.”유남준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당신이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지금처럼만 있어 준다면 이혼할 생각 없어.”몸살이 다 나은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예전에 어쩌다가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유남준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문제의 화살을 박민정한테 돌리면서 자신과는 아무 상관
서다희가 박민정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사모님. 이 꽃들은 대표님께서 어젯밤에 저한테 부탁한 거예요.”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쪽에 있던 민수아가 목청을 높이며 물었다.“혹시 복수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서다희는 목소리를 낮추어 민수아한테 말했다.“그런 거 아니니까 가만히 좀 있어. 나 일하는 거 안 보여?”민수아는 화가 나서 말했다.“일을 이 따위로 한다고? 감히 민정이한테 이런 꽃을 선물해?”민수아는 한 그룹의 대표가 어떻게 아내에게 이런 꽃을 선물하냐고 어이없어했는데 알고 보니 민수아의 약혼자 서다희가 고른 꽃이었다. 서다희는 예전에 민수아한테 자신이 유남준의 비서실장이라고 자랑도 했었다.“어제 너무 피곤해서 수하한테 맡겼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민수아는 서다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말했다.“지금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수아야, 날 몰아세우지 마. 넌 내 여자 친구잖아.”서다희는 민수아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편드는 거야?’사실을 알게 된 박민정은 그제야 화가 풀렸고 두 사람을 말렸다.“오해였다는 걸 알았으니 두 사람 다 그만해요.”서다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죄송해요. 나머지 꽃다발을 다 버리라고 할게요.”이때 박민정이 입을 열었다.“잠깐만요. 버리면 너무 아까우니 꽃잎을 반신욕 하는 데 쓸게요.”그러자 서다희가 대답했다.“그럼 더 좋고요.”민수아는 박민정의 기분이 나아져서 다행이라고 여겼다.“민정아, 저녁에 같이 반신욕 하는 거 어때?”박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좋아.”두 사람의 말을 들은 서다희는 반신욕을 하는 민수아의 모습을 상상했다.‘수아를 다시 데리고 올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서다희는 떼어낸 꽃잎을 다 정리한 뒤에야 해운 별장으로 향했고 가는 길에 수하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사모님이 한수민을 만나러 간 날 병실을 지키던 간병인한테서 들었는데요, 한수민은 사모님이 자신의 친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