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길입니다.”운전기사가 대답했다.유남준의 기억대로라면 단양길에는 차도 사람도 드문 편이다.그러한 점을 감안하여 유남준은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따라가.”“네.”실은 몇 년 전에 단양길이 속해 있는 이쪽 구역을 호산 그룹에서 도맡아서 상업 거리로 탈바꿈해 버렸다.인적이 드문 예전과 달리 지금은 북적북적한다는 말이다.차에서 내린 박민정은 급히 처리할 일도 없고 하여 온 김에 둘러보기로 했다.마침 계절도 바뀌게 되고 하니 박윤우와 박예찬에게 새 옷을 사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많은 이들이 자기 쪽을 향해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얼굴에 흉터를 보고서 다들 수군거리는 줄 알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멀지 않은 곳에 승합차 한 채가 내내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승합차는 7, 8미터 정도 되고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의 차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박민정은 유남준이 홧김에 이미 가버린 줄 알았는데, 내내 뒤에서 쫓아올 줄은 몰랐다.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선 박민정은 심호흡을 한번하고서 승합차를 향해 걸어갔다.다가오는 그녀를 보고서 운전기사는 당황해 마지 못했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유남준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윽고 박민정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운전기사는 차창을 내려주었고 박민정은 뒤에 있는 유남준을 바라보면서 언짢아했다.“대체 뭐 하려고 따라오는 거예요?”“나 지금 임신한 몸이라 정서 파동도 꽤 심한 편이에요. 싸우고 싶으면 남준 씨가 내려와요. 내려와서 싸우자고요.”“...”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그냥 박민정 홀로 이 거리를 걷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 뒤에서 지켜주고 있었던 것뿐인데 말이다.하지만 임신한 걸 감안하여 유남준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타, 두원으로 바래다줄게.”병 주고 약 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유남준이다.먼저 차로 강제로 끌고 올라와서 한바탕 모욕을 주더니 인제 집으로 바래다주
갑자기 뒤에 나타난 차를 보고서 민수아는 적지 않게 놀랐다.이윽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서다희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여긴 왜 왔어? “의혹투성이인 두 눈으로 서다희는 민수아에게 물었다.“수아야, 너 여기서 지내는 거야?”민수아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근데 그게 왜?”“어떻게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거야?”“내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민수아는 자기와 박민정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서다희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수아야, 여기는 박씨 가문 옛 저택이야. 절대 내놓을 리가 없다는 말이지. 너 누구한테 속은 거 아니야?”민수아가 누군가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불법으로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민수아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사기를 친 것이라면서.민수아는 그 말을 듣고서 진상을 털어놓았다.“걱정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민정이가 나한테 빌려준 거야.”‘민정이?’서다희는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박민정 씨 그러는 거야? "“그래.”민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서다희는 아직 추경은과 밥을 먹었었던 그날의 일에 박민정 역시 연관되어 있음을 생각지도 않았었다.단지 민수아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나랑 민정이 친구야.”서다희는 도저히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며칠 못 본 사이에 약혼녀가 자기 회사 대표님의 아내와 친구가 되었으니 말이다.다른 이들이라면 좋아서 방방 뛸 지도 모른다.하지만 서다희는 그렇지 않다.유남준과 박민정 사이의 러브 스토리가 하도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이다.“수아야, 박민정 씨 사람은 괜찮은데 우리하고는 신분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래서 난 네가 박민정 씨와 만나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걸 바라지 않아.”“우리 신분이 어때서? “민수아는 지금 갈수록 그의 말에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두 사람에게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박민정은 경비실로 몸을 숨겼다.경비원은 갑자기 들이닥친 박민정을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사모님, 괜찮으세요?”“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네.”박민정은 그에게 정문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켜달라고 부탁했다.이윽고 박민정은 화면을 뚫어지게 지켜보기 시작했다.문 앞에서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던 서다희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추경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다희 오빠.”추경은은 서다희를 향해 수줍은 듯 종종걸음으로 달아갔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서다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게 되었다.추경은에게 그 어떠한 호감도 없는 모습으로.“경은 씨, 그냥 서 비서라고 불러주시죠.”추경은은 그 말에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왜 그러는 거예요? 그 여자 때문에 나한테 화난 거예요?”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추경은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면서 세상 가녀린 척을 했다.“미안해요. 그만 화 풀어요. 그 여자한테는 제가 가서 직접 사과할게요.”“사과는 왜 하는 거죠?”서다희가 물었다.그러자 추경은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우리 사이 오해했잖아요... 그래서 사과하려고요...”서다희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녹음을 털어놓았는데, 지금과는 정반대인 추경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오늘 다희 오빠랑 왜 사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지 알아? 꼬리 치려고 그런 거야. 근데 네까짓 게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아?”추경은은 순간 사색이 되고 말았다.서다희는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추경은 씨, 앞으로 그냥 남남으로 지내시죠. 오빠니 뭐니 그런 소리도 하지 말고요. 저한테는 동생이 없거든요.”그 말에 사색이 되었던 추경은의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그날 민수아와 했던 대화가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다.‘대단한 여자였어! 감히 녹음을 하다니!’‘앞으로 조심해서 말하고 행동해야겠어!’이미 까밝혀진 상황임으로 추경은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
부정이 아니라 인정을 하고 있는 박민정의 말에 서다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사모님, 저와 추경은 씨 사이에는 처음부터 그 어떠한 관계도 없었습니다. 수아가 지금 이 일로 저와 헤어지려고 하는 거 알고 계십니까?”“그래서요? 저한테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요?”박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만약 제가 수아한테 두 사람이 몰래 커플 레스토랑으로 간 것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다음번에는 더 심한 짓까지 할 수 있잖아요. 아닌가요?”“젊은 여자가 작정하고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냐 말이에요.”순산 서다희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남자로서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추경은 씨는 젊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화끈하고 게다가 집안까지 좋아요. 일반인 남자들이 가만히 놔둘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요. 하물며 작정하고 들이대는데 마다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 것 같아요?”“수아한테 알린 것도 사심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서 비서님이 추경은한테 홀려서 앞으로 추경은 씨의 말에만 끔뻑 죽을까 봐 그런 것도 있어요.”서다희는 모든 말을 다 듣고서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추경은 씨와 따로 둘만 만난 건 잘못했습니다. 낮도 아니고 밤에 만나서 더더욱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다소 멋쩍은 듯이 박민정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조금 전에 보신 것처럼 전 이미 추경은 씨와 선을 딱 그었습니다. 그러니 수아한테대신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제 얘기를 듣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거든요.”박민정은 조금 전에 백업한 동영상을 서다희에게 건네주었다.“수아 소중히 여기고 예쁘게 사랑해 주세요.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좋은 여자예요.”서다희는 박민정이 건네주는 USB를 받고서 다소 당황했으나 차로 돌아와서 동영상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모든 의혹이 풀렸다.그는 바로 동영상을 민수아에게 보내주었다.드라마를 보고 있던
“뭐라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윤석후가 물었다.“당연히 엄마 말대로 해야죠. 근데 문제는 지금 한수민이 사인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윤소현은 모녀 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관한 계약서까지 준비해 두었다.그 말을 듣게 된 윤석훈의 눈빛은 확 달라지면서 차갑기 그지없었다.“앞으로 우리가 걷게 될 길에서 한수민은 틀림없이 걸림돌처럼 내내 거슬리게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이쯤에서 한 방에 해결하는 게 좋겠어.”“아빠가 나서서 그 사인 받아줄게. 겸사겸사 이혼 서류도 작성해야겠어.”“네.”...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가족은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하지만 이 집안만큼은 그 말과 어긋나는 쪽으로 걸으려는 모습이다.오전에 한창 업무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간병인으로부터 박민정은 또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민정 씨, 얼른 좀 오세요. 큰일 났어요.”박민정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한수민의 병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윤석후와 윤소현도 병실 안에 함께 있었는데 한수민에게 강제로 사인을 받고 있었다.간병인이 밖에서 박민정에게 알려주었다.“아침 일찍부터 오셨는데, 오자마자 사모님의 손을 잡고 사인을 강요하고 있지 뭐예요. 길 가던 행인이라도 저렇게 무정하게 굴 것 같지 않아요.”“이혼 서류에 사인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요.”간병인은 박민정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박민정이 나서서 한수민을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박미정은 윤석후가 서둘러서 이혼하려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한수민과 그 어떠한 관계도 엮이지 않게 빚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부녀 사이를 끊어버리는 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나 두 사람이 일단 이혼하게 되면 박민정은 돈을 받을 곳이 없게 된다.윤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본래는 박씨 가문의 것이다.박민정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정민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던 그때 의사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박민정을 불렀다.“박민정 씨?”박민정은 그 소리에
윤소현은 순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진작에 동의하셨으면 아까 그런 고통을 받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요.”말을 마친 윤소현은 합의서를 꺼내서 한수민의 앞에 내려놓았다.한수민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사인하고는 또 붉은 색 지장까지 남겼다.이 모든 것을 마친 한수민이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예전만큼의 애정이 전혀 없었다.“너 같은 배은망덕한 녀석을 애지중지 키웠으니 나도 참 눈이 멀었지.”윤소현은 한수민의 욕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누가 당신보고 절 애지중지 하랬어요? 저는 원래 당신과 정이 없었어요. 저는 정수미가 키운 거예요.”이 말을 들은 한수민는 갑자기 전에 자기가 박민호에게 박민정을 얘기한 것이 떠 올랐다. 그때 그녀는 박민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민정이는 가정부가 다 키웠어. 그래서 난 그 애한테 정이 전혀 없어.”‘다 내 업보야...’“이혼 합의서에도 사인해.”윤석후는 한수민을 빈털터리로 내쫓을 합의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한수민은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이혼 합의서에는 사인할 수 없어.”만약 이 합의서에 사인을 안 하면 한수민은 그나마 절반의 부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합의서에 사인을 하면 그녀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다.“사인 안 해?”윤석후는 또 손을 들어 한수민을 때리려고 했다.“어디 또 한 번 때리기만 해봐!”옆에서 줄곧 군소리 안 하던 박민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윤석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쳐다보았다.“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야?”박민정도 윤석후와 긴말하지 않고 문 쪽을 보며 외쳤다.“민기 씨.”정민기는 줄곧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박민정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듣고 얼른 들어왔다.윤석후는 자기보다 덩치가 크고 어린 정민기를 보더니 삽시에 깃발을 내렸다.“소현아, 가자.”“네.”윤소현은 모녀간의 연을 끊는 합의서를 잘 챙기고 떠났다.두 사람이 간 후, 한수민은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 푹 쓰러졌다. 그녀는 가
‘세상에는 어떻게 이토록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박민정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죠?한수민은 목구멍이 쌉쌀했다.“민정아, 나도 확실히 임신했었어. 하지만 그때 윤석후가 내게 찾아와 재결합을 원했어. 난 그 사람을 위해 아이를 지웠어.”한수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아이를 지우고 나니, 윤석후는 또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했어. 그러더니 정수미랑 결혼을 했더라. 난 형식 씨가 의심하지 않게, 출산 예정인 날에 맞춰서 갓난아기를 구했어. 그 갓난아기가 바로 너야.”한수민은 이 말을 마친 뒤,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난 형식 씨에게 미안해. 그 사람한테 미안해... 전에 거의 만삭인 그 아이를 지워서 내가 지금 이런 병에 걸렸나 봐. 다 내 업보야.”한수민은 울다가 또 웃었다.박민정은 지금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갑자기 박씨 가문의 따님에서 고아가 되었다.이 모든 것들의 변화가 너무나도 커서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쩐 지,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당신은 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박민정은 목이 멘 소리로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근데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도 진실을 몰랐어요... 당신 참으로 독하네요.”박민정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애썼다.한수민도 오늘에서야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아버지의 죽음은 확실히 단순한 사고는 아니야. 네가 결혼하기 전날, 난 그 차를 타고 윤석후를 만나러 갔었어. 근데 난 정말 그 차에 손을 댄 적이 없어. 차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아마도 윤석후가 한 짓일 거야.”그날 한수민은 윤석후와 만난 후, 두 사람의 차는 같이 지하 주차장에 한동안 놓여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박민정은 지금 한수민가 한 말이 어느 말이 진실이고 어느 말이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이번에는 저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를 바라요.” 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떠나려고 했
정민기는 차 안에 앉아서 가벼운 소리로 박민정에게 말했다.“며칠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하시네요.”“네.”“이제 돌아갈까요?”정민기가 물었다.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서교로 가주세요.”“네.”정민기는 서교로 차를 몰았다.박형식이 그곳의 묘원에 묻혀있었다.도착한 후, 박민정은 정민기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 혼자 이곳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네.”정민기는 비록 박민정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몰랐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라는 정민기는 무조건 따르곤 하였다.박민정은 박형식의 묘비 앞으로 걸어와, 위에 걸린 자상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목구멍이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아버지, 전 아직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 거예요?”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박민정은 가슴이 더더욱 답답해 났다.“아버지, 저 지금 너무 괴로워요. 어떡해요?”안타깝게도 박형식은 더 이상 그녀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라고 알려 줄 수 없었다.박민정의 눈 밑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했다. 박형식의 묘비 앞에 앉은 채, 그녀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찬 바람이 휙휙 불었으며 묘비 앞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박민정은 머리가 무거워져 가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시야가 희미해졌다.마침, 이때, 고급 차 한 대가 달려왔으며, 차 안의 남자는 단번에 박민정을 발견했다.그는 단김에 차에서 뛰어 내려와 재빨리 박민정에게 달려갔다.유남우는 오늘 박민정이 황급하게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지켜보라고 했다.박민정이 혼자 묘원에 있다는 것을 듣자마자 유남우는 바로 달려왔다.“민정아.”박민정은 정신이 몽롱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남준 씨, 이제 눈이 보여요?”유남우는 이 말에 목이 멨다.그가 자기는 유남준이 아니라 유남우라고 정정하려고 할 때, 박민정은 두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남준 씨, 나 지금 머리가 너무너
박민정은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얘가 TV에서 그런 걸 봤다고?’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박민정이 손을 빼려 하자, 유남준이 말했다.“민정아, 윤우 말이 맞아. 손잡는 것부터 시작하자.”박윤우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좋다고 생각해요.”박민정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박윤우가 계속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가는 내내 그녀의 손등과 손바닥은 땀으로 가득 찼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빼려 했지만 유남준이 놓아줄 리 없었다.유남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윤우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손잡고 있어도 되지?”앞에서 걸어가던 박윤우가 뒤를 돌아보자, 박민정은 유남준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이들이 거실로 들어오자, 불고기를 먹으려고 모여든 설인하와 다른 사람들이 손깍지를 낀 이 둘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민수아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기억을 되찾은 거야?”박민정은 민망한지 즉시 손을 뺐다.“아직이야.”“오.”설인하와 민수아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불고기를 가지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그러자 거실에는 박민정과 유남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박민정은 조금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서연이 돌아왔는지 모르겠네. 제가 서연 방에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진서연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인기척이 없었다.시간을 보니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유남준은 그녀와 얘기를 좀 더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내일 학부모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근 뒤 씻으러 갔다.다음 날 아침,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려는 박민정을 유치원까지 태워주려고 유남준은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사 안 가요?”박민정은 원래 택시 타고 가거나 아니면 기사에게 부탁해 유치원까지 갈 생각이었다.“같은 방향이야.”유남준은 거절
“필요 없으니 이만 끊을게요.”홍주영은 차갑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그녀의 집안 형편이 유씨 가문만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남우 도련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수발을 들었다면 내가 결코 이토록 적극적이지 않았을 텐데. 남우 도련님은 바보도 아니면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던 홍주영의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이 고였다.유남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자신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그 고집 때문이었다.한편, 휴대폰 너머에 있던 유남우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홍주영이 끊은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홍주영으로부터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한 하민재의 마음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내가 그렇게도 매력이 없단 말인가?’얼마 지나지 않아 하민재는 또 할머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놈아. 왜 주영을 화나게 한 거야? 주영의 말로는 너와 어울리지 않으니 그냥 친구로 남겠다던데.”전달받은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민재의 할머니는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다.하민재는 조금 당황했다.“제가 거절당했다는 말인가요?”“그걸 말이라고 해? 이 개자식아, 대체 왜 주영을 화나게 한 거야? 어서 그녀에게 사죄해! 한심해서 원. 내가 진주까지 가서 혼내야 정신 차릴 테냐? 주영의 할머니가 내 어렸을 적의 절친이니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궁합도 봐야 한다면서요?”“궁합 보니 너와 잘 맞더라.”하민재의 할머니가 허풍을 보탰다.“내가 소개해 준 여러 여자 중에서 주영과의 궁합이 제일 좋아.”“알았으니까 이만 끊어요.”하민재는 짜증 내며 전화를 끊었다.여자를 차버린 적은 있어도 차인 적이 없었던 하민재가 소파에 앉아 홍주영의 마음을 되돌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한편, 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차에 앉아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가고 있었다.가는 도중 박민정은 하민재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민재가 반응하기도 전에 홍주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씨 가문의 장남?”조금 전 하민재와 유남준이 다투고 있을 때 홍주영이 하민재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는 사실 부잣집 아들이었다.그제야 하민재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신분 위장하고 소개팅하러 나온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홍주영은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하씨 가문의 도련님과 소개팅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네요.”하민재는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어차피 재미도 좀 봤으니, 그녀를 이만 잊는 것도 나쁘지 않아.’홍주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산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홍주영이 떠나든 말든 하민재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듯하여 숨쉬기가 힘들었다.이때, 할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민재야, 주영과는 잘 돼가고 있는 거야? 괜찮다면 집에 와서 혼사를 논하자꾸나. 연말에 결혼하는 걸로 하고.”대부분 가문의 풍습은 늘 이런 식이었다.소개팅한 뒤 한두 달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민재는 고민하고 있었다.“할머니, 좀 더 얘기해 봐야 하니 조급해하지 마세요.”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후회했다.‘아참, 그녀와 이제 끝이라고 말해야 했는데.’그의 말에 하민재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주영의 마음을 얻도록 노력 많이 해. 이 할미가 점을 보니 주영이 너와 아주 잘 맞더라. 게다가 점쟁이 말로는 그녀가 우리 하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다던데.”“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앞으로는 점 보러 좀 다니지 마세요.”하민재가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홍주영을 뒤쫓아나갔을 때는 그녀가 사라진 뒤였다.“걸음이 왜 그렇게 빨라?”하민재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모든 것이 내 잘못이구나. 신분을 숨기지 말아야 했는데.”그는 홍주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미안해요. 주영 씨.
하민재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눈치챘지만 박민정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어렸을 때의 일들을 대부분 기억해요.”“그렇구나.”하민재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홍주영은 이 소개팅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연지석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하민재가 계속해서 말했다.“그런데 왜 혼자 있어요? 유남준은 같이 안 왔나요? 민정 씨가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박민정은 하민재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한마디 내뱉었다.“화장실 갔으니 곧 올 거예요. 저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친 박민정이 자리를 뜨려고 돌아서자, 하민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나 보네.”그는 재빨리 뒤쫓아가 박민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민정 씨, 어디를 그리 급히 가려고요? 저는 지석 형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은데.”하민재가 갑자기 자기 손목을 잡자, 박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할 얘기가 더 남았나요?”“지석 형을 받아들였다가 거절한 이유, 그리고 그를 기억에서 지운 이유를 설명하시죠.”하민재는 자신의 롤모델인 연지석이 박민정에게 현혹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그에게 움켜잡힌 손목 부위가 박민정은 너무나 아팠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오해?”하민재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지석 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좋아한 적이 있긴 했었나요?”하민재의 말을 통 알아듣지 못했던 박민정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하민재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보다 못한 홍주영이 하민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장 민정 씨를 놔주세요.”박민정을 어렵게 만났기 때문에 하민재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연지석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해서 더욱 그러했다.바로 그때, 유남준이 박윤우와 함께 화장실 안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이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그는 잡고 있던 박윤우의 손을 놓은 후, 즉시
번화한 거리에서 걷고 있던 세 식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사람들의 시선은 그들 쪽으로 향했다.“와! 저 아이 너무 귀엽네요. 엄마 아빠도 잘생기고.”“그렇네요. 저 아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인터넷 스타 같네요.”기분이 들떠있던 박윤우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려 하자 재빨리 마스크를 썼다.“엄마, 빨리 가.”박민정은 의아했다.“왜 그래?”“나중에 말해줄게.”박윤우가 박민정의 손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도망가려 하자, 유남준이 박윤우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아이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일렀거늘. 너 때문에 나와 네 엄마도 숨어야 하잖아. 차라리 그냥 너 혼자 숨는 게 낫겠다.”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이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 박윤우는 유남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쓰레기 아빠, 앞으로는 제 도움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흥!”말은 그렇게 해도 박윤우의 마음속에는 유남준 생각뿐이었다.불고기 맛집에 도착한 세 사람은 VIP룸에 들어갔다.그제야 박윤우는 유남준의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드러냈다.“아이고.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잖아.”“대체 무슨 일인데?”박민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박윤우는 인터넷 라이브 방송한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놨다.“엄마, 내가 라이브 방송해도 괜찮지?”돈을 주겠으니 라이브 방송을 그만두라고 고영란은 입이 닳도록 박윤우에게 말했었다.“괜찮고말고. 어린 나이에 라이브 방송까지 했다니. 너무 훌륭한데.”당근을 주고 나서 박민정은 채찍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렇지만 아직 어리니까 공부에 집중해야 해.”‘공부’라는 말에 박윤우는 머리가 아팠다.“알았어요. 엄마.”불고기가 나오자마자 다들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박민정이 박윤우의 그릇에 불고기를 담아주면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집어주었다.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배불리 먹고 나자, 박윤우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그 말에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
민수아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서연아, 어디 가?”“밥 먹으러요.”진서연이 대답했다.“밥 먹으러 간다고? 너 밥 먹었잖아.”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민수아의 말에 진서연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보다 못한 설인하가 민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수아 씨, 바보예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내뱉었으니, 바보가 맞았다.민수아는 그제야 알아차린 듯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아까 밥을 많이 안 먹었지? 민기 씨와 함께 밖에서 많이 먹어.”‘내가 돼지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민기 씨가 싫어하지는 않겠지?’쓸데없는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정작 그녀가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정민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면 불고기 먹으러 갈까요? 남으면 가져와서 배고플 때 먹어도 되고.”그의 말을 듣고서야 빨개졌던 진서연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네. 그렇게 해요.”진서연은 여장부의 모습을 거두려고 일부러 작은 발걸음으로 걸었다.박민정이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둘이 정말 잘 어울리네.”“그러게. 빨리 연인 사이로 발전하여 결혼하면 좋을 텐데. 다들 결혼하니까 얼마나 좋아.”설인하는 민수아의 말을 그저 웃어넘겼다.그녀는 방성원과 이혼하려 했지만, 방성원이 이혼을 거부하고 있었다.물론 이혼소송을 할 수도 있었으나, 방은정의 양육권이 방성원에 넘어갈 게 뻔해서 설인하에게 불리했다.진서연이 나간 후 박민정은 산책 좀 하다가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유남준은 박민정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탓에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당연히 노크도 해봤지만, 그녀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일 있으면 내일 얘기하고 이만 쉬세요.”문 너머에 있던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알았어.”이때, 박윤우가 유남준에게 다가왔다.“쓰레기 아빠, 아직도 엄마의 마음을 얻지 못했구나.”유남준은 박윤우에게 도움을 청했
유남준이 흔쾌히 승낙하는 것을 본 몇몇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도 전에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지만 유남준은 회사가 연애하는 곳이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었다.유남준이 박민정을 많이 무서워하는 것이 확실했다.한편, 정민기의 방 앞까지 찾아간 진서연은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더니 바로 열렸다.“왜 문이 열려 있지? 어디 갔나?”진서연은 조금 당황했다.그녀가 다시 나가려고 문을 닫으려던 순간, 타올을 걸친 정민기가 화장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민기의 튼튼하고 강한 근육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저… 문이 안 잠겼길래… 일부로 들어온 건 아니고. 샤워하는 줄 몰랐어요.”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던 진서연은 나가려고 뒤돌아섰다.다행히 정민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 그렇구나. 옷 갈아입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네.”진서연은 그를 등진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그제야 심호흡하며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혔다.‘낮에 뭔 얼어 죽을 샤워야. 망측해서 원. 하여튼 부끄러움은 내 몫이라니까. 그나저나 몸매는 정말 끝내주네. 어떻게 운동했기에 이 정도로 관리가 잘 된 걸까?’진서연이 얼마나 오만가지 잡생각에 사로잡혔으면 정민기가 옷을 다 갈아입고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정민기가 진서연의 어깨를 툭툭 치자, 진서연은 화들짝 놀랐다.“무슨 생각 해요?”정민기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진서연이 뒤돌아섰다.그가 옷을 입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건넸다.“이건 이달 15일에 있을 수아 씨와 다희 씨의 결혼식 청첩장이에요.”진서연이 청첩장을 정민기에게 건네고 나가려고 할 때 정민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요. 서연 씨도 결혼식에 갈 거죠?”사실 정민기는 시끌벅적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이 박예찬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하랑이 박민정에게 전화했다.“민정아, 요즘은 예전과 달라. 애 엄마들은 하나같이 속물이야. 다들 최현아 쪽에 붙었어.”‘최현아?’박민정이 묻기도 전에 조하랑이 물었다.“참. 최현아가 누군지 기억하지?”박민정은 조금 당황했다.“모르겠는데.”조하랑은 피가 거꾸로 솟을 뻔했다.‘어휴.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네.’“누구냐면… 그녀는 유남준 사촌 형의 아내야. 어쨌든 좋은 사람은 아니야. 예전에 너를 많이 괴롭혔어.”“알았어.”‘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학부모 회의에서는 간계를 부리지 않겠지.’박민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이 증명하듯 그녀의 생각은 짧았다.박민정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조하랑은 심히 걱정되었다.“내가 내일에 다른 일이 있어서 너와 함께 가지 못하겠어. 아니면 거절하고 가지 마.”“안돼. 다른 애 엄마들은 다 가는데 나만 안 간다면 예찬이 너무 불쌍하잖아.”박민정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좀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박민정에게 말하는 것 외에 조하랑도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물론 여자들의 기싸움을 조심하라는 말을 보태는 것을 잊지 않았다만.“알았어.”박민정은 아무 생각 없이 답한 후,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까지 했다.저녁이 되자, 박윤우가 박민정에게 졸랐다.“엄마, 형의 학부모 회의에 다녀온 후 나의 학부모 회의에도 와줘.”“알았어.”박민정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자, 박윤우는 그제야 흡족해했다.이때, 민수아가 서프라이즈를 하려는 듯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모두가 의아해하자, 민수아는 감추고 있던 청첩장을 그들에게 보여줬다.“여러분, 다희와 제가 드디어 결혼 날짜를 잡았어요. 이달 15일에 결혼할 예정이니 꼭 참석해 주세요.”이미 알고 있던 유남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와! 이렇게나 빨리요? 축하해요.”모두의 축하에 민수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
박민정이 정반대의 말을 한다고 생각한 이지원의 뻔뻔스러움은 극치에 달했다.“어쨌거나 저는 무난하게 살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없어요.”당연히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었다.많은 고통을 겪다 보니 너무 괴로워서 쓸데없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더구나 올해 들어 유남우의 도움으로 연예계에서 꽤 잘나간 탓에 이제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이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박민정의 물음에 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용서해 준다면 앞으로는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할게요. 물론 민정 씨의 말도 잘 들을 거고요.”“저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으니 이만 가보세요.”박민정은 차갑게 대답했다.이지원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용서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박민정이 여전히 예전처럼 마음이 여리다고 생각한 이지원은 바닥에서 일어났다.“민정 씨, 저는 그러면 가볼게요.”“그러세요.”박민정은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이지원이 나가자, 박민정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유남준은 서둘러 병실로 들어갔다.“이지원이 뭐라 한 거야?”유남준이 다짜고짜 물었다.“널 때린 건 아니지?”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아직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지원이 조금 전에 한 말을 그녀는 유남준에게 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에게 얘기해. 이지원은 겉과 속이 달라. 넌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 그녀의 말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저도 알아요.”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왔다.이지원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자, 박민정은 당시 사건을 파헤치려고 정민기를 찾아갔다.“제 사건은 윤소현과 이지원, 그리고 유남우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민기 씨가 좀 더 깊게 조사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 하지만…”정민기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빠른 기간 내 알아내기는 어려울 거예요.”“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