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은은 끝끝내 자기 옷을 입고 외출했다.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가 두원 별장 앞에 이르렀다.박민정은 나가자마자 그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귀엽게 생긴 얼굴로 눈도 커다란 것이 티 하나 없이 맑아 보였다.여자의 눈으로 본다면 서다희의 약혼녀는 추경은보다 훨씬 예뻤다.“민수아 씨, 안녕하세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수아 역시 박민정이 별장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고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맞으시죠?”실은 서다희에게서 유씨 가문에 관한 재벌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흥미로웠는데, 그중의 한 주인공을 볼 수 있게 되어 신기했다.“네, 저 맞아요.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민정이라고 불러도 돼요.”“민수아라고 합니다. 저도 편하게 수아라고 불러주세요.”민수아는 박민정 앞에서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지 않았다.다 같은 사람이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민수아를 바라보면서 바로 그녀를 데리고 시즌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지만, 추경은을 상대하려고 민수아에게 상처를 주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추경은이 서다희와 약속을 잡은 것에 대해 민수아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추경은의 수단이 어떠한지 박민정은 이미 직접 목격한 바가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되기 전에 말려야 한다며 내적 갈등을 했다.“수아 씨, 실은 오늘 서 비서님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 거예요.”“말씀하세요.”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긴 했다.박민정은 바로 추경은와 서다희의 채팅 기록이 담겨 있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민수아는 보자마자 바로 터지고 말았다.“서다희! 이 쓰레기 같은 놈아!”여자라면 진주시의 시즌 레스토랑이 어떠한 곳인지 모를 리가 없다.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니 말이다.얼굴이 새빨개진 민수아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지금 당장 찾아가야겠어요.”“잠시만요.”박민정이 그녀를 말렸다.“일단 진정 좀 하세요. 두 사람 저
“왜 전화했어?”민수아는 화를 겨우 억누르면서 물었다.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리가 없는 서다희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아야, 나 오늘 야근해야 하는데, 아마 11시쯤 되어야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그래? 근데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왜 같은 말을 두 번 씩이나 하는 건데?”“너 깜빡했을까 봐 그러는 거지.”민수아 앞에서 서다희는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알았어. 안전에 조심하고 여우 같은 것들 조심해.”“하하하, 알았어. 자기야, 사랑해.”민수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를 장착한 서다희의 모습이 박민정은 낯설기만 했다.게다가 닭살이 돋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고 말이다.민수아에 대한 서다희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제발 어장 관리하지 마... 제발 쓰레기처럼 굴지 마...’“봤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지금 당장 시즌 레스토랑으로 가서 지켜봐야겠어.”“같이 가자.”박민정이 말했다.“그래.”같은 목적을 안고 두 사람은 차에 올라 시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시즌 레스토랑은 예약제이고 커플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직원은 박민정과 민수아를 보자마자 길을 막아섰다.“두 분 예약하셨나요? 함께 온 남성분들은요?”박민정은 이러한 ‘제도’에 대해 깜빡하고 있었다.고급 레스토랑이라 일반인이 소비할 만한 수준의 물가도 아니다.박민정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민수아가 박민정의 팔짱을 끼면서 입을 열었다.“꼭 남자랑 와야만 커플로 인정되는 건가요? 지금 우리 차별 대우 하는 거예요?”순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더욱더 당황한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있던 직원이다.“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예약은 하셨나요?”“예약하지 않았으면 들어가서 밥도 못 먹는다는 말이에요? 그럼, 레스토랑은 왜 차리는 건데요?”민수아가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레스토랑이 예약제라 예약 없이는 들어갈...”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정
직원은 두 사람을 박민정과 민수아가 있는 바로 옆방으로 안내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박민정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반투명 유리를 놓아주었다.서다희 쪽에서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은 서다희와 추경은이 똑똑하게 보였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꽃길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정교한 장식품을 보고서 추경은은 서다희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고의로 그러한 것인지 분위기에 심취되어 그러한 것인지 아직 알 길이 없다.“와, 다희 오빠, 여기 너무 예뻐요.”박민정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민수아는 그 광경을 보고서 하마터면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미친!”다행히도 서다희가 바로 추경은의 손을 빼버렸다.“경은 씨, 얼른 앉아서 밥 먹어요. 저한테 물어보고 싶으신 게 많으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추경은은 그제야 의자를 밖으로 빼내면서 서다희의 바로 옆에 앉았다.“따로 앉을 자리가 없나 왜 하필 옆에 앉고 지랄이야.”서다희는 아직 자기 약혼녀랑 박민정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하여 추경은에게 맞은 편으로 가서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냥 있었을지도 모른다.옆으로 의자를 살짝 옮긴 행동으로 본다면 말이다.“다희 오빠, 우리 남준 오빠 요즘 어때요?”“사장님께서 지금 편하게 지내시고 계세요. 걱정할 필요 없으세요.”서다희의 대답에 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우리 남준 오빠 지금 잘 지내고 있지 않을 거예요.”“무슨 근거로요?”서다희는 의문이 들었다.“만약 잘 지내고 있다면 그렇게 홀로 나가서 지내려고 하지 않았겠죠. 요즘 두원 별장에서 홀로 새언니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새언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동안 우리 남준 오빠만 고생했을 텐데... 우리 남준 오빠가 안타깝고 아까워요.”추경은이 넋두리를 두고 있는 동안 박민정은 민수아에게 추경은이 바로 유남준의 ‘사촌 동생’이라며 알려주었다.“사촌 동생?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혈연
“서 비서님이 추경은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박민정이 대답했다.“서다희 그 멍청한 놈이 어떻게 여우 년의 수단을 알아볼 수 있겠어?”민수아는 지금 초조하고 화가 나 있었다.그녀도 이런 상황을 처음이었다.사실 그녀는 소개팅으로 서다희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맞는 진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세상에는 순수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남자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한테 꼬리 치는 여우 년을 구별 못할 리가 없어.”어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칭찬과 아부를 즐기곤 했다.“일단 저들이 밥을 다 먹고 추경은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보자.”“그래.”민수아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박민정을 믿기로 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뛰어가봤자 추경은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게다가 민수아의 집안은 분명 추경은을 따라갈 수 없었다.만약 서다희가 정말로 나쁜 놈이라면 민수아는 그냥 헤어지고 다시 소개팅해서 새로운 남자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옆에 있는 룸에서.서다희는 추경은 앞에서 민수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박민정 이야기를 꺼냈다.“오늘 사모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별거 안 했는데요. 그냥 회의 문서 같은 걸 보더라고요.”추경은은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박민정의 험담을 했다.“새언니가 진지하게 회사 다닐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회의 서류를 하나 보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서류가 영 안 읽혔는지 제가 방해가 된다며 나가 있으라고 눈치를 주더라고요.”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임산부는 감정 기복이 심하잖아요. 경은 씨, 고생 많았어요.”추경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빠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죠. 다희 오빠, 이 디저트 먹어봐요. 엄청 맛있어요.”서다희는 잠깐 망설였다.추경은은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희 오빠, 제가 싫은 거예요? 예전에 오빠 찾아갔을 때는
민수아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엄청 점잖고 고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네.”그녀는 눈물을 닦더니 말을 이어갔다.“맛있는 거 빨리 먹자. 안 그러면 다 식겠어.”“그래.”순수한 민수아에게 서다희가 정말 상처를 준다면 박민정은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다행히 서다희와 추경은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박민정과 민수아도 따라 나갔다.추경은은 서다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희 오빠, 저 돌아가기 싫어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서다희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안 돼요. 여자친구에게 11시 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그럼 전화해서 저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추경은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서다희는 그녀가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말 들어요. 운전기사한테 두원 별장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두원 별장에 돌아가기 싫어요. 거기 가면 또 새언니한테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요.”서다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두원 별장에서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사용인을 괴롭힌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설마 지금 사모님을 질투하고 있는 건가?’“그럼 호텔을 예약해 줄게요.”“여자 혼자서 호텔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서다희를 완전히 자기 옆에 묶어두고 이용해서 유남준을 차지할 계획이었다.서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아니면 민수아는 걱정할 것이다.“진짜 가야 해요. 경호원을 붙여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추경은 서다희가 떠나려고 하자 그에게 와락 안겼다.“다희 오빠, 고마워요.”서다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차에 올라탄 후 집으로 돌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추경은은 눈가의 눈물을 닦고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어렵게 진주에
추경은은 민수아에게 뺨을 맞고 난 후 한참 동안 멍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쫓아가려 했지만 민수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민수아는 가까운 곳에 주차된 박민정의 차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추경은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속이 좀 후련했다.“잘했어.”박민정이 말했다.“고마워.”민수아는 소매를 걷었는데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발견했다. 그만큼 추경은을 때릴 때 얼마나 힘을 줬는지를 설명했다.그녀는 또 아까 녹음한 파일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다 녹음했어. 서다희에게 들려줄 거야. 그럼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겠지.”“급할 것 없어.”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추경은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 민수아를 찾을 수 없어 휴대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하지만 서다희가 민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의 편을 든다면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추경은은 유남준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서다희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국 이 일을 꾹 참고 넘기기로 했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놀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그녀는 진주에서 가장 큰 클럽으로 향해 멋있는 남자들과 놀기로 했다.그러나 추경은은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이제 박민정과 민수아가 아닌, 박민기의 부하들이었다.박민정은 임신하고 있었기에 추경은을 계속 미행할 수 없어 차에 누웠다. 그리고 정민기더러 사람을 보내 추경은을 미행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민수아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기분이 불쾌해져 서다희가 거듭 전화를 했음에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친구 집에 왔어. 안 돌아갈 거야.]서다희는 그 문자를 보고 실망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민수아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결국 서다희는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자기야, 왜 전화를 안 받아?][친구 집에서 있다고 했잖아. 다 잠들었는데 전화 받으면 깨울 것 같아서.][알겠어. 그럼 내일
아무도 서다희에게 답을 알려줄 수 없었다.그는 사람 시켜 조사하고 싶었지만 민수아가 알게 되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유남준은 오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김인우도 함께 왔는데 그 소식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이거 정말 골치 아프네.”하지만 유남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남준아, 안 돌아갈 거야? 형수 임신 중이잖아.”김인우는 요즘 박민정을 많이 걱정했기에 유남준을 당장이라도 집에 보내고 싶었다.“내가 준 돈으로 임신 중 필요한 건 다 해결할 수 있어.”유남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고는 또 서다희에게 물었다.“오늘 추경은 쪽에서 무슨 소식 없었어?”서다희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없었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서다희는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돌아오더니 유남준에게 말했다.“전화를 받지 않네요.”유남준은 더 묻지 않았다.김인우는 오늘 이 두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두 사람 모두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다희 씨, 여자친구랑 싸웠어요?”김인우는 농담조로 말했다.서다희는 정신을 차린 후 김인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인우는 자기가 무심코 한 질문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조금 놀랐다.서다희 같은 성실한 사람이 여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김인우는 속으로 안도했다.‘다행이야. 난 신경을 쓸 여자도 없다고. 두 사람처럼 절대 여자 문제에 휘둘리지 않지.’...호산 그룹, 옥상.추경은은 어제 너무 늦게까지 놀았는지 오늘 아침에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박민정은 혼자 출근했다.홍주영은 박민정이 다른 부잣집 사모님처럼 그저 형식적으로 회사에 나오기만 할 줄 알았지만 박민정은 어제 대부분의 회의 자료를 읽고 정리까지 마친 상태였다.홍주영은 박민정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며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사모님, 오늘 대표님과 함께 클라이
유남우는 주현승이 박민정 때문에 회사 이미지를 망칠 수 있다는 말에 얼굴색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래요?”유남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주현승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는 웃으며 말했다.“장난이에요. 사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미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죠.”주현승은 유남우가 온화하고 겸손한 후배이지, 유남준처럼 잔인한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유남우는 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아, 먼저 가서 쉬고 있어.”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여기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그래. 가도 돼.”“알겠어요.”박민정도 더는 이곳에 남아 주현승의 불쾌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휴게실로 향했다.그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장 밖에서는 비명과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주변 사람들은 경호원에 의해 막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시닉 그룹의 대표가 지금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유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여자란 걸 정말 몰랐습니다.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주현승은 무릎을 꿇은 채 사과했다.유남우가 손에 든 골프채는 주현승을 때릴 때 이미 휘어져 있었다.주현승은 바닥에 엎드렸는데 상처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며 말했다.“유 대표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유남우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골프채를 옆에 던졌다.“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요.”“네. 알겠습니다.”주현승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 줄 알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몇 명의 경호원이 그를 끌고 갔다.유남우는 손을 깨끗이 씻고서야 휴게실로 향했다.박민정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유남우는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의 손이 박민정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다 끝났어요?”박민정이 의아해하며 물었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