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실 안에서.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너 안 올 줄 알았어.”“세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오지 않을 리가 없죠.”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했다.“얼른 앉아.”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뜻 다가갔다.직접 물 한 잔을 건네며 다시 입을 열었다.“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예전처럼.”박민정은 다소 수줍어하면서 물 잔을 건네받았다.“고마워요.”이윽고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앞으로 제가 뭘 책임져 야하는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어요?”“그럼.”두 사람은 그렇게 대표이사실 안에서 얘기를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홍주영도 자리를 떠나 홀로 남겨진 추경은은 기다리는 게 점점 지루해졌다.할 일도 없고 하여 추경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서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희 오빠, 저 지금 새언니 따라서 회사로 왔는데, 여기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요.][남준 오빠랑 같이 지금 당장 돌아왔으면 좋겠어요.]한편, 해운 별장.서다희는 밀린 업무를 요즘 거의 이곳에서 완수하고 있다.그의 핸드폰이 자꾸 울리자,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약혼녀야?”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경은 씨한테서 온 메시지예요.”“무슨 일인데?”왠지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나서 유남준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고 박민정과 관련되는 소식이라면 그게 뭐든 궁금했다.서다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바로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경은 씨 말로는 사모님과 함께 호산 그룹으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모님 지금 둘째 도련님 비서로 일하고 계신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전에 박민정이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좋아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지금 추경은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게 된 뒤, 두 사람 사이의 옛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그럼, 우리 사장님 너무 안쓰러운데...’“가지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가다니. 간이 배 밖으
서다희는 유남준이 내뱉고 있는 차가운 말들을 들으면서 흘러 넘겨 버렸다.말로만 할 뿐이지 행동으로 절대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서다희는 추경은에게 옆에서 박민정을 잘 보살펴 주라면서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다.[네.]추경은은 전과 달리 딱 한 글자만 답장했다.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둔 박민정이다.유남우 곁을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회의의 기록 같은 것을 정리하면 된다.대표이사실에서 나오자마자 박민정은 누군가와 기쁘게 채팅을 나누고 있는 추경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울이자 ‘다희 오빠’ 네 글자가 보였다.박민정은 그제야 두 사람이 커플 레스토랑에 가기로 한 일이 떠 올랐다.과연 옆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추경은이 박민정에게 말했다.“새언니,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요. 친구랑 밤새워 놀 거예요.”‘안 들어와? 친구랑 밤새워 놀아?’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그래요. 안전에 조심하고요.”“걱정하지 마세요.”추경은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솔직히 말해서 그 어떤 여자든 자기 남자 친구 또는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단둘이 커플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추경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서다희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하지만 서다희의 약혼녀를 모르고 있으니 박민정은 간섭할 수 없었다.생각을 접어버리고 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유남우가 준 회사 회의 기록부를 펼쳐보았다.“어머, 또 졌어!”“바보들 아니야?”한쪽에서 게임을 하는 추경은의 시끄러운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업무에 집중하고 싶어도 그럴 수없어 박민정은 추경은에게 나가달라고 했다.“경은 씨, 나가서 게임을 하면 안 될까요?”임신하기 전에도 시끄러운 걸 싫어했었는데, 임신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 옆에 있는 여자가 욕을 하면서 큰 소리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추경은은 끝끝내 자기 옷을 입고 외출했다.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가 두원 별장 앞에 이르렀다.박민정은 나가자마자 그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귀엽게 생긴 얼굴로 눈도 커다란 것이 티 하나 없이 맑아 보였다.여자의 눈으로 본다면 서다희의 약혼녀는 추경은보다 훨씬 예뻤다.“민수아 씨, 안녕하세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수아 역시 박민정이 별장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고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맞으시죠?”실은 서다희에게서 유씨 가문에 관한 재벌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흥미로웠는데, 그중의 한 주인공을 볼 수 있게 되어 신기했다.“네, 저 맞아요.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민정이라고 불러도 돼요.”“민수아라고 합니다. 저도 편하게 수아라고 불러주세요.”민수아는 박민정 앞에서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지 않았다.다 같은 사람이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민수아를 바라보면서 바로 그녀를 데리고 시즌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지만, 추경은을 상대하려고 민수아에게 상처를 주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추경은이 서다희와 약속을 잡은 것에 대해 민수아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추경은의 수단이 어떠한지 박민정은 이미 직접 목격한 바가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되기 전에 말려야 한다며 내적 갈등을 했다.“수아 씨, 실은 오늘 서 비서님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 거예요.”“말씀하세요.”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긴 했다.박민정은 바로 추경은와 서다희의 채팅 기록이 담겨 있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민수아는 보자마자 바로 터지고 말았다.“서다희! 이 쓰레기 같은 놈아!”여자라면 진주시의 시즌 레스토랑이 어떠한 곳인지 모를 리가 없다.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니 말이다.얼굴이 새빨개진 민수아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지금 당장 찾아가야겠어요.”“잠시만요.”박민정이 그녀를 말렸다.“일단 진정 좀 하세요. 두 사람 저
“왜 전화했어?”민수아는 화를 겨우 억누르면서 물었다.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리가 없는 서다희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아야, 나 오늘 야근해야 하는데, 아마 11시쯤 되어야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그래? 근데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왜 같은 말을 두 번 씩이나 하는 건데?”“너 깜빡했을까 봐 그러는 거지.”민수아 앞에서 서다희는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알았어. 안전에 조심하고 여우 같은 것들 조심해.”“하하하, 알았어. 자기야, 사랑해.”민수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를 장착한 서다희의 모습이 박민정은 낯설기만 했다.게다가 닭살이 돋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고 말이다.민수아에 대한 서다희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제발 어장 관리하지 마... 제발 쓰레기처럼 굴지 마...’“봤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지금 당장 시즌 레스토랑으로 가서 지켜봐야겠어.”“같이 가자.”박민정이 말했다.“그래.”같은 목적을 안고 두 사람은 차에 올라 시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시즌 레스토랑은 예약제이고 커플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직원은 박민정과 민수아를 보자마자 길을 막아섰다.“두 분 예약하셨나요? 함께 온 남성분들은요?”박민정은 이러한 ‘제도’에 대해 깜빡하고 있었다.고급 레스토랑이라 일반인이 소비할 만한 수준의 물가도 아니다.박민정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민수아가 박민정의 팔짱을 끼면서 입을 열었다.“꼭 남자랑 와야만 커플로 인정되는 건가요? 지금 우리 차별 대우 하는 거예요?”순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더욱더 당황한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있던 직원이다.“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예약은 하셨나요?”“예약하지 않았으면 들어가서 밥도 못 먹는다는 말이에요? 그럼, 레스토랑은 왜 차리는 건데요?”민수아가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레스토랑이 예약제라 예약 없이는 들어갈...”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정
직원은 두 사람을 박민정과 민수아가 있는 바로 옆방으로 안내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박민정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반투명 유리를 놓아주었다.서다희 쪽에서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은 서다희와 추경은이 똑똑하게 보였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꽃길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정교한 장식품을 보고서 추경은은 서다희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고의로 그러한 것인지 분위기에 심취되어 그러한 것인지 아직 알 길이 없다.“와, 다희 오빠, 여기 너무 예뻐요.”박민정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민수아는 그 광경을 보고서 하마터면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미친!”다행히도 서다희가 바로 추경은의 손을 빼버렸다.“경은 씨, 얼른 앉아서 밥 먹어요. 저한테 물어보고 싶으신 게 많으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추경은은 그제야 의자를 밖으로 빼내면서 서다희의 바로 옆에 앉았다.“따로 앉을 자리가 없나 왜 하필 옆에 앉고 지랄이야.”서다희는 아직 자기 약혼녀랑 박민정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하여 추경은에게 맞은 편으로 가서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냥 있었을지도 모른다.옆으로 의자를 살짝 옮긴 행동으로 본다면 말이다.“다희 오빠, 우리 남준 오빠 요즘 어때요?”“사장님께서 지금 편하게 지내시고 계세요. 걱정할 필요 없으세요.”서다희의 대답에 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우리 남준 오빠 지금 잘 지내고 있지 않을 거예요.”“무슨 근거로요?”서다희는 의문이 들었다.“만약 잘 지내고 있다면 그렇게 홀로 나가서 지내려고 하지 않았겠죠. 요즘 두원 별장에서 홀로 새언니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새언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동안 우리 남준 오빠만 고생했을 텐데... 우리 남준 오빠가 안타깝고 아까워요.”추경은이 넋두리를 두고 있는 동안 박민정은 민수아에게 추경은이 바로 유남준의 ‘사촌 동생’이라며 알려주었다.“사촌 동생?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혈연
“서 비서님이 추경은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박민정이 대답했다.“서다희 그 멍청한 놈이 어떻게 여우 년의 수단을 알아볼 수 있겠어?”민수아는 지금 초조하고 화가 나 있었다.그녀도 이런 상황을 처음이었다.사실 그녀는 소개팅으로 서다희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맞는 진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세상에는 순수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남자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한테 꼬리 치는 여우 년을 구별 못할 리가 없어.”어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칭찬과 아부를 즐기곤 했다.“일단 저들이 밥을 다 먹고 추경은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보자.”“그래.”민수아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박민정을 믿기로 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뛰어가봤자 추경은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게다가 민수아의 집안은 분명 추경은을 따라갈 수 없었다.만약 서다희가 정말로 나쁜 놈이라면 민수아는 그냥 헤어지고 다시 소개팅해서 새로운 남자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옆에 있는 룸에서.서다희는 추경은 앞에서 민수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박민정 이야기를 꺼냈다.“오늘 사모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별거 안 했는데요. 그냥 회의 문서 같은 걸 보더라고요.”추경은은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박민정의 험담을 했다.“새언니가 진지하게 회사 다닐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회의 서류를 하나 보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서류가 영 안 읽혔는지 제가 방해가 된다며 나가 있으라고 눈치를 주더라고요.”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임산부는 감정 기복이 심하잖아요. 경은 씨, 고생 많았어요.”추경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빠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죠. 다희 오빠, 이 디저트 먹어봐요. 엄청 맛있어요.”서다희는 잠깐 망설였다.추경은은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희 오빠, 제가 싫은 거예요? 예전에 오빠 찾아갔을 때는
민수아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엄청 점잖고 고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네.”그녀는 눈물을 닦더니 말을 이어갔다.“맛있는 거 빨리 먹자. 안 그러면 다 식겠어.”“그래.”순수한 민수아에게 서다희가 정말 상처를 준다면 박민정은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다행히 서다희와 추경은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박민정과 민수아도 따라 나갔다.추경은은 서다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희 오빠, 저 돌아가기 싫어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서다희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안 돼요. 여자친구에게 11시 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그럼 전화해서 저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추경은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서다희는 그녀가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말 들어요. 운전기사한테 두원 별장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두원 별장에 돌아가기 싫어요. 거기 가면 또 새언니한테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요.”서다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두원 별장에서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사용인을 괴롭힌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설마 지금 사모님을 질투하고 있는 건가?’“그럼 호텔을 예약해 줄게요.”“여자 혼자서 호텔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서다희를 완전히 자기 옆에 묶어두고 이용해서 유남준을 차지할 계획이었다.서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아니면 민수아는 걱정할 것이다.“진짜 가야 해요. 경호원을 붙여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추경은 서다희가 떠나려고 하자 그에게 와락 안겼다.“다희 오빠, 고마워요.”서다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차에 올라탄 후 집으로 돌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추경은은 눈가의 눈물을 닦고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어렵게 진주에
추경은은 민수아에게 뺨을 맞고 난 후 한참 동안 멍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쫓아가려 했지만 민수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민수아는 가까운 곳에 주차된 박민정의 차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추경은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속이 좀 후련했다.“잘했어.”박민정이 말했다.“고마워.”민수아는 소매를 걷었는데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발견했다. 그만큼 추경은을 때릴 때 얼마나 힘을 줬는지를 설명했다.그녀는 또 아까 녹음한 파일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다 녹음했어. 서다희에게 들려줄 거야. 그럼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겠지.”“급할 것 없어.”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추경은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 민수아를 찾을 수 없어 휴대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하지만 서다희가 민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의 편을 든다면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추경은은 유남준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서다희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국 이 일을 꾹 참고 넘기기로 했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놀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그녀는 진주에서 가장 큰 클럽으로 향해 멋있는 남자들과 놀기로 했다.그러나 추경은은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이제 박민정과 민수아가 아닌, 박민기의 부하들이었다.박민정은 임신하고 있었기에 추경은을 계속 미행할 수 없어 차에 누웠다. 그리고 정민기더러 사람을 보내 추경은을 미행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민수아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기분이 불쾌해져 서다희가 거듭 전화를 했음에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친구 집에 왔어. 안 돌아갈 거야.]서다희는 그 문자를 보고 실망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민수아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결국 서다희는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자기야, 왜 전화를 안 받아?][친구 집에서 있다고 했잖아. 다 잠들었는데 전화 받으면 깨울 것 같아서.][알겠어. 그럼 내일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