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실 안에서.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너 안 올 줄 알았어.”“세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오지 않을 리가 없죠.”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했다.“얼른 앉아.”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뜻 다가갔다.직접 물 한 잔을 건네며 다시 입을 열었다.“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예전처럼.”박민정은 다소 수줍어하면서 물 잔을 건네받았다.“고마워요.”이윽고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앞으로 제가 뭘 책임져 야하는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어요?”“그럼.”두 사람은 그렇게 대표이사실 안에서 얘기를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홍주영도 자리를 떠나 홀로 남겨진 추경은은 기다리는 게 점점 지루해졌다.할 일도 없고 하여 추경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서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희 오빠, 저 지금 새언니 따라서 회사로 왔는데, 여기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요.][남준 오빠랑 같이 지금 당장 돌아왔으면 좋겠어요.]한편, 해운 별장.서다희는 밀린 업무를 요즘 거의 이곳에서 완수하고 있다.그의 핸드폰이 자꾸 울리자,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약혼녀야?”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경은 씨한테서 온 메시지예요.”“무슨 일인데?”왠지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나서 유남준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고 박민정과 관련되는 소식이라면 그게 뭐든 궁금했다.서다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바로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경은 씨 말로는 사모님과 함께 호산 그룹으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모님 지금 둘째 도련님 비서로 일하고 계신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전에 박민정이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좋아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지금 추경은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게 된 뒤, 두 사람 사이의 옛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그럼, 우리 사장님 너무 안쓰러운데...’“가지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가다니. 간이 배 밖으
서다희는 유남준이 내뱉고 있는 차가운 말들을 들으면서 흘러 넘겨 버렸다.말로만 할 뿐이지 행동으로 절대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서다희는 추경은에게 옆에서 박민정을 잘 보살펴 주라면서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다.[네.]추경은은 전과 달리 딱 한 글자만 답장했다.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둔 박민정이다.유남우 곁을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회의의 기록 같은 것을 정리하면 된다.대표이사실에서 나오자마자 박민정은 누군가와 기쁘게 채팅을 나누고 있는 추경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울이자 ‘다희 오빠’ 네 글자가 보였다.박민정은 그제야 두 사람이 커플 레스토랑에 가기로 한 일이 떠 올랐다.과연 옆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추경은이 박민정에게 말했다.“새언니,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요. 친구랑 밤새워 놀 거예요.”‘안 들어와? 친구랑 밤새워 놀아?’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그래요. 안전에 조심하고요.”“걱정하지 마세요.”추경은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솔직히 말해서 그 어떤 여자든 자기 남자 친구 또는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단둘이 커플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추경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서다희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하지만 서다희의 약혼녀를 모르고 있으니 박민정은 간섭할 수 없었다.생각을 접어버리고 박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유남우가 준 회사 회의 기록부를 펼쳐보았다.“어머, 또 졌어!”“바보들 아니야?”한쪽에서 게임을 하는 추경은의 시끄러운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업무에 집중하고 싶어도 그럴 수없어 박민정은 추경은에게 나가달라고 했다.“경은 씨, 나가서 게임을 하면 안 될까요?”임신하기 전에도 시끄러운 걸 싫어했었는데, 임신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 옆에 있는 여자가 욕을 하면서 큰 소리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추경은은 끝끝내 자기 옷을 입고 외출했다.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가 두원 별장 앞에 이르렀다.박민정은 나가자마자 그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귀엽게 생긴 얼굴로 눈도 커다란 것이 티 하나 없이 맑아 보였다.여자의 눈으로 본다면 서다희의 약혼녀는 추경은보다 훨씬 예뻤다.“민수아 씨, 안녕하세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수아 역시 박민정이 별장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고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맞으시죠?”실은 서다희에게서 유씨 가문에 관한 재벌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흥미로웠는데, 그중의 한 주인공을 볼 수 있게 되어 신기했다.“네, 저 맞아요.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민정이라고 불러도 돼요.”“민수아라고 합니다. 저도 편하게 수아라고 불러주세요.”민수아는 박민정 앞에서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지 않았다.다 같은 사람이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민수아를 바라보면서 바로 그녀를 데리고 시즌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지만, 추경은을 상대하려고 민수아에게 상처를 주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추경은이 서다희와 약속을 잡은 것에 대해 민수아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추경은의 수단이 어떠한지 박민정은 이미 직접 목격한 바가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되기 전에 말려야 한다며 내적 갈등을 했다.“수아 씨, 실은 오늘 서 비서님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 거예요.”“말씀하세요.”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긴 했다.박민정은 바로 추경은와 서다희의 채팅 기록이 담겨 있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민수아는 보자마자 바로 터지고 말았다.“서다희! 이 쓰레기 같은 놈아!”여자라면 진주시의 시즌 레스토랑이 어떠한 곳인지 모를 리가 없다.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니 말이다.얼굴이 새빨개진 민수아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지금 당장 찾아가야겠어요.”“잠시만요.”박민정이 그녀를 말렸다.“일단 진정 좀 하세요. 두 사람 저
“왜 전화했어?”민수아는 화를 겨우 억누르면서 물었다.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리가 없는 서다희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아야, 나 오늘 야근해야 하는데, 아마 11시쯤 되어야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그래? 근데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왜 같은 말을 두 번 씩이나 하는 건데?”“너 깜빡했을까 봐 그러는 거지.”민수아 앞에서 서다희는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알았어. 안전에 조심하고 여우 같은 것들 조심해.”“하하하, 알았어. 자기야, 사랑해.”민수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를 장착한 서다희의 모습이 박민정은 낯설기만 했다.게다가 닭살이 돋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고 말이다.민수아에 대한 서다희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제발 어장 관리하지 마... 제발 쓰레기처럼 굴지 마...’“봤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지금 당장 시즌 레스토랑으로 가서 지켜봐야겠어.”“같이 가자.”박민정이 말했다.“그래.”같은 목적을 안고 두 사람은 차에 올라 시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시즌 레스토랑은 예약제이고 커플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직원은 박민정과 민수아를 보자마자 길을 막아섰다.“두 분 예약하셨나요? 함께 온 남성분들은요?”박민정은 이러한 ‘제도’에 대해 깜빡하고 있었다.고급 레스토랑이라 일반인이 소비할 만한 수준의 물가도 아니다.박민정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민수아가 박민정의 팔짱을 끼면서 입을 열었다.“꼭 남자랑 와야만 커플로 인정되는 건가요? 지금 우리 차별 대우 하는 거예요?”순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더욱더 당황한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있던 직원이다.“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예약은 하셨나요?”“예약하지 않았으면 들어가서 밥도 못 먹는다는 말이에요? 그럼, 레스토랑은 왜 차리는 건데요?”민수아가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레스토랑이 예약제라 예약 없이는 들어갈...”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정
직원은 두 사람을 박민정과 민수아가 있는 바로 옆방으로 안내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박민정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반투명 유리를 놓아주었다.서다희 쪽에서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은 서다희와 추경은이 똑똑하게 보였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꽃길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정교한 장식품을 보고서 추경은은 서다희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고의로 그러한 것인지 분위기에 심취되어 그러한 것인지 아직 알 길이 없다.“와, 다희 오빠, 여기 너무 예뻐요.”박민정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민수아는 그 광경을 보고서 하마터면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미친!”다행히도 서다희가 바로 추경은의 손을 빼버렸다.“경은 씨, 얼른 앉아서 밥 먹어요. 저한테 물어보고 싶으신 게 많으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추경은은 그제야 의자를 밖으로 빼내면서 서다희의 바로 옆에 앉았다.“따로 앉을 자리가 없나 왜 하필 옆에 앉고 지랄이야.”서다희는 아직 자기 약혼녀랑 박민정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하여 추경은에게 맞은 편으로 가서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냥 있었을지도 모른다.옆으로 의자를 살짝 옮긴 행동으로 본다면 말이다.“다희 오빠, 우리 남준 오빠 요즘 어때요?”“사장님께서 지금 편하게 지내시고 계세요. 걱정할 필요 없으세요.”서다희의 대답에 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우리 남준 오빠 지금 잘 지내고 있지 않을 거예요.”“무슨 근거로요?”서다희는 의문이 들었다.“만약 잘 지내고 있다면 그렇게 홀로 나가서 지내려고 하지 않았겠죠. 요즘 두원 별장에서 홀로 새언니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새언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동안 우리 남준 오빠만 고생했을 텐데... 우리 남준 오빠가 안타깝고 아까워요.”추경은이 넋두리를 두고 있는 동안 박민정은 민수아에게 추경은이 바로 유남준의 ‘사촌 동생’이라며 알려주었다.“사촌 동생?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혈연
“서 비서님이 추경은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박민정이 대답했다.“서다희 그 멍청한 놈이 어떻게 여우 년의 수단을 알아볼 수 있겠어?”민수아는 지금 초조하고 화가 나 있었다.그녀도 이런 상황을 처음이었다.사실 그녀는 소개팅으로 서다희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맞는 진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세상에는 순수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남자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한테 꼬리 치는 여우 년을 구별 못할 리가 없어.”어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칭찬과 아부를 즐기곤 했다.“일단 저들이 밥을 다 먹고 추경은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보자.”“그래.”민수아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박민정을 믿기로 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뛰어가봤자 추경은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게다가 민수아의 집안은 분명 추경은을 따라갈 수 없었다.만약 서다희가 정말로 나쁜 놈이라면 민수아는 그냥 헤어지고 다시 소개팅해서 새로운 남자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옆에 있는 룸에서.서다희는 추경은 앞에서 민수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박민정 이야기를 꺼냈다.“오늘 사모님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별거 안 했는데요. 그냥 회의 문서 같은 걸 보더라고요.”추경은은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박민정의 험담을 했다.“새언니가 진지하게 회사 다닐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회의 서류를 하나 보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서류가 영 안 읽혔는지 제가 방해가 된다며 나가 있으라고 눈치를 주더라고요.”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임산부는 감정 기복이 심하잖아요. 경은 씨, 고생 많았어요.”추경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빠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죠. 다희 오빠, 이 디저트 먹어봐요. 엄청 맛있어요.”서다희는 잠깐 망설였다.추경은은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희 오빠, 제가 싫은 거예요? 예전에 오빠 찾아갔을 때는
민수아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엄청 점잖고 고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네.”그녀는 눈물을 닦더니 말을 이어갔다.“맛있는 거 빨리 먹자. 안 그러면 다 식겠어.”“그래.”순수한 민수아에게 서다희가 정말 상처를 준다면 박민정은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다행히 서다희와 추경은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박민정과 민수아도 따라 나갔다.추경은은 서다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희 오빠, 저 돌아가기 싫어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서다희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안 돼요. 여자친구에게 11시 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그럼 전화해서 저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추경은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서다희는 그녀가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말 들어요. 운전기사한테 두원 별장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두원 별장에 돌아가기 싫어요. 거기 가면 또 새언니한테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요.”서다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두원 별장에서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사용인을 괴롭힌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설마 지금 사모님을 질투하고 있는 건가?’“그럼 호텔을 예약해 줄게요.”“여자 혼자서 호텔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서다희를 완전히 자기 옆에 묶어두고 이용해서 유남준을 차지할 계획이었다.서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아니면 민수아는 걱정할 것이다.“진짜 가야 해요. 경호원을 붙여줄 테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추경은 서다희가 떠나려고 하자 그에게 와락 안겼다.“다희 오빠, 고마워요.”서다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차에 올라탄 후 집으로 돌아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추경은은 눈가의 눈물을 닦고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어렵게 진주에
추경은은 민수아에게 뺨을 맞고 난 후 한참 동안 멍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쫓아가려 했지만 민수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민수아는 가까운 곳에 주차된 박민정의 차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추경은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속이 좀 후련했다.“잘했어.”박민정이 말했다.“고마워.”민수아는 소매를 걷었는데 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발견했다. 그만큼 추경은을 때릴 때 얼마나 힘을 줬는지를 설명했다.그녀는 또 아까 녹음한 파일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다 녹음했어. 서다희에게 들려줄 거야. 그럼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겠지.”“급할 것 없어.”박민정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추경은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 민수아를 찾을 수 없어 휴대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하지만 서다희가 민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의 편을 든다면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추경은은 유남준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서다희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국 이 일을 꾹 참고 넘기기로 했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놀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그녀는 진주에서 가장 큰 클럽으로 향해 멋있는 남자들과 놀기로 했다.그러나 추경은은 자신을 미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이제 박민정과 민수아가 아닌, 박민기의 부하들이었다.박민정은 임신하고 있었기에 추경은을 계속 미행할 수 없어 차에 누웠다. 그리고 정민기더러 사람을 보내 추경은을 미행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민수아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기분이 불쾌해져 서다희가 거듭 전화를 했음에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친구 집에 왔어. 안 돌아갈 거야.]서다희는 그 문자를 보고 실망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민수아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결국 서다희는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자기야, 왜 전화를 안 받아?][친구 집에서 있다고 했잖아. 다 잠들었는데 전화 받으면 깨울 것 같아서.][알겠어. 그럼 내일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