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 씨, 다름이 아니라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실은 그동안 자기 딸로 키워왔던 소현이는 내...”“아주머니, 헛소리하지 마시죠.”윤소현은 바로 나서서 한수민의 말을 끊어버렸다.‘아주머니?’남다른 호칭에 한수민은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구미가 당긴 정수미는 윤소현을 말리면서 계속 물었다.“소현아, 괜찮아. 무엇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 사람이 너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엄마는 우리 소현이 믿어.”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네.”자기가 배 아파 낳은 딸이 다른 여자에게 엄마라고 부르면서 다정하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토록 아이러니할 수가 없었다.한수민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정수미 씨, 잘 들어요. 윤소현, 우리 소현이 내 친딸이에요.”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정수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윤소현에 관해 결코 좋지 않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지도 못했다.“한수민 씨, 장난도 정도껏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소현이는 나랑 소현이 아빠가 복지센터로 가서 직접 데리고 온 아이라고요. 근데 어떻게 우리 소현이가 그쪽 딸이란 말이죠?”늘 한수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정수미는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고 얘기를 해 본 적도 없다.그러나 지금 한수민이 자기를 속인 거라고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해줬으면 했다.윤소현 역시 한수민에게 눈짓을 보내며 얼른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기를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한수민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차갑게 웃으며 아랑곳하지 않았다.“흥! 비즈니스 여왕이라고 불리던 정수미 씨, 설마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이 누구 배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키운 거예요?”“소현이는 나랑 석후 사이에서 생긴 아이예요.”“석후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요.”충격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수미는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러나 그
정수미의 질문에 윤소현은 순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수민 역시 윤소현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다.사실 그대로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하지만 윤소현은 붉어진 눈시울로 한수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어떻게 저를 그렇게 모함할 수 있어요?”“제 엄마는 제 친엄마이고 저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분이에요. 저를 낳아주신 분이 누구든 저에게는 지금 이 엄마가 전부예요.”그 말에 정수미는 가슴이 따뜻해졌고 한수민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어릴 적부터 옆에서 챙겨주지 못하고 있어 주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수민은 그 어떠한 발언권도 없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한수민은 매년 자기 능력대로 윤소현을 만나러 갔었고 최선을 다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줬었다.몇 해 전 윤석후와 결혼을 했을 때도 전남편 집안에서 받은 폐백을 들고서 윤씨 가문으로 들어갔었다.다름이 아니라 바로 어릴 적부터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윤소현에게 보상하고 싶어서였다.“소현아, 사람 그러면 못 써. 내가 널 낳아준 엄마인데, 어떻게 엄마 앞에서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박민정에게 했었던 그 말들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한수민이다.하지만 윤소현은 그 어떠한 표정변 화도 없었다.“아주머니, 제발 거짓말 좀 그만하세요.”“우리 아빠한테 다른 아주머니가 생겨서 아주머니께서 지금 충격을 받으시고 이러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잘못을 한 사람은 우리 아빠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저 좀 그만 괴롭히시면 안 돼요?”윤소현은 몹시나 억울한 모습으로 애원했다.“너! 너...”화가 치밀어 오른 한수민은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한수민, 어느새 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바지를 물들어 버렸다.간병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사모님, 괜찮으세요?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요.”윤소현 역시 그 모습을 보고서 살짝 두려웠다.하지만 정수미는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뿌린 대로 거둔다더니.”한수민은 간병인의 옷을 꼭 잡고서
박민정을 보게 된 순간 정수미는 그녀가 홀로 칼을 들고서 자기한테 했었던 말들이 떠 올랐다.만약 윤소현만 아니었다면 정수미는 박민정이라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너 역시 구경하려고 온 거야?”정수미는 말하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구경 온 사람들은 회사 직원들이 아니라 회사 앞을 지나가고 있던 행인들이었다.“당연히 아니죠.”박민정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서 무엇인가 찾는 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덧붙였다.“아까 저기서 듣자 하니 증거가 필요하다면서요? 한수민 여사님이 윤소현 씨 생모라는 것에 관한 증거 말이에요.”윤소현은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하지만 박민정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고 핸드폰에서 친자확인 보고서를 찾아 정수미에게 건네주었다.정수미는 지금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지만, 일단은 건네받았다.보고서에는 한수민과 윤소현이 모녀 관계가 확실하면서 적혀 있었다.윤소현 역시 다가와 들여다보았는데 믿어지지 않았다.“엄마, 이거 가짜일 거예요.”“제가 어떻게 저 사람 딸일 수 있단 말이에요.”할리우드 배우도 울고 갈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윤소현이다.옆에서 지켜보던 간병인은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윤소현 씨, 지난번에 사모님 뵈러 왔을 때, 직접 말하시는 거 제가 다 들었어요. 사모님이 윤소현 씨 친엄마라면서 돈을 요구하셨잖아요.”간병인은 원래 남의 집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 생모를 외면하고 오히려 짓밟고 있는 윤소현의 행동에 그럴 수 없었다.간병인까지 나서자 윤소현은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간병인 따위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서로 짜고 치면서 나 엿 먹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너희들 다 명예 훼손죄로 감방에 처넣을 수도 있어.”그 말을 듣고서 간병인은 흠칫 놀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 서 있던 정수미는 딸이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고서 어느 정도 답이 생겼다.어릴 적부터 윤소현을 직접 챙겨온 정수미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멀리 서서 지켜보던 박민정은 한수민의 말을 듣고서 그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그때 간병인이 박민정을 불러세웠다.“민정 씨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박민정이 아니었다면 한수민이 강제로 회사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있는 간병인이다.고마움을 표시하고 나서 간병인은 한수민의 옷깃을 당기며 그녀 역시 박민정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으면 했다.한수민은 고개를 들어 박민정은 바라보았는데, 따뜻한 말이 아니라 심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나 이 꼴 된 거 보려고 온 거야? 직접 보니 어때? 마음에 들어?”박민정은 유난히 덤덤한 모습으로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네, 그러려고 온 거 맞는데, 이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네요.”한수민은 바로 발버둥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때리려고 했다.하지만 얼마 걷지도 못해 뒤로 넘어가려고 했고 간병인이 옆에서 간신히 잡았다.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한수민을 의사는 간신히 그녀를 염라대왕 손에서 빼앗아 왔다.“암세포 확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보호자 분께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의사가 말했다.그 말을 듣게 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덤덤했던 눈빛은 마침내 흔들리기 시작했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요?”의사는 박민정의 그 질문을 듣고 한수민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러한 질문을 한 줄 알았다.하지만 박민정은 지금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직 얼마나 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이다.“한 석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석 달... 그건 너무 빨리 죽는 건데...’한수민이 한 짓에 비하면 석 달 살고 죽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 행복한 일이다.의사가 떠나고 나서 한수민은 다시 병실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않았다.아주 긴 시간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고 깨어날 수 없는 꿈까지 꾸었다.꿈에 박형식이 찾아와서 그녀가 한 짓에 대해
“엄마, 왜 이러시는 거예요?”윤소현은 마냥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윤소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덤덤한 모습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며 정수미가 물었다.이 자료들을 보기 전까지 정수미는 자기가 직접 키운 딸을 믿으려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자랑으로 키운 딸이 실은 양털을 쓴 승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엄숙한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서 윤소현은 부랴부랴 자료들을 훑어보았는데,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엄마, 이건 다...”‘가짜예요.’미처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사실대로 말해. 더 이상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그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거짓말을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풀썩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엄마,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바로 인정하는 윤소현을 보고서 정수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수민이 네 친엄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윤소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저도 올해 들어서야 알게 된 거예요.”“엄마가 한수민 싫어하시는 거 제가 뻔히 알고 있는데, 엄마 화내실까 봐 그래서 숨긴 거예요.”윤소현은 또 거짓말을 했다.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미 한수민이 자기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한수민을 싫어하고 있긴 했지만 윤소현이 한수민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둘이 함께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에 불쾌하고 언짢았다.정수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윤소현은 점점 더 불안하기만 했다.“엄마, 미안해요. 제발 저 용서 해주세요. 엄마가 싫어하실까 봐, 화내실까 봐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요.”“사실이 뭐든 전 시종일관 똑같아요. 저한테 엄마는 엄마뿐이고 다른 사람은 그냥 남이예요.”윤소현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양모인 정수미 역시 자기만의 욕심이 있다.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사람의 정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모든 정력을 한수민에게 쏟아붓고 있어 박민정은 잠시 추경은을 상대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오고 나서 그녀는 박윤우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나서 박윤우를 학교로 바래다주고 박민정은 회사로 가려고 했다.그때 추경은이 또 앞으로 막아섰다.“새언니, 남준 오빠 허락했어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다짜고짜 던진 추경은의 질문이 생뚱맞기만 했다.“유앤케이 그룹으로 가서 일하는 거 말이에요. 남준 오빠 따라서 유앤케이 그룹으로 가서 일하라고 이모가 그랬잖아요.”추경은은 멈칫거리다가 수줍어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저 역시 새언니랑 남준 오빠 비서로 일해도 된다고 약속했었잖아요.”박민정은 그제야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아니라 경은 씨 이모한테 물어보세요. 남준 씨랑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돼서 허락했는지 모르겠어요.”박민정이 말했다.추경은은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또다시 박민정을 욕했다.‘유앤케이 그룹이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꿈과 같은 존재인데, 하나도 조급해하지 않다니! 그러니까 평생 주부로 밖에 살지 못하는 거야.’“따로 볼 일 없으시면 저 그만 작곡하러 갈게요.”“네.”박민정이 떠나고 나서 추경은은 바로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앤케이 그룹으로 출근하는 것에 대해 유남준이 허락했는지 않았는지.“남준이 지금 아파. 회사로 출근한다고 한들 나중에 다시 얘기해야 할 것 같아.”고영란이 말했다.실은 어제 이미 유남준에게 물어보았으나 그가 거절해 버렸다.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다시 유남준을 설득할 생각이다.“알았어요.”“근데 그건 왜 물어?”고영란은 의문이 들었다.“그게... 새언니가 대신 좀 물어봐달라고 해서요. 집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회사로 가고 싶나 봐요.”추경은이 대답했다.고영란은 그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그냥 오늘 회사로 출근하라고 해.’유남우도 말했듯이 유앤케이 그룹을 혼자 관리하는 건 너무
오피스룩으로 차려입은 홍주영은 빈틈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사모님, 추경은 씨, 안으로 안내해 드릴게요.”“네.”홍주영이 앞에서 안내라고 박민정과 추경은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안으로 들어간 추경은은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이 홍주영에게도 아첨을 떨었다.“우리 둘째 오빠 비서님이신 거죠? 너무 예쁘세요.”홍주영은 그 말을 듣고서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처음 만난 그때처럼 인사치레를 했다.“고맙습니다.”인싸나 다름이 없는 추경은은 홍주영의 퉁명스러움에 결코 얼굴이 빨개지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홍주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으니 말이다.“평소에 보통 어떤 업무들을 책임지고 계세요? 우리 둘째 오빠 스케줄을 책임지시나요? 앞으로 모르는 부분 있으면 물어봐도 될까요?”홍주영은 원래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으나 그 말을 듣고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추경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추경은 씨, 제가 무슨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마세요. 추경은 씨가 알아야 할 분야가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 추경은 씨는 사모님의 비서로 일할 것이니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직속 상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세요.”순간 추경은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박민정은 유남우의 전담 비서인 홍주영을 본 적이 있다.오늘 다시 만나보니 업무 능력이 뛰어날뿐더러 뻔뻔한 추경은이 한 마디도 못 하게 바로 입을 막아버리는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추경은은 박민정 곁으로 다시 돌아왔고 앞에 사람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새언니, 저 홍 비서님 말이에요, 사람이 도도 한 것이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아요.”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추기는 했지만, 다들 밀폐된 공간 안에 있어 너무 잘 들렸다.보청기를 쓴 박민정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니 홍주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눈에 뵈는 게 없는 사
대표이사실 안에서.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너 안 올 줄 알았어.”“세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오지 않을 리가 없죠.”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했다.“얼른 앉아.”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뜻 다가갔다.직접 물 한 잔을 건네며 다시 입을 열었다.“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예전처럼.”박민정은 다소 수줍어하면서 물 잔을 건네받았다.“고마워요.”이윽고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앞으로 제가 뭘 책임져 야하는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어요?”“그럼.”두 사람은 그렇게 대표이사실 안에서 얘기를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홍주영도 자리를 떠나 홀로 남겨진 추경은은 기다리는 게 점점 지루해졌다.할 일도 없고 하여 추경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서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희 오빠, 저 지금 새언니 따라서 회사로 왔는데, 여기 정말 너무 좋은 것 같아요.][남준 오빠랑 같이 지금 당장 돌아왔으면 좋겠어요.]한편, 해운 별장.서다희는 밀린 업무를 요즘 거의 이곳에서 완수하고 있다.그의 핸드폰이 자꾸 울리자,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약혼녀야?”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경은 씨한테서 온 메시지예요.”“무슨 일인데?”왠지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나서 유남준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고 박민정과 관련되는 소식이라면 그게 뭐든 궁금했다.서다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바로 유남준에게 알려주었다.“경은 씨 말로는 사모님과 함께 호산 그룹으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모님 지금 둘째 도련님 비서로 일하고 계신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전에 박민정이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좋아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지금 추경은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게 된 뒤, 두 사람 사이의 옛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그럼, 우리 사장님 너무 안쓰러운데...’“가지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가다니. 간이 배 밖으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
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좋아. 한번 해볼게.”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수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응.”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연지석은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맡아보겠다고 전했다.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오후에 병원으로 먼저 들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박민정은 모두 받아들였다.그녀는 유남준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왜 그래?”박민정은 그제야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유남준은 이 일이 제법 의외였다. 하지만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회사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박민정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놀라웠다.박민정은 덧붙였다.“지석이가 그러더라고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후, 유남준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연지석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정수미의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던 주주들까지 급히 병원을 찾을 정도였다.비서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지엔 그룹의 주주들과 고위 임원들입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만나보라고 하셨어요.”정수미가 미리 이들을 불러놓은 듯했다. 나이 지긋한 주주들과 임원들은 그녀를 보고 모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작은 아가씨.”박민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수
정수미의 말이 끝나자 박민정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비서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박민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어요.”그러나 정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생각하면 돼.”“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차라리 윤소현 씨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민정이 다시 말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박민정이 선뜻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정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동생에게 배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민정아, 내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솔직히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나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니?”“소현이는 회사를 경영할 사람이 아니야. 만약 그 애에게 회사를 넘긴다면 지엔 그룹은 끝장날 거야.”“그리고 생각해 봐. 넌 내 친딸이야. 당연히 네가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수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회사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거대한 지엔 그룹을 책임질 수 있을까?“안 돼요. 저는 정말 감당할 수 없어요. 만약 소현 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경영인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다시 설득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직접 경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를 도와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네가 나한테 보고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어때?”“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친딸인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다.”그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래.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연락해 줘.”그렇게 말한 후, 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
지엔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정수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사실 정수미의 건강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지엔 그룹은 당연히 윤소현의 것이 될 터였다.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병원에서 요양 중인 정수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회사를 접수하는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하나씩 내몰았다. 특히 정수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그녀 손에 의해 잘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풀어준 정호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지엔 그룹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호철는 그곳에 대한 미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그는 요즘 병원 근처를 자주 찾아와 멀리서 조용히 정수미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그런 그를 정수미의 비서가 발견했다.“정 매니저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혹시 대표님을 뵈러 오셨나요?”순간 정호철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우연히.”그러나 그의 어설픈 변명이 정수미 곁에서 잔뼈가 굵은 비서를 속일 리 없었다.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마침 지나가신 김에 들어가 보시죠. 대표님께서 병원에만 계시느라 몹시 지루해하셨거든요.”그렇게 정호철은 반쯤 떠밀리듯 정수미의 병실로 들어서게 되었다.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거북한 냄새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정수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정호철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저 평소처럼 앓다가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정수미는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이전부터 이랬어. 별일 아니야.”그러면서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
박민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정수미는 드디어 박민정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고 뜨거운 촉감은 그녀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그리고 어느새 누가가 빨개진 채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민정아, 민정아...”“네, 저 여기 있어요.”“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 민정이구나. 난 네가 또, 또 사라지는 줄 알았어.”정수미는 아주 기나긴 악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딸을 데려갔고, 또 나중에 박민정을 만났는데 꿈속의 그녀는 절대 정수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남준이 마침 마실 물을 가져왔고 박민정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먹여줬다.의사도 와서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해줬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병실 밖에서 그들에게 결과를 말해줬다.길연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정 대표님께서 혹시 깨어나셨나요?” 그녀가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깨어나셨어요.”길연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당장 큰 아가씨한테 알릴게요.”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의사가 길연서 더러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전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정수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귓가에 무언가 말해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다시 핸드폰을 끄더니 이후에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연서의 부름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가 한껏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괜히 나 때문에 온 밤 고생했어.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박민정은 가볍게 대답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자마자 정수미는 갑자기 침대에 털썩하고 쓰러지더니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으나 정수미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길연서는 야식을 배달시켰다. “두 분은 이것 좀 드시고 가서 쉬어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윤소현은 진작에 졸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에 음식을 힐끗 보더니 손을 저으며 답했다.“저는 안 먹을래요. 시간도 늦었고 지금 먹으면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아요.”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그럼 전 이만 쉬러 갈 테니까 제 동생이랑 지키고 있어요. 혼자서 지키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사실 윤소현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졸리지도 않았고 이따 유남준이 오기에 그를 기다려야 했다.윤소현이 떠나가자마자 길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20년 넘게 키운 수양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지금껏 헤어져 있었던 친딸보다 더 정이 없는지, 길연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둘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간병인 침대에서 잠깐만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그러나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안 졸려요.”“그럼 뭐라도 좀 드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대로 음식을 조금 가져와서 먹은 뒤 계속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찾아왔는데 가녀린 몸으로 정수미 곁을 지키고 있는 박미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민정아.”박민정은 지금 유남준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떨렸다.“왔어요?”원래 유남준에게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아이들을 재우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길연서는 정수미의 사위가 온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유 대표님.”“안녕하세요.”“그럼 말씀 나누세요.”굳이 부부 사이에 끼기 싫어 길연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원래 그녀를 불러세우려고 했으나 한발 늦은 것 같았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이때, 박민정이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해야 하
어쨌든 정수미는 박민정의 친엄마다.길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나서야 안심되었다.그러나 윤소현은 계획이 틀어지자 박민정에게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엄마 유산을 네가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여기 남겠다는 건 아니지?”박민정은 원래 그녀와 입씨름하기 싫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자극하는 윤소현을 더는 봐주기 힘들어 이참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맞아요. 정 대표님은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제가 유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구나 유언장에도 제가 유산 절반을 상속받는다고 되어있고요.”박민정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정 대표님께서 진짜 돌아가셨는데 제가 없는 틈에 누군가가 유언장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너!”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게 들자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내팽개쳤다.그러다가 윤소현은 뒤로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박민정, 엄마가 죽길 바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윤소현이 불같은 화를 냈지만 박민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수술실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정수미가 밀려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의사한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그러자 의사가 대뜸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혹시 환자분께서 어제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요?”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늘 드시던 음식이었어요.”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한 분이 대표로 가서 혹시 환자분이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싸 오세요.”의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연서는 곧바로 집안 도우미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윤소현이 그녀를 말렸다.“매일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갖고 와요? 의사 선생님,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된 걸까요?”“일단 응급처치해서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