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알았어. 바로 나갈게.”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유남준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진짜 사나이라면 절대 이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제 발로 에스토니아로 찾아왔으니 연지석은 당연히 그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차에 탄 순간 연지석은 유남준이 죽는다면 박민정이 자신과 함께할지 생각해 보았다.하지만 그는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유남준은 박민정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박민정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연지석은 이번에 단지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었지, 유남준의 목숨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하민재가 계속 그에게 말했다.“형, 유남준 주변 경호가 꽤 잘 되어 있더라. 그 사람 불러낼 방법을 생각해 냈어.”“어떻게 불러낼 건데?”“비밀이야.”하민재는 전화를 끊었다.그는 연지석에게 해커를 고용해 박민정의 휴대폰을 조종해 박민정의 번호로 유남준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하민재도 유남준이 나올지 확신하지 못했다.유남준에게 문자를 보낸 지 3분 만에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훤칠한 키의 남자가 호텔에서 걸어 나왔다.“우르릉!”번개가 하늘을 가르면서 천둥이 울렸다.잠이 든 박민정은 한밤중 천둥소리에 놀라 깼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박민정은 방 안이 더운 줄 알고 욕실로 샤워를 한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왜인지 누웠는데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밖에는 번개와 천둥, 그리고 폭우가 몰아치고 있었다.휴대폰을 확인하니 이미 새벽 3시였다.박민정은 할 일이 없어 현지 뉴스를 보다가 가까운 호텔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봤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박민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 하나 걸치고는 문을 열었다.그리고 연지석이 방이 아닌 밖에서 비에 젖은 채로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어렸다.“안 잤어?”박민정은 그의 이상
전화는 연결되지 않아 연지석은 더 전화를 걸지 않았다.오늘 외출할 때 상처가 다시 찢어진 것은 사실이었다.의사는 그의 상처를 봉합해 줬고 모든 처치가 끝난 후 그는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벽에 기대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보며 연지석은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원망할까 봐 두려웠다.“민정아, 할 얘기가 있어.”박민정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오늘 밤 유남준을 찾아갔었어.”연지석이 잠깐 멈칫했다.“복수하러.”박민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비록 유남준을 예전처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였다.“남준 씨가 여기 왔어?”박민정이 물었다.“응.”유남준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연지석은 이렇게 빨리 복수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 그럼 남준 씨 지금 어디에 있는데?”박민정은 마음이 착잡했다.친구이자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연지석과 아이들의 아빠인 유남준, 도대체 누구를 도와야 할까?연지석이 대답하려는 순간 하민재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그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전화기 너머로 하민재가 아닌 서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지석 씨, 하민재는 이미 저에게 붙잡혔습니다. 대표님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을 겁니다.”충분한 준비 없이 누가 감히 연씨 가문의 지역에 발을 들이겠는가?서다희는 대비를 했는데도 하민재가 유남준을 이용해 그에게 중상을 입힐 틈을 줬다.연지석은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민재를 건드리면 절대 에스토니아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연지석은 자신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다희가 하민재를 제압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하민재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려고 했다.박민정은 방금 하민재 이야기를 듣고 연지석의 팔을 붙잡았다.“민재 씨 어떻게 됐대?”“민정아, 사람 시켜 널 저택으로 보낼 거야.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마.”
박민정은 발신자를 보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유남준도 박민정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유남준은 다른 사람들을 나가게 한 후 먼저 입을 열었다.“왜 말을 안 해?”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박민정은 안심했다.“지금 어디 있어요?”그녀가 물었다.“연지석이 옆에 있어?”유남준이 의심할 만도 했다. 너무 방심했기 때문에 다쳤으니 말이다.“나갔어요. 난 혼자 방에 있고요.”박민정도 유남준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가 어디 있는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에스토니아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일 때문에.”유남준은 당연히 그녀가 걱정돼 따라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박민정도 그의 일 핑계를 믿지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그럼 일이 언제 끝나는데요? 끝나는 대로 빨리 돌아가요.”박민정은 유남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연지석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 초기에 유남준은 몇 번이나 해외에서 죽을 뻔했었다.지금은 눈도 안 보이는 데다가 외국에 나와 있으니 더 위험할 것이다.다른 한편.유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서다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연지석이 왔습니다.”유남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더러 먼저 나가라고 했다.연지석이 지금 여기에 왔으니 박민정이 혼자 방에 있다는 말은 진실인 게 증명되었다.유남준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박민정을 일부러 놀리며 말했다.“왜 이렇게 서둘러 돌아가라고 하는 거야? 연지석이 그렇게 걱정돼?”박민정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농담할 줄은 몰랐다.“지석이가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 지석이를 거의 죽게 만들었으니 복수하려는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죠.”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가볍게 웃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박민정은 그가 연지석을 해치려 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왜 웃어요?”박민정은 그가 비꼬는 의미로 웃었다고 생각했다.“지금
박민정은 한참을 지나고서야 겨우 말 한마디 내뱉었다.“남준 씨가 먼저 잘못한 거 맞잖아요. 지석이를 다치게 했으면서.”유남준은 울화가 치밀었다.개도 주인 말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데 박민정은 그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있었다.유남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다희는 조금 초조해졌다.연지석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다.전화기 너머로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박민정은 그가 화가 나서 전화를 끊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남준 씨, 듣고 있어요?”“아직 안 죽었어.”“...”“하민재 씨 먼저 풀어주면 안 돼요?”박민정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방금 그 사람이 한 말 못 들었어? 그가 살아 있는 한 언젠간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잖아. 그렇게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나 죽으면 다른 남자 찾으려고?”박민정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응대하지 않고 설명했다.“하민재 씨는 지금 남준 씨에게 잡혀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당연히 할 말 다 하고 죽으려는 거죠. 아니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박민정은 말하면서 하민재의 배경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하민재는 하씨 가문에서 가장 중시하는 후계자임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적을 너무 많이 둬도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남준 씨 새 회사 시작했잖아요. 하씨 가문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인데 그 가문의 후계자를 죽인 남준 씨에게 복수하면 어떡해요?”사실 이 말은 서다희도 유남준에게 했었다.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말이다.하지만 유남준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오히려 서다희에게 연지석을 유인해서 함께 제거하라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박민정의 말을 들으니 평소 냉혹하고 오만한 유남준도 마음이 동했다.“그게 다야?”박민정은 유남준이 대부분의 경우 부드러운 말에는 약
연지석의 부하가 하민재를 부축하며 들어왔다.하민재는 배를 감싸면서 말을 겨우 뱉어냈다.“그 녀석 의외로 싸움 잘하네. 우리 쪽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눈이 보이지 않는 그 녀석을 막지 못했다니.”상처투성이인 와중에도 말을 계속 하는 그를 보며 연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만 말해.”박민정 덕분에 유남준이 하민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하민재는 오늘 이 세상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하민재가 계속 말하려 하던 그때, 소파에 앉은 박민정이 맑은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미 연지석에게서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부탁한 소식을 들었다.하민재의 얼굴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의 차가운 눈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다만 조금일 뿐이었다.연지석도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왜 안 잤어?”“잠이 안 와서.”박민정이 일어섰다.부하들은 하민재를 소파에 앉혔다.온몸이 피투성이인 그는 극심한 고통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곧이어 가정의가 도착해 하민재의 상처를 치료했다.그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태였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위층 방으로 데려간 후 이불을 펴주며 말했다.“아직 이르니까 얼른 자.”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너랑 남준 씨...”연지석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가 말한 대로 나도 복수했으니 이제 끝났어.”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다행이네.”그녀는 또 연지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남준 씨 널 괴롭히진 않았지? 어디 다치진 않았어?”박민정이 이렇게 묻자 연지석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깊은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유남준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박민정은 멈칫했다.연지석은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계속 물었다.“너와 유남준은 어쨌든 부부이고 아이도 있잖아. 내가 유남준에게 복수를 했다는데 나한테 화나지도 않아?”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민정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날은 이미 밝았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벌써 점심 12시였다.일어나려던 그때, 유남준에게서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언제 돌아올 거야?]박민정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침실을 나서자 가정부가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민정 씨, 세면도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박민정의 신분을 확실히 알지 못했기에 가정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박민정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세면을 마치고 가정부는 또 그녀를 식탁으로 안내했다.연지석은 식탁 한쪽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하민재가 있었다.그는 새벽에 비해 상태가 많이 나아져 보였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핏기도 돌았는데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일반인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연지석은 식사하지 않고 가죽 의자에 앉아 손에 서류 하나를 들고 있었다.박민정의 발소리를 듣고 그는 서류를 접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얼른 와서 밥 먹어.”“알겠어.”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가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내가 널 돌봐주기로 했는데 이제 네가 나를 챙기고 있네.”연지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우리 둘 중 누가 누굴 돌봐주든 상관없잖아.”맞은편에서 국을 마시고 있던 하민재는 이 말을 듣고 사레들려 크게 기침을 했다.“나 배부르니까 쉬러 갈게.”연지석은 하민재가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유부녀인 박민정을 건드리려 했다.그는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교류를 전혀 보고도 듣고도 싶지 않았다.연지석은 멀어져 가는 하민재의 뒷모습을 보며 박민정에게 설명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응, 괜찮아.”박민정은 하민재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연지석과 친구이지, 하민재와는 친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임신 중이라 박민정은 되도록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영향을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가정부가 건넨 식사를 받아 들고는 열심히 먹기 시
박민정의 뜻을 이해한 연지석은 목이 메었다.박민정은 약간 미안해하며 말했다.“윤우와 예찬이는 아직 국내에 있어서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연지석의 얼굴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다소 지쳐 보였다.“언제 떠나려고?”“모레.”연지석은 사실 박민정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 온 것도 친구로서 병문안하러 온 것이었다.박민정이 모레 떠난다는 말을 듣고 연지석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배불렀어?”“응.”“그럼 나가서 좀 걸을까?”“좋아.”두 사람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옛날에 연지석은 종종 박민정을 찾아와 함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지금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연지석과 함께 에스토니아 거리를 걸으며 두 사람은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을 깜박 잊었다.같은 시각,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계속 휴대폰을 들고 박민정의 답장을 기다렸다.서다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대표님.”“무슨 일이야?”“사모님께서 연지석과 함께 외출하셨어요. 지금 시내에 계십니다.”서다희도 방금 부하에게서 전해 받은 소식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민정이 일찍 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요즘 사람들 중 휴대폰을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졌다.서다희는 그와 몇 미터 떨어졌는데도 그의 주변에서 방출된 냉기를 느낄 수 있어 등골이 오싹해졌다.“제 약혼녀에게도 남사친 한두 명쯤은 있습니다. 저는 보통 눈감아 주죠.”서다희가 그 말을 뱉은 후 방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전에 박민정에게는 남사친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연지석에 유남준의 동생 유남우, 그리고 또 혼혈 스타까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유남준은 일어나려다 상처가 다시 찢어졌다. 전해져 온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서다희는 즉시 다가왔다.“대표님, 괜찮으세요? 의사 부를까요?”“괜찮아.”유남준은 바로 거
박민정의 회사는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직원 수는 500명이 넘었다.다만 진서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박민정이 회사의 실질적인 보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래서 박민정과 연지석이 회사 로비에 나타났을 때 프런트 직원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진 대표님을 찾으신다고요?”“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일반적으로 프런트에서는 쉽게 대표 비서실에 연락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와 그녀 옆에 있는 위엄이 넘치고 매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보자 그녀는 곧바로 대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비서가 전화를 받고는 진서연에게 보고했다.“진 대표님, 누군가 찾으십니다.”진서연은 하던 일을 멈췄다.“나 바쁘다고 해.”말을 마치자마자 진서연은 박민정의 문자를 받았다.[서연 씨, 나 지금 회사 밑에 있어.]진서연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비서를 다급하게 말렸다.“잠시만. 바로 내려가 볼게.”비서는 좀 의아했다.‘진 대표님 갑자기 왜 이러시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심한 태도를 보였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진서연은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박민정을 보자마자 그녀는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달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엉엉, 보스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이제 보스님이 일궈낸 이 왕국을 직접 운영하실 건가요?”진서연이 말할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박민정의 뺨을 스치면서 간지럽혔다.박민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 왕국은 서연 씨가 운영하면 충분해. 나는 그냥 한가로운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야.”박민정과 진서연이 함께 일한 지도 벌써 6년이 다 되어갔다.처음에는 둘이 작은 작업실을 운영하다가 서서히 이렇게 큰 PMJ로 성장하게 되었다.장난은 잠시 그만두고 진서연은 곧바로 박민정의 얼굴에 난 흉터를 발견했다.“보스님, 얼굴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회사가 커지고 일도 점점 많아지다 보니 진서연은 국내 소식을 확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