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가 물었다.“무슨 일?”“너 휴대폰이랑 컴퓨터 있어?”박예찬이 물었다.“난 없어. 근데 아빠한테 있어.”박예찬은 이 호칭을 싫어했다. 말끝마다 아빠, 아빠.“그럼 그 사람 컴퓨터로 계정 하나 로그인해서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생방송 해줘.”박예찬이 계정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보내고 어떻게 하는지 설명하며 사장 노릇을 시작했다.박윤우는 라이브 생방송이 궁금하기도 했기에 이내 유남준의 컴퓨터를 빌려 플랫폼에 로그인했다.생방송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비췄다. 모든 사람들은 눈앞의 아이가 이미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예찬아. 쪽쪽. 이모 보고 싶었어. 당장 로켓 하나 쏠게.”“예찬 오빠. 노래 알려줄 수 있어요? 저 올해 4살인데 엄마가 타자하는 법 가르쳐 줬어요.”“...”사방에서 선물을 쏘아댔다.박윤우는 금방 사태의 흐름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눈치를 챘다. 그는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다들 선물 보내지 마세요. 이성적인 소비. 알겠죠?”“와아아... 예찬이 귀여워. 똘똘하네.”각종 칭찬의 말이 댓글 창에 뒤덮였다.박윤우는 예찬이보다 더욱 관중들의 이쁨을 샀다.조하랑도 모니터 앞으로 와서 예찬이에게 말했다.“예찬아. 너보다 윤우가 더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예찬이는 매번 카메라 앞에 나올 때마다 잘 웃지도 못하고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우는 완전히 달랐다.“흥. 쟤는 다른 사람 비위를 제일 잘 맞추니까.”예찬이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질투나?”조하랑도 이런 예찬이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박예찬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이모. 내가 내 동생 질투하는 사람으로 보여?”조하랑이 삽시에 목이 메었다.“나야 동생이 없으니까.”“그럼 우리 엄마 질투 나?”“당연히 안 나지. 너희 엄마가 잘 지낼수록 난 기분이 좋으니까.”“그럼 됐어. 난 그냥 저 남자의 마음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게 싫어.”조하랑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윤우는 아빠가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저녁을 먹은 뒤 장명철 변호사는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뒤면 재판이 열릴 것이기에 준비가 되었는지 물었다.증거자료 같은 것은 이미 준비가 끝났다. 다만 장명철이 걱정한 것은 박민정이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가 이다. 하긴 법정에 출두해야 할 사람은 자신의 친엄마와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네. 준비되었어요.”의외로 박민정의 대답은 확고했다.한수민이 병에 걸렸든 아니든 그녀는 박씨 가문의 유산을 되찾아야 했다.마침 재판이 청명절 이후라서 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유씨 집안 본가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이튿날.박예찬이 돌아왔고 박민정은 형제 둘은 데리고 유남준과 함께 묘지로 가서 아버지와 은정숙의 제사를 지내고 차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가는 길에 윤우는 예찬이와 함께 라이브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예찬이는 귀찮은 듯 가끔 그의 말에 가볍게 대답을 한 두 마디 했다.그 시각. 유씨 저택 본가에서, 고영란은 손주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다.예찬이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애당초 예찬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갖은 애를 썼으니까 말이다.지금 와서 예찬이가 자신의 손주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다.윤소현은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의 잔뜩 흥분한 얼굴을 보고는 살짝 질투 나서 말했다.“어머니, 우리 거실에서 기다려요. 여기 서 있으면 찬 바람 불잖아요?”그녀는 임신한 데다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한수민한테 불려 가서 충분히 힘들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밖에 서서 박민정과 그녀의 아이를 마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달갑지 않았다.“난 안 추워. 넌 임신했으니까 들어가서 앉아 있으렴.”고영란이 담담하게 말했다.윤소현은 혼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고영란 앞에서 좋은 며느리처럼 행동해서 유남우와의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같이 기다릴게요.”윤소현이 그렇게 대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영란은 그저 두 아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마침내 유남준의 차가 들어섰고 차가 멈추자 박민정과
박예찬과 박윤우는 자신들을 향한 고영란의 진심에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란했다. 할머니와 엄마 가운데서 선택하라면 그들은 무조건 엄마를 선택할 것이다.그들이 지금 보기에는 고영란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과거에 고영란이 박민정을 괴롭힌 것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민정아, 남준아. 난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놀이공원에 갔다가 저녁에 올 테니까 둘이 같이 시간 보내.”청명절은 내일이었다.고영란도 오늘은 마음껏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네.”박민정도 거절하지 않았다.윤소현은 고영란이 자신한테 당부 한마디도 없이 이렇게 가버릴 줄 몰랐다.그녀는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아쉽게도 뱃속에 품은 이 아이는 유씨 집안의 진정한 손자가 아니었다.그녀는 반드시 두 아이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난 후, 다시 유남우의 아이를 가질 것이다.한편, 고영란은 두 손자를 데리고 놀이동산으로 왔다.“예찬아, 윤우아. 학교에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괴롭히는 애들은 없지?”고영란이 물었다.박윤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친구들 모두 저 좋아해요. 괴롭히는 사람 없어요.”“저도 없어요.”박예찬도 간단히 답했다.“그럼 다행이다. 만약 누가 너희들 괴롭히면 할머니한테 말해. 할머니가 혼내줄게.”고영란은 또 전에 박윤우가 유지훈한테 하마터면 맞을뻔한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윤우야. 너는 몸도 안 좋은데, 혹시 학교 가기 싫으면 할머니가 개인 교사 불러줄게.”박윤우는 곧장 거절했다.“저는 유치원 가는 게 좋아요.”고영란은 그 말을 듣고 자연스레 손주의 말을 따랐다.두 귀여운 아이들과 있으니 그녀는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젊어지는 것 같았다.“어휴. 박민정만 아니었으면 할머니가 너희를 데리고 키우는 건데.”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속으로 박민정을 질투하고 있었다.자신의 손주를 오랫동안 데리고 가더니 지금은 이렇게 컸으니 말이다.박예찬은 그녀 말의 다른 뜻을 깨닫고 물었다.“할머니. 그럼 저희 엄마가
고영란은 머리가 아파졌다. 어떻게 자신이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하지?그녀가 답하지 않자 박윤우는 연기력을 불태워 글썽였다.“흥. 엄마 좋아한다면서 증명도 못 하고.”“엄마가 딸 같으시다면서 엄마한테 밥 한 끼 해준 적 있어요? 엄마가 아플 때 보살펴 주거나 엄마가 힘들 때 위로해 준 적 있어요? 엄마가 심술부릴 때 들어준 적 있어요?”박예찬도 따라 물었다.고영란은 두 손자가 이렇게까지 말을 잘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종래로 박민정을 좋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밥을 해주고 보살펴 주는 건커녕,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자비로웠다.고영란이 한마디도 못 하자 박예찬이 말했다.“윤우아, 울지마. 우리 내리자. 할머니 분명 우리를 반기지 않으실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엄마가 오셨는데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셨을 리가 없잖아?”고영란은 급히 두 아이를 잡았다.“윤우야, 예찬아. 증명하라며? 조금 있다가 할머니가 증명해 줄게. 할머니는 정말 너희 엄마 좋아해.”두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인정하고 그녀를 따라 놀이동산으로 향했다.그날 밤. 놀이동산에서 돌아온 두 아이는 고영란이 박민정을 이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고영란은 화려한 에메랄드 장신구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자. 내가 너한테 주는 거다.”박민정은 약간 의외였다. 지금껏 유남준과 몇 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고영란에게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괜찮아요. 저 이런 거 안 써요.”박민정은 습관적으로 거절했다.고영란은 두 손자 앞에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해도 가져가. 이 장신구는 시어머니인 내가 결혼할 때 받은 거야. 내 마음이니까 받아.”고영란이 시어머니라고 자칭하는 것에, 박민정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박민정이 거절하려고 했는데 유남준이 대신 받았다.“어머니가 주시는데 그냥 받아.”한편 박윤우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엄마.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제 아내한테 주
고영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람을 시켜 음식을 내오게 했다.음식이 나온 후 고영란은 자기가 박민정을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음식을 박민정의 그릇에 짚어주기도 했다.“민정아,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많이 먹어야지.”박민정은 고영란이 180도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고영란의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결국 저녁을 다 먹고, 그들은 돌아와서 휴식을 취했다.두 아이를 재운 후, 유남준은 박민정을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박민정은 또 그와 함께 누운 채로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늘 당신 어머니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유남준은 그녀를 안은 채로 진작 눈치챘다는 듯 대답했다. “놀랄 것 없어. 그저 예찬이와 윤우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야.”박민정은 그제야 깨달았다.“그렇군요. 어쩐지... 읍...”유남준의 키스에 박민정의 말은 삼켜졌다....청명.비가 보슬보슬 내렸다.박민정은 아침에 두 아이한테 어두운색의 정장을 준비해 주었다.오늘은 청명이니 유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이다.“예찬아, 윤우 잘 챙겨줘. 이따가 사람이 많으면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박예찬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엄마.”박윤우는 입을 비죽거렸다.“엄마, 내가 바보도 아니고, 왜 길을 잃겠어요?”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웃고는 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졌다.“알겠어. 우리 애들이 가장 총명한 걸 나도 잘 알지.”두 아이는 얼굴이 붉어져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왜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지 의아해했다.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확인해보려고 했을 때, 유남준은 웃옷을 입지 않은 채로 박민정은 등지고 서 있었다.“왜 옷을 안 입었어요?”박민정은 괜히 부끄러웠다.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입혀줘. 난 앞이 안 보이니까.”박민정은 옷을 건네받았다. 평소에는 혼자서만 잘 입는 셔츠면서, 오늘은 왜 입혀달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알아서 입어요.”박민정이 옷을 돌려주었다.박민정은 받지 않
사람들은 아이와 유남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엄청 닮았다. 그 눈은 정말 검은 보석처럼 사람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오직 한 여자만이 박민정 얼굴에 생긴 흉터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민정 씨 얼굴은 무슨 일이래? 저렇게 긴 흉터가 남다니. 수술로 없애버리지.”박민정이 흉터를 없애지 않은 건,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 속의 흉터를 보면서 누가 예찬이를 해치려고 한 건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뼛속까지 기억해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그리고 더 강해져서 앞으로 아이가 다칠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유명훈은 상석에 앉았고 유지훈은 그의 옆에 깡패처럼 앉아있었다.다른 아이들은 유지훈을 보면 그를 건드리기 싫어서 도망가기 일쑤였다.유지훈은 유명훈이 가장 아끼는 아이니까 말이다. “네가 예찬이야? 둘이 정말 똑같게 생겼구나!”유명훈은 박예찬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이리 와, 할아버지가 좀 보자꾸나.”박예찬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유명훈의 앞에 왔다.“할아버지.”그의 목소리는 윤우처럼 발랄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중한 어른 같았다. “기다려 봐. 할아버지가 너랑 윤우를 데리고 친척들을 소개해 줄게.”박예찬과 박윤우가 유씨 가문에 온 후, 다른 유씨 가문의 친척들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건 좋은 기회다.“네.”박예찬은 진작 인터넷에서 이 친척들에 대해 찾아보았다. 박예찬은 이곳의 모든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회사까지 말이다.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해야 한다.지금 유남준은 눈이 먼 상태인데, 이 친척들이 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여도, 뒤에서는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다.만약 그들이 박예찬과 박윤우를 해치려고 한다면 박예찬은 자기를 보호하기 어려웠다.그러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유지훈은 달랐다. 유지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얘기했다.“할아버지, 제가 할게요!”유명훈은 유지훈의 말을 듣고 환하게
유지훈은 박예찬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뭐라고 했다고.”유지훈은 박예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때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박윤우는 박예찬의 손을 잡고 얘기했다.“형, 아까 우리보고 굴러들어 온 자식이라고 그래서 멍청하다고 했어.”박예찬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연기는 이제 끝이다. 그는 아예 유명훈의 앞에서 친척들의 이름을 바 부르기 시작했다.가장 가까이 서 있던 유성혁과 최현아부터였다.“삼촌, 숙모.”그리고 하나씩 불렀다.“셋째 이모할머니, 사촌 삼촌, 사촌 숙모...”유씨 가문의 친척은 아주 많았다. 박예찬은 거의 반 시간 동안 그들을 불렀다. 단 한번도 틀리지 않고 말이다.모든 사람은 그 모습에 놀랐다.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이렇게 빨리 기억하다니.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박예찬은 모든 친척들을 다 부른 다음에 유지훈을 쳐다보았다.유지훈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얘기했다.“어떻게 다 기억한 거야.”만약 한 번에 100여 명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라고 한다면 분명 외우지 못할 것이다.유지훈의 부모는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면서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박예찬은 그 말을 듣고 비꼬면서 말했다.“이게 어려운 일인가?”유지훈은 약간 말을 더듬었다.“하지만, 아, 아까는 기억 못 했다면서.”옆의 박윤우가 웃으면서 말했다.“겸손이란 거 몰라?”유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유명훈은 옆에 앉아서 기뻐하며 말했다.“됐어, 됐어, 싸우지 마. 사촌지간이니 친하게 지내야지.”말을 마친 유명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박예찬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김훈이 박예찬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총명한 증손자가 있다면 그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박윤우를 보면서 확실히 놀랐다.박예찬의 기억력이 좋은 것은 맞으나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거의 한 번 보면 다 기억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유명훈은 두 아이더
제사를 마친 후, 그들은 산을 올라 청소를 시작했다.유지훈은 박예찬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 때문에 어떻게 체면을 다시 세울지 고민하고 있었다.최현아는 유지훈과 함께 차에 타서 당부했다.“지훈아, 할아버지한테 잘 보여야 해. 그래야 저 두 자식을 깔아뭉갤 수 있어. 알겠어?”유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꼭 저 자식들이 내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 거니까.”“응.”최현아는 유지훈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얘기했다.“그리고, 박윤우한테 무슨 병이 있지 않았던가?”“알겠어요, 엄마.”유지훈은 어린 나이지만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유지훈이 떠나자 윤소현이 곁에 왔다.“형님.”최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임신 했으면서 이런 곳에는 왜 따라왔어?”“집안 분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요.”윤소현이 대답했다.최현아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면서 생각만 많다고 말이다.윤소현은 최현아의 비웃음을 보지 못한 듯, 최현아를 보고 계속 얘기했다.“박민정 씨의 아이들은 참 총명하긴 해요. 지훈이보다 더 똑똑한 것 같더라고요. 제 배 속의 아이가 비교당할까 봐 걱정돼요.”윤소현은 일부러 최현아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얘기했다.최현아는 다른 사람이 자기 아들을 비꼬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그렇게 총명하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을 다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봤을 때는 할아버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먼저 외우게 한 것 같아요.”윤소현은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 하면서 물었다.“정말요? 그건 아닌 것 같던데요. 형님, 아무리 그래도 그 쌍둥이들이 더 훌륭하다는 건 사실이에요. 아까도 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박예찬이 바로 유남준 어릴 때랑 똑같다고요. 들어보셨죠? 유남준 씨는 어릴 때 관리 부문의 팀장도 논리로 이기는 사람이었어요. 지금 박예찬이 이렇게 총명한데, 더 크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될까요.”윤소현은 떠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편하게 지시하세요.”주영리를 본 순간 박민정은 이번 직장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꼭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일자리가 생기면 유남우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주영리는 박민정의 태도에 더욱 거만해져서 온갖 잡다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일을 지시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그저 허드렛일이었다.이 직원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저 직원의 서류를 출력하는 일 따위였다.심지어 주영리는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했다.“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면 여기에 다 넘겨. 여유롭게 써먹으면 되잖아.”이는 명백히 박민정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일을 떠넘겼다.“듣자 하니 번역이 전공이라던데, 이 문서들 좀 번역해 줘요. 절대 실수하면 안 돼요.”“제 것도 부탁드려요. 오늘까지 해야 해요.”“...”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박민정에게 맡기며 떠넘기기에 바빴다.그녀에게 쏟아진 업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오후에는 고객 응대를 위한 댄스 연습도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며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동료들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비웃었다.“원래부터 이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나 봐. 앞으로 일 다 넘겨도 되겠네.”“그러게. 공짜 노동력을 안 써먹으면 바보지.”주영리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박민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오래 못 버틸걸.”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박민정을 험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박민정은 모든 서류를 정리해 들고 곧장 댄스 스튜디오로 향했다.주영리는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재빨리 가로막았다.“민정 씨, 일 다 끝냈나
홍주영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는 정말로 누군지 모릅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윤소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홍 비서가 무슨 내막을 알고도 숨기고 있다면 정말 끝장인 줄 알아요.”매서운 경고를 남긴 채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홍주영은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있었던 일을 유남우에게 문자로 알렸다.유남우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간발의 차로 윤소현에게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주영아,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그가 답장을 보냈다.홍주영은 그의 메시지를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정말로 둘째 도련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홍주영은 그 눈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며칠 전,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너도 이제 나이가 얼마인데, 변변한 직장도 없으면서 결혼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니? 설마 남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이번엔 꼭 집에 와서 소개팅 나가야 해.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네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겠니?”“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엄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중에 네가 혼자가 늙을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아.”홍주영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둘째 도련님.”“무슨 일이야?”“어머니가 저를 부르셔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녀와.”전화를 끊기 전 그는 물었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홍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별일은 없고요. 그냥 어머니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홍주영은 유남우를 모신 이후로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올해 설에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와 대화 중인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을 자제했으나 살짝 보니 그는 한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홍주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는 보지 않으려 했다.마음속에서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알던 유남우는 항상 곧고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설마 바람을 피우는 걸까?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윤소현일 리 없다는 건 분명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홍주영은 유남우가 여전히 박민정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었다.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실망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퇴근길에서 홍주영은 한 차량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발견했다.차 창문이 내려오자 나타난 건 고고하게 웃고 있는 윤소현의 얼굴이었다.홍주영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윤소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홍 비서, 걱정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홍주영은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차에 올라타서 이야기하죠,” 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여기서 말씀하시죠.”그녀는 윤소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오늘 유남우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한 일로 인해 윤소현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하지만 홍주영은 틀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차에 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가 그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그녀는 홍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제야 홍주영은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윤소현은 직접 메뉴를 가져와 홍주영에게 건네며 말했다.“먹고 싶은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
“방금 그 여자요? 이제 막 온 사람이잖아요. 그 춤을 완전히 익히지도 않았는데요.” 리더는 여전히 억울해했다.그녀는 겨우 얻은 리더 자리를 놓칠 수 없다. 이번 공연만 잘 끝내면 성과가 두 배로 오를 텐데 이제 와서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주 비서가 방금 못 했던 동작, 그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잖아.”무용 선생님의 눈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비서, 전에 나한테 사람을 바꾸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바꿨는데 왜 불만이야?”주영리라는 이름의 리더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럼 안 하면 되죠. 제가 이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이 매니저님에게 뒷문으로 부탁한 일, 전 꼭 대표님에게 보고할 거예요.”무용 선생님은 주영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가서 고자질해 봐.”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이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그 무용 복장은 두고 가.”주영리는 결국 무용 복장을 남기고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박민정을 수십 번 욕하며 씩씩대었다.박민정은 집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재채기를 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국내에 도착했어요? 오늘 면접은 성공했는데, 인턴이에요.”그때 해외에서 돌아온 유남우는 윤소현에게 아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요구받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안고 한쪽으로 갔다.윤소현은 그를 지켜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남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봤다.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봤지만 그녀는 박민정의 메시지를 발견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이 메시지가 박민정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재빨리 유남우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서 열지 못했다.그
“어때요? 아무거나 해내면 돼요.” 무용 선생님이 박민정에게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갔다.무용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박민정을 주목하며 그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기다렸다.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그들은 박민정이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박민정이 그 동작을 따라 하긴커녕, 아마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동작을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소화했다.“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리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반 달 동안 연습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작을 박민정이 그렇게 쉽게 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언제 우리 회사에 이런 춤 잘 추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또 다른 사람이 투덜거렸다.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을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어느 부서 사람이에요? 제가 매니저님께 얘기해서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랑 같이 춤 연습을 해요. 공연 끝난 후에는 보너스도 줄게요.”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에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에요.”무용 선생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 그럼 면접은 합격했나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합격 못했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한데, 정말 판매직에 딱 맞을 사람인데.”박민정은 자신의 장점은 알지만‘경력'란을 채우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잠깐만 기다려 줘요.”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잠시만요, 금방 돌아올게요.”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네.”무용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우리 회사
실내는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고 박민정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며 아팠다.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어색하게 말했다.“저는 예전에 어떤 일도 해본 적이 없어요.”매니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전업주부로 계셨던 건가요?”이곳에서는 전업주부도 일종의 직업으로 여겨졌다.하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매니저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안 했다는 거라면 몰라도 졸업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일한 적이 없다니.‘이건 게으르거나, 아니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매니저는 곤란한 듯 말했다.“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는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표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녀는 자신의 이력서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실,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왜 졸업 이후로 단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던 걸까?’유남우는 그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전혀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건물 밖으로 나온 박민정은 각양각색의 면접자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들은 학력도 뛰어나고 경력도 풍부해 보였으며 어떤 이는 그녀보다 더 어려 보였다.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자리를 다시 찾아보자.’그녀는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더 많은 공고를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한 댄스 스튜디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안에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한 댄스 강사가 리더 자리에 서 있는 한 여성을 향해 소리쳤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2주나 배웠는데 아직도 실수야? 2주 후면 해외 VIP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괜찮겠어?”리더로 보
아침이 밝자 의사가 집에 방문해 박민정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약을 처방했다.의사는 약을 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당부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유남우는 그를 배웅하며 차 안에서 물었다.“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일을 꿈에 꾸는 거죠?”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그건 정상입니다. 어떤 최면이라도 환자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녀의 상태는 안정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매달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그러나 의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나 익숙한 물건을 접하면 기억이 자극받아 최면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의사를 배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와 박민정이 약을 다 복용하는 것을 확인했다.약을 먹은 박민정은 졸음을 느꼈지만 일자리 지원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고른 회사는 현지에 위치한 곳으로, 출장도 필요하지 않아 유남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그는 박민정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윤소현의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씨, 오늘 새해잖아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집에는 나랑 다혜밖에 없는데, 우리랑 시간을 안 보내줄 거예요?”그녀의 말에도 유남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소현아, 너도 알잖아. 나 지금 호산 그룹에서의 기반이 불안정해. 나도 다혜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하지만 윤소현은 물러서지 않았다.“대체 어떤 일이기에 꼭 외국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언제쯤 돌아올 건데요?”그는 잠들어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며칠 후에.”“안 돼요! 늦어도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