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원 별장.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마지막으로 한수민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잔뜩 화가 난 한수민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배를 움켜쥔 채 사지를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거짓 같진 않았다.게다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암을 핑계로 삼는 건 너무 말이 안 됐다.고민 끝에 박민정은 끝내 병원에 직접 가보기로 결심했다.시립병원.박민정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김인우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치게 되었다.박민정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른쪽 얼굴에 있는 흉터는 여전히 뚜렷하게 보였다.“형수.”김인우는 유치원에서 예찬이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박민정은 그에게 예전만큼 차갑게 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안녕하세요.”그녀는 정중하지만 거리를 두며 대답하고는 곧바로 위층의 병실로 향했다.김인우는 약간 의아해하며 옆에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어디 아프대?”비서는 즉시 조사에 나서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리고 비서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김인우에게 알렸다.“박민정 씨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 같아요.”“한수민?”“네.”“무슨 병으로 입원했대?”비서는 의료 기록을 확인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궁경부암 말기입니다.”김인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자궁경부암 말기라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고 길어야 1, 2년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다.“기록이 거짓이 아닌 건 확실해?”김인우는 한수민이 곧 감옥에 가야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거짓일 리 없습니다. 우리 병원의 전문 의사가 진단한 것이라 문제없을 겁니다.”비서가 대답했다.김인우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잘 조사해 봐. 이런 일에 오류가 있으면 안 되니까.”“네, 알겠습니다.”...다른 한편.박민정은 이미 한수민의 병실 앞에 도착하고는 문을 두드렸다.한수민은 윤소현이 돌아온 줄 알고 활짝 웃은 채 말했다.“얼른 들어와.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그래.”하지만 문이 열리고 박민정의 얼굴이 보이
한수민은 멈칫했다.박민정의 말에 뼈가 있다는 걸 느끼고는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아버지 교통사고를 당하신 게 당신과 관련이 있죠?”박민정이 물었다.한수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그런 한수민의 반응을 보고 박민정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더 따져 묻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도둑이 제 발 저린 한수민이 물었다.“네 아버지가 남긴 유서에 다른 얘기도 있었니?”박민정은 그녀를 낯설게 바라봤다.눈앞의 여자가 자기의 친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인생을 보낸 여자가 맞나 싶었다.“어떻게 생각해요?”박민정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되물었다.한수민의 얼굴색이 조금 변하더니 그녀는 박민정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유서 내놔. 내가 한 번 봐야겠어.”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법정에서 공개할 거니까.”유서에는 그저 박민호가 무능할 경우 박민정은 박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한수민에게 불리한 얘기는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은 한수민을 의심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싶었다.한수민의 아랫배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는지 얼굴에 식은땀을 흘렸다.“너 같은 불효자식이 어디 또 있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키우지 말았어야 했는데.”박민정은 한수민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정말로 중병에 걸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게 바로 인과응보이지 않던가?박민정이 떠나려 하자 한수민이 또 그녀를 불렀다.“내가 왜 소현이를 좋아하고 너를 싫어하는지 알아?”박민정은 발걸음을 멈췄다.“소현이는 너보다 훌륭하고 말을 잘 들어. 나를 더 닮았지. 하지만 너를 보면 역겹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한수민은 이 말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욕을 퍼부었다.“넌 정말 더러운 년이야. 네 아버지가 기어코 너를 남기자고 하지 않았다면 난 널 절대 키우지 않았을 거라고. 넌 인간일 자격도 없어. 너를 낳고 키운 나를 고소하려 하고, 내가 아픈데도 와서 비웃으려 하다
병원 병실.박민정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민은 갑자기 발작한 병 때문에 고통을 꾹 참으면서 몸부림쳤다, 윤소현이 병실에 들어왔을 때, 한수민은 병실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난감해하면서 얘기했다.“소현아, 가서 간병인 좀 불러줄래? 내가 못 참고 그만 이불에...”윤소현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무슨 일인지 눈치채고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한수민을 쳐다보았다.“엄마, 나이가 몇인데 침대에 소변을 봐요?”“미안해, 소현아. 내가 일부러 이런 건 아니고 병 때문에 그래. 그래도 더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지?”한수민은 윤수현 앞에서 항상 작아졌다.한수민은 모든 돈을 윤씨 가문에 주었다. 하지만 윤석후가 이 돈을 다 관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수민이 모든 돈을 관리하고 있었다.그래서 윤소현은 한수민이 죽고 그 권한을 자기한테 넘기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수민을 관심하는 척 해야했다.“엄마, 내가 왜 엄마를 더럽다고 생각하겠어요. 난 엄마의 친딸이에요. 아까는 약간 놀라서 그랬어요. 바로 간병인을 불러올게요 이따가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 선생님도 불러서 한번 확인해 봐요.”“응.”한수민은 안심이 되었다. 윤소현은 그녀의 친딸이니 절대로 그녀를 배신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다.윤소현은 얼른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와서 처리하라고 했다.간병인은 얼른 와서 한수민의 이불을 갈아주었다. 유명한 무용수였던 한수민이 지금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의사의 치료 덕분에, 한수민의 몸은 겨우 나아지고 있었다.윤소현은 이곳에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대고 나갔다.한수민 앞에서 효도하는 척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지, 그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없다.밖에 나와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신 윤소현은 얼른 박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 윤소현은 누나다운 기세로 말했다.“박민호, 엄마가 아픈데 언제 돌아올 거야?”박민호는 현재 유남우의 도움을 받고 자기 회사를 차렸다. 한수민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박민호
박민호의 말을 들은 유남우는 이내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우리는 민정 씨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박민호는 박민정을 납치해 와서라도 유남우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었다.“대표님. 모르시겠지만 누나가 유남준과 결혼 했을 때, 유남준은 저희 아버지를 잘 모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못살게 굴고 저희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을 했어요.”박민호는 지금도 자신의 집안의 몰락이 자기 혼자만의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는 한수민이 유씨 가문에 가서 돈을 빌린 일도, 그가 단번에 회사와 아버지의 유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 일도 잊어버렸다.“걱정하지 마요. 앞으로는 내가 꼭 도와줄테니까요.”유남우가 대답했다.박민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는 감동이 서려 있었다.그는 속으로 반드시 크게 성공하여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다....한편, 윤소현은 전화가 끊긴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들인 박민호도 자기 엄마를 돌보지 않는데 왜 딸인 자신이 돌봐야 하는 거지?윤소현은 핸드폰을 들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윤소현은 알지 못했다. 한수민이 그 시각 윤소현에게 가방을 돌려주려고 왔다가 그녀의 말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침대에 오줌을 쌌는데 진짜 더러워 죽겠어요. 들어갔는데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니까요. 전 양어머니의 시중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저 사람 시중을 들어야 한다니... 친아들도 상관하지 않는 여편네를... 진짜... 저 사람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아니까 이러지 아니었으면...”말을 다 맺지 못한 윤소현이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한수민이 서 있었다.그녀는 얼른 통화를 끊고 애써 웃어 보였다.“엄마, 왜 나오셨어요? 걸을 수 있어요?”윤소현은 다급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윤소현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수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수민은 한순간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착각했다.하지만
한수민이 앞으로 혼자 걸어 나가자 뒤에 있는 간병인들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불쌍하시지. 저렇게 큰 병에 걸렸는데 남편과 아들은 오지도 않고 딸마저도 그냥 얼굴만 보이고 가고 말이야.”“그러니까. 환자분 따님이 치장은 화려하게 하고 다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자기 엄마가 침대에 소변을 봤다고 인상을 쓰는 거, 아까 봤어?”“돈이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니네.”등 뒤 간병인들의 말소리를 들은 한수민은 머릿속에 방금 병원 입구에서 들은 윤소현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순간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 아들은 그냥 바빠서 못 온 거고 내 딸도 나를 사랑하니까 매일 나 보러 오는 거라고. 그저 질투나 하는 주제에!!”간병인들은 바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수민은 병실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귓가에는 방금 윤소현의 말과 간병인들의 대화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침대에 오줌을 쌌는데 진짜 더러워 죽겠어요. 들어갔는데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니까요. 전 양어머니의 시중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저 사람 시중을 들어야 한다니...”“환자분 따님이 치장은 화려하게 하고 다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자기 엄마가 침대에 소변을 봤다고 인상을 쓰는 거, 아까 봤어?”한수민처럼 저렇게 거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딸이 자신한테 진심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그녀는 모든 희망을 딸에게 걸었다. 다시는 춤을 추지 않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윤소현을 위해 박씨 가문 재산을 모두 윤씨 가문에 넘겼다.한수민은 휴대폰을 들어 윤석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또 무슨 일이야?”윤석후의 말투에는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한수민은 윤석후가 귀찮아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여보. 일 아직 안 끝났어요? 언제 저 보러 와요? 나 병원에 혼자 있기 싫어요.”“말했잖아, 회사에 일이 생겨서 바쁘다고. 간병인도 두 명 붙여줬잖아. 심심하면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위해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는 남자를 버린 것을 후회했다.“형식 씨. 나 엄청 미워하겠지?”한수민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을 위로했다. 윤석후는 정말 바쁘고 윤소현도 진짜 일이 있어서 자신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족 단톡방을 열었다. 안에는 박민정, 박형식, 박민호, 한수민. 네 사람이 있었다.채팅방에는 아직 박형식이 보낸 문자가 남아 있었다.[여보. 나 이 옷 입고 우리 딸 결혼식에 가면 멋있겠지?]박민정: [아빠 멋있어요.]한수민: [못생겼어요.]박형식: [그럼 다른 옷으로 바꿔서 서프라이즈 해줄게.]이것이 그가 채팅방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한수민은 스크롤을 위로 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과의 채팅 페이지를 열었다.박민정이 한수민이 박민정을 낳아준 은혜를 모두 갚은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스크롤을 위로 올리며 6년 전 박민정과 자신이 나눈 대화를 보게 되었다.[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오늘 제가 케이크를 샀는데 드셨어요?][엄마. 화내지 마세요. 화내면 몸에 안 좋대요. 엄마 감기에 걸리셨으니까 제가 배즙 만들어 드릴게요.][엄마. 저 이혼하고 싶어요. 우리 이제 더는 다른 사람한테 빌붙어 살지 말아요.][엄마.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모시고 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하지만 한수민이 박민정에게 보낸 답장은 모두 하나같이 차가웠다. 그녀는 박민정이 보낸 문자를 보며 박민정이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 듣고 귀여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한수민이 무용수라는 것을 알기에, 박민정은 무대에 올라서 한수민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한수민은 아직도 기억났다.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발이 온통 피투성이였다는 것을.또 한 번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한수민이 산 위에 있는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자 박민정이 위협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다 주려다 하마터면 다리를 다칠 뻔한 적이 있다. 수많은 기억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유남준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아직도 왜 그 사람이 저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그저 딸을 싫어해서, 그저 냉혹한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제가 오늘 뭘 본줄 알아요? 그렇게 아프면서도 아픈 걸 꾹 참고 윤소현에게 가방을 전해주러 나왔어요. 윤소현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했다고요. 전혀 한수민 씨답지 않았어요!”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있잖아.”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화 안 내요?”“그냥 퉁칠게.”유남준이 물었다.“뭐를요?”“내가 너를 3년 동안 무시하고, 넌 애들 데리고 4, 5년을 지냈으니 퉁 친 거 아니야?”유남준이 넌지시 물었다.박민정은 목에 뭐가 막힌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돌아서서 그를 안았다.그녀가 주동적으로 안자 유남준은 온몸의 피가 굳은 듯 얼어버렸다. 하지만 곧장 손을 올려 그녀를 꽉 껴안았다.그는 애써 욕망을 억누르고 박민정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마른침을 삼켰다.“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또 마음대로 떠나면, 알지?”박민정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유남준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반격을 했다....이튿날. 박윤우는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부모님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해서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이때 도우미 아줌마가 얼른 말렸다.“우리 은우. 엄마 아빠 방해하지 말자. 어젯밤 늦게 주무셨 거든.”도우미는 직원 방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방에서는 반대편 방 불이 꺼졌는지 아닌지 볼 수가 있었다.박윤후가 물었다.“아줌마. 엄마 어제 같이 잤어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침실 불이 하나만 켜졌어. 오늘 청소하려고 가보니까 다른 방에는 사람이 없더라고.”박윤후는 어제 돌아오자마자 자서 부모님이 같이 자는지 아닌지를 몰랐다.그는 약간 후회했다
유남준은 본능적으로 박민정이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고 카드를 받지 않았다.“카드는 이미 유치원 주식 사는 데 썼어요. 지금은 그렇게 돈 쓸데도 없고, 그리고, 아무래도 제 돈은 제가 벌어서 쓰려고요.”박민정이 해명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남준은 안심했다.“네가 번 돈은 네 돈이고, 내가 준 돈도 네 돈이야. 다르지 않은 것 같아도 달라.”유남준이 잠시 머뭇거렸다.“남편은 당연히 아내한테 돈을 맡겨야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있는지 진짜 알고 싶지 않아?”박민정은 당연히 궁금했다.“얼마 있는데요?”유남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셀 수 없을 만큼.”이것도 대답이라고 하는 건가?박민정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유남준은 자연스레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민정아. 며칠 후에 선물 하나 줄게.”“괜찮아요...”박민정은 무심코 거절했다.유남준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거절은 거절할게.”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결국 유남준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 데이트하러 갔다.박민정은 무슨 특별한 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놀이공원이었다. 임산부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온다고?이 남자. 머리에 뭐가 문제가 있는 건가.결국 두 사람은 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만 탔다.저녁에는 또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관에 통째를 대관했다. 여긴 시내 중심에 있는 영화관이다. 하지만 유남준이 전체를 대관해서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 입구에 선 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예전에 매번 영화 보러 오고 싶다고 난리 치더니. 앞으로는 매주 영화 보러 오자, 어때?”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은 매주 이렇게 이목을 끄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집에서 봐요. 이렇게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고 소리만 들을 수 있잖아요. 집에서는 소리도 크게 들을 수 있고 사람도 없어요.”“알았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유남준이 고분고분 말을 듣자 박민정은 어두운 빛을 통해 유남준의 훈훈한 옆모습을 보면서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