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는 유남준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로 손가락을 굽히며 세는 척했다.“한 명, 두 명, 세 명... 적어도 열 몇 명은 되는 것 같은데요? 다 잘생겼었어요.”열몇 명이라...그 말에 유남준은 무조건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예전에 그가 박민정과 결혼했을 때는 그녀 옆에 다른 남자가 전혀 없었었다. 그런데 이제 박민정을 좋아하는 남자가 열몇 명이나 있다니?“그래서 민정이가 그 사람들과 만났었어?”박윤우는 침대에 누워서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지면서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저도 몰라요. 제가 계속 엄마 옆에 따라다닌 게 아니라서요.”그러자 유남준은 벌떡 일어섰다.“너 잘 쉬고 있어.”박윤우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유남준의 손을 잡았다.유남준의 큰 손을 만지자 박윤우는 처음으로 아빠의 손을 잡는 느낌을 받았다.“아저씨, 어디 가려고요?”유남준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왜? 또 뭐 있어?”박윤우는 장난을 이쯤에서 끝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남준을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했다.“그거 알아요? 저 예전에 아저씨를 티브이 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엄마가 티브이에서 아저씨를 볼 때마다 넋이 나가 있었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자.”“네.”박윤우는 유남준의 말을 듣고 자려고 했다.유남준은 밖으로 나가서 경호원에게 몇 시인지 물었다.경호원이 대답했다.“벌써 9시가 됐습니다.”9시가 되었는데도 안 돌아오다니.유남준은 병원을 떠나지 않고 박윤우 병실에 딸린 작은 침실로 갔다.한 편.박민정은 에리와 토론하면서 곡에서 이상한 부분을 적어놓고 돌아가서 수정하려고 했다.“이번에도 예찬이랑 윤우가 같이 안 왔네. 애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에리가 아이들에 대해 묻자 박민정은 윤우가 입원했고 예찬이는 친구네에서 지내고 있다고 간단히 대답했다.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에리가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타. 집까지 바래다줄게.”에리는 지난
훤칠한 키의 유남준은 입구 앞의 한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앞이 보이진 않지만 보디가드에게서 박민정과 에리가 이미 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유남준을 발견한 박민정은 발걸음을 멈췄다.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에리 앞에 섰다.“나 도착했으니까 먼저 돌아가.”그 말을 들은 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다음에 봐.”에리의 차가 천천히 길옆에 섰다.그가 차에 올라탄 걸 확인하고서야 박민정은 돌아서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남준 앞에 온 후 박민정이 입을 열었다.“나 이제 윤우 만나러 가도 돼요?”차가운 유남준의 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시간이 몇 시인데. 윤우는 이미 잤어.”유남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벌써 열 시가 넘었다.에리와 곡에 관해 토론하느라 너무 몰입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알겠어요. 그럼 내일에 보러 갈게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정말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걱정하는 척하는 거야?”박민정이 주먹을 꽉 쥐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게 무슨 말인지는 네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유남준은 그렇게 박민정 곁을 스쳐 지나갔다.박민정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또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윤우를 못 만나게 하는 것도 모자라 내 진심을 의심하다니. 열 달 품어 낳은 아이를 내가 왜 걱정하는 척하겠어?’박민정은 그와 싸우기도 귀찮아 먼저 병원에 돌아가서 쉬고 내일 아침 다시 윤우를 만나러 오기로 했다.박윤우의 옆 병실에는 유지훈이 입원해 있었다.하루 동안의 치료를 받은 그는 마침내 생기를 되찾았다.“엄마, 아빠, 다 그 재수 없는 놈 때문이에요.”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유지훈은 바로 부모에게 일러바쳤다.최현아가 그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아들,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전에 박민정과 박윤우를 통해 그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지만 유지훈에게서는
“뭐가 그렇게 급해? 아침까지 기다리기 그렇게 힘들어?”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았다.“남준 씨,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윤우 엄마예요. 윤우를 만날 권리가 있다고요.”“내가 너무하다고?”유남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그럼 나와 윤우를 4, 5년 동안 떨어져 있게 한 것도 너무하잖아?”박민정의 가슴은 세게 내리쳐진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점심에 다시 보러 오죠.”유남준은 그녀에게 다가가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점심에 윤우를 본가로 데려갈 거야.”본가로 데려간다고?박민정은 갑자기 기억이 돌아온 그날, 유명훈과 고영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안 돼요. 윤우는 꼭 나랑 같이 있어야 해요.”“당신과 같이 있어야 한다고? 그럼 당신이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걸 윤우에게 보이겠다는 거야?”유남준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다른 남자와 연애라니? 내가 언제 다른 남자와 연애했는데?’“그게 무슨 헛소리예요?”“변명할 시간에 휴대폰이나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야.”유남준은 출근해야 했기에 더는 그녀와 싸울 시간이 없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박민정은 깨어난 후 바로 윤우를 보러 올 생각에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았다.휴대폰을 보니 조하랑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민정아, 너 에리도 알아? 두 사람 정말 너무 어울린다. 에리가 너보다 몇 살 어리지? 그럼 연하남이네. 대박, 너무 좋아...]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리고 네이버를 켜자마자 1면에 뜬 사진을 발견했다.한 사진은 두 사람이 레스토랑 앞에 있을 때 찍힌 것이었다. 다른 한 사진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원에 돌아가는 길에 찍힌 듯했다.기사 타이틀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톱스타 스캔들! 한밤중 유부녀와의 밀회, 그녀의 정체는?’클릭해 보니 에리와 박민정이 사귀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박민정이 유남
“그렇게 많은 돈을 물어야 해?”에리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네가 그동안 번 돈은 기부했거나 흥청망청 써버렸지. 우리가 무슨 수로 갚아?”매니저가 한숨을 푹 쉬었다.에리는 매니저더러 잘 계산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집을 팔아야만 위약금을 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럼 집을 팔지, 뭐.”그에게 있어서 집이나 차와 같은 재산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장난하는 거야?”매니저는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에리와 광고 계약하려던 회사에 다시 연락했다.하지만 그 회사들도 기사를 접했기 때문에 에리를 모델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 보자고 했다.매니저가 IM 그룹에도 문의했는데 드디어 다른 대답이 나왔다.“3년 계약하면 우리 회사에서 에리 씨의 스캔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다희였다.매니저는 에리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에 동의했다.IM 그룹에 대해 조사했는데 요즘 성장세가 워낙 엄청나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었다.에리는 IM 그룹의 배후가 유남준인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니저가 계약하기로 약속했다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그럼 오늘 IM 그룹 한 번 가보자.”“알겠어.”에리는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한편, IM 그룹 대표 사무실.서다희가 유남준에게 이미 3년 계약을 마쳤다고 알렸다.그 말인즉 에리는 IM 그룹 밑에서 3년 동안 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차가운 얼굴을 한 유남준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언제 온대?”“오늘 오후에 온다고 합니다.”“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유남준이 물었다.“네, 잘 알고 있습니다.”에리가 겁도 없이 감히 박민정과 스캔들이 나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은 분명 그가 인생에 회의감이 들 때까지 부려 먹을 것이다.다른 한편, 병원.박민정은 에리에게 전화해 자기가 직접 나서 해명할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에리
박민정은 어색한 마음에 다급하게 벨 소리 크기를 낮추려 했지만 실수로 휴대폰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리고 하필 이때 조하랑이 보낸 음성 메시지가 연이어 재생됐다.[정말 에리랑 연애하는 거야? 나 일찍 알려주지, 엄청 만나고 싶었는데.][에리가 한 번도 연애해 본 적이 없다며? 순정 연하남이 유남준보다 몇백 배 나은지 몰라...]박민정은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우려 했지만 휴대폰은 좌석 밑에 끼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얼굴까지 빨개졌다.운전하고 있던 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봤는데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시선을 거두고 가림막을 내렸다.박민정은 겨우 휴대폰을 손에 넣은 뒤 음성 메시지를 껐다.유남준의 얼굴색이 한껏 어두워졌다.“그냥 작곡 얘기를 한 거라며? 연하남 좋아했어?”“다 오해라고 했잖아요.”박민정은 바로 조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나와 에리 씨는 그저 업무 관계일 뿐이야. 어제도 그냥 작곡 얘기만 했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조하랑은 그제야 더는 캐묻지 않았다.차 안의 공기는 한껏 무거워졌다.박민정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는데 본가가 아닌 두원 별장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아챘다.“우리 본가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유남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두원으로 돌아가고 있어. 앞으로 윤우를 치료할 의사도 모시고 공부를 가르쳐줄 선생님도 모실 거야.”박민정은 거절할 수 없었다.“알겠어요.”그동안 박민정은 일로 바빴고, 또 윤우의 몸 상태 때문에 계속 윤우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었다.그 생각만 하면 박민정은 윤우에 대한 미안함뿐이었다.두원에 도착하고.윤우가 다른 차에서 내렸다. 박민정은 발견하자마자 그는 달려가며 말했다.“엄마.”박민정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쓰다듬었다.“몸은 좀 어때? 아직도 아파?”윤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제 괜찮아.”“그럼 다행이네.”유남준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봤다.바로 이때, 전화 한 통이 이
최현아는 박윤우를 보자마자 바로 목소리를 낮추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엄마, 바로 쟤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같아 보여도 심보가 얼마나 못되었는데.”그 얘기를 들은 최현아의 어머니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박윤우를 바라봤다.“네가 우리 지훈이를 해친 거야?”유지훈은 외할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든든한 자기 편이 있었으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박윤우를 바라봤다.‘자식, 감히 내 유씨 가문 후계자의 자리를 탐내? 꿈도 꾸지 마.’어젯밤에 최현아는 아들에게 박민정이 뒤를 봐주는 사람 없으니 앞으로 유씨 가문은 모두 그의 것이라고 했다.박민정은 박윤우의 손을 꼭 잡았다.“제가 그날 충분히 똑똑하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 제가 한 번 또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유명훈은 지금 당당한 박민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민정아, 엊그제 지훈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잖아. 넌 당연히 윤우 입장에서 말했겠지. 오늘 지훈이가 그러던데 전혀 윤우를 때릴 마음이 없었다고 했어.”“그럼 두원 별장에는 왜 왔대요? 설마 윤우랑 놀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박민정이 유지훈 가족이 하려고 했던 변명을 미리 말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명훈은 계속 유지훈의 편을 들었다.“애들은 싸워도 금방 잊어버려, 오래 안 간다고. 윤우와 다른 친구들 찾아가 놀려고 했겠지. 그런데 윤우가 뒷산으로 가게 해서 길을 잃었다잖아.”박민정은 이제 깨달았다.삼자대면인 줄 알았는데 이건 결국 유지훈의 편을 들기 위한 자리였다.박민정은 유명훈이 왜 이렇게 편파적인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유지훈은 갓난아이일 때부터 봐 왔던 손주이고, 박윤우는 이제 갓 만난 손주이니 유지훈을 더 예뻐하는 게 당연했다.“사돈, 보셨죠? 이제 저들은 할 변명도 없을걸요?”최현아의 어머니는 박민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바로 따져 물었다.“우리 지훈이 이렇게 된 거 책임져.”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뭘 원하시는
그리고 박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부른 거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거지 같은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우리 맞짱 뜨면 혼자 올 배짱은 있어?”“당연하지.”이 녹음 파일로 사건의 자초지종이 밝혀졌다.유지훈은 박윤우가 녹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최현아도 당연히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다 가짜야, 다 가짜예요...”유지훈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명훈을 보며 말했다.“할아버지, 저 거지 같은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거지 같은 놈...녹음 파일에서도 유지훈은 이렇게 박윤우를 불렀었다.그래서 유명훈은 유지훈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사돈, 들으셨죠? 지훈이가 먼저 시비를 건 거네요.”최현아의 부모님은 외손주를 위해 일부러 유씨 가문 본가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최현아의 아버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녹음 파일로 뭐 설명할 수 있는데요? 저놈이 일부러 지훈이 얘기하게 하고 녹음했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무서운 놈이네요.”최씨 가문 사람들은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다.박민정은 이런 사람들과 잘 얘기해 보려고 한 게 후회되었다.“네 살짜리 애가 녹음 파일을 조작했다는 건 본인이 들어도 황당한 말 아닌가요?”박민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동서가 가르쳤을지도 모르잖아.”최현아가 바로 대답했다.지금은 그들은 박윤우뿐만 아니라 박민정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박민정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하자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이어서 한 보디가드가 USB를 가지고 들어왔다.USB 안에는 그날 별장 문 앞에서 일어난 모든 화면이 담겨 있었다. 소리도 박윤우의 스마트 워치에서 녹음된 것과 똑같았다.그리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남준은 보디가드더러 그날 운전기사와 최현아의 통화 내용을 재생하라고 했다.재생된 내용에 의하면 최현아는 분명 유지훈이 친구들 데리고 박윤우를 때리러 갈 걸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겼다.동영상이 끝나자 현장은 쥐
유남준은 그들과 더 얘기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박민정에게 말했다.“이만 가자.”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두 사람은 윤우를 데리고 떠났다.유성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잘난 척하긴. 아직도 자기가 유앤케이 대표인 줄 알아? 웃겨.”그들은 자신에게 곧 어떤 폭풍우가 닥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돌아가는 길에 박민정은 진심으로 유남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윤우 편 들어줘서 고마워요.”“내 아들인데 당연히 지켜줘야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유남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박민정은 그가 단단히 화났다는 걸 느낄 수 있어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이때, 유남준이 또 물었다.“윤우가 유지훈을 뒷산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야?”“윤우는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박민정이 대답했다.그녀에게 있어서 윤우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순수한 아이였다.유남준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끝내 CCTV에 찍힌 뒷부분 영상을 박민정에게 보여주지 않았다.CCTV 뒷부분에는 박윤우가 유지훈을 뒷산에 데려간 후 급하게 떠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멀지 않은 곳에서 하품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유지훈을 느긋하게 바라본 모습이 담겨 있었다.평소 귀엽고 사랑스러운 윤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두원으로 돌아간 후.유남준이 업무를 보러 회사에 가려고 했는데 윤우가 몰래 그를 찾아왔다.“아저씨.”박윤우는 유남준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박민정에게 말해 자신이 그동안 엄마 앞에서 지킨 귀엽고 순수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무슨 일이야?”“엄마한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죠?”박윤우는 유남준의 표정을 살피며 그가 엄마에게 말했는지 말 안 했는지 추측하려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싸늘할 뿐이었다.“뭐라도 말했을까 봐 무서워?”유남준이 물었다.그 말을 들은 박윤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한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마세요. 시키는 일 모두 할게요. 제가 나쁜
김인우는 이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조하랑 역시 불편했다. 수년간 솔로로 지낸 그녀도 결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인우 씨... 지금... ”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리자 김인우는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그녀를 놓았다.“다른 방 좀 살펴보고 올게요.”“그래요.”조하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우와 거리를 두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조하랑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김인우 역시 괴로웠다. 다른 방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지친 발걸음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온 김인우는 조하랑과 마주 앉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구조 요청이라도 할까요?” 조하랑이 드물게 기지를 발휘하자 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까 확인했는데 핸드폰들이 다 사라졌어요.”“뭐라고요?” 조하랑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몸의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김인우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모든 것이 탐나기 시작했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황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그럼, 우리 뭐라도 얘기할까요?”“좋아요. 무슨 얘기할까요?”김인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랑 씨, 강연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강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조하랑의 마음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금 진정됐다.“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그 사람이 참 잘생겼고 법학과였거든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먼저 쫒아다녔어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사귀게 됐지 뭐예요.”과거를 떠올리는 조하랑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이를 본 김인우는 괜히 질투가 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그냥 연애했죠.” 조하랑은 짧게 답한 뒤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는요? 뉴스에서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던데, 혹시 첫사랑한테 상처라도 받았어요?”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요. 내가 여
김인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야 당연하죠. 내가 하랑 씨가 좋아했던 그 녀석보다 훨씬 잘생겼거든요.”“그 녀석이요?” 조하랑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강연우 말이에요.” 김인우는 여전히 그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이 말에 조하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나 그 사람 안 좋아한지 꽤 됐거든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김인우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정말 신경 안 써요?” 김인우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조하랑은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네, 신경 안 써요.”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의심스러웠다.김인우는 이미 조하랑과 강연우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당시 조하랑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 했고 강연우 역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걸 뻔했다.그런 뜨거운 사랑, 그런 소중한 기억을 과연 쉽게 잊을 수 있을까?김인우는 생각할수록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조하랑은 그의 침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따라 몸이 이상했다. 김인우 곁에 있으니 더더욱 불편했고 머릿속에는 온갖 이상한 생각들이 스쳤다. 그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매도 좋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까지 들 정도로.김인우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그래요, 병원 가요.”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하지만 문에 도착한 순간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문 열어요!” 김인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 역시 모두 사라진 듯했다.조하랑은 문에 기대며 말했다.“누가 문을 잠갔죠? 할아버지는 어떻게 들어오시려고요?”“그 양반이 들어온다면 완전 변태인 거예요.” 김인우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조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요.”김인우는 그녀가 아직도 김훈을 두둔하는 걸 보며 답답해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나중에
하인은 김훈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더니 국 한 냄비를 들고 왔다.“국 좀 마셔라.” 김훈은 두 사람에게 국을 권했다.김인우는 거절하려다 김훈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멈칫했다.“왜? 할아버지가 증손주를 보고 싶다는데 안 되겠냐? 국 한 그릇 마시라는 것도 거부하는 거냐?”이 말을 듣고 나니 김인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앞으로 재촉만 안 하신다면 국 한 그릇이 아니라 열 그릇도 마시겠습니다.”조하랑도 분위기에 따라 국을 한 그릇 들이켰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맛있어요.”김훈은 인자한 표정을 지었으나 눈빛에는 슬쩍 장난기가 스쳤다.“맛있으면 더 마셔라.”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하랑아, 인우야, 이 할애비를 원망하지 말아라. 나도 너희 둘의 감정에 불 좀 지펴주려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니?'김인우와 조하랑은 김훈이 뭔가 꾸미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국 한 냄비를 모두 비워버렸고 거기에 밥과 반찬도 푸짐하게 먹었다.김인우는 심지어 겉옷까지 벗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보양에 좋은가 봐요. 몸이 엄청 뜨겁고 힘이 넘칩니다.”김훈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내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었거든.”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몸에 좋은 건 밤에 먹지 말아야겠어요. 너무 덥네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김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어디 가려고?”“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려고요.”김인우가 문으로 향하자 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나가지 마. 예찬이도 아직 안 돌아왔고 너희 둘 다 이 늙은이와 함께 있어야지.”김훈의 강한 말에 두 사람은 거절할 수 없어 그대로 남았고 결국 가족 셋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다.오늘따라 김훈은 평소 즐겨보던 뉴스 대신 로맨스 드라마를 틀었다.이를 본 김인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할아버지, 이런 거 좋
설인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결국 방성원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머리가 지끈거렸고 손에 쥔 휴대폰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휴대폰 화면 속에는 과거 설씨 집안이 어떻게 경쟁자에게 모함당하고 함정에 빠졌는지, 그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방씨 집안의 이름은 없었다.설인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아빠, 설마... 아빠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거예요?”하지만 허공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고 텅 빈 방안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만 메아리쳤다.설인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수년간 품어왔던 증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을 단 하루 만에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한편, 방성원은 당시 설인하의 아버지가 누구를 만났는지 조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린 탓에 많은 것들이 이미 사라지고 희미해져 있었다.방성원은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한 개비, 또 한 개비. 하지만 짙은 연기가 그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도 풀어주지 못했다.그때, 아이의 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방성원은 화들짝 놀라 담배를 급히 비벼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는 소리쳤다.“아주머니!”보모가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대표님!”방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애가 어떻게 나왔어요?”보모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은정이가 계속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길래... 제가 잠깐 데리고 나왔어요.”방성원은 혹여나 딸이 자신의 담배 냄새를 맡을까 걱정이 앞섰다.“애 데리고 가서 설인하랑 놀게 해요. 다만, 설인하가 애를 데리고 도망치진 못하게 조심하고.”“네.”보모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안고 설인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둘이 사라지자 방성원은 욕실로 향했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 설인하의 방 앞에 섰는데 멀리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설인하와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
박민정이 보낸 사진은 곧바로 단짝 친구들 단톡방에 반응을 불러왔다.민수아가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부럽다, 여긴 어디야? 풍경 진짜 멋지다!]조하랑도 금세 답장을 보냈다.[아마 민정이랑 예찬이랑 캠핑 간 곳일걸?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살아있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간 것 같아.]진서연 역시 대화를 이어갔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휴가 때 우리도 꼭 놀러 가요. 진짜 오랜만에 나들이하고 싶어요.]친구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웠고 설인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모티콘 몇 개로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일에 매달렸고 잠시 한가해지기만 하면 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지금 방은정은 방성원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설인하는 이미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곧 양육권을 반드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고개를 들자 연지석이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연지석이 물었다.“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요?”설인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네? 무슨 말씀이시죠?”연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 서류들, 전부 오류가 있어요. 확인해봐요.”설인하가 서류를 펼쳐보니 숫자들이 엉망으로 기재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었다.“아...”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하지만 연지석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수정은 필요 없고 그냥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설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그 말이 혹시 해고 통보는 아닐까 싶어 다급히 말했다.“부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안 할게요.”절박함이 담긴 목소리와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최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눈빛 속으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다 큰 어른이면서 내 말뜻을 모르겠어?”그녀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건가?”박민정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부끄러울 게 뭐가 있죠? 저랑 남우 씨는 줄곧 친구였을 뿐이에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래? 참 신기하네. 난 아직까지 남녀 사이에 그런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남준 씨, 그냥 하는 말이에요. 두 사람이야 부부니까 잘 지내면 그만이죠. 제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이 당연히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했다.“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형수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랑 민정이는 잘 지낼 거니까요.”유남준은 그렇게 답하며 오히려 최현아에게 은근히 감사함을 느꼈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해줘서.최현아의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박민정의 얼굴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귀국한 뒤로 아무도 그녀와 유남우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니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박민정은 조용히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나를... 믿어요?”남녀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기란 솔직히 쉽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유남준은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물론 널 믿지.”유남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걸
“옆모습이요?” 박민정이 조용히 물었다.“그건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찍은 사진이야. 예뻐 보여서 그냥 간직했지.”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러다 어느 날 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어. 그 사진 속 소녀가 바로 어린 시절의 너라는 걸.”박민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에요?”“당연하지.”유남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그 사실을 알아챘던 건 해외에 있을 때였다.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하지만 그날, 그는 박민정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자 유남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진을 오랫동안 간직해왔지만 정작 그 속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생각해 보면 박민정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첫눈에 반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의 어색함을 조금씩 지워갔다.잠시 후, 유남준이 물었다.“해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던 거야?”박민정이 사라졌던 그 1년, 유남준은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며 지낼까.박민정은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유남우 씨랑 해외에 있으면서 치료도 받고 최면 치료도 했어요. 그 외에는 혼자 별장에 머물렀죠.”그녀는 덤덤히 말했다.“낯선 곳에서 밖에 나가도 늘 혼자였어요.”유남준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왔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이 짙게 스며들었다.“미안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남준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내가 무슨 고생을 한 것도 아닌걸요.”유남우가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의사는 존중했고 필요한 건 다 채워주었다.둘은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멀리서 최현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남준 씨, 드디어 왔네요.“민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