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의 유남준은 입구 앞의 한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앞이 보이진 않지만 보디가드에게서 박민정과 에리가 이미 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유남준을 발견한 박민정은 발걸음을 멈췄다.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에리 앞에 섰다.“나 도착했으니까 먼저 돌아가.”그 말을 들은 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다음에 봐.”에리의 차가 천천히 길옆에 섰다.그가 차에 올라탄 걸 확인하고서야 박민정은 돌아서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남준 앞에 온 후 박민정이 입을 열었다.“나 이제 윤우 만나러 가도 돼요?”차가운 유남준의 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시간이 몇 시인데. 윤우는 이미 잤어.”유남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벌써 열 시가 넘었다.에리와 곡에 관해 토론하느라 너무 몰입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알겠어요. 그럼 내일에 보러 갈게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정말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걱정하는 척하는 거야?”박민정이 주먹을 꽉 쥐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게 무슨 말인지는 네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유남준은 그렇게 박민정 곁을 스쳐 지나갔다.박민정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또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윤우를 못 만나게 하는 것도 모자라 내 진심을 의심하다니. 열 달 품어 낳은 아이를 내가 왜 걱정하는 척하겠어?’박민정은 그와 싸우기도 귀찮아 먼저 병원에 돌아가서 쉬고 내일 아침 다시 윤우를 만나러 오기로 했다.박윤우의 옆 병실에는 유지훈이 입원해 있었다.하루 동안의 치료를 받은 그는 마침내 생기를 되찾았다.“엄마, 아빠, 다 그 재수 없는 놈 때문이에요.”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유지훈은 바로 부모에게 일러바쳤다.최현아가 그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아들,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전에 박민정과 박윤우를 통해 그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지만 유지훈에게서는
“뭐가 그렇게 급해? 아침까지 기다리기 그렇게 힘들어?”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았다.“남준 씨,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윤우 엄마예요. 윤우를 만날 권리가 있다고요.”“내가 너무하다고?”유남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그럼 나와 윤우를 4, 5년 동안 떨어져 있게 한 것도 너무하잖아?”박민정의 가슴은 세게 내리쳐진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점심에 다시 보러 오죠.”유남준은 그녀에게 다가가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점심에 윤우를 본가로 데려갈 거야.”본가로 데려간다고?박민정은 갑자기 기억이 돌아온 그날, 유명훈과 고영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안 돼요. 윤우는 꼭 나랑 같이 있어야 해요.”“당신과 같이 있어야 한다고? 그럼 당신이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걸 윤우에게 보이겠다는 거야?”유남준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다른 남자와 연애라니? 내가 언제 다른 남자와 연애했는데?’“그게 무슨 헛소리예요?”“변명할 시간에 휴대폰이나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야.”유남준은 출근해야 했기에 더는 그녀와 싸울 시간이 없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박민정은 깨어난 후 바로 윤우를 보러 올 생각에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았다.휴대폰을 보니 조하랑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민정아, 너 에리도 알아? 두 사람 정말 너무 어울린다. 에리가 너보다 몇 살 어리지? 그럼 연하남이네. 대박, 너무 좋아...]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리고 네이버를 켜자마자 1면에 뜬 사진을 발견했다.한 사진은 두 사람이 레스토랑 앞에 있을 때 찍힌 것이었다. 다른 한 사진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원에 돌아가는 길에 찍힌 듯했다.기사 타이틀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톱스타 스캔들! 한밤중 유부녀와의 밀회, 그녀의 정체는?’클릭해 보니 에리와 박민정이 사귀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박민정이 유남
“그렇게 많은 돈을 물어야 해?”에리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네가 그동안 번 돈은 기부했거나 흥청망청 써버렸지. 우리가 무슨 수로 갚아?”매니저가 한숨을 푹 쉬었다.에리는 매니저더러 잘 계산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집을 팔아야만 위약금을 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럼 집을 팔지, 뭐.”그에게 있어서 집이나 차와 같은 재산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장난하는 거야?”매니저는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에리와 광고 계약하려던 회사에 다시 연락했다.하지만 그 회사들도 기사를 접했기 때문에 에리를 모델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 보자고 했다.매니저가 IM 그룹에도 문의했는데 드디어 다른 대답이 나왔다.“3년 계약하면 우리 회사에서 에리 씨의 스캔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다희였다.매니저는 에리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에 동의했다.IM 그룹에 대해 조사했는데 요즘 성장세가 워낙 엄청나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었다.에리는 IM 그룹의 배후가 유남준인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니저가 계약하기로 약속했다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그럼 오늘 IM 그룹 한 번 가보자.”“알겠어.”에리는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한편, IM 그룹 대표 사무실.서다희가 유남준에게 이미 3년 계약을 마쳤다고 알렸다.그 말인즉 에리는 IM 그룹 밑에서 3년 동안 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차가운 얼굴을 한 유남준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언제 온대?”“오늘 오후에 온다고 합니다.”“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유남준이 물었다.“네, 잘 알고 있습니다.”에리가 겁도 없이 감히 박민정과 스캔들이 나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었다.유남준은 분명 그가 인생에 회의감이 들 때까지 부려 먹을 것이다.다른 한편, 병원.박민정은 에리에게 전화해 자기가 직접 나서 해명할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에리
박민정은 어색한 마음에 다급하게 벨 소리 크기를 낮추려 했지만 실수로 휴대폰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리고 하필 이때 조하랑이 보낸 음성 메시지가 연이어 재생됐다.[정말 에리랑 연애하는 거야? 나 일찍 알려주지, 엄청 만나고 싶었는데.][에리가 한 번도 연애해 본 적이 없다며? 순정 연하남이 유남준보다 몇백 배 나은지 몰라...]박민정은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우려 했지만 휴대폰은 좌석 밑에 끼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얼굴까지 빨개졌다.운전하고 있던 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백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봤는데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시선을 거두고 가림막을 내렸다.박민정은 겨우 휴대폰을 손에 넣은 뒤 음성 메시지를 껐다.유남준의 얼굴색이 한껏 어두워졌다.“그냥 작곡 얘기를 한 거라며? 연하남 좋아했어?”“다 오해라고 했잖아요.”박민정은 바로 조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나와 에리 씨는 그저 업무 관계일 뿐이야. 어제도 그냥 작곡 얘기만 했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조하랑은 그제야 더는 캐묻지 않았다.차 안의 공기는 한껏 무거워졌다.박민정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는데 본가가 아닌 두원 별장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아챘다.“우리 본가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유남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두원으로 돌아가고 있어. 앞으로 윤우를 치료할 의사도 모시고 공부를 가르쳐줄 선생님도 모실 거야.”박민정은 거절할 수 없었다.“알겠어요.”그동안 박민정은 일로 바빴고, 또 윤우의 몸 상태 때문에 계속 윤우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었다.그 생각만 하면 박민정은 윤우에 대한 미안함뿐이었다.두원에 도착하고.윤우가 다른 차에서 내렸다. 박민정은 발견하자마자 그는 달려가며 말했다.“엄마.”박민정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쓰다듬었다.“몸은 좀 어때? 아직도 아파?”윤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제 괜찮아.”“그럼 다행이네.”유남준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봤다.바로 이때, 전화 한 통이 이
최현아는 박윤우를 보자마자 바로 목소리를 낮추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엄마, 바로 쟤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같아 보여도 심보가 얼마나 못되었는데.”그 얘기를 들은 최현아의 어머니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박윤우를 바라봤다.“네가 우리 지훈이를 해친 거야?”유지훈은 외할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든든한 자기 편이 있었으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박윤우를 바라봤다.‘자식, 감히 내 유씨 가문 후계자의 자리를 탐내? 꿈도 꾸지 마.’어젯밤에 최현아는 아들에게 박민정이 뒤를 봐주는 사람 없으니 앞으로 유씨 가문은 모두 그의 것이라고 했다.박민정은 박윤우의 손을 꼭 잡았다.“제가 그날 충분히 똑똑하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 제가 한 번 또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유명훈은 지금 당당한 박민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민정아, 엊그제 지훈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잖아. 넌 당연히 윤우 입장에서 말했겠지. 오늘 지훈이가 그러던데 전혀 윤우를 때릴 마음이 없었다고 했어.”“그럼 두원 별장에는 왜 왔대요? 설마 윤우랑 놀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박민정이 유지훈 가족이 하려고 했던 변명을 미리 말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명훈은 계속 유지훈의 편을 들었다.“애들은 싸워도 금방 잊어버려, 오래 안 간다고. 윤우와 다른 친구들 찾아가 놀려고 했겠지. 그런데 윤우가 뒷산으로 가게 해서 길을 잃었다잖아.”박민정은 이제 깨달았다.삼자대면인 줄 알았는데 이건 결국 유지훈의 편을 들기 위한 자리였다.박민정은 유명훈이 왜 이렇게 편파적인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유지훈은 갓난아이일 때부터 봐 왔던 손주이고, 박윤우는 이제 갓 만난 손주이니 유지훈을 더 예뻐하는 게 당연했다.“사돈, 보셨죠? 이제 저들은 할 변명도 없을걸요?”최현아의 어머니는 박민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바로 따져 물었다.“우리 지훈이 이렇게 된 거 책임져.”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뭘 원하시는
그리고 박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부른 거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거지 같은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우리 맞짱 뜨면 혼자 올 배짱은 있어?”“당연하지.”이 녹음 파일로 사건의 자초지종이 밝혀졌다.유지훈은 박윤우가 녹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최현아도 당연히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다 가짜야, 다 가짜예요...”유지훈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명훈을 보며 말했다.“할아버지, 저 거지 같은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거지 같은 놈...녹음 파일에서도 유지훈은 이렇게 박윤우를 불렀었다.그래서 유명훈은 유지훈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사돈, 들으셨죠? 지훈이가 먼저 시비를 건 거네요.”최현아의 부모님은 외손주를 위해 일부러 유씨 가문 본가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최현아의 아버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녹음 파일로 뭐 설명할 수 있는데요? 저놈이 일부러 지훈이 얘기하게 하고 녹음했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무서운 놈이네요.”최씨 가문 사람들은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다.박민정은 이런 사람들과 잘 얘기해 보려고 한 게 후회되었다.“네 살짜리 애가 녹음 파일을 조작했다는 건 본인이 들어도 황당한 말 아닌가요?”박민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동서가 가르쳤을지도 모르잖아.”최현아가 바로 대답했다.지금은 그들은 박윤우뿐만 아니라 박민정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박민정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하자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이어서 한 보디가드가 USB를 가지고 들어왔다.USB 안에는 그날 별장 문 앞에서 일어난 모든 화면이 담겨 있었다. 소리도 박윤우의 스마트 워치에서 녹음된 것과 똑같았다.그리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남준은 보디가드더러 그날 운전기사와 최현아의 통화 내용을 재생하라고 했다.재생된 내용에 의하면 최현아는 분명 유지훈이 친구들 데리고 박윤우를 때리러 갈 걸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겼다.동영상이 끝나자 현장은 쥐
유남준은 그들과 더 얘기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박민정에게 말했다.“이만 가자.”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두 사람은 윤우를 데리고 떠났다.유성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잘난 척하긴. 아직도 자기가 유앤케이 대표인 줄 알아? 웃겨.”그들은 자신에게 곧 어떤 폭풍우가 닥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돌아가는 길에 박민정은 진심으로 유남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윤우 편 들어줘서 고마워요.”“내 아들인데 당연히 지켜줘야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유남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박민정은 그가 단단히 화났다는 걸 느낄 수 있어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이때, 유남준이 또 물었다.“윤우가 유지훈을 뒷산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야?”“윤우는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박민정이 대답했다.그녀에게 있어서 윤우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순수한 아이였다.유남준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끝내 CCTV에 찍힌 뒷부분 영상을 박민정에게 보여주지 않았다.CCTV 뒷부분에는 박윤우가 유지훈을 뒷산에 데려간 후 급하게 떠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멀지 않은 곳에서 하품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유지훈을 느긋하게 바라본 모습이 담겨 있었다.평소 귀엽고 사랑스러운 윤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두원으로 돌아간 후.유남준이 업무를 보러 회사에 가려고 했는데 윤우가 몰래 그를 찾아왔다.“아저씨.”박윤우는 유남준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박민정에게 말해 자신이 그동안 엄마 앞에서 지킨 귀엽고 순수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무슨 일이야?”“엄마한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죠?”박윤우는 유남준의 표정을 살피며 그가 엄마에게 말했는지 말 안 했는지 추측하려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싸늘할 뿐이었다.“뭐라도 말했을까 봐 무서워?”유남준이 물었다.그 말을 들은 박윤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한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마세요. 시키는 일 모두 할게요. 제가 나쁜
유명 가수에게 발기부전약을 홍보하라고 하다니...그리고 대사도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글거렸다.에리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저 회사 홍보 모델로 쓰는 거 아니었어요?”매니저도 광고 기획안을 보더니 말문이 막혔다.“죄송한데 뭔가 착오가 생긴 게 아닐까요? 에리는 글로벌 스타예요. 이런 광고를 받으면 앞으로 나락 갈 일밖에 없다고요.”어젯밤에 갑자기 스캔들이 터져 많은 광고 위약금을 물어야 할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절대 이렇게 섣불리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을 것이다.금테 안경을 쓴 서다희는 코웃음을 쳤다.‘겁도 없이 유부녀를 꼬신 사람이 회사 홍보 모델을 하려고 했던 거야?’“에리 씨를 위한 광고 맞아요. 지금 이런 광고밖에 할 수 없잖아요. 우리 회사 홍보 모델로 활동하면 오히려 우리 회사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죠.”에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게 무슨 말이죠? 일부러 장난치는 거죠? 저 그만둘게요.”에리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서다희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그만둬도 돼요. 다만 위약금을 내야죠, 100억이에요.”서다희는 유남준의 비서실장으로서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지금 에리에게 가장 모자란 게 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스캔들이 터진 건 오히려 그들에게 행운이었다. 아니면 에리의 약점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1000억?화가 치밀어 오른 에리는 다짜고짜 서다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서다희는 그의 주먹을 피하며 말했다.“에리 씨, 저 분명 경고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세계 최고의 법무팀이 있습니다. 저한테 주먹을 휘두르면 내야 할 돈은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고 환갑이 넘은 아버지에게 돈을 대신 갚으라고 하지는 않겠죠?”서다희는 계약서를 챙기더니 게스트 룸을 나섰다.매니저는 씩씩거리는 에리의 팔을 잡아당겼다.만약 에리가 서다희를 때려 또 기사에 오른다면 다시는 연예계에 복귀할 수 없을 것이다.폭행, 유부녀와의 불륜, 그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
“방금 그 여자요? 이제 막 온 사람이잖아요. 그 춤을 완전히 익히지도 않았는데요.” 리더는 여전히 억울해했다.그녀는 겨우 얻은 리더 자리를 놓칠 수 없다. 이번 공연만 잘 끝내면 성과가 두 배로 오를 텐데 이제 와서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주 비서가 방금 못 했던 동작, 그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잖아.”무용 선생님의 눈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비서, 전에 나한테 사람을 바꾸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바꿨는데 왜 불만이야?”주영리라는 이름의 리더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럼 안 하면 되죠. 제가 이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이 매니저님에게 뒷문으로 부탁한 일, 전 꼭 대표님에게 보고할 거예요.”무용 선생님은 주영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가서 고자질해 봐.”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이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그 무용 복장은 두고 가.”주영리는 결국 무용 복장을 남기고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박민정을 수십 번 욕하며 씩씩대었다.박민정은 집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재채기를 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국내에 도착했어요? 오늘 면접은 성공했는데, 인턴이에요.”그때 해외에서 돌아온 유남우는 윤소현에게 아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요구받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안고 한쪽으로 갔다.윤소현은 그를 지켜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남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봤다.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봤지만 그녀는 박민정의 메시지를 발견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이 메시지가 박민정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재빨리 유남우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서 열지 못했다.그
“어때요? 아무거나 해내면 돼요.” 무용 선생님이 박민정에게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갔다.무용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박민정을 주목하며 그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기다렸다.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그들은 박민정이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박민정이 그 동작을 따라 하긴커녕, 아마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동작을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소화했다.“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리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반 달 동안 연습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작을 박민정이 그렇게 쉽게 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언제 우리 회사에 이런 춤 잘 추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또 다른 사람이 투덜거렸다.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을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어느 부서 사람이에요? 제가 매니저님께 얘기해서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랑 같이 춤 연습을 해요. 공연 끝난 후에는 보너스도 줄게요.”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에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에요.”무용 선생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 그럼 면접은 합격했나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합격 못했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한데, 정말 판매직에 딱 맞을 사람인데.”박민정은 자신의 장점은 알지만‘경력'란을 채우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잠깐만 기다려 줘요.”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잠시만요, 금방 돌아올게요.”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네.”무용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우리 회사
실내는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고 박민정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며 아팠다.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어색하게 말했다.“저는 예전에 어떤 일도 해본 적이 없어요.”매니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전업주부로 계셨던 건가요?”이곳에서는 전업주부도 일종의 직업으로 여겨졌다.하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매니저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안 했다는 거라면 몰라도 졸업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일한 적이 없다니.‘이건 게으르거나, 아니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매니저는 곤란한 듯 말했다.“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는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표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녀는 자신의 이력서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실,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왜 졸업 이후로 단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던 걸까?’유남우는 그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전혀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건물 밖으로 나온 박민정은 각양각색의 면접자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들은 학력도 뛰어나고 경력도 풍부해 보였으며 어떤 이는 그녀보다 더 어려 보였다.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자리를 다시 찾아보자.’그녀는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더 많은 공고를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한 댄스 스튜디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안에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한 댄스 강사가 리더 자리에 서 있는 한 여성을 향해 소리쳤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2주나 배웠는데 아직도 실수야? 2주 후면 해외 VIP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괜찮겠어?”리더로 보
아침이 밝자 의사가 집에 방문해 박민정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약을 처방했다.의사는 약을 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당부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유남우는 그를 배웅하며 차 안에서 물었다.“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일을 꿈에 꾸는 거죠?”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그건 정상입니다. 어떤 최면이라도 환자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녀의 상태는 안정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매달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그러나 의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나 익숙한 물건을 접하면 기억이 자극받아 최면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의사를 배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와 박민정이 약을 다 복용하는 것을 확인했다.약을 먹은 박민정은 졸음을 느꼈지만 일자리 지원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고른 회사는 현지에 위치한 곳으로, 출장도 필요하지 않아 유남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그는 박민정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윤소현의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씨, 오늘 새해잖아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집에는 나랑 다혜밖에 없는데, 우리랑 시간을 안 보내줄 거예요?”그녀의 말에도 유남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소현아, 너도 알잖아. 나 지금 호산 그룹에서의 기반이 불안정해. 나도 다혜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하지만 윤소현은 물러서지 않았다.“대체 어떤 일이기에 꼭 외국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언제쯤 돌아올 건데요?”그는 잠들어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며칠 후에.”“안 돼요! 늦어도 내일
박민정은 유남우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저, 이제 자러 갈게요.”“그래.”유남우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그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박민정은 누워 있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옆방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대체 왜 이러지?”박민정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최근 들어 유남우와의 관계에서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1년 전 깨어난 뒤로 박민정은 자신이 많은 기억을 잃었다고 느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유남우와 관련된 몇 가지 일들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과거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일부 기억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외에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라고 했다.새벽이 되어서야 박민정은 겨우 잠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는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 남자는 성격이 매우 거칠었다.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당신 누구예요?”남자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날 잊은 거야?”그의 말에 박민정은 혼란스러웠다.갑자기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를 찾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그러더니 강제로 무언가를 하려 했다.박민정은 몸부림치며 외쳤다.“놔요! 제발 놔요!”그 순간, 그녀는 깨어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여전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박민정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다시 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방의 등을 켜고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스크롤을 내리던 중 여러 구인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자신이 예전에 외국어에 능숙했던 기억은 있지만 무슨 일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비서직이나 번역 관련 공고를 보며 흥미를 느꼈다.그때 문
“무슨 일이야?”유남우가 묻자 박민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지난 1년 동안 그녀는 유남우의 돈으로 생활하며 치료를 받아왔다.하지만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된 만큼 스스로 자립하고 싶었다.모든 걸 그에게만 의지하며 그의 어깨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그가 기꺼이 허락할 거라 생각했지만 잠시 침묵을 지킨 유남우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결할게.”“아니에요.”박민정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준 돈도 다 쓰지도 못해요. 그냥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오빠한테 계속 의지하는 것도 싫고요.”“그게 왜 의지야? 난 너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 없어.”그는 말을 마치며 대화를 끝내려는 듯 덧붙였다.“알겠지? 자, 이제 밥 먹자.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그의 단호한 태도에 박민정은 더 이상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저녁을 먹은 뒤 박민정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요즘 그녀는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독서나 TV 시청으로 하루를 때웠는데 그런 단조로운 일상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껴졌다.어느새 유남우가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왔다.“민정아.”“응?”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맑은 그녀의 눈을 마주한 유남우는 순간 목울대가 꿈틀거렸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박민정의 옆얼굴에 닿았다.“왜 그래요?”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박민정은 얼어붙은 듯 물었다.하지만 유남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이어 몸을 기울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긴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그를 보지 못했다.그리고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결과 그의 입맞춤은 그녀의 옆얼
여느 때처럼 박예찬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옆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박윤우가 한마디를 던졌다.“두 녀석이 이제 겨우 한 살 좀 넘었잖아. 뭘 안다고 그래?”박윤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을 닫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아휴, 저 애들 꼴값 떠는 거 정말 못 봐주겠어.”그는 투덜거리면서 박예찬 옆으로 다가가 함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화면에는 어딘가의 거리 CCTV 영상이 떠 있었다.1년 전부터 여전히 엄마의 흔적을 찾지 못한 박예찬은 세계 곳곳의 CCTV 영상을 끌어모으며 단서를 찾고 있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두 아이는 거리 CCTV를 뒤져 엄마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뭔가 찾았어?”“아니... 아직 없어.”박예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묻어났다.그는 다른 지역의 영상을 다시 띄우며 끈질기게 화면을 지켜보았다.그렇게 두 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화면 앞에서 모든 영상을 체크하고 있었다.한편, 집 안은 시끌벅적했다.정수미는 두 외손자들과 놀며 한껏 즐거워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윤소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자기 딸이 소외되는 것이 못마땅해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엄마, 요즘 다혜를 너무 안 챙기시는 것 같아요.”박민정 사건 이후로 정수미는 윤소현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겉으로는 치우치지 않으려 유다혜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다혜야, 외할머니가 너한테도 선물 사왔단다.”하지만 아직 몇 개월밖에 안 된 유다혜에게 줄 만한 건 옷 몇 벌뿐이었다.윤소현은 자기 딸에게 주어진 옷 몇 벌과 박민정의 네 아이에게 보내진 고가의 선물들을 비교하며 질투심이 치밀었다.“엄마, 어릴 때부터 늘 딸이 최고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편애하시면 안 되죠. 예찬이랑 윤우에겐 개인 비행기를 사주시면서 우리 다혜는 옷 몇 벌이 다예요?”정수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다혜는 아직 어려서 그래. 나중에 크면 당연히 비행기도 사줄 거야.”정수미는 윤소현의 이런 불만이
고영란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말투를 들으며 왜 이런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상류층의 여인 다운 기품이 없었다.“그럼 남준이는? 아직도 안 왔어요?”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지금 두원 별장에 계십니다. 설날엔 안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을 찾지 못한 유남준이 아직도 우울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영란은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 이제 음식 준비 부탁해요.”“네.”집사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영란은 두 아이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윤소현, 박윤우, 박예찬 그리고 고영란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오늘따라 식탁이 아주 썰렁하게만 느껴졌다.“고기 많이 먹어.”고영란은 두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윤소현은 두 아이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고영란을 바라보며 질투심으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음식을 먹었다.그때, 식탁으로 다가온 집사가 말했다.“사모님, 정 대표님이 오셨는데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민정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네 명의 외손자들을 자주 찾아왔다.그녀는 이제라도 박민정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고마워요.”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윤소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뒤를 따라나섰다.하지만 박윤우와 박예찬은 식사에만 집중하며 정수미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이들 역시 이제는 정수미가 엄마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엄마,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윤소현은 웃는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하지만 정수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이미 먹고 왔어. 이번에는 그냥 아이들 보러 온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윤소현은 정수미의 냉한 태도를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