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눈빛 속으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다 큰 어른이면서 내 말뜻을 모르겠어?”그녀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건가?”박민정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부끄러울 게 뭐가 있죠? 저랑 남우 씨는 줄곧 친구였을 뿐이에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래? 참 신기하네. 난 아직까지 남녀 사이에 그런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남준 씨, 그냥 하는 말이에요. 두 사람이야 부부니까 잘 지내면 그만이죠. 제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이 당연히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했다.“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형수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랑 민정이는 잘 지낼 거니까요.”유남준은 그렇게 답하며 오히려 최현아에게 은근히 감사함을 느꼈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해줘서.최현아의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박민정의 얼굴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귀국한 뒤로 아무도 그녀와 유남우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니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박민정은 조용히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나를... 믿어요?”남녀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기란 솔직히 쉽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유남준은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물론 널 믿지.”유남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걸
박민정이 보낸 사진은 곧바로 단짝 친구들 단톡방에 반응을 불러왔다.민수아가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부럽다, 여긴 어디야? 풍경 진짜 멋지다!]조하랑도 금세 답장을 보냈다.[아마 민정이랑 예찬이랑 캠핑 간 곳일걸?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살아있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간 것 같아.]진서연 역시 대화를 이어갔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휴가 때 우리도 꼭 놀러 가요. 진짜 오랜만에 나들이하고 싶어요.]친구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웠고 설인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모티콘 몇 개로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일에 매달렸고 잠시 한가해지기만 하면 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지금 방은정은 방성원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설인하는 이미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곧 양육권을 반드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고개를 들자 연지석이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연지석이 물었다.“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요?”설인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네? 무슨 말씀이시죠?”연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 서류들, 전부 오류가 있어요. 확인해봐요.”설인하가 서류를 펼쳐보니 숫자들이 엉망으로 기재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었다.“아...”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하지만 연지석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수정은 필요 없고 그냥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설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그 말이 혹시 해고 통보는 아닐까 싶어 다급히 말했다.“부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안 할게요.”절박함이 담긴 목소리와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
설인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결국 방성원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머리가 지끈거렸고 손에 쥔 휴대폰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휴대폰 화면 속에는 과거 설씨 집안이 어떻게 경쟁자에게 모함당하고 함정에 빠졌는지, 그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방씨 집안의 이름은 없었다.설인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아빠, 설마... 아빠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거예요?”하지만 허공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고 텅 빈 방안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만 메아리쳤다.설인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수년간 품어왔던 증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을 단 하루 만에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한편, 방성원은 당시 설인하의 아버지가 누구를 만났는지 조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린 탓에 많은 것들이 이미 사라지고 희미해져 있었다.방성원은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한 개비, 또 한 개비. 하지만 짙은 연기가 그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도 풀어주지 못했다.그때, 아이의 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방성원은 화들짝 놀라 담배를 급히 비벼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는 소리쳤다.“아주머니!”보모가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대표님!”방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애가 어떻게 나왔어요?”보모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은정이가 계속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길래... 제가 잠깐 데리고 나왔어요.”방성원은 혹여나 딸이 자신의 담배 냄새를 맡을까 걱정이 앞섰다.“애 데리고 가서 설인하랑 놀게 해요. 다만, 설인하가 애를 데리고 도망치진 못하게 조심하고.”“네.”보모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안고 설인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둘이 사라지자 방성원은 욕실로 향했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 설인하의 방 앞에 섰는데 멀리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설인하와
하인은 김훈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더니 국 한 냄비를 들고 왔다.“국 좀 마셔라.” 김훈은 두 사람에게 국을 권했다.김인우는 거절하려다 김훈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멈칫했다.“왜? 할아버지가 증손주를 보고 싶다는데 안 되겠냐? 국 한 그릇 마시라는 것도 거부하는 거냐?”이 말을 듣고 나니 김인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앞으로 재촉만 안 하신다면 국 한 그릇이 아니라 열 그릇도 마시겠습니다.”조하랑도 분위기에 따라 국을 한 그릇 들이켰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맛있어요.”김훈은 인자한 표정을 지었으나 눈빛에는 슬쩍 장난기가 스쳤다.“맛있으면 더 마셔라.”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하랑아, 인우야, 이 할애비를 원망하지 말아라. 나도 너희 둘의 감정에 불 좀 지펴주려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니?'김인우와 조하랑은 김훈이 뭔가 꾸미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국 한 냄비를 모두 비워버렸고 거기에 밥과 반찬도 푸짐하게 먹었다.김인우는 심지어 겉옷까지 벗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보양에 좋은가 봐요. 몸이 엄청 뜨겁고 힘이 넘칩니다.”김훈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내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었거든.”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몸에 좋은 건 밤에 먹지 말아야겠어요. 너무 덥네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김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어디 가려고?”“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려고요.”김인우가 문으로 향하자 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나가지 마. 예찬이도 아직 안 돌아왔고 너희 둘 다 이 늙은이와 함께 있어야지.”김훈의 강한 말에 두 사람은 거절할 수 없어 그대로 남았고 결국 가족 셋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다.오늘따라 김훈은 평소 즐겨보던 뉴스 대신 로맨스 드라마를 틀었다.이를 본 김인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할아버지, 이런 거 좋
김인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야 당연하죠. 내가 하랑 씨가 좋아했던 그 녀석보다 훨씬 잘생겼거든요.”“그 녀석이요?” 조하랑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강연우 말이에요.” 김인우는 여전히 그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이 말에 조하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나 그 사람 안 좋아한지 꽤 됐거든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김인우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정말 신경 안 써요?” 김인우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조하랑은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네, 신경 안 써요.”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의심스러웠다.김인우는 이미 조하랑과 강연우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당시 조하랑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 했고 강연우 역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걸 뻔했다.그런 뜨거운 사랑, 그런 소중한 기억을 과연 쉽게 잊을 수 있을까?김인우는 생각할수록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조하랑은 그의 침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따라 몸이 이상했다. 김인우 곁에 있으니 더더욱 불편했고 머릿속에는 온갖 이상한 생각들이 스쳤다. 그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매도 좋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까지 들 정도로.김인우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그래요, 병원 가요.”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하지만 문에 도착한 순간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문 열어요!” 김인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 역시 모두 사라진 듯했다.조하랑은 문에 기대며 말했다.“누가 문을 잠갔죠? 할아버지는 어떻게 들어오시려고요?”“그 양반이 들어온다면 완전 변태인 거예요.” 김인우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조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요.”김인우는 그녀가 아직도 김훈을 두둔하는 걸 보며 답답해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나중에
김인우는 이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조하랑 역시 불편했다. 수년간 솔로로 지낸 그녀도 결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인우 씨... 지금... ”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리자 김인우는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그녀를 놓았다.“다른 방 좀 살펴보고 올게요.”“그래요.”조하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우와 거리를 두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조하랑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김인우 역시 괴로웠다. 다른 방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지친 발걸음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온 김인우는 조하랑과 마주 앉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구조 요청이라도 할까요?” 조하랑이 드물게 기지를 발휘하자 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까 확인했는데 핸드폰들이 다 사라졌어요.”“뭐라고요?” 조하랑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몸의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김인우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모든 것이 탐나기 시작했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황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그럼, 우리 뭐라도 얘기할까요?”“좋아요. 무슨 얘기할까요?”김인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랑 씨, 강연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강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조하랑의 마음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금 진정됐다.“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그 사람이 참 잘생겼고 법학과였거든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먼저 쫒아다녔어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사귀게 됐지 뭐예요.”과거를 떠올리는 조하랑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이를 본 김인우는 괜히 질투가 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그냥 연애했죠.” 조하랑은 짧게 답한 뒤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는요? 뉴스에서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던데, 혹시 첫사랑한테 상처라도 받았어요?”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요. 내가 여
“착한 사람이라뇨...” 조하랑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김인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랑 씨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요.”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몸을 조하랑 쪽으로 더 가까이 움직였다. 조하랑도 어찌된 영문인지 피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김인우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잡고 조하랑을 안아 올려 어느 노인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으로 옮겼다. 그 노인네도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거실에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김훈은 하인에게 문 너머의 상황을 엿보게 시켰다. 잠시 후, 하인은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르신, 성공했습니다.”“정말인가?” 김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 틀림없어요.” 하인이 확신하자 노인은 마음속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자, 우리도 잠이나 자자.”“네, 알겠습니다.”...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조하랑이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쑤셨다. 전날 밤의 모든 기억이 선명했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걸까?옆에 누운 김인우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무의식중에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자요.”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조하랑은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익숙하지 않아 김인우를 흔들어 깨웠다. “이거 놔요. 이제 일어나야죠.”김인우는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때리는 거예요?”어젯밤의 일은 분명 그녀도 동의했던 일이었다.조하랑은 얼굴이 붉어졌다. “어젯밤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걱정 마요,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예전처럼 지내요.”그녀는 관계를 명확히 하려 애썼지만 김인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책임질 필요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자는 건가?김인우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처음이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