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보낸 사람들도 사진 찍는 데 애를 먹었어요. 박민정 씨 뒤에 도련님 측 사람들이 따라다니고 있어서 우리 쪽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전에 박민정과 예찬을 조사하러 보냈던 사람들이 유남준에게 발각된 이후, 고영란은 더욱 조심했고 그곳에 보냈던 사람들은 감히 그들이 사는 곳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다.고영란은 지금 사진을 보니 자신이 모르는 게 아직 더 많은 것 같다.“계속 조사해. 박민정에게 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야겠어.”“네.”...한편 박민정과 조하랑은 윤우를 데리고 몇 시간 동안 놀다가 윤우의 몸이 감당할 수 없어 급히 돌아왔다.그들은 설 전에 윤우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고 병원을 나와 차에 앉은 조하랑은 박민정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배 속의 아기가 태어나 제대혈이 나오면 윤우도 수술받을 수 있어. 수술 끝나면 예찬이처럼 될 수 있을 거야.”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를 만졌다.“이번엔 아들일지 딸일지 모르겠네.”“딸이면 좋겠네. 그럼 아들딸 다 있는 거잖아. 윤우와 예찬이도 여동생 갖고 싶어 했잖아.” 조하랑이 말했다.물론 박민정도 딸을 원했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둘 다 좋았다.“그런데 하랑아, 넌 어떻게 할 거야?”“뭘 어떻게 해?”“아저씨 쪽은 해결됐어?”박민정은 조하랑이 아직 첫사랑 강연우와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조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르겠어. 사실 지금 너랑 유남준, 윤우랑 예찬이를 보니까 그냥 아빠 말 듣고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해.”“하랑아, 단순히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하는 건 절대 안 돼.” 박민정이 말하자 조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거 아니야? 민정아, 지금까지 결혼한 거 후회 안 해?”후회?“유남준과 결혼한 건 후회하지만 윤우와 예찬이를 낳은 건 후회하지 않아. 그래서 네가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눈사람 만들러 갈래?”유남준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박민정이 눈을 좋아하고 어린아이처럼 눈사람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항상 유치하다고 나무랐었다.박민정은 눈사람을 만들자는 그의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순간 눈에 이채가 돌았지만 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요, 밖이 너무 추운 데다 너무 유치해요.”유남준은 목이 메었다.박민정이 안으로 걸어오며 말했다.“나 좀 쉴 테니까 나가요.”그녀는 유남준이 어젯밤처럼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그를 쫓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곧바로 방 문을 잠그고 무언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침대에 누운 그녀는 금세 잠에 빠졌다.다음 날 이른 아침.박민정이 눈을 떴을 때 밖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커튼을 열고 씻으러 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 속에 무수히 많은 귀여운 눈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놀란 눈으로 통유리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 박민정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유난히 복잡한 기분으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눈을 밟으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눈사람 만들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움직이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박민정은 남자가 이를 절대적으로 경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저 멀리서 검은색 링컨 차량이 천천히 다가왔다.박민정은 차의 번호판을 알아봤다. 유씨 저택 차량이었다.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고영란 옆에 있던 여비서가 마당에 눈사람이 가득한 것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박민정과 유남준을 발견했고, 유남준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곧 예의 바른 태도로 그녀는 시선을 거두었다.“박민정 씨, 도련님.”비서는 눈을 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사모님께서 앞으로 이틀 후면 둘째 도련님의 약혼식이니 두 분을 모
한동안 집안에 정적이 흘렀고 고영란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맞아, 걔야.”윤소현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 새어머니의 딸이에요. 언니인 저도 돌아온 후로 한 번도 못 봤네요.”천 년 묵은 여우에게 가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영란은 윤소현을 집에 들이는 데 동의하기 전 당연히 그녀에 대해 조사했었다. 한수민이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과 생모인 정수미의 힘을 알고 나서야 허락한 것이었다.박민정처럼 쓸모없는 며느리는 더 이상 원치 않았다.“앞으로 만날 기회가 많을 거야. 밥 많이 먹어.”고영란은 박민정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윤소현은 미래의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이제 보니 유씨 가문에 들어오면 경제권은 확실히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윤소현은 유남우를 따라 산책을 나갔다.그녀는 이곳에서 지내라는 고영란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유남준이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지도 알고 싶었다.“남우 씨, 형님 말이에요, 제가 다 안타까워요. 박민정 같은 여자는 형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유남우의 걸음이 느려지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덤덤하게 그녀를 응시했다.“형수님에 대해 잘 아나 봐?”형수님이라는 말에도 윤소현은 오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쉴 틈 없이 떠들었다.“새어머니로부터 박씨 가문의 딸로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청력이 약하고 잘하는 게 없다고 들었어요. 회사 운영할 줄도 모르고 배운 기술도 없어서 쓸모가 없다네요.”유남준은 약혼녀의 입에서 박민정의 이러한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회사를 운영할 줄 모른다고? 잘하는 것도 없고?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구한 곡이 사실은 박민정이 쉽게 쓴 곡이라는 걸 윤소현은 알까.적어도 박민정은 스스로 회사를 차려 아버지에게 의지해 먹고사는 그녀보다 훨씬 나았다.유남우가 얇은 입술을 달싹였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어딘가 서늘
유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도우미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도련님, 박민정 씨, 저녁 준비 다 끝마치고 두 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남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우미에게 물었다.“내 아내를 뭐라고 불렀지?”그는 기억을 잃기 전에 모든 도우미들에게 박민정이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도우미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사모님.”유남준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유남우가 책임자이고 과거에 박민정을 막 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을 변호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바뀌었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려 부엌으로 향했다.유남우와 윤소현은 이미 도착했고,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윤소현은 어렴풋이 불쾌감을 느꼈다.곧 유남준과 그의 아내를 본 윤소현의 시선은 순식간에 박민정에게 고정됐다.과거 윤소현은 박민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잠깐 조사만 한 적이 있었다.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조금 닮아있었지만 박민정의 눈은 맑은 물이 가득 찬 듯 더욱 아름다웠고, 첫눈에 잊을 수 없는 첫인상을 남겼다.박민정이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윤소현의 내면에 있던 질투심이 조금은 누그러지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주버님, 형님.”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래도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이곳에 와서 그녀도 윤소현을 유심히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상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고 풍기는 분위기마저 한수민과 똑같았다.그 순간 유남우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유남준을 불렀다.“형.”유남준은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가득했다.“그래.”박민정이 유남준을 도와 자리에 앉자 식사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고영란은 여전히 방에서 유명진에게 오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유명진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통화를 끝내고 고영란이 부엌으로 왔다.부엌 안의 네 사람을
윤소현도 뒤따라 일어서서 같이 가려고 할 때 유남우가 그녀를 말렸다.“소현아, 넌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고영란 앞이라 윤소현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곧 그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유남우가 나가자 그녀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밖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박민정은 유남우가 문 앞까지만 배웅해 줄 거라 생각하고 거절하지 않은 채 유남준의 옷자락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왠지 눈앞이 흐려져 길도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손을 꽉 쥐었다.유남준은 유남우가 따라오며 손을 뻗는 것을 알고 박민정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박민정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박민정을 더 꽉 잡고 뒤에 있던 유남우에게 말했다.“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이런 일 할 시간에 회사나 잘 경영해.”유남우는 멈칫하며 곧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유남준은 그가 약을 탔다는 걸 아는 것이다.어쩐지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 그는 도리어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형,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뭐가 문제야?”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박민정은 정신이 흐릿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너무 졸렸던 그녀는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유남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박민정은 그의 넓은 등에 기대어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몸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유난히 불쾌했다.박민정이 잠든 것을 확인한 유남우는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유남준에게 말했다.“형, 이제 물건을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때야.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형이 아니야.”유남준은 그 말에 웃음이 났다.“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법적으로 내가 남편인데. 탓하려면 애초에 나를 사칭한 너 자
차 안.박민정은 무척 괴로웠다. 의사도 과실주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이 힘들고 졸리고 더운 것 같았다.“유남준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나 차멀미 날 것 같아요.”“나한테 기대서 자면 어지럽지 않을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따뜻하게 달랬다.박민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두 사람은 유남준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목울대가 일렁거리면서 심장의 욱신거림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의 부축을 받으며 곧장 개인 접견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 검진을 받았고, 다행히 와인에 첨가된 물질이 몸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아 약효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면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김인우가 병실로 급히 달려왔다.“남준아, 무슨 일이야?”그 시각 박민정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유남준은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뒤 두 사람은 병동 밖으로 나갔다.“남준아, 박민정 씨가 무슨 일로 병원에 온 거야?”“먹지 말아야 할 것을 좀 먹었어. 심각한 건 아니야.”유남준은 처음에는 너무 걱정돼서 김인우에게 와달라고 말했다.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오늘 일로 인해 더욱 짜증이 났고,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괜찮아서 다행이야.”김인우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렸다.박민정은 자신의 은인이고 아직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김인우는 유남준과 함께 남아 박민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쫓는 말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데리고 돌아갔다.밤이 깊어질 무렵 박민정은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눈을 뜨고 방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살짝 움직이자 갑자기 그녀의 손이 따뜻한 무언가에 닿았고 조심스럽게 잡자 유난히 단단했다.박민정은 뒤돌아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과 마주했고 그제야 방금 꽉 쥔 것이 유남준의
윤소현의 눈가에 오만함이 가득 담겼다.“어쨌든 내 새엄마가 그쪽 친어머니잖아요.”박민정은 그 말에 직격탄을 날렸다. “유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 되려면 당연히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죠.”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유남우가 박민정을 돌려보내는 것을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여자의 직감으로 박민정을 미워하게 되었다.“아직 유씨 가문에 시집오기 전이니까 동생이라고 부를게.”윤소현은 말을 마친 뒤 앞으로 다가갔다.“동생, 오늘 약혼식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줘야겠어.”유남우만 아니었다면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네, 10분만 기다려요.”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은 윤소현을 거실에 혼자 남겨두고 씻으러 갔다.윤소현은 자연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유씨 가문은 진주 제일 가문답게 유남준이 머무는 것도 심플하지만 곳곳에 화려함이 엿보였다.그에 비해 유남우가 사는 곳은 훨씬 더 평범했다.윤소현은 불만이 가득했다. 앞도 못 보는 유남준이 왜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건지.박민정은 짐을 챙긴 뒤 유남준에게 말하고 윤소현과 함께 문을 나섰다.저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링컨이 주차돼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차에 타려는 순간, 낯익은 인물이 차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고 윤소현이 먼저 말했다. “엄마 왔어?”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동생, 인사도 안 해?”윤소현은 말로는 박민정을 동생이라고 불렀지만 눈 밑에는 조롱이 가득했다.한수민은 차갑게 말했다.“소현아, 쟤가 무슨 동생이니. 얼른 차에 타. 밖이 춥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돌아보았다.“차에 타, 물건 사러 가야 해.”박민정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며 차에 탔다.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미묘했다.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 가운데 손가락에 낀 알이 큰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이거 남우가 사준 거 맞지? 예쁘다.”“네, 남우 씨가 맞춤 제작해 준 거예요.
한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박민정에게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박민정이 덧붙였다.“친딸인 제가 왜 의붓딸보다 못한 거죠? 그렇게 미워하면서 왜 날 낳았어요?”잔뜩 긴장하던 한수민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졌다.그녀의 차갑고 화려한 얼굴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널 낳지 않았을 거야. 네가 태어난 건 실수였어!”박민정은 이 대답을 수없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설명할 수 없이 아팠다.어쩌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성애를 너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박민정은 한수민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당신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한수민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그 순간 윤소현이 다가왔다.“엄마, 무슨 얘기 했어요?”한수민은 박민정에게 보였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한 모습만 남았다.“아무것도 아니야.”“엄마 박민정 안 좋아해요?” 윤소현은 조금 궁금했다, 이 세상에 딸을 사랑하지 않는 친엄마는 없지 않나?친엄마인 정수미는 해외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약혼식 날에 꼭 오겠다고 했다.게다가 정씨 집안의 사업 지분을 나눠줄 거라는 말도 했다.“걔 얘기는 하지도 마. 걔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도 유명한 무용수가 됐을 거고, 이렇게 추락하지도 않았을 거야.” 한수민이 차갑게 말하자 윤소현은 이해한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씨 가문 저택.박민정이 먼저 돌아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남우가 보였다.큰 키에 비정상적으로 하얀 얼굴, 유남준과 똑같이 깊은 눈동자는 온화하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다 샀어? 널 힘들게 한 건 아니지?”유남우가 앞으로 걸어오자 박민정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소현 씨랑 엄마는 뒤차에 있어요.”어쨌든 윤소현은 유남우 미래의 아내였으니 당연히 박민정은 유남우 앞에서 그녀에 대해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그제야 홍주영은 지금이 근무 시간이라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급히 하민재에게 배달 음식을 하나 시켜주고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나 회사에 잠깐 다녀와야 해요.”하민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병원에 혼자 두고 가는 거예요? 의사 말로는, 지금 상태면 최소 이틀은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한다던데. 혹시라도 내부 장기에 손상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그 말에 홍주영은 잠시 망설였다.“퇴근하자마자 바로 올게요.”“근데 밥은요? 씻는 건요? 누가 도와줘요?”하민재가 묻자 홍주영은 곧 결심한 듯 말했다.“회사 가서 이틀 휴가 내고 올게요. 병간호는 내가 해줄게요.”그제야 하민재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근데 유남우 대표는 뭐라고 안 할까요?”홍주영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을 거예요. 저 지금껏 한 번도 휴가 낸 적 없으니까요. 게다가 약혼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당연히 내가 돌봐야지요.”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이번엔 꼭 하민재 곁을 지켜야겠다고.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였고 앞으로는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사람이었으니까.“주영 씨는 정말 착하네요.”하민재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홍주영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됐어요. 아까 시킨 음식 곧 도착할 테니까 받아서 먹고 있어요. 나 회사 잠깐 다녀올게요.”“네!”하민재는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하지만 그녀가 병실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민재의 얼굴에 번지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메시지를 눌러 열었는데 부하 직원에게서 온 보고였다.[이번 일, 유남우 씨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고를 낸 택시 운전사가 과거에 유남우 씨와 자주 연락했던 기록이 있습니다.]유남우...하민재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듯 천천히 되뇌었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땐 연씨 집안 사람들 쪽에서 자신을 노린 줄 알았다. 설마 유남우일 줄이야.도
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홍 비서님?”홍주영이 급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도련님이 거절하신 거예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홍주영은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이 굳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아이가 도련님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죠.”박민정이 담담하게 말하자 홍주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도련님께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민정 씨, 너무 원망하진 말아요.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꼭 연서 씨가 다혜를 입양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볼게요.”유다혜라는 아이는 홍주영도 자주 보아온 터였다.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착한 아이가 고아로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그래 준다면 너무 고맙죠.” 박민정이 말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그치만 남우 오빠가 딱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홍 비서님, 한 가지만 조심하세요. 그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홍주영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는데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도련님이 좀 집착이 강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예전엔 박민정도 그렇게 생각했다.홍주영이 더 뭔가 말하려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들고 화면을 확인하니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약간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죠?”“홍주영 씨 되시죠? 약혼자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병원으로 빠르게 와주십시오.”교통사고?홍주영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네, 네. 지금 바로 갈게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박민정을 돌아보며 말했다.“민정 씨,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그 말을 마친 뒤, 홍주영은 급히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민재가 왜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걸까?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하민재는 이미 일반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의사는 다행히도 외상 정도만 입은 것 같다고
“형, 민정아.”유남우가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불렀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동시에 돌아보았다.유남준은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난 여기 있을게.”“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자에서 걸어 나왔다.유남우가 우산을 들어 그녀 위에 씌워주었다.“고마워요.” 박민정은 공손하게 인사하며 살짝 몸을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그런 작은 움직임까지 유남우는 다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망설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연서 씨는 제 오랜 친구예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다혜를 정말 진심으로 입양하고 싶어 해요. 다혜가 그 친구랑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박민정의 다급한 말투에 유남우는 손에 쥔 우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우리, 이곳에 온 것도 참 오랜만이지?”박민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요즘 따라 자꾸 어린 시절 꿈을 꿔.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남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예요. 난 오늘 다혜 얘기를 하러 온 거지, 어린 시절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에요.”박민정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유남우는 말을 멈췄다.“...다혜는 내 딸이야. 남에게 맡길 수 없어.”박민정은 손을 꽉 쥐었다.“알아요. 다혜는 오빠랑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조 비서가 가끔 유다혜를 보러 병원에 간다고 했다. 간호사들 말로는 유남우는 거의 병원에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다혜는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유남우는 그 말에 짧게 웃었다.“다혜랑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박민정은 그의 부드럽고 단정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굳이 콕 집어 말할 필요 없잖아요. 서로 다칠라.”그녀는 끝까지 윤소현이 다혜를 어떻게 임신했는지는 입 밖
호숫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먼저 도착해 작은 정자를 하나 찾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예전에 너랑 여기 같이 온 적 있어.”“네?” 박민정은 잠깐 멍해졌다.“나랑 여길 같이 왔다고요?”“잊었어?”유남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는데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박민정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은 게 아니라 헷갈렸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유남준과 유남우는 너무도 닮았다. 어쩌면 그때 자신조차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런 그녀의 눈치를 읽은 듯 유남준이 슬며시 웃었다.“그때 말이야, 네가 반 친구한테 맞고 울면서 오다가 나를 딱 마주쳤지. 네가 내 품에 안겨선 자초지종을 다 말하더라.”“내가 그놈 혼쭐을 내주고 결국 전학까지 시켰잖아.”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그게 남준 씨였네요.”어쩐지 그날따라 유남준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던 게 기억났다. 평소엔 늘 다정한 그였는데 그날은 거칠게 이렇게 말했다.“울긴 왜 울어, 한심하게. 맞았으면 맞은 만큼 되갚아야지!”그땐 그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날 자신은 억지로 유남준을 끌고 이곳까지 왔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나무에 기대 서 있었고 울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질색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또 울면 나 간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추운 바람이나 쐬고 있고 싶진 않거든.”그 말에 박민정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지만 유남준은 끝내 떠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밤이 깊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박민정은 다시 유남준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만 보면 네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 꼭 유남우였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유남준은 질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두 사람 다 좋아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럼 이건 이중 플레이야, 양다리라고.”박민정은 피식 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