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의 눈가에 오만함이 가득 담겼다.“어쨌든 내 새엄마가 그쪽 친어머니잖아요.”박민정은 그 말에 직격탄을 날렸다. “유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 되려면 당연히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죠.”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유남우가 박민정을 돌려보내는 것을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여자의 직감으로 박민정을 미워하게 되었다.“아직 유씨 가문에 시집오기 전이니까 동생이라고 부를게.”윤소현은 말을 마친 뒤 앞으로 다가갔다.“동생, 오늘 약혼식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줘야겠어.”유남우만 아니었다면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네, 10분만 기다려요.”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은 윤소현을 거실에 혼자 남겨두고 씻으러 갔다.윤소현은 자연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유씨 가문은 진주 제일 가문답게 유남준이 머무는 것도 심플하지만 곳곳에 화려함이 엿보였다.그에 비해 유남우가 사는 곳은 훨씬 더 평범했다.윤소현은 불만이 가득했다. 앞도 못 보는 유남준이 왜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건지.박민정은 짐을 챙긴 뒤 유남준에게 말하고 윤소현과 함께 문을 나섰다.저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링컨이 주차돼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차에 타려는 순간, 낯익은 인물이 차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고 윤소현이 먼저 말했다. “엄마 왔어?”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동생, 인사도 안 해?”윤소현은 말로는 박민정을 동생이라고 불렀지만 눈 밑에는 조롱이 가득했다.한수민은 차갑게 말했다.“소현아, 쟤가 무슨 동생이니. 얼른 차에 타. 밖이 춥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돌아보았다.“차에 타, 물건 사러 가야 해.”박민정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며 차에 탔다.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미묘했다.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 가운데 손가락에 낀 알이 큰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이거 남우가 사준 거 맞지? 예쁘다.”“네, 남우 씨가 맞춤 제작해 준 거예요.
한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박민정에게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박민정이 덧붙였다.“친딸인 제가 왜 의붓딸보다 못한 거죠? 그렇게 미워하면서 왜 날 낳았어요?”잔뜩 긴장하던 한수민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졌다.그녀의 차갑고 화려한 얼굴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널 낳지 않았을 거야. 네가 태어난 건 실수였어!”박민정은 이 대답을 수없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설명할 수 없이 아팠다.어쩌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성애를 너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박민정은 한수민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당신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한수민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그 순간 윤소현이 다가왔다.“엄마, 무슨 얘기 했어요?”한수민은 박민정에게 보였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한 모습만 남았다.“아무것도 아니야.”“엄마 박민정 안 좋아해요?” 윤소현은 조금 궁금했다, 이 세상에 딸을 사랑하지 않는 친엄마는 없지 않나?친엄마인 정수미는 해외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약혼식 날에 꼭 오겠다고 했다.게다가 정씨 집안의 사업 지분을 나눠줄 거라는 말도 했다.“걔 얘기는 하지도 마. 걔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도 유명한 무용수가 됐을 거고, 이렇게 추락하지도 않았을 거야.” 한수민이 차갑게 말하자 윤소현은 이해한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씨 가문 저택.박민정이 먼저 돌아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남우가 보였다.큰 키에 비정상적으로 하얀 얼굴, 유남준과 똑같이 깊은 눈동자는 온화하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다 샀어? 널 힘들게 한 건 아니지?”유남우가 앞으로 걸어오자 박민정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소현 씨랑 엄마는 뒤차에 있어요.”어쨌든 윤소현은 유남우 미래의 아내였으니 당연히 박민정은 유남우 앞에서 그녀에 대해
박민정은 유남우를 부축해 그가 머무는 곳으로 데려다준 후 돌아갔다.거실에 막 들어섰을 때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이렇게 추운 날, 실내에 난방조차 켜져 있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그녀가 재킷을 꼭 껴입고 들어갔을 때, 잘생긴 얼굴로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유남준이 보였다.기억을 잃은 이후 박민정은 유남우의 이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왜 난방 안 켰어요, 안 추워요?” 박민정이 묻자 소리를 따라 유남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열기가 넘치는데 어떻게 추울 수가 있어?”잔뜩 비꼬는 그의 말에 박민정은 더욱 의아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열기요?”유남준은 박민정이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척할 줄은 몰랐다.누굴 바보로 아나!그는 더 말하지 않고 바로 사진 더미를 꺼내 그녀를 향해 던졌다.사방에는 박민정과 유남우가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유남준은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는 들을 수는 있었고 사진을 찍은 것도 박민정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사진을 본 박민정은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유남준에게 다가가 물었다.“사람 보내서 몰래 나 찍었어요?”그동안 유남준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지금 몰래 찍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그의 두 눈에 담긴 초점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안 그러면 박민정은 그가 앞 못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우는 내 동생이고 네 시댁 식구야.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걔를 찾아?”유남준은 차가운 말을 뱉자마자 다시금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그는 박민정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짜악-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유남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거렸고, 박민정이 얼마나 큰 힘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병이 도져서 잠깐 부축해 준 것뿐인데 내가 뭘 찾아요? 그렇
다음 날 이른 아침, 집안의 도우미들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유남준을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유남준은 소리를 듣고 곧바로 눈을 떴다.“민정아.”“도련님, 저예요, 사모님께서는 아직 안 깨셨어요.”도우미가 대답했다.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으니 이만 나가요. 요즘은 내가 부르기 전까지 안 와도 됩니다.”신림현에 살면서 도우미가 너무 많은 것을 싫어했던 유남준이었다.“네.”도우미는 조심스럽게 나가서 문을 닫았다.유남준은 깨어난 후 잠기가 달아나 박민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박민정은 임신 후 매일 늦잠을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어제 윤소현과 함께 오후 물건 고르느라 동행한 탓에 오늘 일어나 보니 벌써 오전 열 시였다.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음식 냄새가 났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고, 부엌 불 앞에서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그가 보였다.유남준은 사업적으로 뛰어나고 피아노도 잘 치지만 딱 하나, 요리만 못했다.박민정은 그가 몇 번이나 손이 델 뻔한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내가 할게요.”하지만 유남준의 큰 몸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걱정 마, 밖에서 사 온 건데 그냥 데우면 돼.”그는 박민정이 자신의 요리가 서툴러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설명했다.어쩐지 요리도 못하는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성공했다 싶었다.“그럼 손 데지 않게 조심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인지라 박민정은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사이드 테이블로 가서 기다렸다.그녀는 유남준의 바삐 움직이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뒷모습을 보며 전에 이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유남준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식을 차려주었다고 했다.심지어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에서는 마치 요리사가 한 것 같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하지만 최근 유남준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정말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지원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남준은 이미 모든 음식을 식탁에
진서연은 박민정에게 회사의 최근 경영 상황을 보고했다. “보스, 이 기세라면 머지않아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 돌아오세요? 에리가 얼마 전에 저한테 찾아와서 만나 뵙고 다른 곡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에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돌 가수에 혼혈이고, 특히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다.진서연은 매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이제 곧 새해인데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박민정이 답하자 진서연은 조금 아쉬운 듯했다.“알았어요, 그럼 제가 말씀드릴게요.”“그래.”박민정은 진서연과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사실 회사의 업무는 대부분 직원들이 처리하기 때문에 그녀는 대충 파악만 하면 된다.집이 너무 썰렁해서 TV를 켜고 몇 개의 채널을 돌리던 박민정의 시선이 갑자기 연예 뉴스에 고정됐다.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지원이 카메라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이 방송 화면에 잡혔다.“여기 계신 팬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의 사생활 영상으로 인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저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렸어요. 여러분의 이해를 바라는 대신 제가 더 많은 작품을 통해 저를 아끼는 여러분께 보답하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꼭 사람 제대로 보고 쓰레기 같은 남자는 믿지 마세요. 안 그러면 결국 당하는 건…”이지원의 마지막 말로 모든 잘못을 남자들에게 돌렸다.사람들은 그녀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것도 잊은 채 그저 영상이 유출된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듯했다.온라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서서히 늘어났다.박민정은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상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연예계는 정말 어디까지 밑바닥인지 알 수 없었고 연예인이 무슨 짓을 해도 인터넷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있었다.유남준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TV를 끈 뒤였다.그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이지원에 대한 일이 생각나지 않은
방 안은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김인우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형수, 갖고 싶은 건 말만 하면 내가 지금 가서 사줄게.”세상에 공짜가 없고, 하늘에서 떡이 그냥 떨어질 리가 없었다.박민정은 김인우가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니라고 느꼈다.“아니요, 나도 직접 살 돈이 있어요.”김인우는 조금 당황한 듯 말문이 막혔다.“남준아, 뭐 필요한 거 있어?”유남준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할 말 있어?”김인우는 열정적인 자신과 다르게 시큰둥한 두 사람을 보며 화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할 일 없으면 와서 같이 놀면 안 돼?”어제 고영란은 박민정에게 오늘도 약혼식장을 어떻게 꾸몄는지 확인하러 가자고 했고, 그녀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이 나가자마자 유남준은 김인우에게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할 일 없으면 돌아가.”“남준아, 너 그러면 나 속상하다? 차 한 잔도 대접 안 해줘?”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고, 김인우는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김인우는 막 도착한 터라 금방 떠나고 싶지 않아 소파에 앉아 혼자 TV를 켰다.TV에서 뉴스가 재생되자 그는 울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다.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남준이가 저 여자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았나, 대체 언제 나온 거야?”그는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시간 줄 테니 오늘 내로 이지원 내 눈앞에 데려와.”두 시간도 되지 않아 이지원은 다시 진주 정신병원으로 돌아왔고, 검은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눈앞이 다시 또렷해졌다.이지원은 자신이 있는 곳이 낯익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동공이 급격히 작아졌다.“난 미치지 않았어, 빨리 날 내보내 줘!”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병실 문이 열리자 외부의 강렬한 빛이 들어왔고, 김인우가 구두를 신은 채 불빛을 등지고 그녀에게 걸어왔다.사실 박민정보다 이지원을 더 미워
김인우가 나간 후, 방 안은 이지원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그 사람들이 떠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지원은 상처로 뒤덮인 피 웅덩이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쓰러졌다.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왜 좋은 건 다 박민정이 가져가는지, 왜 자기는 자신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누리는 걸 누릴 수 없는 건지.심하게 다친 이지원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김인우의 부하들은 이지원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일부러 힘들게 만든 것이다.그녀는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얼마나 지났을까, 곧 기절하려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이지원은 본능적으로 빌었다.“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남자가 반짝이는 가죽 구두를 신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이지원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인우 오빠,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내가 이렇게 빌게.”“이지원, 나야.” 마침내 눈앞에 있던 남자가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지원은 행동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준 오빠, 오빠는...”차마 눈이 멀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했다.“전 유남준이 아니라 유남우입니다. 저번에 만난 적 있는데요.”그때 이지원은 그를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이지원 역시 눈앞의 남자가 유남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방금 알아차렸다.“남준 오빠 쌍둥이 동생이에요?”“네.”“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유남우 역시 박민정을 돕기 위해 자신을 처리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우리 거래하는 건 어때요?” 유남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지원은 유남우의 온화한 태도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그를 두려워했다.“무슨 거래요?”김인우의 표적이 되어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그녀는 지금 상황보다 더 나쁜 거래는 없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이 유남준을 떠나도록 도와주면 당신을 구해줄게요.” 유남우는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혔다.이지원은 유남우가 왜 이런
“걱정 마세요. 제 아이는 유씨 가문에 들이지 않을 테니. 가능하다면 유남준 씨를 설득해서 빨리 이혼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고영란은 다시 한번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걱정 마, 남준이가 기억을 되찾으면 내가 이혼하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고영란은 박예찬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하던 일도 멈추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고영란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박민정 곁을 떠나자 윤소현은 다가와 짐짓 살가운 척 물었다.“괜찮아?”한편으로는 박민정의 입에서 미래의 시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괜찮아요.”그런데 박민정이 딱 한 마디로 대답할 줄이야.윤소현은 굴하지 않고 물었다.“아줌마랑 친해지기 어렵지?”“잘 모르겠어요.” 박민정은 단호하게 말했다.윤소현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냉정할 줄은 몰랐기에 더 가식 떨지 않았다.“박민정, 난 곧 남우 씨와 결혼할 거고 앞으로 유씨 가문은 남우 씨 손에 들어올 텐데 조금 더 나를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어?”박민정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말했다.“전 정말 고 여사님에 대해서는 몰라요. 유남우 씨와 결혼할 사이면 궁금한 것도 그 분께 물어보면 될 것 같네요.”윤소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유남우에게 물어본 적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유남우는 겉으로는 상냥해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유남우가 왜 자신과 약혼을 하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민정으로부터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윤소현은 유남우를 찾으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를 보게 됐다.유남우의 훤칠한 키가 사람들속에서 눈에 띄었고, 그는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윤소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꽃꽂이를 하고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유남우의 시선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
하지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컸고, 유남우가 박민정의 모든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버린 지금, 유남준은 어쩌면 평생 박민정을 찾지 못할 지도 몰랐다.“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우가 대답했다.“네.”이지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럼 약속한 건 어떻게 된 건가요?”“아직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서두르는 거죠?”유남우가 다시 말했다.유남우를 이미 따르기로 한 이지원은 지금 모든 것을 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이제 마지막까지 딱 한 단계 남았어요. 유남준한테 박민정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거든요.”유남우가 입을 열었다.이지원은 그런 유남우를 보면서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 한 명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준비하죠.”“그래요.”이지원이 자리를 뜨자 유남우는 다시 코트를 입고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홍주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 요즘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따로 주치의라도 불러드릴까요?”“필요없어.”유남우는 단호히 홍주영의 말을 거절했다.“주영아, 난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기쁘거든. 나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네가 괜한 걱정 하는 거야.”그 말에 홍주영도 더는 권하려 하지 않았다.유남우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더미를 한아름 안고 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요 며칠 동안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유남우는 퇴근 들어 계속 외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류 위로 사인 하던 남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은데, 묻지 말아야 할 질문 아닌가?”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냉기가 스며있었다.유남우의 이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홍주영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의 말을 전부 믿을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우선 이 여자 가둬요.”그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네.”그 말에 당황한 윤소현이 말했다.“아주버님, 남우 씨를 봐서라도, 제 배 속의 아이를 봐서라고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한 마디만 남겼다.“민정이를 찾았을 때, 민정이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면 그때 풀어드리죠.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소현 씨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그렇게 윤소현은 가차 없이 차에 태워졌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다. 자신이 왜 박민정을 찾아갔었는지, 왜 그 일을 인정했던 건지.이제 윤소현은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남준은 계속해서 인력을 충원해가며 박민정을 찾는 게 총력을 기울였다.마침내 유남준은 서다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택시에 남기신 귀걸이를 찾았습니다. 택시 안에 내장된 블랙박스 영상으로 사모님의 이동 경로까지 모두 파악했습니다.”“알겠어, 그 영상 나한테 보내줘. 그 경로대로 찾아봐야 하니까.”“네.”수색 범위가 좁아지자 유남준은 김인우와 방성원의 인력까지 동원해 박민정을 찾기 시작했다.한편, 이지원은 유남우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장소 바꿔요. 유남준이 추적 중인 모양이니까.”“네.”이지원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유남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두 아이는 남겨놓고 가요.”두 아이가 작전을 방해할지도 몰랐다.이지원은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유남우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남우 씨가 어떻게 저를 유남준한테서 구해준다는 거죠? 유남준 그 냉혈한이 작정하고 저를 공격하면 어쩔 건데요?”이지원은 윤소현 같은 그 바보가 유남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원 씨가 비밀만 지켜준다면, 제가 책임지고 지켜드리죠.”유남우가 약속했다.“좋아요.
윤소현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내랑 아이를 못 지킨 건 아주버님인데, 왜 그걸 저한테서 찾아요? 웃겨, 정말.”유남준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나 버렸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유남준은 곧장 CCTV를 통해 박민정이 스스로 병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장 부하직원들에게 박민정이 병원을 벗어난 후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지시했다.한편, 윤소현은 여전히 곁에서 비아냥거렸다.“아주버님, 제가 봤을 땐 굳이 찾을 필요도 없어 보여요. 분명 바람 나서 다른 남자랑 도망간 게 분명해요. 애도 있으면서 참... 그냥 조용히 살지...”윤소현은 끝을 모르고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 순간, 유남준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윤소현에게 다가간 유남준은 조금 전의 신사다운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윤소현의 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네 애새끼가 20주쯤 됐다고 했지? 내가 지금 너 죽이고, 의사 찾아가서 애 꺼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우리 가문 재력 정도면 조산아 살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거든.”그 말에 윤소현의 동공이 커지더니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는 최대한 유남준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건지 점점 땅에서 발이 떨어지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이 미친놈은 지금 마음만 먹으면 정말 윤소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윤소현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쳐봤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목을 움켜쥔 유남준의 힘은 점점 강해지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제야 윤소현은 처음으로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유남준을 향해 눈빛으로 용서를 구했다.그녀의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갈 때쯤, 남자는 마침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윤소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목을 감싸고 거친 숨과 기침을 내뱉었다.“이제 말할 수 있겠지? 민정이랑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그 말을 하는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
이지원은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거라면 날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했어야지.”그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이지원은 박민정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이런 대화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내가 정말 너 따위를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고.”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지 그래.”박민정의 목을 움켜쥔 이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문가에서 어떤 남자의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이지원은 뭔가가 떠오른 듯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해줄 생각이야.”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의 안위였다.“이지원, 화풀이할 거면 나한테만 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알고 싶어? 그럼 협조 잘해야 할 텐데?”이지원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협조라고?박민정은 이지원이 말하는 협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뭘 하려는 거야?”이지원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뼉만 두어 번 쳤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우르르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사람 맞죠?”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제 부탁 좀 할게요.”“네.”대답을 마친 그 사람은 천천히 박민정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저희는 심리상담 교수입니다. 민정 씨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이지원이 왜 생뚱맞게 심리상담 교수들을 불러들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박민정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조하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박민정은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박민정 역시 자신이 간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정민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이라도 하는 듯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왜 말을 안 듣지, 박민정 씨?”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는 건드리지 마요!”박민정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출산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박민정은 순간적인 아픔에 헛숨을 들이키며 입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제가 얘기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이건 경고예요. 한 번만 더 허튼수작 부렸다간 그땐 저도 봐줄 생각 없어요.”“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연락 안 할 테니까, 제발 아이한테 손대지 마세요.”박민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진작 그랬어야죠. 이제 제가 말해주는 장소로 오세요.”박민정은 수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그녀 역시 자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떠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잊게 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었다.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택시 기사에게 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뒤이어 차를 여러 번 더 갈아타며 수화기 너머의 인간이 얘기해 준 장소로 향했다.끔찍할 정도로 치밀했던 그 인간은 박민정에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 역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두 귀걸이를 각각 다른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렇게라도 해놓
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당신이 데려간 거예요? 신생아실에 왔는데 아이들이 없어요. 지금 어디 있나요?”유남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정아,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아이들은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예요? 왜 다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박민정이 재차 물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조여왔지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본가로 보냈어.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우리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가자.”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소현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남준 씨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대요.”윤소현은 유남준이 거짓말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본가에 가서 아이들을 봐.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분명 거기 없을 거야.”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윤소현은 핏기 하나 없는 박민정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며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혼자 신생아실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유남준이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박민정은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유남준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했잖아. 지금 몸이 매우 약해서 나오면 안 된다고.”“남준 씨,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나 데려다 줘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쉴 수도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 병실로 향했다.병상에 박민정을 눕히고 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선 잘 쉬어. 약속할게. 사흘 안에 반드시 아이들을 데려와서 보여줄게, 어때?”이 말을 듣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유남준은 이런 그녀의 모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