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조하랑은 은정숙이 말한 변했다는 것이 단순히 박민정을 향한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은정숙에게 말하는 유남준의 태도도 확실히 전과 달라졌다.의사 선생님들이 각종 고급 의료 장비까지 가져오자 조하랑은 감탄했다.“민정아, 네가 시킨 거야?”“남준 씨가 의료 장비를 찾는 데 도움을 줬어.”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자신이 전문의를 고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유남준 덕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은정숙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그는 박민정이 자신에게 신세를 졌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곁을 지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랬기에 은정숙은 더더욱 유남준이 변했다고 확신했다.어르신은 의사에게 병을 보이고 진료를 받으며 반나절을 흘려보냈다.진료가 끝나자 의사가 박민정에게 말했다.“박민정 씨, 나이가 들어 병을 완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수술을 통해 어르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습니다.”“그래요, 수술 일정은 언제로 잡으면 돼요?”“당분간 약을 먹고 그 후에 시간 정하는 걸로 하죠.”의사와 얘기를 마친 후 박민정은 그들을 배웅했다.은정숙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속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박민정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난 너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라며 “그래요.”조하랑도 옆에서 그녀를 다독이며 오늘 집안 분위기가 유난히 평화롭고 행복했다.유남준은 오늘 회사에 가야 했기 때문에 의사들이 나가자 그도 함께 나갔다.가는 길에 그는 서다희에게 전화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어?”“유남우 씨가 맞습니다.”“내가 뺏으라고 했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어?”“아무 문제 없어요.”서다희는 유남준이 올해가 끝나면 회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유남준은 그제야 전화를 끊었다.한편, 조하랑은 박민정을 따라 윤우를 만나러 갔다.그 시각, 병원에서는 윤우가 병상에 누워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간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보낸 사람들도 사진 찍는 데 애를 먹었어요. 박민정 씨 뒤에 도련님 측 사람들이 따라다니고 있어서 우리 쪽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전에 박민정과 예찬을 조사하러 보냈던 사람들이 유남준에게 발각된 이후, 고영란은 더욱 조심했고 그곳에 보냈던 사람들은 감히 그들이 사는 곳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다.고영란은 지금 사진을 보니 자신이 모르는 게 아직 더 많은 것 같다.“계속 조사해. 박민정에게 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야겠어.”“네.”...한편 박민정과 조하랑은 윤우를 데리고 몇 시간 동안 놀다가 윤우의 몸이 감당할 수 없어 급히 돌아왔다.그들은 설 전에 윤우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고 병원을 나와 차에 앉은 조하랑은 박민정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배 속의 아기가 태어나 제대혈이 나오면 윤우도 수술받을 수 있어. 수술 끝나면 예찬이처럼 될 수 있을 거야.”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를 만졌다.“이번엔 아들일지 딸일지 모르겠네.”“딸이면 좋겠네. 그럼 아들딸 다 있는 거잖아. 윤우와 예찬이도 여동생 갖고 싶어 했잖아.” 조하랑이 말했다.물론 박민정도 딸을 원했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둘 다 좋았다.“그런데 하랑아, 넌 어떻게 할 거야?”“뭘 어떻게 해?”“아저씨 쪽은 해결됐어?”박민정은 조하랑이 아직 첫사랑 강연우와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조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르겠어. 사실 지금 너랑 유남준, 윤우랑 예찬이를 보니까 그냥 아빠 말 듣고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해.”“하랑아, 단순히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하는 건 절대 안 돼.” 박민정이 말하자 조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거 아니야? 민정아, 지금까지 결혼한 거 후회 안 해?”후회?“유남준과 결혼한 건 후회하지만 윤우와 예찬이를 낳은 건 후회하지 않아. 그래서 네가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눈사람 만들러 갈래?”유남준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박민정이 눈을 좋아하고 어린아이처럼 눈사람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항상 유치하다고 나무랐었다.박민정은 눈사람을 만들자는 그의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순간 눈에 이채가 돌았지만 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요, 밖이 너무 추운 데다 너무 유치해요.”유남준은 목이 메었다.박민정이 안으로 걸어오며 말했다.“나 좀 쉴 테니까 나가요.”그녀는 유남준이 어젯밤처럼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박민정은 그를 쫓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곧바로 방 문을 잠그고 무언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침대에 누운 그녀는 금세 잠에 빠졌다.다음 날 이른 아침.박민정이 눈을 떴을 때 밖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커튼을 열고 씻으러 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 속에 무수히 많은 귀여운 눈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놀란 눈으로 통유리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 박민정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유난히 복잡한 기분으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눈을 밟으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눈사람 만들어.”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움직이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박민정은 남자가 이를 절대적으로 경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저 멀리서 검은색 링컨 차량이 천천히 다가왔다.박민정은 차의 번호판을 알아봤다. 유씨 저택 차량이었다.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고영란 옆에 있던 여비서가 마당에 눈사람이 가득한 것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박민정과 유남준을 발견했고, 유남준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곧 예의 바른 태도로 그녀는 시선을 거두었다.“박민정 씨, 도련님.”비서는 눈을 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사모님께서 앞으로 이틀 후면 둘째 도련님의 약혼식이니 두 분을 모
한동안 집안에 정적이 흘렀고 고영란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맞아, 걔야.”윤소현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 새어머니의 딸이에요. 언니인 저도 돌아온 후로 한 번도 못 봤네요.”천 년 묵은 여우에게 가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영란은 윤소현을 집에 들이는 데 동의하기 전 당연히 그녀에 대해 조사했었다. 한수민이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과 생모인 정수미의 힘을 알고 나서야 허락한 것이었다.박민정처럼 쓸모없는 며느리는 더 이상 원치 않았다.“앞으로 만날 기회가 많을 거야. 밥 많이 먹어.”고영란은 박민정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윤소현은 미래의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이제 보니 유씨 가문에 들어오면 경제권은 확실히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윤소현은 유남우를 따라 산책을 나갔다.그녀는 이곳에서 지내라는 고영란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유남준이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지도 알고 싶었다.“남우 씨, 형님 말이에요, 제가 다 안타까워요. 박민정 같은 여자는 형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유남우의 걸음이 느려지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덤덤하게 그녀를 응시했다.“형수님에 대해 잘 아나 봐?”형수님이라는 말에도 윤소현은 오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쉴 틈 없이 떠들었다.“새어머니로부터 박씨 가문의 딸로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청력이 약하고 잘하는 게 없다고 들었어요. 회사 운영할 줄도 모르고 배운 기술도 없어서 쓸모가 없다네요.”유남준은 약혼녀의 입에서 박민정의 이러한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회사를 운영할 줄 모른다고? 잘하는 것도 없고?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구한 곡이 사실은 박민정이 쉽게 쓴 곡이라는 걸 윤소현은 알까.적어도 박민정은 스스로 회사를 차려 아버지에게 의지해 먹고사는 그녀보다 훨씬 나았다.유남우가 얇은 입술을 달싹였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어딘가 서늘
유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도우미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도련님, 박민정 씨, 저녁 준비 다 끝마치고 두 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남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우미에게 물었다.“내 아내를 뭐라고 불렀지?”그는 기억을 잃기 전에 모든 도우미들에게 박민정이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도우미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사모님.”유남준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유남우가 책임자이고 과거에 박민정을 막 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을 변호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바뀌었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려 부엌으로 향했다.유남우와 윤소현은 이미 도착했고,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윤소현은 어렴풋이 불쾌감을 느꼈다.곧 유남준과 그의 아내를 본 윤소현의 시선은 순식간에 박민정에게 고정됐다.과거 윤소현은 박민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잠깐 조사만 한 적이 있었다.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조금 닮아있었지만 박민정의 눈은 맑은 물이 가득 찬 듯 더욱 아름다웠고, 첫눈에 잊을 수 없는 첫인상을 남겼다.박민정이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윤소현의 내면에 있던 질투심이 조금은 누그러지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주버님, 형님.”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래도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이곳에 와서 그녀도 윤소현을 유심히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상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고 풍기는 분위기마저 한수민과 똑같았다.그 순간 유남우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유남준을 불렀다.“형.”유남준은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가득했다.“그래.”박민정이 유남준을 도와 자리에 앉자 식사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고영란은 여전히 방에서 유명진에게 오라고 연락하고 있었다.유명진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통화를 끝내고 고영란이 부엌으로 왔다.부엌 안의 네 사람을
윤소현도 뒤따라 일어서서 같이 가려고 할 때 유남우가 그녀를 말렸다.“소현아, 넌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고영란 앞이라 윤소현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곧 그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유남우가 나가자 그녀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밖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박민정은 유남우가 문 앞까지만 배웅해 줄 거라 생각하고 거절하지 않은 채 유남준의 옷자락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왠지 눈앞이 흐려져 길도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손을 꽉 쥐었다.유남준은 유남우가 따라오며 손을 뻗는 것을 알고 박민정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박민정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박민정을 더 꽉 잡고 뒤에 있던 유남우에게 말했다.“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이런 일 할 시간에 회사나 잘 경영해.”유남우는 멈칫하며 곧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유남준은 그가 약을 탔다는 걸 아는 것이다.어쩐지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 그는 도리어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형,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뭐가 문제야?”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박민정은 정신이 흐릿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너무 졸렸던 그녀는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유남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박민정은 그의 넓은 등에 기대어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몸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유난히 불쾌했다.박민정이 잠든 것을 확인한 유남우는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유남준에게 말했다.“형, 이제 물건을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때야.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형이 아니야.”유남준은 그 말에 웃음이 났다.“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법적으로 내가 남편인데. 탓하려면 애초에 나를 사칭한 너 자
차 안.박민정은 무척 괴로웠다. 의사도 과실주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이 힘들고 졸리고 더운 것 같았다.“유남준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나 차멀미 날 것 같아요.”“나한테 기대서 자면 어지럽지 않을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따뜻하게 달랬다.박민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두 사람은 유남준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목울대가 일렁거리면서 심장의 욱신거림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의 부축을 받으며 곧장 개인 접견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 검진을 받았고, 다행히 와인에 첨가된 물질이 몸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아 약효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면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김인우가 병실로 급히 달려왔다.“남준아, 무슨 일이야?”그 시각 박민정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유남준은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뒤 두 사람은 병동 밖으로 나갔다.“남준아, 박민정 씨가 무슨 일로 병원에 온 거야?”“먹지 말아야 할 것을 좀 먹었어. 심각한 건 아니야.”유남준은 처음에는 너무 걱정돼서 김인우에게 와달라고 말했다.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오늘 일로 인해 더욱 짜증이 났고,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괜찮아서 다행이야.”김인우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렸다.박민정은 자신의 은인이고 아직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김인우는 유남준과 함께 남아 박민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쫓는 말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데리고 돌아갔다.밤이 깊어질 무렵 박민정은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눈을 뜨고 방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살짝 움직이자 갑자기 그녀의 손이 따뜻한 무언가에 닿았고 조심스럽게 잡자 유난히 단단했다.박민정은 뒤돌아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과 마주했고 그제야 방금 꽉 쥔 것이 유남준의
윤소현의 눈가에 오만함이 가득 담겼다.“어쨌든 내 새엄마가 그쪽 친어머니잖아요.”박민정은 그 말에 직격탄을 날렸다. “유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 되려면 당연히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죠.”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유남우가 박민정을 돌려보내는 것을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여자의 직감으로 박민정을 미워하게 되었다.“아직 유씨 가문에 시집오기 전이니까 동생이라고 부를게.”윤소현은 말을 마친 뒤 앞으로 다가갔다.“동생, 오늘 약혼식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줘야겠어.”유남우만 아니었다면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네, 10분만 기다려요.”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은 윤소현을 거실에 혼자 남겨두고 씻으러 갔다.윤소현은 자연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유씨 가문은 진주 제일 가문답게 유남준이 머무는 것도 심플하지만 곳곳에 화려함이 엿보였다.그에 비해 유남우가 사는 곳은 훨씬 더 평범했다.윤소현은 불만이 가득했다. 앞도 못 보는 유남준이 왜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건지.박민정은 짐을 챙긴 뒤 유남준에게 말하고 윤소현과 함께 문을 나섰다.저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링컨이 주차돼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차에 타려는 순간, 낯익은 인물이 차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고 윤소현이 먼저 말했다. “엄마 왔어?”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동생, 인사도 안 해?”윤소현은 말로는 박민정을 동생이라고 불렀지만 눈 밑에는 조롱이 가득했다.한수민은 차갑게 말했다.“소현아, 쟤가 무슨 동생이니. 얼른 차에 타. 밖이 춥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돌아보았다.“차에 타, 물건 사러 가야 해.”박민정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며 차에 탔다.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미묘했다.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 가운데 손가락에 낀 알이 큰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이거 남우가 사준 거 맞지? 예쁘다.”“네, 남우 씨가 맞춤 제작해 준 거예요.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
이지원은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거라면 날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했어야지.”그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이지원은 박민정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이런 대화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내가 정말 너 따위를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고.”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지 그래.”박민정의 목을 움켜쥔 이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문가에서 어떤 남자의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이지원은 뭔가가 떠오른 듯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해줄 생각이야.”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의 안위였다.“이지원, 화풀이할 거면 나한테만 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알고 싶어? 그럼 협조 잘해야 할 텐데?”이지원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협조라고?박민정은 이지원이 말하는 협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뭘 하려는 거야?”이지원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뼉만 두어 번 쳤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우르르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사람 맞죠?”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제 부탁 좀 할게요.”“네.”대답을 마친 그 사람은 천천히 박민정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저희는 심리상담 교수입니다. 민정 씨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이지원이 왜 생뚱맞게 심리상담 교수들을 불러들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박민정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조하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박민정은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박민정 역시 자신이 간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정민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이라도 하는 듯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왜 말을 안 듣지, 박민정 씨?”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는 건드리지 마요!”박민정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출산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박민정은 순간적인 아픔에 헛숨을 들이키며 입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제가 얘기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이건 경고예요. 한 번만 더 허튼수작 부렸다간 그땐 저도 봐줄 생각 없어요.”“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연락 안 할 테니까, 제발 아이한테 손대지 마세요.”박민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진작 그랬어야죠. 이제 제가 말해주는 장소로 오세요.”박민정은 수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그녀 역시 자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떠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잊게 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었다.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택시 기사에게 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뒤이어 차를 여러 번 더 갈아타며 수화기 너머의 인간이 얘기해 준 장소로 향했다.끔찍할 정도로 치밀했던 그 인간은 박민정에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 역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두 귀걸이를 각각 다른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렇게라도 해놓
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당신이 데려간 거예요? 신생아실에 왔는데 아이들이 없어요. 지금 어디 있나요?”유남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정아,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아이들은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예요? 왜 다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박민정이 재차 물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조여왔지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본가로 보냈어.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우리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가자.”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소현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남준 씨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대요.”윤소현은 유남준이 거짓말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본가에 가서 아이들을 봐.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분명 거기 없을 거야.”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윤소현은 핏기 하나 없는 박민정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며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혼자 신생아실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유남준이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박민정은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유남준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했잖아. 지금 몸이 매우 약해서 나오면 안 된다고.”“남준 씨,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나 데려다 줘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쉴 수도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 병실로 향했다.병상에 박민정을 눕히고 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선 잘 쉬어. 약속할게. 사흘 안에 반드시 아이들을 데려와서 보여줄게, 어때?”이 말을 듣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유남준은 이런 그녀의 모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