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도 뒤따라 일어서서 같이 가려고 할 때 유남우가 그녀를 말렸다.“소현아, 넌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고영란 앞이라 윤소현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곧 그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먼저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유남우가 나가자 그녀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밖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박민정은 유남우가 문 앞까지만 배웅해 줄 거라 생각하고 거절하지 않은 채 유남준의 옷자락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왠지 눈앞이 흐려져 길도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손을 꽉 쥐었다.유남준은 유남우가 따라오며 손을 뻗는 것을 알고 박민정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박민정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박민정을 더 꽉 잡고 뒤에 있던 유남우에게 말했다.“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이런 일 할 시간에 회사나 잘 경영해.”유남우는 멈칫하며 곧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유남준은 그가 약을 탔다는 걸 아는 것이다.어쩐지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니. 그는 도리어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형,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뭐가 문제야?”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박민정은 정신이 흐릿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너무 졸렸던 그녀는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유남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박민정은 그의 넓은 등에 기대어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몸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유난히 불쾌했다.박민정이 잠든 것을 확인한 유남우는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유남준에게 말했다.“형, 이제 물건을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때야.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형이 아니야.”유남준은 그 말에 웃음이 났다.“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법적으로 내가 남편인데. 탓하려면 애초에 나를 사칭한 너 자
차 안.박민정은 무척 괴로웠다. 의사도 과실주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이 힘들고 졸리고 더운 것 같았다.“유남준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나 차멀미 날 것 같아요.”“나한테 기대서 자면 어지럽지 않을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따뜻하게 달랬다.박민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두 사람은 유남준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목울대가 일렁거리면서 심장의 욱신거림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의 부축을 받으며 곧장 개인 접견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 검진을 받았고, 다행히 와인에 첨가된 물질이 몸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아 약효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면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김인우가 병실로 급히 달려왔다.“남준아, 무슨 일이야?”그 시각 박민정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유남준은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뒤 두 사람은 병동 밖으로 나갔다.“남준아, 박민정 씨가 무슨 일로 병원에 온 거야?”“먹지 말아야 할 것을 좀 먹었어. 심각한 건 아니야.”유남준은 처음에는 너무 걱정돼서 김인우에게 와달라고 말했다.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오늘 일로 인해 더욱 짜증이 났고,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괜찮아서 다행이야.”김인우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렸다.박민정은 자신의 은인이고 아직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김인우는 유남준과 함께 남아 박민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쫓는 말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데리고 돌아갔다.밤이 깊어질 무렵 박민정은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눈을 뜨고 방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살짝 움직이자 갑자기 그녀의 손이 따뜻한 무언가에 닿았고 조심스럽게 잡자 유난히 단단했다.박민정은 뒤돌아 유남준의 차가운 얼굴과 마주했고 그제야 방금 꽉 쥔 것이 유남준의
윤소현의 눈가에 오만함이 가득 담겼다.“어쨌든 내 새엄마가 그쪽 친어머니잖아요.”박민정은 그 말에 직격탄을 날렸다. “유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 되려면 당연히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죠.”윤소현은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유남우가 박민정을 돌려보내는 것을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여자의 직감으로 박민정을 미워하게 되었다.“아직 유씨 가문에 시집오기 전이니까 동생이라고 부를게.”윤소현은 말을 마친 뒤 앞으로 다가갔다.“동생, 오늘 약혼식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줘야겠어.”유남우만 아니었다면 박민정은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네, 10분만 기다려요.”그렇게 말한 후 박민정은 윤소현을 거실에 혼자 남겨두고 씻으러 갔다.윤소현은 자연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유씨 가문은 진주 제일 가문답게 유남준이 머무는 것도 심플하지만 곳곳에 화려함이 엿보였다.그에 비해 유남우가 사는 곳은 훨씬 더 평범했다.윤소현은 불만이 가득했다. 앞도 못 보는 유남준이 왜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건지.박민정은 짐을 챙긴 뒤 유남준에게 말하고 윤소현과 함께 문을 나섰다.저택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링컨이 주차돼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박민정이 차에 타려는 순간, 낯익은 인물이 차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고 윤소현이 먼저 말했다. “엄마 왔어?”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동생, 인사도 안 해?”윤소현은 말로는 박민정을 동생이라고 불렀지만 눈 밑에는 조롱이 가득했다.한수민은 차갑게 말했다.“소현아, 쟤가 무슨 동생이니. 얼른 차에 타. 밖이 춥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박민정을 돌아보았다.“차에 타, 물건 사러 가야 해.”박민정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며 차에 탔다.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미묘했다.한수민은 윤소현의 손을 잡고 가운데 손가락에 낀 알이 큰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이거 남우가 사준 거 맞지? 예쁘다.”“네, 남우 씨가 맞춤 제작해 준 거예요.
한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박민정에게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박민정이 덧붙였다.“친딸인 제가 왜 의붓딸보다 못한 거죠? 그렇게 미워하면서 왜 날 낳았어요?”잔뜩 긴장하던 한수민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졌다.그녀의 차갑고 화려한 얼굴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널 낳지 않았을 거야. 네가 태어난 건 실수였어!”박민정은 이 대답을 수없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설명할 수 없이 아팠다.어쩌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성애를 너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박민정은 한수민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당신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한수민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그 순간 윤소현이 다가왔다.“엄마, 무슨 얘기 했어요?”한수민은 박민정에게 보였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한 모습만 남았다.“아무것도 아니야.”“엄마 박민정 안 좋아해요?” 윤소현은 조금 궁금했다, 이 세상에 딸을 사랑하지 않는 친엄마는 없지 않나?친엄마인 정수미는 해외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약혼식 날에 꼭 오겠다고 했다.게다가 정씨 집안의 사업 지분을 나눠줄 거라는 말도 했다.“걔 얘기는 하지도 마. 걔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도 유명한 무용수가 됐을 거고, 이렇게 추락하지도 않았을 거야.” 한수민이 차갑게 말하자 윤소현은 이해한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씨 가문 저택.박민정이 먼저 돌아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남우가 보였다.큰 키에 비정상적으로 하얀 얼굴, 유남준과 똑같이 깊은 눈동자는 온화하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다 샀어? 널 힘들게 한 건 아니지?”유남우가 앞으로 걸어오자 박민정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소현 씨랑 엄마는 뒤차에 있어요.”어쨌든 윤소현은 유남우 미래의 아내였으니 당연히 박민정은 유남우 앞에서 그녀에 대해
박민정은 유남우를 부축해 그가 머무는 곳으로 데려다준 후 돌아갔다.거실에 막 들어섰을 때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이렇게 추운 날, 실내에 난방조차 켜져 있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그녀가 재킷을 꼭 껴입고 들어갔을 때, 잘생긴 얼굴로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유남준이 보였다.기억을 잃은 이후 박민정은 유남우의 이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왜 난방 안 켰어요, 안 추워요?” 박민정이 묻자 소리를 따라 유남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열기가 넘치는데 어떻게 추울 수가 있어?”잔뜩 비꼬는 그의 말에 박민정은 더욱 의아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열기요?”유남준은 박민정이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척할 줄은 몰랐다.누굴 바보로 아나!그는 더 말하지 않고 바로 사진 더미를 꺼내 그녀를 향해 던졌다.사방에는 박민정과 유남우가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유남준은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는 들을 수는 있었고 사진을 찍은 것도 박민정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사진을 본 박민정은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유남준에게 다가가 물었다.“사람 보내서 몰래 나 찍었어요?”그동안 유남준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지금 몰래 찍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그의 두 눈에 담긴 초점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안 그러면 박민정은 그가 앞 못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우는 내 동생이고 네 시댁 식구야.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걔를 찾아?”유남준은 차가운 말을 뱉자마자 다시금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그는 박민정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짜악-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유남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거렸고, 박민정이 얼마나 큰 힘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병이 도져서 잠깐 부축해 준 것뿐인데 내가 뭘 찾아요? 그렇
다음 날 이른 아침, 집안의 도우미들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유남준을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유남준은 소리를 듣고 곧바로 눈을 떴다.“민정아.”“도련님, 저예요, 사모님께서는 아직 안 깨셨어요.”도우미가 대답했다.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으니 이만 나가요. 요즘은 내가 부르기 전까지 안 와도 됩니다.”신림현에 살면서 도우미가 너무 많은 것을 싫어했던 유남준이었다.“네.”도우미는 조심스럽게 나가서 문을 닫았다.유남준은 깨어난 후 잠기가 달아나 박민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박민정은 임신 후 매일 늦잠을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어제 윤소현과 함께 오후 물건 고르느라 동행한 탓에 오늘 일어나 보니 벌써 오전 열 시였다.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음식 냄새가 났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고, 부엌 불 앞에서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그가 보였다.유남준은 사업적으로 뛰어나고 피아노도 잘 치지만 딱 하나, 요리만 못했다.박민정은 그가 몇 번이나 손이 델 뻔한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내가 할게요.”하지만 유남준의 큰 몸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걱정 마, 밖에서 사 온 건데 그냥 데우면 돼.”그는 박민정이 자신의 요리가 서툴러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설명했다.어쩐지 요리도 못하는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성공했다 싶었다.“그럼 손 데지 않게 조심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인지라 박민정은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사이드 테이블로 가서 기다렸다.그녀는 유남준의 바삐 움직이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뒷모습을 보며 전에 이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유남준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식을 차려주었다고 했다.심지어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에서는 마치 요리사가 한 것 같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하지만 최근 유남준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정말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지원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남준은 이미 모든 음식을 식탁에
진서연은 박민정에게 회사의 최근 경영 상황을 보고했다. “보스, 이 기세라면 머지않아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 돌아오세요? 에리가 얼마 전에 저한테 찾아와서 만나 뵙고 다른 곡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에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돌 가수에 혼혈이고, 특히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다.진서연은 매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이제 곧 새해인데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박민정이 답하자 진서연은 조금 아쉬운 듯했다.“알았어요, 그럼 제가 말씀드릴게요.”“그래.”박민정은 진서연과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사실 회사의 업무는 대부분 직원들이 처리하기 때문에 그녀는 대충 파악만 하면 된다.집이 너무 썰렁해서 TV를 켜고 몇 개의 채널을 돌리던 박민정의 시선이 갑자기 연예 뉴스에 고정됐다.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지원이 카메라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이 방송 화면에 잡혔다.“여기 계신 팬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의 사생활 영상으로 인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저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렸어요. 여러분의 이해를 바라는 대신 제가 더 많은 작품을 통해 저를 아끼는 여러분께 보답하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꼭 사람 제대로 보고 쓰레기 같은 남자는 믿지 마세요. 안 그러면 결국 당하는 건…”이지원의 마지막 말로 모든 잘못을 남자들에게 돌렸다.사람들은 그녀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것도 잊은 채 그저 영상이 유출된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듯했다.온라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서서히 늘어났다.박민정은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상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연예계는 정말 어디까지 밑바닥인지 알 수 없었고 연예인이 무슨 짓을 해도 인터넷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있었다.유남준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TV를 끈 뒤였다.그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이지원에 대한 일이 생각나지 않은
방 안은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김인우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형수, 갖고 싶은 건 말만 하면 내가 지금 가서 사줄게.”세상에 공짜가 없고, 하늘에서 떡이 그냥 떨어질 리가 없었다.박민정은 김인우가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니라고 느꼈다.“아니요, 나도 직접 살 돈이 있어요.”김인우는 조금 당황한 듯 말문이 막혔다.“남준아, 뭐 필요한 거 있어?”유남준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할 말 있어?”김인우는 열정적인 자신과 다르게 시큰둥한 두 사람을 보며 화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할 일 없으면 와서 같이 놀면 안 돼?”어제 고영란은 박민정에게 오늘도 약혼식장을 어떻게 꾸몄는지 확인하러 가자고 했고, 그녀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이 나가자마자 유남준은 김인우에게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할 일 없으면 돌아가.”“남준아, 너 그러면 나 속상하다? 차 한 잔도 대접 안 해줘?”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고, 김인우는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김인우는 막 도착한 터라 금방 떠나고 싶지 않아 소파에 앉아 혼자 TV를 켰다.TV에서 뉴스가 재생되자 그는 울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다.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남준이가 저 여자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았나, 대체 언제 나온 거야?”그는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시간 줄 테니 오늘 내로 이지원 내 눈앞에 데려와.”두 시간도 되지 않아 이지원은 다시 진주 정신병원으로 돌아왔고, 검은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눈앞이 다시 또렷해졌다.이지원은 자신이 있는 곳이 낯익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동공이 급격히 작아졌다.“난 미치지 않았어, 빨리 날 내보내 줘!”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병실 문이 열리자 외부의 강렬한 빛이 들어왔고, 김인우가 구두를 신은 채 불빛을 등지고 그녀에게 걸어왔다.사실 박민정보다 이지원을 더 미워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
유남준이 나와보니 텐트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고 산사태도 발생한 흔적이 있었다.“위험할뻔했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나?”분명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박민정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세상에. 만약 어제 비가 조금만 더 세게 내렸다면 우리 텐트도 분명 물에 잠기거나 바위에 깔렸을 것 같네요.”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유남준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고 재빨리 다가와 안심시켰다.“우린 하느님이 도와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학교 선생님들도 눈앞의 상황에 매우 놀랐다.지금은 비가 그쳤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기에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곳은 분명 최현아가 사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결정했던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만약 이 거대한 바위들과 흙들이 비에 씻겨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적어도 몇 집은 이미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선생님들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게 무리인 것 같아 모두가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에는 민박집을 예약했다.“너무 좋아요. 이곳에서 자는 것보다 민박집에서 자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네요.”학부모들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저마다 찬성하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시각, 최현아는 진작에 산에서 내려와 혹시나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뉴스가 뜬 게 없는지 계속 핸드폰으로 확인했다.그러나 아침 9시가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이때, 유지훈도 진작에 잠에서 깼다가 문득 최현아에게 물었다.“엄마, 저희는 왜 계속 산에 있지 않고 내려왔나요? 저는 배도 안 아픈데.”그의 말에 최현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선생님께서 오늘에는 더 높은 산에 올라갈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산에
저녁이 되더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원래 유남준은 오늘 이불을 덮고 자려고 했으나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낭에서 자야 했다.박민정은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이불 안으로 꼭꼭 숨었다.옆에 자기 아들이 누워있어 티는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박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예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침낭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엄마, 나랑 같이 자자.”“응? 왜?”박민정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아니면 나랑 같이 잘까? 나 천둥소리가 너무 무서운데.”이때,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예찬은 원래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에게 뺏긴 게 너무 괘씸해서 그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고요?”“응. 좀 무섭네?”유남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박민정은 사람마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같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 약점이나 두려워하는 게 있을 텐데 저 사람한테는 그게 천둥소리인가 싶었다.“괜찮아요. 잠들면 금방 안 들릴 테니까.”박민정은 아까까지 너무 무서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유남준은 약간 진정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세워둔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이쪽으로 좀 오지 않을래?”그의 말에 박민정은 침낭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마침 박예찬의 침낭에 딱 붙게 되었다. 박예찬이 흐뭇해하던 찰나에 또다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찬이는 천둥소리가 안 무섭지?”박예찬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답했다.“당연하죠. 남자로서 어떻게 천둥소리 따위를 무서워하겠어요? 제가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하세요.”“그럼 네가 침낭 끝에 자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래?”유남준의 말에 박예찬은 그제야 그의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박민정의
박민정은 뜬금없이 자기 앞으로 내미는 음식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뭐예요?”“형수가 담아줬는데 안에 고기도 있더라고. 아까 잘 못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최현아는 마침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듣게 되었는데 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호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마음을 이용해서 박민정에게 애정 공세 할 줄은 몰랐다.“남준 씨는 참 다정한 남편이네요. 제가 가져다준 음식을 그대로 민정 씨에게 줄 만큼.”말속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솔직히 저녁 식사가 부실했던 건 사실이었고 양도 적은 데다가 온통 채소뿐이라 박민정은 진작에 허기져 있었다.그가 건네준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최현아를 보고는 막 거절하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빨리 먹어.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현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형님,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최현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답했다.“많이 먹어요.”그리고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뒤돌아서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최현아는 원래 유남준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면 이따가 이 남자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세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 같았다.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박민정은 도시락에 담긴 다양한 음식을 보고는 순식간에 식욕이 올라왔다.“와, 너무 맛있겠다.”그리고 다시 반찬들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두 사람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예찬아, 남우 씨, 너무 많아서 저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이 먹어요.”뜬금없이 자신을 남우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 없었다.“그래.”그렇게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